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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時間)의 변주곡, 셋

 

이제 세상엔 희망이 없는 것 같다.


방정아, '세계 3', 2008.(bjart.net)


 

 1.
{자본}을 읽기에 좋은 시간이다.

 

 2.
잉여가치/노동력의 가치 = 잉여노동/필요노동.

 

{자본}에는 알람 소리가 넘쳐난다.
나는 알람에 맞춰  덤으로 살아간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자본}에는 생을 뜯어먹고
재생산하는 시간이 오늘처럼 빠르지 않다.
그 때는 초고속이 없었다.
그 때는 하루 절반의 반이 잉여의 시간이었다면
오늘은 도대체 알 수 없는
생이 닳고 축적이 된다.
아니다, {자본}에서 이미 모든 시간이
소비되고 있었다.
{자본}에는 알람 소리가 넘쳐난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래 맞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

 

3.
기차는 시작과 끝이 있다.
속도의 진화가 있고, 적당히 멈출 줄 안다.
{자본}은 기차가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지
내다볼 수 없었다.
다만, 시간은 더욱 빨리 닳고
혁명은 더욱 성큼 빨리 전염되고
다가오리라는 걸,
사랑의 유통기한도 더욱 빨리 지나가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 하리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혁명이나 희망 따위 보다
기차와 같은 연애를 희망한다고
쓰고는 지웠다.

희망이 없다.


누군가 망명지를 떠나 봉인 열차를 타고

역에서 내렸을 때
이미 혁명은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연애도 혁명도
기억할 수는 있으나
내다볼 수는 없다.
그래서 희망이 없다.
또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 좋다.

 

다만, 기억하라,

지나간 사랑과 혁명과

봉인 열차를,

그들이 멈추어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역들을.

 

이제는 비관이 희망을 넘어서야 한다.
비관론이 진실이 되어야 한다. 

 

4.
{자본}을 읽기에 좋은 시간들이다.

더 이상 희망이 없으므로 더욱 그렇다.


만국의 비관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우리가 잃을 건 시간이요,
쟁취할 것 또한 시간.

 

이 세계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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