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의 포뇨 또는 엄마가 된 사츠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될 수 있는 대로 극장에서 보려고 하는데

<벼랑 위의 포뇨>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캠 버전(중간에 누가 일어나 밖에 나간다)을 보았다가

이번에 제대로 된 <포뇨>를 보았다.

 

저번에도 잠깐 그랬는데,

소스케의 엄마 리사를 보며 <이웃집의 토토로>에 나오는 사츠키

가 이제 저 나이쯤 되지 않았을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토토로>가 개봉할 때 사츠키 또래였던 아이들이

이제 리사 나이가 되었겠다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토토로>가 개봉된 1988년에 사츠키의 극중 나이가 11살이었으니

(물론 이 작품의 배경 자체는 1955년이다)

<포뇨>가 나온 2008년, 사츠키(의 또래)는 31살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중간쯤, 남편에게 토라져 있던 리사는 소스케를 보고 힘을 얻는데

그 때 리사가 부르는 노래가 바로 <토토로> 주제곡의 한 대목이다.)

 

다들 지적하듯 <포뇨>는 정말이지 대책 없이 낙관적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겨냥해서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어디서 그런 낙관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난 감독이 그렇게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일 다들 리사 같은 엄마아빠가 되어

포뇨의 도착 같은, 말의 강한 의미에서 '사건'을 겁내지 않고 껴안을 수 있다면

세상은 아마 훨씬 좋아질 거라고.

 

하야오의 영화에는 언제나 지혜로운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녀들은 대개 극이 시작되기 이전 그런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는 느낌,

즉 하야오의 개입과 상관없이 지혜를 얻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리사는 하야오가 개입한 바로 그 결과(즉 <토토로>를 보고 커서!)

그렇게 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야오가 그의 영화를 통해 말을 건네고 희망을 건 사람들이

항상 아이들이었던 반면에, <포뇨>에서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하야오의 영화와 함께 나이를 먹고 이제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모들이 추가되었다고.

너희는 이제 나이를 먹었고, 포뇨도, 소스케도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마라, 너희들이 리사 같은 부모가 된다면, 또는 그래야만

포뇨와 소스케가, 그/녀들의 마주침이 가능할 것이고, '바다의 여신'과의 교섭이 가능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 아이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니까,

라고 하야오가 속삭이는 것이 영화 내내 느껴지는 듯 했다.

 

내가 그렇게 느낀 건

나 역시 (<미래소년 코난>이나 <엄마 찾아 삼만리>, 그러나 무엇보다 <플란다스의 개> 등)

하야오의 애니와 함께 사츠키의 나이에서 리사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노대가의 아이들 중 한 명인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나의 후배들과 아이들의 성장과 작업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약간 엉뚱할 수도 있지만, <포뇨>가 내게 가장 강하게 남긴 것은 이 질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난로 곁에서

어린 손주들의 다듬어지지 않고 시행착오 투성이인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들어주는

후덕한 할아버지할머니를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하야오가 좋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9/08/23 15:19 2009/08/23 15:19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s://blog.jinbo.net/aporia/rss/response/84

Trackback URL : https://blog.jinbo.net/aporia/trackback/84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 17 : Next »

블로그 이미지

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 아포리아

Tag Cloud

Notices

Archives

Calendar

«   2024/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75960
Today:
143
Yesterday: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