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W.코넬, 남성성/들

40~41. 심리학 일반에서 젠더 원형 관념은 '젠더 정체성' 개념으로 대체됐다. ~~ 융이 젠더의 모순을 정신 내부의 보편적 이분법으로 환원했다면, 젠더 정체성 이론은 한술 더 떠서 아예 모순을 제거했다. 

46~47. 보부아르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젠더는 사회 구조나 상황들과 더불어 변화하는 관여 engagement다. ~ 실존적 정신분석은 젠더 모순이 고정돼있는 것도, 젠더 모순이 곧바로 정체성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젠더 모순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양립 불가능한 행동 방침의 형태를 취할 때에야 비로소 모순이 된다. 

50~51. 20세기 중반의 성차 연구는 이 주제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최신 개념인 '사회적 역할'과 만났다. 이 만남이 '성역할'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용어는 일상 대화에도 스며들었다. ~~ 사람들은 대부분 생물학적 성차가 문화적으로 정교화된 것이 성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54~55. 성역할 이론에는 남녀의 위치를 상보적으로 이해하려는 기본적 경향이 있다. ~~ 그동안 역할 이론의 한계는 계속 지적됐다. ~ 역할 이론은 대개 논리적으로 모호하다. 이 이론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해서 직업, 정치적 지위, 일시적 교류, 취미, 생애 단계, 젠더를 설명한다. '역할'을 정의하는 기반이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역할 이론은 사회적 삶을 분석하는 데 중대한 비일관성을 초래한다. 역할 이론은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이 규정되는 정도를 과장한다. 동시에 그런 명령이 상보적이라고 가정하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을 간과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역할'은 사회 분석의 일반적인 이론 틀로 사용될 수 없다고 입증됐다. ~ '성역할'은 기본적으로 젠더 상호 작용에 관한 부적절한 은유다. 

 

117. 젠더는 사회적 실천에 질서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젠더 과정에서 일상적 행동은 육체적 구조와 인간의 재생산 과정으로 정의되는 재생산의 무대와 관계를 맺으면서 조직된다. 이 무대는 성적인 흥분과 성교, 출산과 양육, 성별에 따른 육체적 유사성과 차이를 포함한다. 나는 이것에 '생물학적 기초'가 아니라 '재생산의 무대'라는 이름을 붙인다. ~ 젠더는 사회적 실천이다. 끊임없이 몸들과 몸들의 행위에 의지하지만 몸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실천이다. ~ 젠더는 엄밀히 생물학이 사회적인 것을 결정하지 않는 범위에 존재한다. ~ 이 구조와 관련된 실천은 개인과 집단들이 역사적 상황과 분투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립된 행동이 아니다. ~ 우리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젠더 실천의 배치 형태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127. 전체적으로 볼 때 헤게모니 패턴을 엄격히 실천하는 남자들은 상당히 적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남자들은 헤게모니에서 이득을 얻는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가부장적 배당금, 곧 전반적인 여성 종속의 결과로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얻는 이익을 누리기 때문이다. 

 

207. 젠더의 재구성을 계속 추구하려면 감정적 모순이라는 구조적 자원을 직접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영토로 이동해야 한다. 집합적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320. 게이 커뮤니티가 대항적 남성성의 정치를 저절로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대체하는 안정적 대안의 존재는 젠더 불일치를 항구적 가능성으로 만들면서 남성성의 정치 전체를 재배치한다. 

 

335. 평등한 권리의 정치를 통해 남자들의 이익을 해체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곧 남자들이 이익을 재생산하고 수호하는 방식에 관한 지식을 내다버리게 된다. ~ 대신 어마어마한 우연을 가정한다. 페니스가 달린 몸들이 권력의 위치를 차지하는 일이 발생했고, 그 자리를 이어가려고 페니스가 달린 친구들을 계속 모집했다는 식의 이야기다. 이것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현실 인식과 아주 유사하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비합리적 편견 때문에 여자들이 미국 상원이나 일본 의회에 들어가지 못해서 해당 국가에 큰 손실을 가져온다고 봤다. / 가부장제의 수호자들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정의롭지 않은 젠더관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차이, 곧 여성의 몸들을 하나의 장소로 남성의 몸들을 다른 장소로 정의하는 남성적/여성적 대립에 끊임없이 호소한다. 그러나 순수한 논리적 의미에서도 이것은 전혀 '차이'라고 할 수 없다. 2장에서 본 대로 육체적 차이는 재귀적 몸실천으로 사회적 현실이 된다. 젠더의 사회적 관계는 몸 안에서 경험되며 그 자체로 육체적 행동 속에서 구축된다. 가부장적 젠더 질서에서 이런 실천의 사회적 조직화는 차이를 불가피한 위계인 지배로 구축한다. 

 

344. 계급정치와 젠더 정치가 상호 작용하는 일련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남성성의 정치는 계급적, 종족적, 사회적 운동의 맥락에서 전개될 것이므로 단일한 '남성 운동'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이 남성성의 정치는 거의 모든 단계에서 여자들과 함께하는 공동 행동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일터, 제도, 공동체,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투쟁은 각기 다른 논리를 띨 수밖에 없고, 다양한 남성 집단 사이에서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 이 지점에서 관련이 되는 것은 남성 운동보다는 동맹의 정치다. 여기서 사회 정의의 프로젝트의 성패는 (공통된 이해관계가 중심이 된 한 집단의 동원이 아니라) 다양한 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포개지는 데 달려 있다. ~~ 가부장제를 여자들을 학대하는 남자들이라는 영원한 이분법이 아니라 역사적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면, 가부장제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사라질 것이다. 전략적인 문제는 구조 전체가 변형될 수 있게 압력을 가해서 변화를 누적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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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9 15:51 2020/02/2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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