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붉히다

 

- 송재학

 

 

임하댐 수몰 지구에서 붉은 꽃대가 여럿 올라온 상사화를 캤다 상사화가 구근을 가진다는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놀랍도록 크고 흰 구근을 너덜너덜 상처입히고야 그놈을 집에 가져올 수 있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얼굴은 붉어지고 젖은 신문지 속 구근의 근심에 마음을 보태었다 깊은 토분을 골라 상사화를 심었어도 아침에 시들한 꽃대를 들여다보면 저녁에는 굳이 외면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물어 비료며 살충제며 잔뜩 뿌리고 잔손을 대었지만 상사화의 꽃을 보고자 함은 물론 아니었다 살릴 수만 있다면 꽃은 아주 늦어도 대수롭잖다고 다짐했다 상사화 꽃대가 차례로 시들어갈 때 내 귀가는 늦어졌다 한밤중에 일어나 바깥의 상사화를 들여다보고 한숨쉬는 내 불안을 알아보는 식구는 없었다 나는 꽃필 상사화에 기대어 이제는 물 아래 잠긴 땅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언젠가 이곳도 물에 잠기리라 결국 내가 시든 줄기를 토분에서 뽑아냈을 때 상사화는 그러나 완전한 구근과 수많은 잔뿌리를 토해내었다 그 아래 두근거리는 둥근 세계가 숨어 있었으니, 시든 꽃대 대신 뾰족한 푸른 잎이 구근과 무거움을 딛고 겨울을 준비하였으니! 내 근심은 겨우 꽃의 지척에만 머물렀던 것이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상사화가 스스로의 꽃대를 말려 죽인 이유를 사람의 말로 중얼거려보았다

 

<푸른빛과 싸우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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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5 10:04 2006/03/2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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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현 2006/03/25 10:4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호, 이런 글들 좋아요, 앞으로도 부탁드려요
    내 머리에도 꽃이 하나 필 것 같아요

  2. 미류 2006/03/26 22:5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와우, 현현의 꽃핀 머리. 얼굴이 발그레~ ^^

  3. 산오리 2006/03/27 09: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지난해 선운산 어느 골짜기에서 상사화두뿌리 쎄배다가 화분에 심었는데, 겨우내 잎이 마르지 않고 푸르게 살아 있어요.. 올가을에 꽃이 필라나...

  4. 미류 2006/03/27 09:5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산오리가 올린 사진 봤어요. 저는 상사화를 직접 본 적은 없는데... 올가을에 산오리 집에도 상사화가 피겠군요. ^^
    울 엄마 아빠도 산에 가서 야생화 뿌리 쎄배는 거 많이 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