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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함?

오랫동안 지지부진하게 붙잡던 일 하나를, 아직도 끝맺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크게는 일단락지었다. 어제 밤 10시쯤 글을 넘겼는데

아직까지 다른 일이 손에 안 잡힌다. 그것 말고도 남은 일이 산더미인데!

 

그러다가 방금 음악을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하던 일은 나름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라

한동안 음악을 듣지 않으며 작업했는데

앞으로 할 일은,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음악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니 좀 낫다.

 

한 친구처럼, 나도 뒤늦게 '브로콜리 너마저' 1집을 듣고 있는데

음악 전반에 흐르는 소심함(한발 더 나가면 찌질함이 되겠지만)이 나랑 잘 맞는다.

요새 특히 즐겨 듣는, '유자차'나 한잔들 드시길.

(근데 이 노래는 1집을 다 듣고 마지막에,

적어도 '보편적인 노래' 다음에 들어야 제 맛이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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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15:25 2010/12/0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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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제도

"군중의 열정적 운동.분노.연민은 한 사람의 특정한 개인의식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각자의 외부로부터 오며, 우리 자신과 상관없이 우리를 몰고 갈 수 있다. (...) 우리가 공통의 감정을 생산하는 데 자발적으로 기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받은 인상은 만일 우리가 혼자였더라면 경험했었을 것과 매우 다르다. 또한 일단 군중이 흩어지면, 즉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이 우리에게 작동하는 것이 그치고 다시 혼자 있게 되면, 우리의 마음을 통해 지나갔던 감정들이 낯설게 나타나고 또한 더 이상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에밀 뒤르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윤병철.박창호 옮김, 새물결, 2001, 56~57쪽.

 

조직 없이 보낸 노동자대회는, 철이 든 후엔 거의 처음이지 싶다.

뒤르켐이 말한 것처럼, 감정도 제도다.

다른 제도에 들어가면, 감정도 달라진다.

생각해 보면, 한때 나를 괴롭혔던, 그때 그 선배들은 왜 저렇게 바뀌었을까 하는 질문만큼,

답하기 쉬운 것도 없었다.

선배들은 나와 다른 제도에 들어갔고, 서로를 이어줄

또 다른 제도를 그들과 내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제도에 들어가서, 전처럼 생각하고 느낀다는 건

거짓말이거나 관념론, 어느 쪽도 아니라면 정말 대단한 거다.

안타깝게도 그리 대단치 않은 나는, 이렇게 또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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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19:20 2010/11/0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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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1966년(!)에 알튀세르는 "레비스트로스에 관하여"라는 글로

레비스트로스를 비판한다. 그의 사후에 유고로 출간된 이 글은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의 쟁점,

나아가 당대를 풍미한 구조주의 사조와 알튀세르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몇 가지 논점이 있겠지만, 지금은 한 가지에만 집중하려 한다.

알튀세르는 레비스트로스가 형식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 자신이 형식(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즉각 덧붙인다.

비판 대상은 형식주의 일반이 아니라, 잘못된 종류의 형식주의라는 것이다.)

특히 문제는, 그가 가능성과 실재성의 관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어떤 형식적 가능성이 실재하게 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튀세르가 볼 때 진짜 설명해야 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왜 다른 가능성이 아니라 이 가능성이 실현되게, 따라서 실재적이게 된 것인가?"

("Pourquoi c'est tel possible et pas tel autre, qui est devenu, qui est donc réel?"(p.441)

"Why is it this possibility and not another which has come about, and is therefore real?"(p.26))

 

이는 필연성의 관점에서 가능성의 관점을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오히려 이 질문이야말로 알튀세르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현되지 않은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과학적 필연성'의 틀에 가두려고 한 것이라고,

결국 알튀세르가 말년에 제기한 '우발성/마주침의 유물론'은

필연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능성이라는 화두를 복권시킨 것이다 등등.

 

아직 가설이지만,

나는 이 논쟁을 정확히 가늠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를 우회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 "Essence, Existence and Power in Ethics I: The Foundations of Proposition 16", God and Nature: Spinoza's Metaphysics, E.J.Brill, 1991, p.29.)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질문, 곧 "왜 무(無)가 아니라 어떤 것이 실존하는가?"

("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라는 질문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마트롱이 볼 때 <윤리학> 1권의 신 증명에서 스피노자가 제기하는 명제는

"그 본질이 인식가능한(즉 모순이 없는) 모든 것은,

외부의 장애물이 그것이 실존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면, 실존한다."

("Anything whose essence is conceivable (i.e., non-contradictory) exists

if no external obstacle prevents it from so doing.")

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즉 무언가가 실존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실존해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본질에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그것이 실존하지 않아야만 하는 실정적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질문을 대체하는 스피노자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모든 것이 아니라, 다만 특정한 사물들이 실존하는가?"

("Why are there only certain things rather than everything?")

 

알튀세르가 레비스트로스에게 제기한 쟁점은

바로 이런 스피노자적 노선 위에 있는 것 아닌가?

'가능성'이라는 모호한 말을 가지고 '필연성' 또는 '인과성'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라는 것.

그러나 이는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헤겔적 명제를 보수적으로 전유,

따라서 현재와 같은 실존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움과 변화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지를 유물론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능성이 현실성/실재성에도 불구하고 실존하지 않는 이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실존하는 것을 가로막는 물질적 장애물, 또는 세력관계

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유물론적 요청과 다르지 않다.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 공허하기 일쑤다.

가능성을 말할 때 즉각 제기되는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현실이 지배하는가, 왜 그런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는가

("신이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는가,

왜 신은 우리를 고통 속에서 신음하도록 내버려 두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면, 왜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가,

왜 인간은 봉기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지배와 공모하는가?" 등등)

라는 뼈아픈 질문이다. 이와 대결하지 않는 한 가능성 개념은 무력할 뿐이고,

더 이상 가능성을 믿지 않는 냉소주의,

현재의 지배 관계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는 보수적 현실주의,

또는 현실을 거부하고 유토피아로 도피하는 자폐주의

에 대해 의미있는 반작용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따라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현실에는 현실을 초과하는 대안적이고 실재적인 반경향들이

항상-이미, 그리고 항상-아직 실존한다.

문제는 관념적 가능성을 되뇌이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적 반경향들을 인식하는 것,

그것들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세력관계를 인식하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현실의 물질적 도래를, 이 경향들과 함께 기획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나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은

결국 관념론과 유물론, 정치적 보수주의와 급진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귀착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아직 가설에 불과하고

더 다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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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17:16 2010/10/1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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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서 행복해요

요새 자출을 하고 있다.

의외로 학교에서 집까지 대부분 자전거 도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10월 초 언젠가 자출을 했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이라

감기에 된통 걸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되어

몸이 회복된 다음에도 망설이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자전거를 탄다.

 

자정을 넘긴 시간, 양화대교를 건너 집을 지척에 둔 자전거 도로에 들어섰을 때

이어폰에서 루시드폴의 "고등어"가 흘러 나왔다.

한밤의 반짝이는 한강 곁에서 그의 노래를 듣자니

특히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라는 가사에서는

정말 깊은 위로를 느꼈다.

 

그의 따뜻한 노래와 위로는 '돈이 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그대'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 일반을 향한 것이 아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어떤 면에서는 다 가난하다고 말장난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계급을 위한 노래,

어떤 계급('몇만 원이 넘는다는 서울의 꽃등심'을 예사롭게 먹는 자들)은 밀어내는 노래,

그러나 가난하지 않은 이들에게조차

저기에 속해 저 따뜻한 위로의 수신자가 되고 싶다

는 욕망을 일으킬 정도로 감동적인 노래다.

 

가난은 행복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의 노래의 수신자에 속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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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15:46 2010/10/1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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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놀라운 무식

어떤 글을 번역하고 있는데

나름 꼼꼼하게 하자는 생각에서

저자가 인용한 책들을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대조하고 있다.

그런데 쪽수가 맞지 않는 인용문도 있고

원문에는 나오지 않은 단어(물론 진짜 원문은 불어이기 때문에 그걸 보긴 해야겠지만

본인이 달아 놓은 참고문헌 자체가 영역본이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나와 있지 않다)

가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뭐 그런 거야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대개 큰 흐름 면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는데

오늘 발견한 대목은 좀 심각하다.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In Structural Anthropology Levi-Strauss argues that kinship systems could not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그런데 인터넷(책을 잘못 빌려서. ㅋ)에 등록된 원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No one asks how kinship systems, regarded as synchronic wholes, could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most of which are hypothetical),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보다시피 원문에는 'could be'라고 되어 있다.

저자는 앞의 'No one'의 'no'를 'could' 쪽으로 당겨온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원문의 뜻과 정반대가 된다.

원문은, 친족체계가 어떻게 이질적 제도들이 수렴한 자의적 산물일 수 있으면서(긍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규칙성과 실효성을 가지고 기능하느냐라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해석은, 자의적 산물일 수 없고(부정), 오히려 규칙성과 실효성을 갖는다는 식이다.

 

내가 레비스트로스를 잘 모르지만

레비스트로스에 관해 최소한의 소양만 있으면 하기 어려운 오독이고

게다가 문맥상으로도 앞뒤 내용이 'nevertheless'로 연결된다고 보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자의적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성과 실효성을 갖는다?)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자가 'not'을 잘못 삽입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문장 아래에서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를

다음과 같이 싸잡아 비판한다.

"In neither case is any attempt made to justify the belief that all the components of a social system must be necessary and functional elements of that system."

 

그러니까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 알튀세르 문제는 일단 논외로 치자)를

일종의 기능주의로, 적어도 변이가능성에 대한 부정으로 비판하면서,

그 근거로 위 인용문을 들고 있는 것이니 이건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즉 레비스트로스가 자의성을 부정했다는 게 일단 가장 중요한 근거인 셈인데,

아니 레비스트로스가 받아들인 소쉬르의 가장 중요한 명제가 '기호의 자의성'라는 건

약간 ABC 아닌가? 혹여 얼핏 그렇게 봤더라도 이 정도 내용이면

일단 자기 눈을 한번 의심하고 혹시 잘못 읽은 게 아닌지 다시 한번 읽어야 하는 것 아닐까?

 

비단 이 부분만 문제는 아니지만

이건 약간 실소를 자아내는 대목이라 적어둔다.

원어민도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다니, 역시 문제는 단지 어학 실력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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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4 19:55 2010/10/1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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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정지

이번 학기에는 (일본어 수업까지 포함)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수업이 있다.

그래서 목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면 약간 진이 빠진다.

사실 큰 일은 치렀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미뤄둔 일을 해야 하는데

언제나 닥쳐오는 이 나른함이란...

 

내일도 알바랑 세미나가 있어서

제대로 시간이 나진 않는다.

그러니 지금이 가장 황금시간인데! 그런데...

 

조금 있으면 정신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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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4 14:41 2010/10/1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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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덟 시구나

새삼 느끼지만 하루가 너무 빨리 간다.

물론 충분히 집중하지 않으니까 시간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자전거를 갖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늦어도 10시 반쯤엔 학교를 나서야 한다.

집에서 인터넷이 안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원래는 어떻게든 집에 가기 전까지 과제를 올려 놓아야 하지만

아무래도 여의치 않을 듯.

이것 참 쉽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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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3 19:41 2010/10/1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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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신을 다잡을 때

한동안 무계획적으로 살았다.

알바가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손은 대는데, 제대로 되는 건 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인터넷에서 다이어리 비스무리한 걸 다운받아

이것저것 할 일, 하고 싶은 일 등을 적어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일이 많다...!

공부하고 싶고, 어느 정도 읽어야 할 책의 윤곽이 나온 주제만 일단 다섯 개인데,

모르긴 해도 하나만 붙잡고 전력해도 각각 최소한 반년은 걸릴 주제들이다.

그러니 이것만 해도 2년 반이 간다는 얘기인데

게다가 수업이랑 알바, 이런저런 일들까지 감안하면

견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것저것 조금씩 손만 대고

뭐 하나 제대로 끝내놓지 않으니 결국 이 모양이다.

나도 어느덧 30대 중반을 바라보는데

좀 한심한 노릇이다.

 

박명수가 말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었다."

또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참으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아직 나는 아주 늦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누가 봐도 늦었다고 할 만할 때가 그리 멀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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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2 18:29 2010/10/1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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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에 관한 짧은 생각

아니나다를까 지금까지 발리바르 글만 읽었다. ㅠㅠ

뭐 그래도 놀지는 않았으니까...

 

아직 충분히 읽지도 않았고

거기서 다루는 여러 화두를 다룰 수도 없는 노릇.

한두 가지 정도에 관해서만 조금 더 생각해 보려 한다.

 

알다시피 맑스주의 역사에서 공산주의는 항상 사회주의와 쌍을 이뤘다.

사회주의가 지향할 '규제적 이념'이든, 사회주의를 보다 급진화.발본화할 필요성이든.

그런데 1998년에 쓴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라는 글에서 발리바르는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쌍을 해체하려고 시도하며

사회주의의 다음 단계로서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공산주의

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물론 1990년대 초반에 쓴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이나

심지어 1976년에 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도 이런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번 글에서 발리바르는 이 명제를 연장하면서

공산주의에게 '사회주의의 지양'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역설적 대체보충'

또는 '인민주의의 대안'라는 새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와 '인민(주권)'(peuple)이라는 준거점을 공유하는 인민주의라는 혁명적 담론,

자본주의(또는 제국주의)에 맞선 '인민-되기'라는 혁명적 운동

'내부에서의' 대안적 비판으로 공산주의를 재규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지금까지 발리바르의 이론화와 수미일관할 뿐더러

그의 사변적 작업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이 '공산주의'의 혁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계승하고 스피노자를 경유하여

'대중들'(masses)을 이론과 정치의 중심 문제로 제기한 그의 작업은

어떤 점에서는 현 정세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인민주의

에 대한 좌익적 개입을 이론적으로 준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인민주의에 대한 우익적 비판을 부지불식간에 수용하고

대중운동의 인민주의 경향 앞에서 외재적 계몽주의로 후퇴한 것이야말로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의 가장 큰 이론적.정치적 패착이었다.

 

현 정세에서 맑스(주의)가 다시 돌아온다고 할 때

그것은 비단 사회주의, 그리고 그 이론적 기초로서 (정치)경제학 비판

의 귀환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불가결한 필요조건이며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론의 문화주의 경향을 감안할 때

막대구부리기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만이라면, 그것은 '좋았던 옛 시절'로의 회귀일 뿐이며,

그럴 거였다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힘겹게 읽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 도식을 비판하면서

역사에는 경제와 이데올로기라는 '두 개의 토대'가 있다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를 데 없이 쇼킹한 명제를 제시하고,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맑스주의만으로는 결코 안 되며

스피노자를 비롯, 맑스주의 이외의 이론적 자원을 읽어야 한다고 할 때,

그 말로 말미암아 기존의 체계가 해체되는 고통을 겪고

새로 열린 저 막막한 지평 앞에서 현기증을 느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맑스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지만,

어차피 문제는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맑스의 어떤 부분을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할지

가 아니었던가.

 

사회주의-공산주의 쌍을 해체하면서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인민주의-공산주의로, 새롭게 자리를 배정한다.

내가 볼 때 그 정치적 함의 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놓고 인민주의와 공산주의가 각축을 벌이는 현 정세에서

사회주의(그리고 (정치)경제학 비판)라는 관점을 충실하게 견지하는 것만으로는

결정적 문턱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공산주의가, 곧

인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우익적 전유에 맞선 민주주의의 좌익적 전유

(아마 더 정확히 말한다면 '탈-전유'(ex-appropriation))가 필요하다.

사회주의 없이 공산주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없이 사회주의 없는 것 역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인민주의를 비웃거나 매도하지 않고 진지하게 다루는 것.

내가 보기에 우리가 우선 출발해야 할 곳은 거기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거기서 출발했기 때문에

너무 늦지 않으려면 더욱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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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0 21:22 2010/10/1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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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의 알튀세르와 정세의 알튀세르

구조와 정세. 둘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알튀세르가 양자를 중요 개념으로 제시할 때

분명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떤 요소를 평가할 때,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에서 고립시켜 보지 말라는 것.

요새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자면,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의 관점을

강조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한 요소는 그것을 초과하는 구조 속에서 보아야 한다.

한 요소는 그것을 초과하는 정세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양자 사이의 거리가 의외로 크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는 거리가 아주 멀어질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구조 역시 사건, 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면 '돌발'(surgissement)

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알튀세르가 구조를 '과잉결정'으로 사고한 한에서,

그것은 구조주의의 속류적 판본보다 애초부터 훨씬 불안정한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원용하는 시몽동의 개념을 빌자면 '준안정적'(metastable)인 것.)

이 때문에 정세, 마주침, 또는 '과소결정' 개념 등과 긴장적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기원에서부터 발생한 후 차근히 단계를 밟아 숙명적으로 오늘에 이른 구조가 아니라

돌발한 사건이라는 불안정한 심연 위에 있는 구조.

구조 개념의 통상적 용법에 비추어 볼 때, 참 특이한 구조가 아닐 수 없다.

임의로 조작가능한(manipulable) 것은 아니되, 고정되거나 불변적인 것도 아닌 구조.

유물론적이지만 변증법적인 구조.

그리고 또는...

 

일단 오늘 든 생각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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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08 20:29 2010/10/08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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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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