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승리한 순간은

학생인권조례 원안 통과를 위한 농성 중에 아주 잠깐 눈물이 찔끔했던 적이 있다. 아마 기자회견이었던 것 같다. 어이없게도 나는 구호를 외치다 찔끔 눈물이 흘러 휘리릭 삼켜버렸는데, 그 구호는 서울시의회의 교육위원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학생인권조례를 원안대로 통과시키라고 요구하는 구호였다. 그러니 모두 열 다섯 번의 똑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이었다. ### 의원님, 학생인권조례 원안 통과를 촉구합니다. %%% 의원님, 학생인권조례를 원안대로 통과시켜 주세요. *** 의원님, ......

 

어느 순간, 너무나 당연한 우리의 요구가 누군가의 결단을 거쳐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라는 현실이 생생하게 다가오면서,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서러웠다. 10만 명에 가까운 주민발의 서명과, 그걸 받기 위해 뛰어다녔던 활동가들과, 누군가의 정체성을 삭제하려는 모욕에 맞선 농성단과, 그 모든 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사실은 너무나 단순하고 자명한 '인권'의 가치라는 점이 더 사무쳤다. 그걸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마도 그때는, 정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교육위원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속내를 알 수 없고 경험과 역사를 알 수 없는 어떤 사람들의 판단에 이 모든 것들이 달려 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을 다양한 수단으로 압박하는 것밖에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희망버스 상상토론회에 다녀오며 다시 이 싸움을 볼 수 있었다. 

 

6일 간의 농성은 어딘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농성은 2007년 차별금지법이 차별금지사유를 선별적으로 삭제했을 때 시작된 것이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벙개모임에 나왔고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나눠맡으며 이런저런 활동을 벌였다. 무지개행동이 만들어졌고, 조금 다르게 반차별공동행동도 만들어졌다. 차별금지법 제정 연대가 만들어졌고, 각각의 단체들과 개인들은 이런 저런 계기를 통해 이미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네트워킹이 이 농성의 시작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 농성의 승리는 학생인권조례 원안 통과뿐만 아니라, 2007년 차별금지법에서 시작된 분노를 자긍심으로 뒤덮어버린 성소수자 운동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녀들이 농성을 시작한 그 순간이 바로 결정적인 승리의 순간이다. 

 

그러나 이 승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청소년 운동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학교에서 터져 나오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함께 나누고 싸움을 모색했던 그/녀들이 없었다면, 교통비 천 원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그/녀들이 지쳐 물러섰다면 이 자리는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다고 당장 학교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가장 잘 아는 그/녀들이 반 년을 넘게 서울시내를 헤집고 다니며 주민발의를 성사시키지 못했다면, 그래서 주민발의안 원안이라는 물러설 수 없는 선을 그어놓지 못했다면, 2007년과 비슷하게 상황은 끝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명백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분명해지는 사회적 혐오에 대해 싸울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청소년 운동은 성소수자들의 농성 덕분에 승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차별금지 사유의 삭제 위기를 계기로 시작된 농성이야말로 학생인권조례의 필요성을 사회에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의 승리이기도 한 서울 학생인권조례. 이것은 교육위원이나 시의원들에게까지 가기 전에 이미 이긴, 그래서 결국 이길 수 있었던 싸움이었다. 싸워야 할 이유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 싸움의 한가운데를 비껴서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왔기 때문에, 그 자리를 더욱 풍성하게 키웠기 때문에. 그 자리는 서로 조금 달랐고 늘 함께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자리는 모든 차별에 맞서 '사람'을 지키려는 자리였기에 서로를 보태며 결정적인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모두의 승리라고 말하며 내가 얼떨결에 끼기에는 미안하고 고마운 승리. 머리를 스쳐가는 수많은 청소년활동가들과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얼굴. 그/녀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서야 만난 반가운 승리인지 알기에,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모멸을 견디고 분통을 터뜨려야 했는지 모르지 않기에, 그만큼 내가 그/녀들과 얼마나 먼 자리에 있는지 알기에, 문득 그냥 고맙다는 말만 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함께 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당신들이 참 부럽다는 투정과 그게 다 당신들이 그만큼 멋져서 그런 거라는 아부와, 뭐 이런 것들을 뒤섞어서 말이다. 얼얼했던 학생인권조례 원안 통과 소식은 당신들이 흘린 눈물이 거둔 보물이지만, 정말 승리한 순간은 당신들이 눈물을 흘린 그 순간이었음을 말해주고 싶다. 온몸으로 현실에 부딪치는 사람만이 눈물도 흘릴 수 있기 때문에. 난 아직 그런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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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0 18:44 2011/12/2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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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난다 2011/12/20 19:4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우왕....... 이 글 읽으며 또 시큰시큰. 난 미류의 글에 고마움을 느낀당~

    • 미류 2011/12/21 10:21 고유주소 고치기

      난다요! 멋진 당신이 있어 참 고맙당~ 내게 술 한 잔 살 기회도 줘!! ^^

  2. 다영 2011/12/20 21:0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시큰시큰...

  3. 혜원 2011/12/21 00:1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시큼시큼..
    그대 좋아요!

  4. 서연 2011/12/21 02:0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 고마워요.
    그대 글을 보니 모든게 선명해지고,
    이제 좀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 미류 2011/12/21 10:31 고유주소 고치기

      서연, 고맙긴요... 그대 마음이 얼마나 부대꼈을지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그대가 얼마나 힘이 됐을지도요. 상처는 스스로 아무는 거래요. 그대 안에 차오르는 기운 저한테도 나눠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