일전에 대만의 오랜 친구 가운데 하나인 대만 아방가르드 소극장의 관장에게 "신식민/분단체제와 '민주수업'의 불가능성"이라는 글을 보내준 바 있었다. 한국 쪽과의 합작 공연 기획과 관련해서 최근 상황에 대한 내 의견을 구해 왔던 것이다. 그 친구가 작품에 넣고자 한 단락의 한국어 번역을 요청해 왔다. 종말론적 권리담론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이 글을 읽어본 사람들 가운데 이 대목에 특별히 주목한 친구는 처음인 듯 싶다.
역사와 지리의 다원성을 소거해서 보편성을 얻은 주체는 인류와 사회로부터 추상된 권리의 담당자로 표상된다. 현대적인 보편주의의 틀에서 이러한 주체가 구성한 사회, 나아가 이러한 사회가 구성한 세계는 규범적으로 개체 사이의 차이와 사회/민족 사이의 차이를 소거한다. 이와 같은 인식론/존재론적 구도에서 세계사를 구성하는 운동적 에너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보편의 상 아래에서 제출된 진보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무차별화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무차별화의 완성은 곧 횡적 시간성의 우위 하에서 역사지리적 차이가 소거된 세계의 종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세계 종말은 담론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보다 장구한 맥락에서 보면 현실 역사의 전개는 여전히 다원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논리를 관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