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견

단풍이 산자락을 가득 덮고도 넘쳐나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안개가 슬며시 걷혀 투명해진 공간에서 제 빛깔을 선명하게 드러낸 나무들은 마냥 곱기만 했다.


에이즈인권모임을 하면서 실제로 감염인들을 만나 이야기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적었던 터라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고 에이즈인권모임 나누리+가 감염인단체가 아닌데도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 고맙기도 했다. 어쩌면 그게 편견의 시작이었을 지도 모른다.

 

소중하고 고마운 기회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적지않은 부담이 있었다. 그 막연한 부담은, 지금 돌아보면, 하나는 내가 무언가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고 하나는 그렇게 손을 내밀었을 때 냉소의 벽에 부딪치지는 않을까 하는 편견이었다. 많이 배워오자는 생각을 한편으로 하면서도 나는 아무래도 그/녀들만큼 억압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 탓에 격려의 말이든 지지의 표현이든 내어주는 마음으로 2박3일을 지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들은 감염사실로 인한 괴로움이든, 감염으로 인한 차별과 인권침해에 따른 고통이든 저마다의 삶의 근저에 우울과 냉소가 있어 나의 섣부른 격려나 어설픈 지지가 비웃음이나 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워크샵 프로그램은 인권감수성 훈련, 사이코드라마 마술가게, 조별 관광, 춤 쎄라피, 감염인 인권에 대한 토론 등으로 구성되었다. 내가 진행해야 했던 인권감수성훈련은 잔뜩 긴장한 탓에 하고 싶었던 만큼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지 못해 속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면서 나는 그/녀들을 에워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울과 냉소는 차라리 나의 것이었고 무언가를 주고받는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소중한 것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순간 긴장했던 내 몸이 편안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어지러운 마음들이 잔잔해졌다. '우리'라는 말이 조금씩 입밖에 나오기도 했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시험에 떨어진 친구의 괴로움, 애인과 헤어진 후배의 슬픔을 듣는 것과 다르지 않게 '말하는 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두 가지 편견을 버리는 동안 나는 새로운 편견을 얻게 되기도 했다. 그/녀들의 감성이 너무나 풍부하다는 것, 그리고 누구도 당사자를 대신할 수 없다는 편견. 워크샵에 참가한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삶의 내력을 세세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감염사실을 처음 확인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차별과 배제, 관계의 단절 등의 경험은 비감염인들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것임은 분명하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훨씬 힘겹게 지니고 있어서인지 그/녀들의 감성과 고민들은 매우 폭이 넓었고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깊어보였다. 이를테면 기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내가 세 개 가지고 있다면 그/녀들은 십수개를 가지고 있었고 그 마음으로 서로를 만나고 있었다. 내가 무슨 고민을 털어놓아도 모두 이해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기대고 싶은 내 욕심을 몰래 탓하기도 했다.

 

어떤 집단이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말일지라도 위험하다. 하지만 나는 워크샵에서 얻어오게 된 새로운 편견을 즐겁게 간직하고 싶다. 여전히 나는 나고 그는 그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밤 버스에서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내가 로또에 당첨되는 상상을 하며 씨익 웃어볼 때 그는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되어 오래 앓은 감기를 떨쳐내는 상상을 하며 빙긋 웃어볼 것이다. 하지만 눈부시게 푸른 가을하늘을 보면 오래전 사랑했던 이의 살짝 올라간 입술이 떠오르고 비오는 날 저녁이면 언제부터인가 서먹서먹해진 친구가 좋아하던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 우리는 우리다. 나도 모르는 사람이 내 얘기를 수근대면 불안하고 나를 위협하는 것 앞에서는 화가 나면서도 움추려드는 것이 우리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다른 고민을 하며 살아가겠지만 감염인의 인권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길에서 반갑게 마주치게 될 우리는 PLWHA(People living with HIV/AID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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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1 14:24 2005/11/0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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