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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반)서구중심주의...

사실 나는 대만을 '싫어한다'. 주변부 국가가 아닌 소위 '선진국'에 가 본적이 없는 나는 대만이나 다른 아시아 지역에 대해 '한국'적 시각을 가지고 보게 된다. 그렇게 '한국'을 통해서 '대만'을 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 여러가지 '사회문화'적 '상황'들이 눈에 들어온다. 종종 '10년쯤 지나면 여기도 바뀌겠지'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건 꼭 10년쯤 전에 한국에서 사라진 폐습들을 생각하면서이다. 예를 들지는 말자. 그러면서 이런 얘기가 예전에 주류 미디어에서 자주 얘기됐던 일본과의 기술 격차가 30년이니, 중국과는 몇 년밖에 차이가 안나느니 어쩌니 하는 선형적 발전주의 담론들과 뭐가 다른지 자문하기도 한다. 물론 내가 비교하는 것은 경제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문화적인 것인데, 대체적으로 '진보'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갖는 비교의 관점은 여기에 기대고 있는 듯 하다. 많은 이들이 유럽을 가지고 한국을 비판한다. 한국의 보수, 진보, 인문학, 사회운동 등을 비판하기도 한다. 나 또는 누군가는 동일한 방식으로 한국을 가지고 대만을 비판할 수 있다. 물론 보편적 가치의 전제 하에서 이러한 비판은 일정하게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 가치가 실현되지 못하는 복잡한 조건에 대한 분석이 결여된 상황에서 이러한 비판은 매우 공허할 것이다. 그런데, 대만에서 그치는 것일까. 누군가는 대만을 가지고 또 다른 어딘가를 비판하지 않을까. 그러면, 이러한 비교비판의 연쇄의 끝에 존재하는 그 구석진 곳은 과연 얼마나 그 '희망'의 실현을 유예해야 하는가. 아마도 반서구중심주의, 탈식민주의 등등의 작업들도 처음에는 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지 싶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하나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빈곤이 미국경제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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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들

사실 요즘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던 독서를 경험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철학 수업을 통해 접하는 마키아벨리로부터 시작하는 일련의 정치철학의 흐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 정치라는 테마를 가지고 시작한 슈티르너, 니체, 하이데거, 바타이유, 데리다, 알튀세르, 낭시 등을 다루는 수업이 있다. 거기에다, '정치적 스피노자'를 주제로 교수 한 명과 함께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들뢰즈, 네그리, 발리바르, 마슈레 등이 주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번 박사 3학기를 마치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 공부에 들어갈텐데 이런 '대책없는 공부'는 이번 학기가 아마도 마지막일 듯 싶다. 사실 석사에서 '명목상' 사회학 전공을 하였고, 박사논문 주제 역시 중국정치사상연구로 잡고 있는 이에게 이런 공부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역사이론'이라는 큰 주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싶은데, 이러한 학습을 통해 최근 두 가지 흐름, 즉 헤겔, 마르크스, [알튀세르] 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인식론(횡적 구조, 공시성)의 흐름과 니체, 들뢰즈, 푸코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학'적 인식론(종적 구조, 통시성)의 흐름에 대한 초벌적인 이해를 통해서 양자를 일정하게 상대화할 수 있는 위치에 다다른 것 같다. 아마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선결되어야겠지만, 잠정적으로 그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중국의 문제,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로 돌아와야겠지만, 화려하진 못하더라도 나중에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투박한 그릇(지금은 비어있더라도)이라도 가지고 싶다는 생각에 가끔은 정말 내가 뭘하고 있는지 모를 이런 공부를 하고 있다. 여기는 프랑스도 아니고, 독일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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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메모(Perry Anderson, 2010/10/19)

http://www.soc.nthu.edu.tw/news/index.php?act=detail&nid=737

 

옆 학교인 (대만) 청화대학 사회학과에서 주최한 페리 앤더슨 초청강연에 가 보았다. 작은 강의실에 30-40여명 정도 좀 좁게 앉아서 들었는데,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래의 메모는 매우 자의적으로 이해된 내용들이다.

 

특강의 제목은 '중국혁명: 역사로부터 개혁까지'(中國革命:從歷史到改革)였다. 영어 제목은 달지 않았는데, '중국혁명: 역사로부터 개혁으로'라는 번역도 후보에 올릴 수 있다.

 

먼저, 앤더슨은 중국혁명을 비롯하여 그 후 개혁개방의 성공과 현재의 지위 등 중국과 관련한 '내재적 본질' 또는 'unique China'에 근거한 접근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사실 지난번 왕초화의 문제제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보인다. 다시 말해, 간접적으로 왕휘, 감양 등을 비판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다. 이와 다른 관점으로 제시된 것은 '비교'의 관점이다. 즉, 비교를 불허하는 특수주의에 대항하여 '역사적 비교'의 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비교는 역사적 관점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1. 볼세키비와 중국공산당

2. 내전과 혁명

3. 숙청과 집단화

4. 페레스트로이카와 개혁개방

이에 더해, 당의 정치적 리더쉽의 문제, 사회주체, 국제적 관계, 계급혁명/민족혁명 등을 추가로 분석한다.

 

중국적 측면에서 정리해보자면, 혁명주체에서는 농민이 포섭되었으며, 국공내전은 경제력의 파괴가 크지 않은채 혁명에 도움이 되었고, 혁명 후의 집단화와 숙청은 사실상 '실패한 재난'(러시아의 '성공한 재난'에 비해)이었으며, 이는 오히려 모택동 사후 관료계급의 지속성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나아가, 이는 개혁개방에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였다. 사회적 측면에서 농민사회는 집단화 과정에서도 일정하게 유지되었으며,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가진다. 국제적 관계에서 볼 때, 미국 등 자유주의 진영은 '소련'을 주적으로 삼았으며, 중소분쟁은 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소련에서 경제개혁의 출구가 없었던 반면, 중국은 '미국'이라는 출구와 원시축적의 역할을 한 화교자본이라는 출구가 있었다. 소련이 국내적 계급투쟁의 성격이 강한 반면(나치즘과 관련한 부분은 에피소드에 불과), 중국은 반외세적인 민족혁명의 성격이 강했다.

 

마지막으로 많이 알아듣지 못한 부분인데, 아시아 속의 중국과 유럽 속의 러시아의 역사경험의 차이도 현재의 중국을 설명하는데 분석이 필요한 것 같다. 아마도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는 듯 했다. 한편, 중국의 '성공'은 자본축적과 글로벌패권의 측면에서 볼 때 '성공'일 뿐이지, 혁명의 본래적 의미에서, 특히 '평등'이라는 가치에서 볼 때 전혀 '성공'이 아니라는 입장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페리 앤더슨 스스로도 아마 정리된 내용은 아닌 것 같고, 막 펜으로 작성한 글을 가지고 발표한 것으로 보아 앞으로 좀 더 연구가 진행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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