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해? 라는 질문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사회의 목적이다. 그게 인권이다.

기초생활보장법이 기초인권부정법이 되려고 한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인정액)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자리잡아왔다. 문제가 없지 않아 언제나 개정 요구가 있어왔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문제를 없애려고 한다, 빈곤에 대한 국가의 책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면서.

최저생계비가 너무 낮았고, 소득 보장 외에 통합적인 생활 보장이 안 되는 것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였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낮아서 문제가 됐던 최저생계비 개념 자체를 없애버리고, 통합적인 생활 보장이라는 빈곤 대응의 핵심 개념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생계, 주거, 의료, 교육 등 개별 급여로 쪼개버리겠다는 것.

빈곤은 인권의 총체적인 박탈이다. 집이 없으면 일을 구하기 어렵고, 일을 겨우 구하더라도 아프기 쉽고, 아프면 일을 하기 어려워지고, 일이 불규칙해지면 집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즉,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풀기를 도모하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도 풀리지 않는 것, 그것이 누군가 살아내야 하는 빈곤의 모습이다. 기초생활보장은 그 역할을 해야 했다.

기초생활보장이 수입 보전 정도로 여겨지고, 주거와 의료 등 영역에서 통합적인 생활보장을 꾀하지 못한 것은 한계다. 그러나 개별급여로의 전환은 접근 틀 자체를 정반대로 돌려놓는 것이다. 집이 없어지면, 아프게 되면, 소득이 없어지면, 그때그때 행정부가 알아서 줄 수 있는 만큼 부조하겠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은, 방을 얻었지만 일이 없고, 일을 얻었지만 병을 얻고, 치료를 받지만 일이 없어지고, 그러는 동안 다시 방을 잃고... 의 악순환을 그대로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수급자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자랑할 때 그것은 정확하다.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므로.

기초생활보장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이번 개정안은 재정적자를 해소해보려는 정부의 선택이다. 취약한 존립 기반(이건 정당성으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돈이 있어야 정부가 된다.)을 타개해보려고 공공기관의 노동자들을 도마에 올리더니, 가난한 사람들을 아예 희생양으로 삼았다. 기초생활보장 예산이 축소된다는 걸 자랑으로 아는 정부다. (박정희의 생활보호제도보다도 후퇴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굵어죽을 지경이 되면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이 인권 보장이 아니다. 누구나 스스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람답게 살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권이다. 그래서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뿔뿔이 흩어져 힘 없는 누군가가 재정적자의 희생양이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한 사회가 인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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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7 21:57 2014/02/17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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