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즘의 블로그
http://blog.jinbo.net/chasm/
가끔 찾아옵니다.
급한 연락은 chasm99@gmail.com 으로 주세요.
2019-01-24T21:25:38+09:00
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
"도박자"의 인류학을 위한 연구노트
캐즘
http://blog.jinbo.net/chasm/162
2019-01-21T16:10:40+09:00
2019-01-21T16:03:36+09:00
<p> </p>
<p> </p>
<p>* <문학과 사회> 2018년 여름호 (통권 122호)에 기고한 글. 교정전 원고입니다.</p>
<p> </p>
<p> </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strong><strong>도박자</strong><strong>”</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인류학을</strong> <strong>위한</strong> <strong>연구노트</strong></p>
<p> </p>
<p> </p>
<blockquote>
<p style="margin-left:.5in;">“근대의 경제 발전은 자본주의 사회를 점차 거대한 국제적인 도박판으로 변형시킨다. 그곳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건들로 인해 자본을 따고 잃는다… ‘불가해함’은 도박장에서만큼이나 부르주아 사회에서도 추앙받는다… 예상치 못한, 알 수 없는, 그리고 우연에 기반한 원인으로부터 야기되는 성공과 실패를 통해, 부르주아는 점점 더 도박자의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다… 그의 재산이 주식과 채권에 저당잡혀 있는, 따라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한 시장 가치 변동에 종속된 부르주아는 한 명의 전문 도박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박자는 미신에 홀린 이들이다. 카지노 단골들은 모두 운명에 호소할 마술적 방책을 가지고 있다… 자연의 불가해함이 야만인들을 사로잡듯이, 사회의 불가해함이 부르주아들을 사로잡는다.”<a href="http://blog.jinbo.net/chasm/162#_ftn1" name="_ftnref1" title="">[1]</a></p>
</blockquote>
<p> </p>
<p> </p>
<p>자본주의를 돈이 돈을 낳는 하나의 거대한 도박장으로 묘사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느슨하고 진부하며—가치가 자가증식하는 듯 보이는 자본주의의 물신화된 현상 구조를 승인하고 심층의 자본운동에 대한 분석을방기하는—게으른 비유일지 모른다.<a href="#_ftn2" name="_ftnref2" title="">[2]</a> 하지만 이 글은 오늘날 금융화된 후기자본주의의 맥락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직관적으로’ 그 본질을 포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오래된 ‘픽션’과 ‘은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a href="#_ftn3" name="_ftnref3" title="">[3]</a> 즉, 만약 오늘날 자본주의가 초국적 금융시장을 매개로 한 하나의 거대한 카지노처럼 작동한다면, 우리 모두는 이제 한 명의 ‘도박자(gambler)’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p>
<p> </p>
<p>주지하다시피,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쉬지 않고 돌아가는 오늘날 금융시장의 영향은, 단순히 초국적 기업이나 정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개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부동산 시장의 등락에 영향을 받고, 굳이 펀드나 주식·코인 투자의 형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새 연기금을 통해 미래가 주식시장에 저당 잡혀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건들에 의해 자본을 따고 잃는” 전지구적 도박장에 이미 한 발을 걸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굳이 최근의 ‘비트코인 열풍’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전엔 부르주아와 전문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금융시장이라는 도박판은 오늘날 ‘금융의 민주화’란 이름으로 그 문을 활짝 열어 모든 이들을 유혹하고 있다. 금융화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노동자’이자, 자신의 인적 자본에 대한 체계적 관리와 창의적 계발의 압력에 시달리는 ‘기업가’적 주체인 동시에, 수시로 부동산·주식·코인 시장의 등락에 맡겨진 자신의 미래를 확인하고 부채에 허덕이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 은밀하게 대박의 꿈을 꾸는 ‘도박자’이기도 한 것이다.</p>
<p> </p>
<p>하지만 이 금융자본주의의 새로운 경제적 주체로서 도박자에 대한 이해는—유사한 ‘투자자-주체’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더라도— 많은 부분 공백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일찍이 맑스와 그 계승자들의 작업을 통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주체성으로서 노동자의 형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푸코와 통치성 학파의 연구는, 이 노동자와 중첩되면서도 대체관계에 있는 ‘자기의 기업가’라는 새로운 신자유주의 주체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이에 비해 금융적 주체성으로서 도박자에 대한 논의는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비판이론의 영역에 걸쳐 매우 파편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이러한 파편화된 논의들을 연결시키는 한편, 이를 통해 도박자라는 주체-형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몇가지 쟁점들을 추출하고자 한다. 물론 이 짧은 글에서 오늘날 대표적인 금융적 주체성으로 등장하고 있는 도박자에 대한 종합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것은 무망한 일일 것이다. ‘연구노트’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글의 목적은 완결된 형태의 논의보다는, 도박자라는 주체성을 둘러싼 논의의 장소를 마름질하고 차후의 연구를 위한 일종의 개념적·실용적 발판들을 마련하는 데 있음을 밝힌다. </p>
<p> </p>
<p> </p>
<p><strong>장소</strong><strong> I: </strong><strong>도박자,</strong> <strong>근대성,</strong> <strong>리스크</strong></p>
<p> </p>
<p>먼저 우리의 손에 주어진 몇 가지 자원을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도박자’를 하나의 인간 유형이자 캐릭터로 파악하려 했던 대표적 시도는, 게오르그 짐멜과 발터 벤야민의 작업에서 발견된다. 1911년 출판된 짧은 에세이에서 짐멜은, 도박자를 예술가, 사랑에 빠진 연인 등과 함께 일상의 연속성에서 벗어난 삶의 경험을 추구하는 “모험가(adventurer)” 타입으로 분류한다.<a href="#_ftn4" name="_ftnref4" title="">[4]</a> 그에 따르면, 도박자는 과거 및 미래와 단절되어 게임이 제공하는 “절대적 현재성(absolute presentness)”에 몰입하는 자이며, 무의미한 우연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이다. 세계와 유기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노동자와는 달리, 모험가와 도박자는 불확실성에 몸을 맡기면서도 기회를 재빠르게 움켜쥐는 정복자의 기질을 가진다.<a href="#_ftn5" name="_ftnref5" title="">[5]</a> 벤야민은 이러한 짐멜의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는데, 특유의 섬세한 논의를 통해 그는 도박자를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질서를 넘어서는 잠재적 힘을 가진 양가적 주체로 제시한다.<a href="#_ftn6" name="_ftnref6" title="">[6]</a> 한편으로, 벤야민은 자동기계 앞에 선 공장노동자와 주사위 던지기를 반복하는 도박자를 등치 시킨다. 이 둘은 모두 역사와 맥락에서 단절되어 반복적인 작업에 종사한다는 면에서, 종합적 경험(<em>erfahrung</em>)이 불가능해진 자본주의의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을 증언한다.<a href="#_ftn7" name="_ftnref7" title="">[7]</a>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벤야민에게 도박자는 이 텅 빈 반복적 시간을 절단하고 지금-시간의 충만성을 도입하는 혁명가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도박자는 우연과 불확정성의 한복판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찰나의 순간에 계시를 통해 운명과 접속한다: “도박은 실험의 형태로 위험의 순간에 발생하는 섬광같은 자극을 만들어낸다. 이는 마음의 현재가 예언(divination)이 되는 주변적인 경우—말하자면, 인생의 가장 지고하고 드문 순간이다.”<a href="#_ftn8" name="_ftnref8" title="">[8]</a></p>
<p> </p>
<p>그러나 ‘도박자’라는 형상을 중심으로 찰나와 같은 근대적 시간성과 혁명적 행위의 가능성을 읽어내려는 이러한 시도의 반대편에는, 근대사회에서 도박과 우연의 요소는 주변화되어야 한다는—좀 더 지배적인—입장이 존재한다 (아마도 도박자에 대한 논의의 희소성은 바로 이러한 지배적 입장의 결과일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근대성은 합리화와 탈-주술-화 과정을 통해 불확실성을 계산가능한 리스크로 번역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 관리를 확장하는 과정이기에, 우연에 기반한 도박과 같은 행위는 이같은 ‘합리적’ 조직 속에서 통제되고 제어되어야 한다. 초창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종 발견되는 도박의 인기에 대한 로제 카이와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p>
<p> </p>
<blockquote>
<p style="margin-left:.5in;">나는 이러한 현상이 과도기 사회의 특징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과도기 사회란 가면과 홀림의 결합된 힘에 의해 더 이상 지배되지 않지만, 규칙있는 경합과 조직화된 경쟁이 기본적인 역할을 하는 제도에 기초를 두고 있는 집단생활에는 미처 도달하지 못한 사회이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기본적인 가치들은 더 이상 시민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운명의 결정에 몸을 맡기는 것이 그들의 게으름과 초조함에 더 잘 들어맞는다.<a href="#_ftn9" name="_ftnref9" title="">[9]</a></p>
</blockquote>
<p> </p>
<p>카이와에 따르면, 사회가 ‘진보’해 나갈수록 우연과 불확실성이 작용하는 범위와 영향력은 제한되는 대신, 경쟁과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체계가 시스템의 핵심 원리로 자리잡게 된다. 근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보상체계가 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노동, 능력, 재능”에 기반해야 한다는 데 대한 일반적 합의가 이루어지며, 그 중 “노동”은 가장 “명예로운 소득원”으로 간주되곤 한다.<a href="#_ftn10" name="_ftnref10" title="">[10]</a> 따라서 복권 등 우연에 기반한 부의 획득은 원칙적으로 임금에 덧붙여지는 보충 혹은 여분에 머물러야 하며, 노동을 통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자는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된다. </p>
<p> </p>
<p>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논의는, 근대성 속에서 도박자가 겪게 될 이같은 운명을 보여주는 한 편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베버는 부에 대한 욕망 자체보다는 이 욕망을 노동윤리와 그 합리적 조직이라는 정당화된 기반에 정초하는 것에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을 찾는다.<a href="#_ftn11" name="_ftnref11" title="">[11]</a> 그는 이 정신의 등장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하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류로 제시하는 칼뱅주의 예정론에서 구원은 이미 신에 의해 결정되었고 개인은 여기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기에, 이들은 지속적인 불안 속에서 자신이 선택되었음을 ‘믿고’ 고독하게 자신의 길—노동을 통한 부의 축적—을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a href="#_ftn12" name="_ftnref12" title="">[12]</a> 여기서 도박의 논리와 노동의 논리 간의 기묘한 착종이 발견되는데, 즉, 운명에 대한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믿음에 의존하는 자들—이는 ‘주술적인’ 도박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에게 노동은 구원으로 제시되며, 도박자의 불안은 노동의 강박증적 조직으로 억압되고 해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박의 논리와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은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근대성의 노동윤리를 탄생시키지만, 안정적 기반으로서 노동윤리가 정초되는 순간, 무대 뒤로 사라지거나 존재하더라도 기존 체계를 강화하는 동력으로 기능할 뿐이다.<a href="#_ftn13" name="_ftnref13" title="">[13]</a></p>
<p> </p>
<p>결과적으로 이러한 대비되는 논의들 속에서, 우리는 각각 노동자와 도박자라는 주체-형상으로 대변되는 두 가지 상이한 시간성의 대립, 더 나아가 두 가지 근대성—흔히 계몽주의적 근대성과 문화적·미학적 근대성의 구도로 이해되는—간의 대립을 발견한다.<a href="#_ftn14" name="_ftnref14" title="">[14]</a> 카이와와 베버의 근대성이 진보의 시간 속에 우연을 포섭해 ‘길들이고’ 불확실성을 노동이라는 안정적 기반과 연결시켜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모델을 제시한다면, 도박자의 형상은 ‘지금-순간’에 충실한 카이로스의 시간성, 매순간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는 우발적 시간들의 근대성을 보여준다. 근대 자본주의 하에서 공존해 온 이 대립되는 근대성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룰 여유는 없으나, 이들이 각각 자본주의의 산업적 논리, 금융적 논리와 친화성을 가지고 있음은 간단히 언급해 두도록 하자.<a href="#_ftn15" name="_ftnref15" title="">[15]</a></p>
<p> </p>
<p>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오늘날 ‘도박자’라는 형상의 귀환이 기존의 노동체제에 대한 기이한 사후복수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의 근대성의 이상이 지속적 노동에 안정적 보상을 지급하고 조직된 노동 위에서 여타의 사회적 리스크를 보장해주는 사회보험 체계였다면, 이러한 ‘이상’이 기능부전에 빠진 오늘날 금융화된 신자유주의는 삶의 리스크를 개개인이 감수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모두가 도박자가 될 것을 종용한다. 베버의 알레고리는 정반대로 뒤집혀져, 이제 노동의 절망이 도박자로의 탈주 혹은 추방의 유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귀환은 짐멜과 벤야민이 바라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앞으로 논의되겠지만, 오늘날 귀환하고 있는 도박자적 주체는 짐멜과 벤야민이 파악한 도박자의 성격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성이 발휘하는 사회적·정치적 효과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기입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한 금융적 해결책 속에서 금융시장과 접속하게 된 개인들은, 진보의 시간에 맞서 절대적 불확실성을 실험하기보다는 ‘지금-시간’의 논리를 현실화한 듯 보이는 가속화된 금융시장—찰나의 순간에도 무수한 거래와 가치의 등락이 이뤄지는—속에서 치밀하게 이윤의 기회를 엿보며 자신의 운을 실험할 것을 요구 받게 된다.</p>
<p> </p>
<p> </p>
<p><strong>장소</strong> <strong>II. </strong><strong>도박자</strong><strong>, </strong><strong>주술</strong><strong>, </strong><strong>선망</strong></p>
<p> </p>
<p>오늘날 금융적 주체성의 형상인 도박자가 이같이 합리적 계산과 우연의 교차점 위에 존재한다면, 이 합리성과 우연은 어떻게 결합하는지가 새로운 질문으로 제기될 것이다. 그 동안 상대적으로 억압되어왔던 우연과 불확실성이 후기자본주의에서 다시 ‘귀환’했다면, 요점은 그 귀환의 형태와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화된 자본주의 하에서, 부르주아들이 “야만인들이 자연의 불가해함에 사로잡히듯이 사회의 불가해함에 사로잡혀 있다”는 라파르그의 제사는, 다시 한 번 논의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예컨대, 인류학에서 오랜기간 축적되어 온 주술(witchcraft)에 관한 연구들에서논의를 시작해보자.</p>
<p> </p>
<p>아프리카 남수단 지역 아잔데족의 주술 관습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에반스-프리차드는 잘 알려진 곡물창고 붕괴사고의 예를 통해 합리성과 우연, 주술의 관계를 설명한다. 아잔데 족은 해충과 지열을 피해 나무 기둥을 받쳐 지상에서 떨어진 곡물 창고를 짓곤 하는데,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 곡물 창고를 받치던 기둥이 무너져 창고 밑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던 일군의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이 갑작스런 사고를 맞아, 아잔데인들은 이 사고가 누군가의 주술에 의한 것으로 규정짓고 그 주술을 건 범인을 찾아 나선다. 얼핏 합리성이 결여된 원주민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듯한 이 사례에 대해, 에반스-프리차드는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지적한다.</p>
<p> </p>
<blockquote>
<p style="margin-left:.5in;">아잔데인들이 이 붕괴를 주술탓으로만 돌린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아잔데인들은 종종 흰개미들이 기둥을 갉아먹는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단단한 나무라도 시간이 흐르면 썩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또 사람들이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려 창고 밑 그늘에 모여서 게임을 하거나 각종 노동을 한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왜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창고 밑에, 그 창고가 무너지는 특정한 순간에 앉아있었던 것일까? 창고가 무너지곤 한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이 특정한 사람들이 창고 밑에 앉아있던 특정한 순간에 창고는 무너져야만 했던 것일까?<a href="#_ftn16" name="_ftnref16" title="">[16]</a> </p>
</blockquote>
<p> </p>
<p>에반스-프리차드에 따르면, ‘주술’은 이러한 질문—자연적 인과관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이러한 사고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이 그 시간에 바로 그 창고 밑에 모여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주술 때문이다! 이 때 ‘주술’은 불운한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인과관계적 설명이 미처 가닿지 못한 영역, 사건의 독특성(singularity)이 자연법칙적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영역에—근대 사회에서 우리가 종종 마지못해 ‘운’이나 ‘우연’의 이름으로 남겨놓는 텅 빈 공백에—붙여지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p>
<p> </p>
<p>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불운과 마찬가지로 행운 역시 일반적인 인과관계적 설명과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며 그 ‘의미’를 묻게 만드는 갑작스레 도착한 ‘선물’같은 것이기에, 불운을 설명하는 주술의 논리는 반대로 행운을 좇는 도박자의 믿음 속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데 있다.<a href="#_ftn17" name="_ftnref17" title="">[17]</a> 짐멜이 말했듯이, 도박자는 “우연 속에 의미가, 합리적 논리에는 맞지 않더라도 무언가 필연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다고 믿는 자”이다.<a href="#_ftn18" name="_ftnref18" title="">[18]</a> 오늘날 도박자는 주사위의 숫자가 이미 정해진 확률에 따라 매번 독립적인 확률로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돈을 따는 것은 언제나 카지노(혹은 기관투자자나 작전세력)뿐이라는 현실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벤야민이 말하듯이 어떠한 행운이 ‘특정한’ 순간 자신에게 닥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운명과 은밀히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자이다. 이런 면에서, 도박자는 자기 자신에게 주술을 거는 자이며, 인과관계적 설명이 우연에 맡겨둔 공백을 채우는 주술적 사유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p> </p>
<p>실제 일련의 인류학자들은 금융자본주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주술적 사고의 귀환, 즉 “오컬트 경제” 혹은 “오컬트 자본주의”라부를 수 있는 현상들에 주목해왔다.<a href="#_ftn19" name="_ftnref19" title="">[19]</a> 국제적 금융시장과 자본의 운동이 개개인의 삶에 더 깊이 침투할수록, 사실상 도박자가 되도록 내몰린 이들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이 불투명하고 불가해한 힘에 의해 지배된다는 느낌을 받을수록, 주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형태로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의 곳곳에서 귀환한다: 인도네시아와 남아프리카에서는 갑작스레 부자가 된 이들을 주술사로 몰아 살해하는 주술사 사냥이 벌어지고, 인도의 농촌에서는 어린아이의 내장을 먹으면 땅 속에 묻힌 재화를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유아살인이 반복되며, 뉴욕에서는 투자은행직원들이 코카인에 취해 사탄숭배에 몰입한다. 사실 굳이 이러한 극단적인 예들이 아니더라도, ‘주술사’의 조언에 따라 새로운 시장의 탄생이 “대박”이라 외쳤던 전-대통령의 말에서, 무속인의 말에 따라 선물·옵션에 투자해 천문학적 돈을 벌었다는 재벌총수에 대한 소문에서, 신년이 되면 은행 사이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사주팔자를 통해 올해의 돈벌이 운세를 확인하고, 코인가격의 상승을 갈구하며 “가즈아!”를 주문(chant)처럼 외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술이 전근대적인 현상이 아니라 금융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귀환한 매우 동시대적인 현상임을 피부로 체험할 수 있다.</p>
<p> </p>
<p>하지만 이 풍경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인류학 연구들에서 주술은 우연적 선물과 연결된 자리일 뿐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소에는 잠재되어 있다가 ‘사건’으로 표면화되는 그 사회의 ‘적대’가 재현되는 장소라는 점이다. 예컨대, 앞서 아잔데의 창고 붕괴 사고로 돌아가보자. 그 사고의 ‘기원’으로서 주술을 건 범인을 찾아내고 (사고로 죽은 이들과 갈등관계에 있던 이는 누구인가? 누가 주술사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사회 내에서 억압되었던 적대들은 표면화되고 동시에 조정된다.<a href="#_ftn20" name="_ftnref20" title="">[20]</a> 하지만 앞서의 논의처럼 현대의 도박자가 자기자신에게 주술을 거는 자라면, 이제 이 적대는 어디로 회귀하게 되는가? 도박자가 노리는 행운과 은총은, 사회적 재화의 규범적 순환을 벗어나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기에, 타인의 선망과 비난을 불러들이는 입구이기도 하다. 이미 오래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했듯이,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겨지던 이웃의 갑작스런 성공, 선물에 기반한 부는 언제나 선망(envy)과 질시를 동반하는 위험한 반-폴리스적 요소이다.<a href="#_ftn21" name="_ftnref21" title="">[21]</a> 이 부유하는 적대적 감정은 어느 순간 자신의 대상과 언어를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p>
<p> </p>
<p>1998년 12월부터 3개월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한 지역에서 약 120명이 살해당한 주술사 사냥에 대해 논하면서, 제임스 시겔은 ‘주술’과 ‘주술사’가 온당한(due) 자리와 몫에 기반한 사회적 인정구조가 깨어진공백에서 등장하는 이름임을 지적한다.<a href="#_ftn22" name="_ftnref22" title="">[22]</a>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지탱되던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급격한 도시화와 금융화로 인해 오랜 이웃이 기원이 모호한 갑작스런 부를 축적할 때, 이러한 변화는 ‘주술’의 결과로 설명되며, 주술사들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시겔에 따르면, 이러한 폭력은 온당한 몫과 자리의 질서를 갈구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이지만, 동시에 사회 속에서 억압되었던 적대가 주술사 사냥의 형태로 귀환한 원초적 형태의 혁명적 폭력이기도 하다.<a href="#_ftn23" name="_ftnref23" title="">[23]</a> 이러한 평가에 대한 동의여부를 떠나서, 이는 우리 모두가 도박자가 되어 ‘온당치 못한(undue)’ 부를 갈구하는 세상의 이면은, 증폭된 선망과 질시, 주술과 비난의 세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금융화된 후기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술을 거는 이들의 욕망 때문이건, 이 주술을 둘러싼 비난의 증식 때문이건, 온당함의 범위를 넘어선 막대한 부의 축적과 그 전시 때문이건, 이 증식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언제나 수반할 것이다. </p>
<p> </p>
<p> </p>
<p><strong>장소</strong><strong> III: </strong><strong>도박자를</strong> <strong>통치하기</strong></p>
<p> </p>
<p>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감정과 비합리성의 문제가 오늘날 통치담론 및 프로그램의 새로운 대상이자 영역으로 부상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좀 더 과감히 말하자면, 합리적으로 리스크를 계산하지만 동시에주술적 믿음에 기대고 주위 사람들에 감정적 동요를 느끼는 ‘도박자’의 형상은, 최근의 통치담론 및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형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 후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에서 푸코는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신자유주의 통치의 상관물로, 새로운 호모 이코노미쿠스인 ‘자기-기업가적 주체’를 제시한다. 푸코에 따르면, 교환하는 인간도 소비하는 인간도 아닌 이 “기업과 생산의 인간”은, 비경제적 영역에까지 확장된 경쟁적 시장원리에 따라 자기 자신의 인적자본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관리하고 계발하는 주체이다.<a href="#_ftn24" name="_ftnref24" title="">[24]</a> 신자유주의 초창기에 제시된 푸코의 이러한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며 많은 신자유주의 분석이 그의 논의에 기대고 있지만, 최근 여러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금융화로 대변되는 현재의 변화까지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a href="#_ftn25" name="_ftnref25" title="">[25]</a></p>
<p> </p>
<p>무엇보다도 부침을 반복하는 최근 금융시장의 움직임은, 기존 경제학의 시장과 경제적 주체에 대한 가정들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학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시도들 중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기존 경제학과 상이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모델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 행동경제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a href="#_ftn26" name="_ftnref26" title="">[26]</a> 행동경제학 내부의 여러 입장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시장에 참여하는 행위자는 이용가능한 정보들을 종합해 온전히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아닌, 합리성과 감정, 이성과 직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표준적이지 않은 선호와 편향된 믿음, 일관되지 않은 결정-과정을 가진 존재라고 가정한다.<a href="#_ftn27" name="_ftnref27" title="">[27]</a> 예를 들어, 애커로프와 쉴러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에서, 경제적 현상을 이해하고 진단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에 직면했을 때 경제적 행위자들이 보이는 비이성적인 선호, 즉 “야성적 충동”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들은 이 충동의 요소로, 좋은 경기가 지속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속임수에 당하거나 맹목적 믿음의 유혹에 빠져버리는 ‘부패와 악의’, 미래의 화폐 가치변동에 무감각하고 오직 현재에만 관심을 갖는 ‘화폐환상’, 풍문에 휩쓸려 결정을 내리는 ‘이야기선호’ 등을 제시하고, 이러한 비합리적 혹은 감정적 요소들이 실제 시장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경기과열과 붕괴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새로운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모델에서 앞서 논의되었던 도박자의 특징들—자신의 미래를 근거없이 낙관하고 현재-시간에 충실하며 각종 주술적 사유에 의존하는—을 읽어내는 것은 크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 쉴러가 인정하듯이, “비이성적 과열”이 지배하는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투자와 도박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a href="#_ftn28" name="_ftnref28" title="">[28]</a></p>
<p> </p>
<p>이러한 새로운 경제인에 기반한 논의들은, 이를 둘러싼 통치 공간이자 주체로서 시장과 정부의 모델 역시 바꾸어 놓는다. 이제 시장은 투명한 정보공유와 합리적 판단에 기반한 교환 혹은 경쟁으로 운영되는 공간이 아니라, 비합리적 주체들에 의해 생산되는 불안정성과 불균형—그리고 이로 인한 기회—를 내재하고 있는 역동적 공간으로 가정되며, 이 불안정성 속에서 행위자들의 비합리적 선호가 버블이나 붕괴의 형태로 재귀적 혹은 자기-예언적으로 실현되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공공연히 인정된다.<a href="#_ftn29" name="_ftnref29" title="">[29]</a> 더 나아가, 시장은 여전히 진리의 장소로 기능하지만 행위자들의 심리적·감정적 요소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기에, 이러한 정념적 요소들이 야기하는 과잉을 통제하고 경제인이 가진 ‘정념의 올바른 사용’을 이끄는 역할은 정부의 과제로 주어진다.<a href="#_ftn30" name="_ftnref30" title="">[30]</a> 즉, 이 새로운 모델에서 정부의 개입은 필수적인 조건으로 인정되지만, 이 때의 개입은 시장 자체에 대한 개입이라기보다는 이 시장을 형성하는 개개인과 그들의 비합리성에 대한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a href="#_ftn31" name="_ftnref31" title="">[31]</a> 예컨대, 또 다른 행동경제학자 탈러와 선스타인이 제안하는 ‘넛지’와 ‘자유주의적 온정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는, 어떻게 시장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경제인을 통치하고 그들의 비합리적 측면을 복지 및 사회정책 영역에서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 할 수 있다.<a href="#_ftn32" name="_ftnref32" title="">[32]</a></p>
<p> </p>
<p>통치의 ‘감정적’ 혹은 ‘금융적’ 전환이라 불릴 만한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편으로는 정부의 통치 프로그램에 사회투자채권, 인센티브, 매칭 통장 등 개개인의 투자욕을 자극하는 형태의 금융적 기법이 적극 동원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감정적·비합리적 경제인을 ‘책임성’있는 주체들로 선별·생산하고 ‘과도하게’ 편향된 경제인들을 시장에서 배제하기 위한 각종 신용등급 시스템이 운영된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의 운영을 위해 관계의 영역을 가지화하는 네트워크 분석이나 감정의 영역까지 수량화하는 빅데이터가 통계를 대신하는 새로운 지식형태로 적극 활용된다.<a href="#_ftn33" name="_ftnref33" title="">[33]</a> 물론 이러한 새로운 통치 프로그램들은 개인들이 리스크를 감당하도록 요구되는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개인의 비이성적 ‘과잉’을 제어하고 조정할 것인가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중첩되며 이를 보충·강화하는데 기여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논의된 것처럼 이 감정적·정념적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등장은 통치 대상과 언어, 프로그램에 있어서 유의미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이 도박자적 주체들의 정념을 통치하려는 시도들이 기존의 기업가적 주체에 대한 통치 프로그램과 어떤 식으로 결합하면서 어떤 형태로 발전·변형되어 갈 것인가는 앞으로 흥미로운 논의지점을 형성할 것이다. </p>
<p> </p>
<p> </p>
<p><strong>장소</strong> <strong>IV: </strong><strong>도박자와</strong> <strong>혁명</strong></p>
<p> </p>
<blockquote>
<p>“프롤레타리아가 잃을(lose) 것은 쇠사슬뿐이요, 얻을(win) 것은 전세계이다.”</p>
<p>–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p>
</blockquote>
<p> </p>
<p>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해 비르투(virtu)로 행운의 여신인 포르투나를 유혹해 길들일 것을 군주에게 간언했던 마키아벨리 이래로, 근대 사상 속에서 혁명과 저항은 종종 도박의 은유를 통해 사유되어 왔다.<a href="#_ftn34" name="_ftnref34" title="">[34]</a> 혁명은 연속성과 반복에 의해 지배되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카이로스의 순간을 도입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도박의 성패가 손에 쥔 카드패와 전략, 행운에 기인하듯이, 혁명은 주어진 정세와 역량, 우연적 계기의 마주침에 기반한 순간의 기예(art)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혁명=도박’의 은유는 최근의 급진 정치사상들에서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벤야민의 지금-시간에 기반한 메시아적 혁명론, 편지(혹은 선물)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리다의 탈구축 정치론, 목적론을 부정하는 후기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 등은 모두 필연성과 법칙보다는 우연과 도박의 관점에서 급진 정치를 재-사유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더 나아가,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들”의 정치는 판돈 없이 대박을 꿈꾸는 ‘불량한’ 도박자와 닮은 꼴이라는, 혹은 바디우가 내세우는 진리-사건에 충실한 정치적 주체는, 자기에게 우연처럼 닥친 사건 속에서 운명을 읽어내려는 주술자-도박자의 이미지라는 그럴싸한 농담도 가능할 것이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나, 이같은 혁명=도박의 인기는 오늘날 자본주의에서의 혁명의 가능성과 어려움을 묘사하는 한편, 우리의 정치적 언어와 상상력이 이미 어느정도 금융화라는 풍경과의 선택적 친화성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p>
<p> </p>
<p>하지만 한편으로 고도로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현실은, 이 오래된 은유에 보다 흥미로운 변형을 가한다. 2011년 이집트 혁명 당시 스위스의 한 투자은행에서 현장연구 중이던 인류학자 스테판 레인스는, 1월 25일 타흐리히 광장에서의 봉기 직후 이 투자은행에서 펼쳐진 풍경을 생생하게 전한다.<a href="#_ftn35" name="_ftnref35" title="">[35]</a> 봉기 후 30분도 채 되지 않아 이집트 주식시장은 폭락을 경험했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새롭게 떠오르던 아랍지역의 주식시장에 많은 투자를 했던 이 은행의 애널리스트들은 곧바로 이 봉기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그 결과가 어떤 경제적 리스크를 가질지, 궁극적으로 어떠한 주식을 더 사고 팔아야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레인스가 강조하듯이, 이러한 혁명적 사태는 부정적 위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균형을 흔들어 투자자들에게 새로운 수익 가능성을 제공하는 ‘기회’로 여겨진다. 또한 이들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혁명의 정치적 의미나 내용, 애널리스트 본인들이 믿고 있는 봉기의 성공 가능성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이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이며, 이 추론에 기반해 이들은 이집트에 투자를 늘릴지 줄일지를 베팅하고 투자자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따를 것을 권유한다.<a href="#_ftn36" name="_ftnref36" title="">[36]</a>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혁명에 가격을 매긴 애널리스트들의 도박은 재귀적 과정을 통해 일정부분 현실 속에서 실현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타인들이 이집트 혁명의 경제적 영향에 대해 부정적일 것’이라는 입장에 베팅한 이들이 기존의 투자를 다른 지역의 주식시장으로 옮긴다면, 이 결과 혁명은 ‘실제로’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이는 사후적으로 이들의 베팅을 정당화한다!</p>
<p> </p>
<p>사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오늘날 정치적·사회적 ‘사건’들은 무엇보다도 투자/도박의 기회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번역된다. 2017년 초 탄핵정국 당시, 탄핵 가결/부결시 주목해야 할 각각의 테마주들에 관한 정보가 시중에 돌아다니고, 헌법재판관의 입에서 “파면”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치솟았던 주식시장의 그래프가 탄핵 결정에 환호하는 시위대의 모습과 한 화면에 나란히 담겼던 것은, 가장 최근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대중의 감정·믿음과 긴밀하게 동기화된 금융시장은 특정한 ‘사건’의 파급력과 영향력을 판별해주는 ‘객관적’ 믿음의 지표로 기능한다. 북한과의 전쟁위험이 증가할 때마다 사람들은 주가 동향을 참조해 이 위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들이 이 위기를 진짜라고 ‘믿는지’를 판별한다. 이 ‘객관적’ 믿음의 지표가 개개인과 기관들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놓고 벌인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도박의 종합적 결과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 도박을 통한 믿음의 구성에 연루되며, 어떠한 충격적인 사건과 변화도 이 ‘믿음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금융시장의 구조에 포섭되며, 이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음을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인다.</p>
<p> </p>
<p>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날 세계의 ‘사건없음’과 궁극적인 변화의 불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면, 그 일차적 원인은 지루한 대의민주주의나 과도한 관료제에 있기 보다는, 역설적으로 흥분과 열광에 기반한 금융자본주의와 도박판의 확대, 모두가 도박자가 되어버린 이 구조에 있을 것이다. 끊임없는 사건들을 투자의 기회로 번역해내고 각종 지표의 등락 속에 포섭함으로써 이 금융적 장치들은 결과적으로 ‘사건’의 불가능성을 증언하고 상연한다. 따라서 오늘날 도박과 혁명에 대한 은유는 더욱 정교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혁명이 도박이 된 세계를 넘어, 혁명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세계이자 궁극적으로는 도박이 혁명을 관리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a href="#_ftn37" name="_ftnref37" title="">[37]</a> 이는 오늘날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비관적 전망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급진적 정치를 논하고 기획하기 위해서는 이 금융적 장치와 믿음의 구조들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필수적이며, 새로운 도박으로서의 혁명은 모두가 도박자가 된 조건과 그 결과에 대한 고민을 포함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고민 없이는 어떠한 혁명적 도박도, 이 전 세계화된 도박판의 구조에 새로운 판돈과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한계 내에서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p>
<p> </p>
<p> </p>
<p>****</p>
<p>이 글에서 나는 도박자라는 형상을 근대성, 주술, 통치, 혁명 등의 키워드와 연결시키면서 이 오래되고도 새로운 금융주체에 접근할 수 있는 몇 가지 장소들을 제시하였다. ‘연구노트’라는 사전경고를 달기는 했으나, 이 느슨하고 자의적인 지도 그리기는 여전히 많은 영역들—예컨대, 도박자의 물신주의나 도박과 테크놀로지의 문제—을 빈칸으로 남겨두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 도박자의 주체성이 어떻게 기존의 노동자, 기업가 주체와 충돌하고 중첩되는지 그에 따라 오늘날 통치와 정치의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조명하는 작업은, 금융화된 후기자본주의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 논리를 ‘아래로부터’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한 핵심적 입구로 기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말라르메의 유명한 시구처럼 모든 사유가 하나의 주사위 던지기를 요청한다면, 거대한 카지노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세계는 도박자가 되어버린 우리에게 새로운 또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라는 역설적 과제를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p>
<p> </p>
<p> </p>
<p> </p>
<div>
<hr align="left" size="1" width="33%" />
<div id="ftn1">
<p><a href="#_ftnref1" name="_ftn1" title="">[1]</a> Paul Lafargue, “Die Ursachen des Gottesglaubens,” <em>Die neue Zeit</em>, 24 (1), 1906. 이 제사(題詞)는 Walter Benjamin, <em>The Arcade Project</em>,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p. 497에서 재인용한 것이다.</p>
</div>
<div id="ftn2">
<p><a href="#_ftnref2" name="_ftn2" title="">[2]</a> 요하임 비숍, 김성구 역,“카지노 자본주의”<이론> 12호, 1995. 하지만 이 은유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가 순전히 운에 좌우되는 통제 불가능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웨닝이 지적하듯이, 이 대중적 은유에서 종종 간과되는 이면은 많은 카지노 도박장들이 국가기구나 사적집단의 폭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카지노화된 자본주의의 이면에는 이 정당화하기 힘든 부의 축적, 손실, 이동을 뒷받침하고 보장하는 폭력의 구조가 존재한다. Mario Wenning, “On Gambling” <em>Thesis Eleven</em> 143 (1), 2017. 확대된 금융화의 이면으로서 더욱 전면화되는 폭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하비, 최병두 역, <신제국주의>, 한울, 2016. </p>
</div>
<div id="ftn3">
<p><a href="#_ftnref3" name="_ftn3" title="">[3]</a> ‘의제(fictitious)’자본으로서의 금융자본의 동학을 분석할 때 픽션과 은유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Max Haiven, <em>Cultures of Financialization</em>, Palgrave McMillan, 2014, 1장.</p>
</div>
<div id="ftn4">
<p><a href="#_ftnref4" name="_ftn4" title="">[4]</a> Georg Simmel, “The Adventure,” <em>Simmel on Culture: Selected Writings</em>, SAGE, 1998. </p>
</div>
<div id="ftn5">
<p><a href="#_ftnref5" name="_ftn5" title="">[5]</a> Georg Simmel, 앞의 글, p. 230.</p>
</div>
<div id="ftn6">
<p><a href="#_ftnref6" name="_ftn6" title="">[6]</a> ‘도박’은 벤야민의 사상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주제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에 대한 개략적 설명으로는, Michael A. Rosenthal, “Benjamin’s Wager on Modernity: Gambling and the Arcades Project” <em>The Germanic Review</em> 87 (3), 2012. </p>
</div>
<div id="ftn7">
<p><a href="#_ftnref7" name="_ftn7" title="">[7]</a> Walter Benjamin, “On Some Motifs in Baudelaire,” <em>Selected Writings</em> Vol. 4,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 329.</p>
</div>
<div id="ftn8">
<p><a href="#_ftnref8" name="_ftn8" title="">[8]</a> Walter Benjamin, “Notes on a Theory of Gambling,” <em>Selected Writings</em> Vol.2,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 298.</p>
</div>
<div id="ftn9">
<p><a href="#_ftnref9" name="_ftn9" title="">[9]</a> 로제 카이와, 이상률 역,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p. 212-3.</p>
</div>
<div id="ftn10">
<p><a href="#_ftnref10" name="_ftn10" title="">[10]</a> 로제 카이와, 같은 책, p. 229.</p>
</div>
<div id="ftn11">
<p><a href="#_ftnref11" name="_ftn11" title="">[11]</a> 막스 베버, 김덕영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길, 2010.</p>
</div>
<div id="ftn12">
<p><a href="#_ftnref12" name="_ftn12" title="">[12]</a> 막스 베버, 같은 책, p. 182.</p>
</div>
<div id="ftn13">
<p><a href="#_ftnref13" name="_ftn13" title="">[13]</a> 베버의 이론 체계에 있어서 “사라지는 매개자”의 개념과 기능에 대해서는, Fredric Jameson, “The Vanishing Mediator: Narrative Structure in Max Weber” <em>New German Critique</em> 1 (1), 1973.</p>
</div>
<div id="ftn14">
<p><a href="#_ftnref14" name="_ftn14" title="">[14]</a> 이 두 근대성의 구분에 대해서는, Hans Robert Jauss, <em>Toward an Aesthetic of Reception</em>,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김홍중, “문화적 모더니티의 역사시학,”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p>
</div>
<div id="ftn15">
<p><a href="#_ftnref15" name="_ftn15" title="">[15]</a> Peter J. Taylor<em>, Modernities</em>, Polity, 1999; 조반니 아리기, 백승욱 역, <장기 20세기>, 그린비, 2014.</p>
</div>
<div id="ftn16">
<p><a href="#_ftnref16" name="_ftn16" title="">[16]</a> E.E. Evans-Pritchard, <em>Witchcraft, Oracles, and Magic among the Aznade</em>, Clarendon Press, 1976, p. 22.</p>
</div>
<div id="ftn17">
<p><a href="#_ftnref17" name="_ftn17" title="">[17]</a> 유럽의 중세 도상학에서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는 종종 야누스와 같이 한 쪽 얼굴은 웃고, 한 쪽 얼굴은 찡그린 것으로 묘사된다. Wenning, 앞의 글, p. 86. 이는 규범적인 경로를 따르는 재화와 상징의 순환을 넘어선 수직적 개입으로서 ‘운’이라는 것이 가지는 양가적 성격을 표현한 것이다. 인류학 논의에서 ‘운’과 유사한 위상학적 지위를 가지는 ‘선물’ 역시 ‘부채’라는 이면을 가지며, 마르셀 모스가 지적하듯이 ‘선물=독(poison)’이라는 등식은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Marcel Mauss, “Gift, Gift,” <em>The Logic of the Gift</em>, Alan Schrift ed., Routledge, 1997. </p>
</div>
<div id="ftn18">
<p><a href="#_ftnref18" name="_ftn18" title="">[18]</a> Georg Simmel, “The Adventurer,” <em>Simmel on Culture: Selected Writings</em>, SAGE, 1998, p. 224. </p>
</div>
<div id="ftn19">
<p><a href="#_ftnref19" name="_ftn19" title="">[19]</a> 예를 들자면, Jean Comaroff and John Comaroff, “Occult Economies and the Violence of Abstraction,” <em>American Ethnologist</em> 26 (2), 1999; Jane Parish, “Beyond Occult Economies: Akan sprits, New York idols, and Detroit automobiles” <em>HAU</em> 5 (2), 2015; Aarti Sethi, “The Life of Debt in Rural India,” Ph.D. Dissertation, Columbia University, 2017. </p>
</div>
<div id="ftn20">
<p><a href="#_ftnref20" name="_ftn20" title="">[20]</a>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과정이 가장 극적으로 재현된 사례는 아마도 세월호 ‘사건’(event)일 것이다. 세월호를 교통‘사고’에 비교하는 것은 사회’과학’적으로는 지극히 합리적인 설명일지 모르지만, 사고의 통계적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은 그 사건에 대한 어떠한 사회적·정치적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사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들이 표면화되고 심화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공백 속에서 였다. 사회적 적대를 재현하는 이러한 질문들은, 놀랍게도 최고 권력자의 배후에서 실제로 ‘주술사’를 발견함으로써 극적으로 종결되고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p>
</div>
<div id="ftn21">
<p><a href="#_ftnref21" name="_ftn21" title="">[21]</a> Aristotle, <em>On Rhetoric</em>,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p. 145. 아리스토텔레스는 선망과 질시가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한 감정임을 강조하는데, 이 점은 남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의 주술사 사냥이 어째서 민주화 과정 이후에 등장하였는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p>
</div>
<div id="ftn22">
<p><a href="#_ftnref22" name="_ftn22" title="">[22]</a> James Siegel, <em>Naming the Witch</em>,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p>
</div>
<div id="ftn23">
<p><a href="#_ftnref23" name="_ftn23" title="">[23]</a> Siegel, 같은 책, p. 161.</p>
</div>
<div id="ftn24">
<p><a href="#_ftnref24" name="_ftn24" title="">[24]</a> Michel Foucault, <em>The Birth of Biopolitics, Picador</em>, 2008, p. 147.</p>
</div>
<div id="ftn25">
<p><a href="#_ftnref25" name="_ftn25" title="">[25]</a> 예컨대, Wendy Brown, <em>Undoing the Demos</em>, Zone Book, 2014; Maurizio Lazzarato, <em>Experimental Politics</em>, The MIT Press, 2017; Michel Feher, <em>Rated Agency</em>, forthcoming 등의 논의를 참고하라.</p>
</div>
<div id="ftn26">
<p><a href="#_ftnref26" name="_ftn26" title="">[26]</a> 물론 행동경제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행동주의는 푸코도 강의 중에 언급하고 있는 스키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행동경제학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에 대한 소수 비판 그룹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경제학 패러다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90-2000년대를 거치면서라고 할 수 있다. 행동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개괄적 설명으로는, Floris Heukelom, <em>Behavioral Economic: A History</e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p>
</div>
<div id="ftn27">
<p><a href="#_ftnref27" name="_ftn27" title="">[27]</a> 도모도 노리오, 이명희 역, <행동경제학>, 지형, 2007; 박대민, “시장자유주의 통치성의 계보학: 1980년대 이후 선호하는 인간의 통치로서 금융통치성의 대두” <커뮤니케이션 이론> 10 (4), 2014.</p>
</div>
<div id="ftn28">
<p><a href="#_ftnref28" name="_ftn28" title="">[28]</a> 로버트 쉴러, 이강국 역, <비이성적 과열>, 알에치코리아, 2014.</p>
</div>
<div id="ftn29">
<p><a href="#_ftnref29" name="_ftn29" title="">[29]</a> 헷지펀드 매니저 조지 소로스는 실제 금융시장의 흐름이 사람들이 금융시장에 가진 인식과 느낌, 실천에 영향을 받는다는 본인의 ‘재귀성(reflexivity)’ 개념을 통해, 이러한 시장의 자기-예언적 속성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George Soros, <em>The Alchemy of Finance</em>, Wiley, 1987. 사실 이러한 재귀성의 논리는, 이후 살펴볼 애널리스트들의 분석 활동이나 인플레이션 타겟팅 등의 형태로 이미 금융시장의 실천 속에 깊이 들어 와 있다.</p>
</div>
<div id="ftn30">
<p><a href="#_ftnref30" name="_ftn30" title="">[30]</a> 이러한 논의구도는 허쉬먼이 분석했던 개인의 파괴적인 열정과 무해한 열정의 구분을 둘러싼 17세기 자유주의 논의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Albert Hirschman, <em>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em>,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당시 이 논쟁은 ‘이해관계’라는 개념의 탄생과 이를 통한 파괴적인 열정의 통제라는 자유주의 통치성의 부상으로 이어졌는데, 오늘날 정념적 경제인의 통치는 이러한 이해관계와 정념의 경계선을 지우는 동시에 다시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
</div>
<div id="ftn31">
<p><a href="#_ftnref31" name="_ftn31" title="">[31]</a> Christian Berndt, “Behavioral Economics, Experimentalism and the Marketization of Development” <em>Economy and Society</em> 44 (4), 2015.</p>
</div>
<div id="ftn32">
<p><a href="#_ftnref32" name="_ftn32" title="">[32]</a> 리처드 탈러·캐스 선스타인, <넛지>, 리더스북, 2009. ‘넛지’ 담론과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John McMahon, “Behavioral Economics as Neoliberalism: Producing and Governing Homo economicus” <em>Contemporary Political Theory</em> 14 (2), 2015.</p>
</div>
<div id="ftn33">
<p><a href="#_ftnref33" name="_ftn33" title="">[33]</a> 윌리엄 데이비스, 황성원 역, <행복산업>, 동녘, 2015.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의 SNS 사용 기록에 기반한 심리·감정 분석을 통해 개인의 신용등급을 결정하는 알고리듬은 점차 많은 신용 등급 회사들에서 활용되고 있다. </p>
</div>
<div id="ftn34">
<p><a href="#_ftnref34" name="_ftn34" title="">[34]</a> 마키아벨리 사상에 있어서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중요성에 대한 탁월한 설명으로는, 존 포칵, 곽차섭 역,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나남, 2011을 참조할 것.</p>
</div>
<div id="ftn35">
<p><a href="#_ftnref35" name="_ftn35" title="">[35]</a> Stefan Leins, <em>Stories of Capitalism</e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8. 또한 같은 저자의 “Pricing the Revolution” <em>Anthropology Today </em>27 (4), 2011도 참고하라.</p>
</div>
<div id="ftn36">
<p><a href="#_ftnref36" name="_ftn36" title="">[36]</a> 이는 주식시장에서의 투자 전략을 미인대회 수상자를 예측하는 게임에 비유한 케인즈의 유명한 논의를 연상시킨다. 케인즈에 따르면, 이 때 중요한 것은 나의 기준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를 뽑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 사람을 수상자로 베팅해야 한다는 점이다. John Maynard Keynes, <em>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e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p. 156.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타인의 믿음에 대한 믿음은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서 냉소주의적 이성과 물신주의의 기본구조를 형성한다.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1997.</p>
</div>
<div id="ftn37">
<p><a href="#_ftnref37" name="_ftn37" title="">[37]</a> 프랑스와 에발드는 사회보험은 “혁명에 대한 보험”이기도 하며, 역사상 사회보험이 발달한 나라에서 전면적인 사회혁명이 일어난 경우는 없다고 말한다. “보험과 리스크”, 이승철 외 역, <푸코 효과> 난장, 2013. 이는 사실일지 모르나,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보험에 기반했던 “복지국가 (섭리국가)”의 사회신학이 붕괴한 이후 어떠한 새로운 믿음의 구조가 이 “혁명에 대한 보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금융시장은 사회보험의 훌륭한 대체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p>
<p> </p>
<p> </p>
</div>
</div>
<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162,'/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62+%22%22%EB%8F%84%EB%B0%95%EC%9E%90%22%EC%9D%98%20%EC%9D%B8%EB%A5%98%ED%95%99%EC%9D%84%20%EC%9C%84%ED%95%9C%20%EC%97%B0%EA%B5%AC%EB%85%B8%ED%8A%B8%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62&t=%22%EB%8F%84%EB%B0%95%EC%9E%90%22%EC%9D%98%20%EC%9D%B8%EB%A5%98%ED%95%99%EC%9D%84%20%EC%9C%84%ED%95%9C%20%EC%97%B0%EA%B5%AC%EB%85%B8%ED%8A%B8"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62&title=%22%EB%8F%84%EB%B0%95%EC%9E%90%22%EC%9D%98%20%EC%9D%B8%EB%A5%98%ED%95%99%EC%9D%84%20%EC%9C%84%ED%95%9C%20%EC%97%B0%EA%B5%AC%EB%85%B8%ED%8A%B8','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162?commentInput=true#entry162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브루노 보스틸스, "정치와 주체성에 관한 스무가지 테제"
캐즘
http://blog.jinbo.net/chasm/160
2019-01-21T16:11:32+09:00
2019-01-21T16:02:34+09:00
<p> </p>
<p> </p>
<p>* <문화과학> 2016년 가을호 (통권 87호)에 번역해 실은 글. 교정전 원고입니다.</p>
<p align="center"> </p>
<p align="center"> </p>
<p align="center"><strong>정치와</strong> <strong>주체성에</strong> <strong>관한</strong> <strong>스무</strong> <strong>가지</strong> <strong>테제</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160#_ftn1" name="_ftnref1" title=""><strong><strong>[1]</strong></strong></a></p>
<p> </p>
<p align="right">브루노 보스틸스</p>
<p align="right"> </p>
<p align="right"> </p>
<p>1.</p>
<p>오늘날 정치 이론은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있다. 우선 가장 급진적인 정치 이론조차 근래의 정치적 실천들이 가지는 다양성·강도·이동성에 비해 형편없이 뒤처진 것처럼 보인다. 소위 시민사회의 주변부에서 이뤄지는 점거와 봉기의 실천에서부터 선거를 통해 의회좌파를 재활성화 해 국가를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통제하려는 분산된 노력에 이르기까지, 현재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되어야 할 (예컨대 조직의 역할이나 국가의 기능, 역사의 자리, 정치경제학 비판 등등의 관점에서 분석을 요하는) 사건들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많은 이론가들은 뿌리깊은 기존의 관성을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운동의 구호들을 통해 이해한 사건들을 (이들 중 일부는 좀 더 개량적이고 다양한 수준에서 국가지향적이지만, 다른 일부는 무정부주의적-자유의지론적libertarian이며 역시나 다양한 수준에서 반국가적이다) 이론가 자신이 독립적으로 고안해 낸 이론의 수많은 예시나 묘사에 끼워 맞추는데 그치고 있다.</p>
<p> </p>
<p>다른 한편 오늘날 정치이론의 두 번째 곤경은, 이러한 최근의 정치적 실험 중 몇몇이 가진 단점이 실제 현대이론 혹은 철학의 단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에도, 종종 운동의 단점이 이론 자체의 단점과 등치된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아마도 이는 자기-비판적 겸손함의 가면을 쓰고 행진하는 이론적 오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일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사건들을 예견하고 위로부터 그들을 지도하기는커녕 사건들의 속도조차 따라잡지 못하면서, 오늘날 많은 이론가들은 현재의 실천들이 우리가 가진 주요 이론들의 약점이나 맹점을 보여준다는 처량한 감정에 젖어있기를 더 선호한다. 이런 저런 철학자가 이런 저런 봉기들의 전망을 이해할만한 개념적 도구도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고 비판 받을 때조차, 지적 권위 자체가 진정으로 위협받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비판은 —부정 혹은 파산의 형태이긴 해도— 모든 급진적 실천은 여전히 정확한 이론에 의해 지도될 필요가 있음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론가들은 진행중인 실천과 대면해 패배하고 있을 때조차 여전히 승리할 수 있다.</p>
<p> </p>
<p> </p>
<p>2.</p>
<p>지금의 상황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어떤 준비된 답을 제공하기는커녕, 현재 모든 정론적 입장들이 맞닥뜨린 어려움의 상당 부분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좀 더 복합적이다. 오늘날 이전과는 달리 (이전에도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선행하는 이론이나 프로그램의 적용 혹은 그 파생물로 정치적 실천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한다. 이론과 실천의 융합—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빌려온 프락시스praxis라는 엄밀한 용어로 표현되었던 그 융합—을 그토록 바래왔던 혁명정치의 관점조차, 낡은 서구 형이상학에 기반한 사유로, 즉 하나의 급진적 비판이라기보다는 지배적 위치를 차지해온 변증법적 종합의 사유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판 받고 있다. 헤겔 변증법에 빚지고 있는 맑스주의는 (이 빚은 소위 청년 맑스와 성숙기 맑스 간의 “인식론적 단절”의 순간을 넘어서는 것인데) 이 공격에서 특히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짧고 간헐적이며 대부분 아주 일시적인 구원의 메시아적 순간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눈멀고 교조적인 자율성 속에서 영원히 분리되어, 비활성화된 프락시스 혹은 텅 빈 프락시스, 즉 작동하지 않게 된 프락시스 혹은 비실천적 프락시스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방기되었다.</p>
<p> </p>
<p>결국 이론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에 내재적인 것이라는, 오늘날 스스로를 무정부-공산주의자나 자율주의자 혹은 가속주의자<a href="#_ftn2" name="_ftnref2" title="">[2]</a>라고 칭하는 운동가들 사이에 꽤 널리 퍼져있는 통념만이, 사건의 실제 전개 과정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의 합일에 관한 새천년의 희망을 상징하는 입장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 역시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탈구축deconstruction 혹은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따르면, 형이상학의 유산은 두 가지 측면 혹은 경향을 가진다. 그 중 하나가 제1철학이나 존재론 같은 이론을 정치나 윤리 같은 실천에 우선시되거나 초월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혹은 범신론적 종합, 합일 혹은 합치를 프락시스의 내재성 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이다. </p>
<p> </p>
<p> </p>
<p>3.</p>
<p>오늘날 정치적 사건과 주체들을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러한 좀 더 광범위한 곤경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명명의 어려움은, 첫째 이론과 실천 간, 둘째 정치와 역사 간, 셋째 역사와 존재론 간의 자명한 변증법적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 형이상학 비판 혹은 탈구축의 일부로서 변증법 비판과 함께, 정치와 역사의 관계 역시 이론과 실천의 관계만큼이나 분리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이전처럼 넓은 의미에서 역사적 요인들—경제적인 것 그리고 사회적인 것을 포함하는 요인들—에 기반하거나 그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한 때 “인민”, “민족”, “시민사회”, “프롤레타리아”, “평민” 혹은 심지어 “다중”같은 이름들이 제공했던 딱 맞는 장갑이 오늘날 행위자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대체로 진정한 정치적 사건의 기원이, 어떤 행위자와 그가 사회에서 자연적·객관적으로 배정받은 역할 간의 불가피한 틈, 즉 주체와 그가 경제 구조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간의 간극 혹은 정치적 주체를 그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 내부적 단절 등과 관련해서 사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p>
<p> </p>
<p>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틈·간극·단절에서 진정한 정치적 사건의 원천을 찾으려는 시도는 (이 주장은 오늘날에만 타당한가 아니면 항상 그러했는가? 이는 이 논의에서 잊혀진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그 가장 급진적인 판본에서조차 재-존재론화 된다. 즉, 여기서 정치와 역사 간의 분리와 격리는, 이론과 실천 간의 간극과 마찬가지로 (정치·역사·사회 등등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존재자적인 것the ontic과 (존재 그 자체를 사유하는 철학인) 존재론적인 것the ontological간의 차이라는, 좀 더 근본적 간극에 기대어 설명된다. 소위 존재론적 차이를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간의 차이로 번역하려는 간명한 시도는, 이러한 존재론화의 한 예시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왜 어떤 이름 혹은 어떤 정치적 주체화 양식이 특정한 시기에는 작동했었는지, 예컨대 오늘날에는 기능부전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계급 정치가 왜 한 때는 작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strong>역사적</strong>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정치 형태들은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혁명정치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포함하여— 정치적 주체를 이미-항상 그의 역사 및 사회에서의 객관적 기능으로부터 떼어내는 불가피한 간극·불일치·열림에 눈감아 왔다는 암묵적 결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 이후에 이루어진 역사주의나 역사성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에 기대고 있는 이러한 반-역사주의적 그리고 반-본질주의적 통찰은, 가장 극단적인 경우 정치적이든 어떤 다른 형태든 간에 주체라는 범주 자체를 방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p>
<p> </p>
<p> </p>
<p>4.</p>
<p>역설적으로 서구 형이상학의 최절정(이 절정은, 하이데거가 의지에 대한 지고의sovereign 의지로 해석한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로 구체화된 서구 형이상학의 몰락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으로서 주체라는 범주의 급진적 탈구축은,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정치적 주체성의 이름들에 영향을 미쳤다. “인민”, “민족”,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같은 이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형이상학적 주체성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1956년 탈-스탈린화 과정 동안 그리고 68년의 새로운 에너지 속에서 (혹은 오늘날 자율주의나 무정부-공산주의적 입장의 부활에서 보듯이) 전체주의적 관료제에 자주관리적 대안을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됐던 소위 평의회 공산주의의 “소비에트”라는 이름조차 그 비판 대상이 되었다.</p>
<p> </p>
<p>그러나 동일한 비판이 “공동체”라는 관념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1980년대에 들어 한동안, 공동체가 그 이름에 걸맞기 위해서는 기저에 통일적이고 본질적인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래야만 하며, 공동체에서는 무nothing만이, 다시 말해 공통의 본질의 부재만이 공유된다는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공동체에 대한 급진적 탈구축의 사유가 진행된 바 있다. 실제 공동체가 “그렇다is”는 것인가, 아니면 “그래야만 한다ought to be”는 것인가? 이 양가성에 많은 것이 걸려있다. 탈구축에 전형적인 존재론화의 경향은 대체로 현재 형태를 지칭하는 확언적 용법인 “그렇다”를 선호하긴 하지만, 무위의 공동체, 유한한 공동체, 특이-복수적인singular-plural 공동체의 속성에 관한 다양한 주장들이 실은 “그래야만 한다”는 명령어의 암묵적인 규범성에 기대고 있다. 이러한 규범성 없이는 현존하는 공동체주의가 낳은 최악의 형태들, 예컨대 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출현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strong>공동체</strong>(<em>the</em> community; 영어 번역은 종종 이 정관사를 생략하지만, 프랑스어든 이탈리아어든 정관사의 사용은 그것이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더라도 이러한 맥락에서 항상 강조의 의미로 읽혀야 한다)가 “무엇인가is”에 대한 장-뤽 낭시나 아감벤의 주장—즉, 공동체엔 실체나 본질, 안정적인 기반의 동일성이 부재하다는 입장—을 접할 때마다, 이러한 주장들이 원칙적인 것이며 실제 사실에 항상 부합하는 것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명백히 이 철학적 성찰들이 비판 대상으로 삼는 주요 이데올로기 형식인,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가 그러한 형태로 공동체의 이념을 작동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p>
<p> </p>
<p> </p>
<p>5.</p>
<p>따라서 존재론적 진영은 현재에 대한 역사적 비판을 철학적 언어로 번역해내면서, 역사와 존재론 간의 순수한 쌍방적 관계를 수립할 가능성을 차단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짊어지게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고유명으로 표현되는 표준적인 전체주의 쌍둥이 버전의 실제 역사는, 바로 “공동체”의 개념 (그것의 <strong>현상태</strong>is를 설명하기 위해, 아니 사실은 <strong>이상적</strong> <strong>상태</strong>ought to be를 확증하기 위해 번거로운 요소들을 모두 제외시켜 버린 개념)이 가진 존재론적 위엄에 항상 미치지 못할 것이다.<a href="#_ftn3" name="_ftnref3" title="">[3]</a> 그러나 이로써 우리는 어떤 현존하는 공동체도 철학자들이 과감하고 확신에 차 사유하는 “공동체”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심지어 전체주의의 위협을 막아줄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법적 보장 하에서도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기껏해야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재상상하려는 시도에는, 어쩌면 단순히 현재 상태를 확인시켜주는 것에 불과했을 각종 사태들에서 찾아낸 전망의 섬광들, 즉 이런 예술 작품 혹은 저런 거리 투쟁 같은 각종 뉴스 헤드라인들에서 예상 가능한 기준에 따라 선별된 파편화된 실험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실험들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실체와 본질도 없이 순수하게 “함께-있음being-with” 혹은 순수하게 “공통 속에 있음being-in-common”에 노출된 유한한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근본적 조건을 잠시 엿볼 수 있을지 모른다.</p>
<p> </p>
<p>마지막으로 20세기의 재앙적 경험들에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진단(이러한 실험들이 “공동체”의 핵심인 유한성이라는 중핵을 폭력적으로 부인한 것이 문제라는 진단)이 내려지면서, 정치의 탈구축은 미래의 기획으로 집단적 주체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작업을 완전히 피해야 할 것은 아니더라도 일견 불가능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적어도 일이나 노동 혹은 활동성 같은 개념에 기반한 집단적 주체의 기획은, 이제 대책없이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바로 이 “공동체”의 사상가들이 특정한 형태의 공산주의communism 개념을 주창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의 서두에서 (맑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을 구성한다는) 장-폴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을 모호하게 참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더 이상 우리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어떤 공산주의에 대한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지평보다 더 멀리 나아가게 만드는 몸짓으로 이어진다는 명제를 똑같이 강조해서 제시해야만 한다.”<a href="#_ftn4" name="_ftnref4" title="">[4]</a></p>
<p> </p>
<p> </p>
<p>6.</p>
<p>맑스주의 변증법의 형이상학적 속성에 대한 이러한 일견 고담준론적 비판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좌파의 정치적·이론적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정확히 말하면, 이 논쟁의 결과로 수없이 다양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좌파들이 노골적으로 철학적인 전장으로 끌려들어 왔으며, 곧 정치적 기획으로서 자신들의 주된 특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정치적 사유 영역에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마술적 기법 중 하나는, 맑스와 바쿠닌에서부터 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를 거쳐 스탈린·마오·카스트로·호치민에 이르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좌파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가 (여기서 언급된 중요한 몇몇 인물들은 이름으로 불리고 마치 후설이나 하이데거를 연구하듯이 문헌학적 연구의 열정적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존재being에 대한 형이상학적 망각에 반대하는 천년왕국 투쟁의 일부로 제시되었다는 데 있다. 반대로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한 하이데거의 강의와 세미나, 심지어 최근에 출간된 [하이데거의 수기 모음집] <검은 노트Black Notebooks>까지 열심히 읽은 독자들은, 이제 자신들을 포스트-형이상학 좌파의 선구자로 자임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자칭 “좌파 하이데거주의” 흐름을 낳고 “도래하는 민주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급진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이 차이의 철학들에 기대어, 새로운 세대의 사상가들은 과거의 정치운동, 국가형성, 대중봉기의 실패와 약점 전부를 형이상학의 탈구축과 비판의 관점에서 재평가하고 있다.</p>
<p> </p>
<p><strong>전부라고</strong><strong>?</strong> 글쎄, 사실이 그렇다. 이 비판에 걸려있는 것이 정치적 질문이 최초로 제기되는 지평 자체에 관한 것인 한,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사실이나 사례도 전방위적인 형이상학, 주권, 헤게모니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더군다나 이 마지막 세 용어는 대체로 등가적이며 거의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 즉, 포스트-형이상학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포스트-주권이나 포스트-헤게모니를 동시에 암시한다. [서구 문명 전체를 상징하는] “플라톤에서 나토까지”라는 유명한 문구조차도, 이러한 비판이 드리우는 탈구축적 의심의 전방위적 범위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의심이 우파보다는 좌파에 더 열정적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형이상학 탈구축의 지지자들은, 개인이든 인민이든 혹은 프롤레타리아든 다중이든, 모든 주체들의 자기-해방 노력에 내재한 형이상학적 유혹을 끝없이 감시하는 파수꾼을 자처하면서, 스스로를 항상 공식적 좌파보다 더 왼쪽에 위치 짓는다. 마지막으로, 이 차이의 철학자들과 오늘날 그 계승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유물론을 주창하면서, 그들의 입장이 이전의 낡은 유물론들보다 더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기존의 낡은 유물론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맑스에게서 기인하는 어떤 변증법적이고 역사적인 유물론—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념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그 유물론—의 그늘이다. </p>
<p> </p>
<p> </p>
<p>7.</p>
<p>정치적 주체라는 관념의 완전한 붕괴가, 최근의 이론적 곤궁이 다다른 유일한 결론은 아니다. 프랑스 이론이라 불리는 영역만 보더라도, 형이상학의 탈구축이라는 하이데거적 전통을 따르는 자크 데리다의 제자들 외에, 주체화subjectivization라는 관념이 정치에 있어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루이 알튀세르의 가르침에 역설적으로 기대는 몇몇 사상가들—알랭 바디우, 자끄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같은 사상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과 알튀세르의 관계는 역설적인데, 왜냐하면 알튀세르 본인은 하이데거 못지 않게 주체라는 범주에 본래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주체는 과학이든 정치이든 어떤 영역에서도 결코 진리의 편에 속하지 않는다. 알튀세르의 주요 저작들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주체에 대한 거부와는 반대로, 맑스주의의 위기—종종 포스트-맑스주의가 등장한 계기로 언급되는 그 위기—한복판에서 그의 제자들은 형이상학의 탈구축과 양립할 수 있는 주체의 이론을 정식화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마주했다. 이들은 탈구축은 어떤 개입하는 주체intervening subject라는 통념 없이는 끝까지 완수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런 통념 없이는 탈구축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와 알튀세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두 개의 지적 전통과 그들의 추종자들 사이에는, 이렇듯 (일자the One의 탈구축의 필요성에 대한 동의로 요약될 수 있는) 근본적 양립가능성과 함께 (주체의 최소 이론의 유지냐 아니면 방기냐로 요약될 수 있는) 근본적 양립불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p>
<p> </p>
<p> </p>
<p>8.</p>
<p>그러나 이들 간의 논쟁이 앞서 언급한 정치와 역사간의 관계라는 영역에서는 잦아든다. 바디우나 랑시에르 같은 사상가들에게, 정치는 언제나 주체의 작업이며, 더 이상 역사학, 사회학 혹은 정치경제학의 객관적 데이터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더 이상”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한 때는 역사적으로 가능했던 작업이 이제는 불가능해졌으며 더 이상 실용적 선택지로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작업은 과거 한 시대의 사회-경제적 현실로부터 직접적으로 계급투쟁을 도출해냈던 잘못된 이론적 전통일 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맑스와 그의 계급투쟁의 관점이 한 때는 역사적으로 옳았으나 이제는 사실상 낡은 것이 되었다고 이야기되거나, 아니면 정통 맑스주의의 결정론적 본질주의 하에서 사장되기는 했어도 계급투쟁의 우연적 속성에 대한 맑스의 통찰력은 원칙적으로는 항상 옳았던 것으로 간주된다.</p>
<p> </p>
<p> </p>
<p>9.</p>
<p>이같이 모든 포스트-맑스주의의 공통된 전제는, 이들이 정치와 역사 간의 간극(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와 사회 간의 혹은 정치와 경제 간의 관계를 포괄할 정도로 폭넓게 이해되는 이 간극)을 염두에 둔다는 점이다. 지난 2-30년에 걸쳐 맑스주의의 정치적 역할로부터 분석적 역할을 점차 분리시켜 온 바디우의 궤적은, 이런 점에서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진단도구로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시대 봉기에 참여하는 투사들이 적합한 개입 전술이나 전략을 고민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든 맑스주의의 두 가지 논리/속성 간의 절합에 근본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분석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이라고 부르는 이 두 측면을,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안 라발은 자본의 논리와 계급투쟁의 논리라 부르는데, 이들에 따르면 이 통약불가능한 두 논리는 오직 공산주의라는 상상적 접착제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공산주의는 매우 상이한 역사를 가진 이 두 계통의 사유를 묶어주는 ‘접착제’로 기능한다. 자본주의의 ‘객관적’ 논리와 계급 전쟁의 ‘실천적’ 논리는, 공산주의라는 더 우월한 사회·경제적 조직 형태로 수렴된다. 다시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상상적 기획만이 이 상이한 속성의 두 관점을 공통의 전투에 복무하도록 만들 수 있다.”<a href="#_ftn5" name="_ftnref5" title="">[5]</a></p>
<p> </p>
<p>바디우를 보자면, 초기 맑스가 <신성가족The Holy Family>에서 종교의 발전을 (고故 다니엘 벤사이드가 종종 인용했던 문구처럼) “역사를 <strong>통해</strong>, 역사 <strong>속에서</strong> 역사와 <strong>함께</strong>”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방식대로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에 점점 확신을 잃어왔다. 이 <존재와 사건Being and Event>의 저자에게 있어, 정치는 전적으로 사건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단순한 사실들과 이에 대한 여론들을 한 쪽에 밀어두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바디우는 점차로 정치적 개입들을—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다른 세 영역들, 즉 예술, 수학, 사랑과 동일하게—그 자신에 의해서만 확증되며 자기-참조적인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바디우의 저작에서 반-역사주의적, 반-변증법적 충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 즉 대체로 <존재와 사건>(1988)에서 <메타폴릭틱스Metapolitics>(1998)에 이르는 기간에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바디우의 이후 작업들에서도 여전히 반-역사주의적 경향을 읽어내고 있으며, <공산주의적 가설The Communist Hypothesis>이나 <역사의 재탄생The Rebirth of History>에서 제기되는 공산주의 이념으로의 회귀에서도 유사한 입장을 발견하곤 한다. 맞든 틀리든 이러한 입장이 가지는 잠재적 결점은 명백하다. 겉보기에 난해하고 고고한 척 하는 태도, 봉기하는 대중에 비해 철학자-지식인을 특권화하는 경향, 그리고 일반적으로 맑스보다는 플라톤에 철학적 기원을 두는 프락시스와 이념의 구분이 바로 그것이다. 역으로, 이와는 반대되는 입장이 가지는 잠재적 위험 역시 분명하다. 실천의 페다고지를 강조하며 이론을 경멸하는 반-지성적 태도, 자율적인 정치적 전술의 등장을 역사적 주기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로 모두 설명해 버리려는 경향, 그리고 일반적으로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나 <프랑스 내전The Civil War in France>의 정치적이고 정세개입적인 맑스를 좀 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자본론Capital>의 맑스로 (이를 <정치경제학비판 요강Grundrisse>에 기반한 좀 더 주체적인 맑스로 보충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환원하려는 시도 등등.</p>
<p> </p>
<p>하지만 맑스주의를 투사의 담론으로 평가하는 바디우의 전환은, 얼핏 보기보다 그리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다. “역사”라는 용어의 의미와 관념에 대한 그의 해석은 변화해 왔지만, 사실 바디우 자신은 정치는—비록 필연적으로 역사에 <strong>정박</strong>하거나 <strong>뿌리를</strong> <strong>대고</strong> 있기는 하지만—역사 자체에서 직접 <strong>도출</strong>되거나 <strong>연역</strong>될 수 없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해왔다. 이것이 모든 정치적 사건은 필연적으로 강요된forced 사건인 이유이다. 예컨대, <주체의 이론>(1982)에서 바디우는 생산 대중과 당파적 계급의 변증법에 기반해, 역사와 정치 간의 변증법적 절합articulation을 고안해내고자 한다. “계급의 변증법적 성격을 변증법적으로 분할함으로써 이해한다면, 계급은 대중의 생산적 역사성에 뿌리내린 당파적인 정치적 행위를 의미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급은 바로 이들[역사와 정치]의 공동작용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의 실제 운동 속에서 정치의 분리가능한 특이성이 솟아오르게 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a href="#_ftn6" name="_ftnref6" title="">[6]</a> 바디우는 이후에 이러한 타동성transitivity의 관점 혹은 적어도 당파적 실천을 통해 조직되는 역사와 정치 혹은 대중과 계급의 변증법적 공동 작용에 대한 입장을 포기한다. 이에 따라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Can Politics Be Thought?>(1985)에서는, 자동성intransitivity이 정치의 핵심을 결정하는 새로운 중요 요소로 등장하며, 맑스 본인의 담론에서도 실재the real의 지점을 표지하게 된다. 이에 따라 오직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만이 계속해서 하나의 허구에 고착된다fixate.</p>
<p> </p>
<p>그러나 이것이 이 시점부터 바디우가 맑스의 변증법과 역사라는 범주를 완전히 포기하고 방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최근 <역사의 재탄생>에서, 그는 문제가 되는 [정치와 역사의] 절합을 위해 상당 부분 동일한 문법을 다시 제기한다. 하지만 이제 모든 정치가 “정박”하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역사는, 더 이상 객관적인 요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사건을 그 자체로 유지시키는 주체적 과정에 완전히 내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바디우에게 있어 포스트-맑스주의 혹은 포스트-마오주의의 핵심은, 더 이상 역사를 정치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역사화하는 것이다. 역사의 재탄생이나 재각성은 더 이상 계급 투쟁의 객관적 역사에 기반하지 않으며, 어떤 자발적인 봉기나 반란들의 역사-되기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폭동들을 정치화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둔다. 다시 말해 변증법적인 것에 대응하는 것은, (우리가 이를 여전히 사건의 이론이라 부르길 원한다면) 자발적 반란과 역사적 운동, 정치적 조직의 내재적 시대구분periodization이다. 그래서 <주체의 이론>에서 대중, 계급, 당과 같은 용어를 통해 던져졌던 오래된 질문은, <역사의 재탄생>에서는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념Idea의 기호에, 활동적인 물질성으로서 역사의 재각성을 정치적으로 기입할 수 있을까?” 특히 이러한 기입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사전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희박하며 우연적인 것이라면 말이다. “단지 모든 정치적 진리가 거대한 대중적 사건에 뿌리 내리고 있다 하더라도, 이 진리가 그 대중적 사건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만 지적해두도록 하자.”<a href="#_ftn7" name="_ftnref7" title="">[7]</a> </p>
<p> </p>
<p> </p>
<p>10.</p>
<p>프랑스 이론 내부에서, 아니 그 밖의 지역에서도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로의 이행은 정치적 주체화라는 질문을 문제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이러한 전환에서 두 가지 지배적인 흐름을 식별해낼 수 있다. 한 흐름은 여전히 맑스주의 및 변증법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들에게 정치는 주체화 과정과 분리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차이의 이름으로 헤겔-맑스주의적 변증법에 반대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하며, 이들은 주체를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이데거 사유의 유산과 연결되어 있는 후자의 경향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대치가 “함께-있음being-with”의 존재론을 무위의 “공동체”의 기반으로 제시하는 것이라면, 알튀세르의 작업유산과 연결된 전자의 경향에서 정치적 주체를 지지하는 입장은 종종 “인민people” 범주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형태로 정식화된다.</p>
<p> </p>
<p>예컨대, 논문 모음집 <인민이란 무엇인가What is a People?>의 기고문에서, 바디우와 랑시에르는 단수로서의 “인민”은, 이 명사를 꾸며주는 형용사들에서 발견되는 어떤 특수성의 기입들로부터 벗어난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적 주체의 이름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민’이라는 말은 국가의 가능한 비실존nonexistence의 견지에서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 국가가 우리가 창조하고자 열망하는 금단의 국가든지 우리가 사라지기를 열망하는 공인된 국가이든지 말이다. ‘인민’은 민족해방전쟁과 같은 임시적인 유형 아래서 또는 공산주의 정치와 같은 결정적인 유형 아래서 그 전적인 가치를 갖는 말이다.”<a href="#_ftn8" name="_ftnref8" title="">[8]</a> 동일한 진영에서, 우리는 한 때 알튀세르주의자였던 또 한 명의 인물, 고故 에네스토 라클라우의 이론적 지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역시 유사하게 인민주의populism의 논리가 모든 정치적 과정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들은 주디스 버틀러가 “우리, 인민we, the people”이라는 표현을 미국에 기반한 좁게 정의된 제헌적 전통에서 빼내어 최근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에 적용할 때처럼, 단수 형태가 아니라 복수의 형태로 “인민들peoples”이 등장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질문을 야기한다. </p>
<p> </p>
<p>오늘날 정치적 주체를 지칭하는 이름의 복수화를 위해서는, “토착민indigenous peoples” “선주민first nations”, “원주민pueblos originarios”과 같은 인종적·종족적·문명적 다양성에 대한 참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드리 키아리가 <인민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이, “인민 개념이 전개되고 특수한 의미들을 갖는 의미의 세계는, 일반적으로 세 개의 다른 개념들—국민, 시민권/주권, 하위주체들이라 불리는 계급들—간의 결코 동일하지 않은 절합 위에서 만들어진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 묘사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인민이 국민nation과 동일한 기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도 스스로를 국민에 ‘못미치는 것’으로 자기-정체화하는 경우, 즉 일반적으로 어떤 (특히 문화적 영역에서의) 자율적 권력에 집착하면서도 자신들만의 국가를 가지려 하지 않거나 이를 포기하는 경우. (여기서 우리는 유럽 국가들 안의 많은 ‘소수 인민들minority peoples’의 예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a href="#_ftn9" name="_ftnref9" title="">[9]</a> 이 복수적 형태는 오늘날 정치적 주체의 이름에 대한 매우 유럽중심적 논의들에서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오의 문화대혁명, 멕시코나 쿠바 혁명이 수행한 농지개혁, 볼리비아의 새로운 다수헌법제도 속에서 드러나는 프롤레타리아와 소작농 간의 고전적 긴장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오늘날 정치적 주체들의 얼룩덜룩한 속성에 계속해서 눈감을 수는 없다.</p>
<p> </p>
<p> </p>
<p>11.</p>
<p>어찌되었든, 하나의 새로운 합의가 알튀세르 학파의 대화 속에서 등장했다. 여기에는 랑시에르나 발리바르 뿐 아니라 바디우나 라클라우도 포함될 수 있으며, 꼭 직접적으로 알튀세르와 연결고리를 가진 것은 아닌 일련의 소장 학자들, 슬라보예 지젝, 주디스 버틀러, 산드라 메자드라Sandra Mezzadra같은 이들까지 포함된다. 이 합의에 담긴 공유된 전제는, 구조는 본질적으로 완결 불가능하지만 주체의 개입 없이는 이 불가능성이 가시화될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구조의 완결불가능성 때문에 주체와 구조가 절합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리바르가 모든 좋은 구조주의는 이미 포스트구조주의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나의 가설은, 실은 포스트구조주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국제적 ‘수출’과 ‘수용’, ‘번역’의 과정을 통해 그 이름을 획득한) 포스트구조주의는 항상 여전히 구조주의이며, 그 가장 강한 의미에서의 구조주의는 이미 포스트구조주의라고 말해야 한다.”<a href="#_ftn10" name="_ftnref10" title="">[10]</a>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모든 구조는 그 구조를 자기-완결적인 총체성으로 구성하는 것을 가로막는 필수적인 간극과 불일치로 인해 이미-항상 그 내부에서 탈구되어 있다는, 알튀세르 자신의 저작에서도 드러나며 데리다 같은 하이데거주의자들도 완전히 동의할 수 있는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상황situation의 역사성이 징후적으로 집중화되어 있는 사건의 현장site, 바로 그 곳에서 개입하여 활동하는 주체가 없다면, 이 간극이나 불일치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데리다의 탈구축, 라캉의 정신분석, 이탈리아 자율주의의 여파 속에서 작업해 온 수많은 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도입한 주요한 이론적 혁신이다. 라클라우가 지젝의 첫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서문에서 행한 탁월한 요약을 빌자면, “주체가 존재한다면, 실체 (대상성)가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구성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a href="#_ftn11" name="_ftnref11" title="">[11]</a></p>
<p> </p>
<p> </p>
<p>12.</p>
<p>이 새로운 합의의 문제점은, 이렇게 구조의 불완전성 혹은 간극과 절합된 주체의 이론이 다시 한 번 새로운 법칙으로 존재론화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그의 주요 저작인 <맑스를 위하여<em>For Marx</em>>에서 불균등 발전uneven development을 문명의 충돌 같은 역사적 상황이나 러시아 같은 특정 국가의 주변적 속성과 관계없이 모든 구조에 적용될 수 있는 “원초적 법칙”으로 제시한 것처럼, 지젝이나 버틀러, 메즈드라의 작업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정식화에서, 우리는 주체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일차적으로 권력 구조들이지만, 주체는 항상 그 권력구조들에 의한 결정을 초과한다는 주장을 발견한다. “행위성agency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권력을 초과한다.” 버틀러는 이것이 그 자체로 주체성의 최종적인 법칙인 것처럼 주장한다. “만약 주체가 (상당부분 혹은 부분적으로 권력에 의해 결정되고 권력을 결정하긴 하더라도) 권력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지도 역으로 권력을 완전히 결정하지도 않는다면, 주체는 비모순의 논리를 초과하며 그 자체로 논리의 이상생성물excrescence이라 할 수 있다.”<a href="#_ftn12" name="_ftnref12" title="">[12]</a> 더 나아가, 구조를 그 자신의 근본적인 우연성을 향해 열어젖히면서 동시에 주체를 이 열려짐의 공간에 기입하는 이 필연적인 과잉excess의 이름으로, 현대 이론은 “우발적 유물론aleatory materialism”이라는 절충적 형태를 찾아 나섰던 알튀세르의 사후 출판된 연구들의 발자취 역시 종종 따르고 있다 (알튀세르는 초기 주요 저작들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의 이름으로 자신의 원칙 중 몇 가지를 분명히 했는데, 후기에는 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의 초기 입장이 가진다고 여겨졌던 결정론적 성격을 우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p>
<p> </p>
<p> </p>
<p>13.</p>
<p>이치다 요시히코가 주장하는 것처럼, 오늘날 만약 하나의 지배적인 정치인류학 혹은 하나의 새로운 근본적 존재론이 있다면, 정신이 “실체로뿐만 아니라 주체로 사유되어야 한다”는 헤겔의 주장을 새롭게 뒤튼 이러한 합의일 것이다.<a href="#_ftn13" name="_ftnref13" title="">[13]</a> 물론 지젝은 이 새로운 합의 뒤에 헤겔적 교리가 있음을 가장 앞장서 자랑스레 주장하는 철학자이다. 그가 보기에 이 헤겔적 교리는, 절대적인 것을 향한 변증법의 총체화하는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탈구축의 표준적 입장들과 결정적으로 결별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지젝처럼 헤겔의 영향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아니라도, 우리는 현대 이론의 많은 위대한 저자들 사이에서 실체와 주체 간의 절합에 대한 유사한 입장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론에 있어 현재 우리는 독일 관념론의 지속적인 패러다임에 압도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p>
<p> </p>
<p> </p>
<p>14.</p>
<p>그러므로 (총체성의 원리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탈구축한 이후에) 독일 관념론을 계승한 주체이론의 패러다임과도 결별하려는 모든 시도는, 알튀세르의 또 한 명의 제자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의 책 제목, <헤겔 혹은 스피노자<em>Hegel or Spinoza</em>>와 같은 양자택일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스피노자 이외에도, 알튀세르의 마지막 작업을 좇아간 많은 저자들은 헤겔 이전 혹은 심지어 칸트 이전의 사상가들, 예컨대 그리 멀리 거슬러가지는 않아도 되는 마키아벨리나 혹은 고대 유물론자 루크레티우스 같은 예상치 못한 동지들을 발견했다. 하이데거적 사유가 다다른 근본적 결론과 동일하게,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종종 주체이론 전반을 희생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지만, 이러한 희생은 이제 급진적 내재성, 우연성, 우발적인 것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자유들을 존재론적으로 확정하는 것으로 연결된다.</p>
<p> </p>
<p> </p>
<p>15.</p>
<p>정치와 주체성 이론이 다다른 이러한 최근의 곤경은, 익숙한 철학적 카드들을 다시 뒤섞는 것을 넘어서 두 겹의 역사화를 요구한다. 먼저 (바디우의 친구이자 동료 투사인 실뱅 라자뤼스Sylvain Lazarus가 처음 제안한) “정치의 역사적 양식들”이라는 통념을 좀 더 정교화해야 한다.<a href="#_ftn14" name="_ftnref14" title="">[14]</a> 여기에는 자코뱅, 볼셰비키, 스탈린주의, 민주적-의회주의적 양식들이 포함되며, 이러한 작업은 정치를 행하는 특정한 양식, 예컨대 전세계에 걸친 노동조합이나 공산당의 계급-기반 정치와 같은 양식들이 지금은 그 기한을 다했거나 낡은 것이 되었을지라도 과거에는 적합한 것이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더해, 우리는 다양한 “주체의 이론들” 역시 복수의 형태로 역사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포스트-헤겔적 합의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유일한 주체의 이론인 것처럼 (바디우 본인이 <주체의 이론>에서 정확히 썼듯이: “진실은 오직 단 하나의 주체의 이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a href="#_ftn15" name="_ftnref15" title="">[15]</a>) 확증되면서 등장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p>
<p> </p>
<p> </p>
<p>16.</p>
<p>첫 번째 역사화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봉기와 반란의 최근 국면sequence은,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나 스페인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을 점거한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과 같은 다양한 사건들 이전에 2006년 멕시코의 일명 옥사카 코뮌<a href="#_ftn16" name="_ftnref16" title="">[16]</a>에서 시작된 것일지 모른다. 이 코뮌에서 영감을 얻은 캘리포니아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오클랜드 점거운동”이 아닌 “오클랜드 코뮌”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코뮌의 이름을, 바디우나 다른 이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1871년 파리 코뮌의 영웅적인 예시를 참조한 것으로 손쉽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비록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 코뮌을 분석하면서 잠시 잊은 듯 하지만 실은 맑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시피, 히스패닉의 세계에서 코무네로 반란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전통은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코무네로 반란에서 시작해, 18세기 안데스와 뉴 그라나다 지역의 다양한 원주민 반란을 거쳐, 트로츠키 역사학자 아돌포 질리가 모렐로스 코뮌이라 부른, 1914-15년에 걸쳐 멕시코 시티 바로 남쪽에서 일년 간 행해진 원조 사파티스타의 급진적 토지개혁과 군사 자치의 실험으로 이어진다.<a href="#_ftn17" name="_ftnref17" title="">[17]</a> 이같이 코뮌은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상 핵심이 되는 소작농과 프롤레타리아의 동원을 통해, 중앙집권화된 국가로부터 준-무정부주의적 자율성을 획득하려는 계기에 적합한 정치적 실천 및 조직의 역사적 양식으로 간헐적으로 등장해왔다. 이러한 역사는 공동체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으로 환원하는 대신, 코뮌의 다양한 정치 형태의 구축에 있어 소위 원시적 혹은 원초적 공동체들의 역사적 운명을 조사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공동체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p>
<p> </p>
<p> </p>
<p>17.</p>
<p>유사한 질문들이 두 번째 역사화의 과제, 즉 독일 관념론으로부터 내려온 지배적 형태의 주체 이론 이외에 다양한 주체의 이론들을 살펴보는 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오늘날 주체가 구조의 불완전성에 의해 분열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판본이 새로운 합의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이 판본이 그 자체로 모든 시기에 타당한 주체의 유일 이론으로 존재론화되었는지 물어야만 한다. 사건의 우연성에 대한 모든 강조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적 이론은 완전히 비역사적이고 선험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어떤 주체가 어떻게 충실성 속에서 사건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오직 하나의 이론만이 항상 남게 되며, 그 주체의 다양한 유형이나 형상들을 드러낼 수 있는 사건들—예컨대, 기독교의 등장이나 신대륙의 정복과 함께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같은 사건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우리가 이러한 다양한 유형이나 형상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구조적이거나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계보학적인 주체의 이론이 필요하다. 알랭 드 리베라가 최근 진행하고 있는 <주체의 고고학> 시리즈 작업이나 얼마 전 작고한 아르헨티나 철학자 레온 로지츠너의 자본주의와 기독교 주체성 간의 역사적 연결고리에 대한 연구가 바로 이러한 시도에 해당할 것이다.<a href="#_ftn18" name="_ftnref18" title="">[18]</a></p>
<p> </p>
<p> </p>
<p>18.</p>
<p>이러한 맥락에서 맑스의 사유는 여전히 유용할 수 있다. 심지어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에서조차 (안토니오 네그리는 알튀세르의 세미나에 초청받아 행한 강연집 <맑스를 넘어선 맑스<em>Marx Beyond Marx</em>>에서 이 텍스트의 주체-지향적 접근을 분석한 바 있지만), 우리는 “1857년 서설Einleitung”이나 혹은 모든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과 포스트-자율주의자들이 영감을 얻어온 소위 “기계에 대한 단상fragment on the machine”에만 초점을 맞춰선 안 된다. 우리는 동시에 에릭 홉스봅이 별도의 책으로 편집해 영어로 출판하고, 특히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주변부 혹은 포스트식민 국가들에서 수없이 재발간되며 맑스주의 저작의 핵심 텍스트 중 하나로 자리잡은,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경제 형태들Economic Forms that Precede Capitalism”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 텍스트는 자본주의가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이지는 않지만 이후 자본의 산물인양 [내·외부의 구분이 불가능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자본의 순환에 재기입·재코드화되는 요소들과의 우연적 조우 속에서 어떻게 역사적으로 등장하였는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시초축적 국면에 선행했던 소위 원초적·농경적 소작농 코뮌이나 공동체가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본순환의 메커니즘 때문이며, 그 결과 코뮌의 이름에 기댄 다양한 봉기와 반란은 이들의 유토피아적 재건을 목표로 내건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꿈은, 단순히 이미-항상 구성적으로 상실된 존재론적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일소되어야 할 사후적 환상의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원자화된 개인들만이 가능한 시민-부르주아 사회의 시장터에서 집합적 주체를 동원하고자 하는 모든 정치적 기획이 가지는 불가피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p>
<p> </p>
<p> </p>
<p>19.</p>
<p>그럼에도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의 주요 부분들에서 묘사된 자본의 순환적 고리와 혁명적 프락시스의 구조 사이에는 기묘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2항에서 혁명적 프락시스의 구조를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의 “일치” 혹은 말 그대로 “동시에 행하는 것”, 즉 구조와 주체의 동시적 변형transformation으로 정의한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와의 일치는 오직 <strong>혁명적</strong> <strong>프락시스</strong>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a href="#_ftn19" name="_ftnref19" title="">[19]</a> 이 테제가 지배적인 포스트-헤겔주의적 합의의 틀 속에서 번역될 때조차, 아니 오히려 그러한 틀 속에서 해석될 때 더더욱, 하나의 주체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환경에 의해 결정되기는 하지만 그 자신과 환경을 동시에 변형시킬 수 있다는 관념은, 자신의 등장을 위한 실질적 전제들을 마치 그 자신의 행위의 산물인 양 제시하는 자본순환 매커니즘의 기괴한 복제품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으나, 맑스의 주체 이론들과의 지속적인 대화는 한 차원 높은 역사화 작업, 즉 독일 관념론으로부터 이어져온 정치 인류학이 탈역사화 혹은 선험화되는 과정의 역사화에 근본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라는 가장 급진적인 요청조차, 근대사회에서만 보편적·영구적으로 타당하게 여겨지는 매우 특정한 주체 이론에 계속해 기대고 있음을 새롭게 밝힐 수 있을지 모른다. 이는 우리 고통의 원천이 오직 독일 관념론의 철학적 영향 때문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독일 관념론의 부상 그 자체가, 자본주의의 자기-변화 혹은 활동 모델에 기반해 주체성을 이해해 온 좀 더 광범위한 역사적 과정의 일부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p>
<p> </p>
<p> </p>
<p>20.</p>
<p>오늘날 주체에 관한 지배적인 이론, 즉 사건적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선험적인 이 이론의 탈역사성을 엄밀하게 유물론적으로 역사화하는 작업은, 자기self에 대한 전-기독교적 이해와 기독교적 이해를 분리시키는 지표들, 혹은 인간의 언어와 사유에 대한 전-자본주의적 이해와 자본주의적 이해를 분리시키는 역사적 지표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시대의 모든 문화는 그 자신의 주체 이론을 가지고 있다는 역사적 상대론의 입장을 택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여전히 주체는 항상 존재해왔다고 주장하길 원한다면, 그것이 항상 동일한 주체적 형태로 존재해온 것은 아니라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주체는, 그것이 데카트르든 헤겔이든 혹은 그 길을 앞서 나간 성 어거스틴이든, 이들 철학자들의 발명품이 아니다. 만약 모든 주체이론이 암묵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이론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주체가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근대적 주체가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질적·역사적 전제조건들로 자신 앞에 놓여진 전-근대적 환경들에 그 자신을 투영할 수 있었는지 물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주체와 주체가 아닌 것(어떻게 부르든 주체가 그 위에서 작동하는 물질들, 즉 자연, 욕망, 의지력, 생명 혹은 단순히 힘과 충동의 특정한 양) 간의 단절이, 근대와 전-근대 간의 단절 혹은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 간 경제체제 및 주체의 (정신적, 리비도적, 인지적, 정동적) 형성들formations에 있어서의 단절과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오직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만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 즉 세계를 변혁하자는 모든 호소가 얼마나 맹렬하고 격렬하게 반자본주의를 외치든지 간에, 결국 자본이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스스로를 늪에서부터 끄집어 낸 [독일 민담의 허풍선이 남작] 뮌히하우젠Münchhausen처럼) 모든 것을, 심지어 그 자신의 출현을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들까지 생산해낸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자본의 뫼비우스 띠 순환구조를 복제하고 있는 현재의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오직 이러한 역사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본주의 주체들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비로소 멈출 수 있을 것이다.</p>
<p> </p>
<p> </p>
<p> </p>
<p><strong>해제</strong></p>
<p> </p>
<p>여기 번역된 브루노 보스틸스의 글은, 2015년 1월 일본 교토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에서 주관한 국제 심포지엄 “정치, 주체, 그리고 현대철학”에서 영문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이치다 요시히코, 브루노 보스틸스, 에티엔 발리바르 등이 참석한 이 심포지엄의 발표문은 이후 동일 연구소의 연간지 Zinbun 46호에 게재되었고, 향후 이치다 요시히코와 오지 겐타가 공동 편집하고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출판될 <68년 이후와 우리>에 일본어 번역이 수록될 예정이다. 한글 번역은 영문판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힌다.</p>
<p> </p>
<p>얼마 전 <공산주의의 현실성> (염인수 역, 갈무리, 2014)이 번역되면서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브루노 보스틸스는, <주체의 철학>을 포함한 다수의 알랭 바디우 저서를 영어권에 번역·소개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번역자 및 주석자의 역할을 넘어 본인 만의 정치이론을 전개하면서 최근에는 알베르토 토스카노, 피터 홀워드, 제이슨 리드, 조디 딘 같은 학자들과 함께 영미 좌파 정치이론계의 소장학자 중 한 명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어디선가 보스틸스는 자신의 정치이론의 출발점을 “형이상학의 탈구축이 이룩한 개념적 성취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하이데거나 데리다에 기반한 지배적 탈구축의 흐름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정치철학의 모색”이라 밝힌 바 있는데,<a href="#_ftn20" name="_ftnref20" title="">[20]</a> 이 글에서도 그의 이러한 이론적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과 정치지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기존 유럽중심의 정치철학 논의에 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을 도입하려는 시도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독자들은 이 글에서 그 고민의 흔적 역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p>
<p> </p>
<p>사실 여러 면에서 완결된 형태의 논문이라기보다는 이후 연구를 위한 과제제기에 가까운 글을 굳이 번역·소개하는 이유는, 이 글이 현재 다소 교착상태에 빠진 듯한 좌파 정치이론 지형에 대한 흥미로운 개괄과 함께 나름의 일관된 문제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20여 년 간 서구 이론의 영역에서 정치철학의 부흥이라 부를만한 현상이 존재했다. 보스틸스는 데리다, 라쿠-라바르트, 낭시, 아감벤, 라클라우,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 버틀러, 네그리 등 정치철학의 부흥을 이끌었던 대표적 이름들을, 크게 포스트-하이데거 진영과 포스트-알튀세르 진영으로 분류한 후, 이 두 진영이 오늘날 정치적 주체를 사유하는데 있어 공통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맞닥뜨리게 된 곤경에 대해 논한다.</p>
<p> </p>
<p>우선 포스트-하이데거 진영이 역사·사회·이론 등이 정치적 실천과 가졌던 변증법적 관계들을 급진적으로 탈구축하고 주체 역시 해체해야 할 형이상학적 범주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결국 주체 및 공통의 본질 없이 함께-있음에 기반한 이상적인 “공동체”의 조건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면, 포스트-알튀세르 진영은 이러한 탈구축 자체가 “개입하는 주체”라는 범주 없이는 가능하지 않음을 밝히고 주체의 존재 조건을 구조의 근본적 불완전성과 연결시키면서 일종의 형식적인 주체 개념을 되살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특정한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역사적 조건 속에서 사유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 글의 서두에서 보스틸스가 지적하듯이, 오늘날 정치이론이 최근 분출하고 있는 정치적 사건들을 분석하고 이 사건의 주체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이는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정치적 주체에 대한 사유가 직면한 이러한 이론적 곤경 때문일 것이다. </p>
<p> </p>
<p>물론 이 글에서 보스틸스가 제시하는 지형도는 다분히 자의적이고 거친 분류이며, 각 이론가 간의 혹은 각 진영 내부의 중요한 입장차이를 상당부분 간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러한 지형도에 기반해 제안하는 현 교착상태의 돌파구는 한 번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보스틸스는 오늘날 정치적 사유의 이론적 곤궁을 해소하기 위해 두 겹의 역사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가 정치 양식들의 역사화 작업을 통해 정치와 역사의 관계를 다시금 연결시켜 사고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주체에 대한 복수의 관념들을 역사 속에서 추적하면서 현재 유일하게 가능한 주체 형태로 간주되는 (보스틸스 본인이 ‘포스트-헤겔적’이라 부르는) 주체 관념을 극복하는 것이다. 좀 더 익숙한 용어로 고쳐 쓰자면, 전자는 정치적인 것의 혹은 정치 양식의 계보학, 후자는 주체화 양식의 계보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p>
<p> </p>
<p>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처럼 “항상 역사화하라!”는 명령이 물화와 형식주의에 맞서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온 맑스주의 변증법의 교리였음을 생각해보면,<a href="#_ftn21" name="_ftnref21" title="">[21]</a> 사실 보스틸스의 이러한 제안이 특별히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른다. 또한 혹자는 이러한 이중의 역사화 작업이 그가 진단하고 있는 정치적 주체화를 둘러싼 이론적 곤경을 돌파하는데 충분한 해결책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논의들이 그 역사적 조건보다는 (예컨대, 정치와 치안을 논리적 차원에서 구분하려 한 랑시에르의 작업이나, 사건 개념을 수학적으로 정교화한 바디우, 정신분석적 행위act와 여타의 거짓행위를 구분짓는 지젝의 작업처럼) 주로 정치적 주체를 다른 주체와 구분시켜 주는 “형식”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왔으며, 그 결과 이들 논의 속에서 정치적 주체는 안티고네, 바틀비, 바울 같은 일종의 초역사적 알레고리로서만 제시되어 왔음을 염두에 둔다면, 보스틸스의 이러한 요청이 가지는 부분적 설득력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자면, 보스틸스 자신이 이 글의 마지막에 언급하듯이, 이러한 정치 및 주체 개념의 역사화에 대한 강조가 각 시대별로 나름의 정치 및 주체 개념이 존재한다는 역사적 상대주의에 대한 옹호로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보스틸스는 특이하고 희박한 사건으로서의 정치를 역사의 내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형식이 역사의 구체성 속에서 어떻게 돌출적으로 등장하며 상호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이 역사화의 핵심 과제임을 반복해 강조하고 있다.<a href="#_ftn22" name="_ftnref22" title="">[22]</a> 그리고 그러할 때 우리는 정치적 주체화를 둘러싼 논의가 이룩해 온 개념적 성취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그 이후 및 너머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p>
<p> </p>
<p>이 글에서 보스틸스는 나름의 문제진단과 방향성만을 제시할 뿐, 이러한 방향성에 걸맞는 구체적인 작업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그가 이러한 문제틀에 기반해 어느 정도의 연구 프로그램을 진척시킬 수 있을지는 앞으로 이어질 그의 행보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의 논의를 통해 최근 정치이론이 다다른 것처럼 보이는 막다른 골목의 돌파구가 어디서부터 마련될 수 있는지 하나의 유용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그가 제시한 이후 연구 방향과 구체적인 방법론의 적실성을 상세히 논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논의와 우리의 고민을 한 발짝 더 진전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점만 간단히 언급하며 짧은 해제를 마치고자 한다. </p>
<p> </p>
<p>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이 글에서 보스틸스가 개괄하고 있는 오늘날 정치와 주체를 둘러싼 논의구도가 전체 지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글의 열 네 번째 테제에서 매우 부분적이고 불분명하게 암시되기는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적 전환 이후 정치적 주체를 둘러싼 포스트-하이데거와 포스트-알튀세르 진영의 대립 구도 너머 다른 한 켠에는, 객체의 절대적인 우연적 조합에 대해 사유하면서 정치와 행위자에 대한 인간 중심적 가정들을 해체해 나가는 다양한 흐름들, 즉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혹은 인류학에서 “존재론적 전환”이라 부르는 상호연결되어 있으나 동시에 분리된 흐름들이 존재한다.<a href="#_ftn23" name="_ftnref23" title="">[23]</a> 화이트헤드, 퍼스, 타르드, 시몽동, 들뢰즈·가타리와 같은 사상가들로부터 이론적 영감을 얻고 있는 이 흐름은 비인간 행위자에 대한 사유를 통해 기존의 정치와 주체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쓰려는 시도로서, 보스틸스가 추구하는 역사화의 작업은 기존의 정치철학적 논의들과 이 새로운 흐름들 간의 대화와 긴장 및 갈등 관계를 통해 좀 더 풍부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p>
<p> </p>
<p>다음으로 비록 이 글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보스틸스가 자신의 역사화 작업을 위한 구체적 자원으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분석에 기반한 역사유물론과 후기 푸코의 장치 분석에 기반한 주체의 계보학을 제시한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a href="#_ftn24" name="_ftnref24" title="">[24]</a> 이 기본적인 두 축에 이 논문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일종의 탈식민주의적 접근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포스트-맑스주의 논쟁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정치경제학과 주체생산장치 분석의 결합에서 과거 생산양식과 주체화 양식의 절합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을 자연스레 떠올릴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기존의 논의들이 사회구성체와 사회적 주체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즉 사회적 예속화의 매커니즘에 대한 관심 속에서 생산양식과 주체화양식의 절합을 고민했다면, 보스틸스는 이 자원들을 역사 속에서 정치적 주체화가 어떻게 가능했으며 오늘날 새로운 주체의 돌출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 가능성의 조건들을 사유하기 위해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서구 사회의 경험을 일반화하지 않으면서, 생산양식의 모순이 어떻게 특정시기의 정치양식과 주체형태를 조건지으며 동시에 정치적 주체생산을 위한 각종 장치들이 어떻게 작동해왔는지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p>
<p> </p>
<p>장기 지속되고 있는 냉전체제와 급격한 산업자본주의의 발달 및 금융자본주의로의 포섭 속에서 그 어느 사회보다 역동적인 정치 주체의 이름들—인민, 민중, 노동자, 전위, 청년, 열사, 전사, 시민 등—의 부침을 경험한 한국 사회는, 어쩌면 보스틸스가 제안하는 유럽의 경험을 넘어선 정치양식과 주체화양식의 역사화 작업을 고민하기에 알맞은 현장일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정치적 주체의 형식과 논리의 구체적 “사례”를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연구를 통해 정치적 주체화를 둘러싼 기존의 논의에 개입하고, 그 형식과 논리 자체를 다시 써나가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보스틸스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 정치적 주체의 부침을 둘러싼 역사화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 보이는데, 이는 “민중”의 해체와 “시민”의 무기력화, “청년”의 몰락 등을 겪으며 우리사회가 정치적 주체의 이름을 망각하고 상실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 때는 정치적 주체를 호명했던 이름들이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역사적·사회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추적해나가는 작업. 이는 보스틸스의 말처럼 역사와 정치의 분리를 극복하고 존재론화된 주체 이론의 갱신을 추구하는 이론적 작업인 동시에,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등장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을 마련하고 그 잠재적 유령을 현실 속에 다시금 소환해내기 위한 정세개입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일 것이다.</p>
<p> </p>
<p> </p>
<p> </p>
<div>
<hr align="left" size="1" width="33%" />
<div id="ftn1">
<p><a href="#_ftnref1" name="_ftn1" title="">[1]</a> Bruno Bosteels, “Twenty Theses on Politics and Subjectivity”, <em>Zinbun</em> 46, 2016: 21-39. © 2016 Institute for Research in Humanities Kyoto University [한국어 번역 및 게재를 흔쾌히 허락해준 저자 브루노 보스틸스와 Zinbun 편집자 오지 켄타(王寺 賢太)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역자에게 브루노 보스틸스의 작업을 소개하고 일독을 권한 에티엔 발리바르와 송제숙 선생님께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 역자]</p>
</div>
<div id="ftn2">
<p><a href="#_ftnref2" name="_ftn2" title="">[2]</a> [역주] 가속주의accelerationism는 현 자본주의의 물질적-기술적 조건의 발달을 가속화하고 이를 집단적으로 재전유함으로써 자본주의에 급진적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입장을 의미한다. 기존의 자율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일부 전제들을 공유하지만 일시적 자율공간의 구성이나 직접행동의 추구 같은 구체적 실천 형태들에 이론을 제기하며, 이들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인 Alex Williams and Nick Srnicek, “#Accelerate Manifesto for an Accelerationst Politics,” <em>Critical Legal Thinking</em> (2013. 5. 14)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가속주의적 정치를 위한 선언,” <a href="http://blog.daum.net/nanomat/520">http://blog.daum.net/nanomat/520</a>) 최근 들어 포스트-자율주의를 포함한 여타의 맑스주의 진영과 가속주의 간의 논쟁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David Cunningham, “Marxist Heresy: Accelerationism and Its Discontents” <em>Radical Philosophy</em> 191, 2015: 29-38를 참고할 수 있다. </p>
</div>
<div id="ftn3">
<p><a href="#_ftnref3" name="_ftn3" title="">[3]</a> [역주] 여기서 보스틸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공동체를 a community나 communities로, 낭시나 아감벤이 이상적 형태로 제시하는 무위의 공동체나 도래할 공동체를 the community로 일관되게 구분해 서술하고 있다. 전자는 공동체로, 후자는 “공동체”로 옮긴다.</p>
</div>
<div id="ftn4">
<p><a href="#_ftnref4" name="_ftn4" title="">[4]</a> Jean-Luc Nancy, <em>The Inoperative Community</em>, trans. Peter Conno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8-9.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 pp.35-36.]</p>
</div>
<div id="ftn5">
<p><a href="#_ftnref5" name="_ftn5" title="">[5]</a> Pierre Dardot and Christian Laval, <em>Marx, prénom Karl</em> (Paris: Gallimard, 2012), 11.</p>
</div>
<div id="ftn6">
<p><a href="#_ftnref6" name="_ftn6" title="">[6]</a> Alain Badiou, <em>Theory of the Subject</em>, trans. and intro. Bruno Bosteels (London: Continuum, 2009), 27. 맑스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입장 변화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한 글로는, 다음의 내 논문을 참고하라. “The Fate of the Generic: Marx with Badiou,” in <em>(Mis)readings of Marx in Contemporary Continental Philosophy</em>, ed. Jessica Whyte and Jernej Habjan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4), 211-226.</p>
</div>
<div id="ftn7">
<p><a href="#_ftnref7" name="_ftn7" title="">[7]</a> Alain Badiou, <em>The Rebirth of History: Times of Riots and Uprisings</em>, trans. Gregory Elliott (London: Verso, 2012), 67 and 89. 역사와 정치에 대한 바디우의 변화된 관점에 대해서는, 내 책 <em>Badiou and Politics </em>(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1)의 3장과 7장을 보라.</p>
</div>
<div id="ftn8">
<p><a href="#_ftnref8" name="_ftn8" title="">[8]</a> Alain Badiou, “Vingt-qatre notes sur les usage du mot ‘peuple,’” in <em>Qu’est-ce qu’un people</em>? (Paris: LA Fabrique, 2013), 21. [“‘인민’이라는 말의 쓰임에 대한 스물 네 개의 노트”, 서용순 외 역,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연구, 2014, p.28.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p>
</div>
<div id="ftn9">
<p><a href="#_ftnref9" name="_ftn9" title="">[9]</a> Sadri Khiari, “Le people et le tiers-peuple” in <em>Qu’est-ce qu’un people?</em> (Paris: LA Fabrique, 2013), 117-118. [“인민과 제3의 인민,” 서용순 외 역,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연구, 2014, p.151-152.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컬럼비아 대학 출판사에서 곧 출판될 이 책의 영어 번역본에 실린 나의 서문 “This People Which Is Not One”도 참고하라.</p>
</div>
<div id="ftn10">
<p><a href="#_ftnref10" name="_ftn10" title="">[10]</a> Etienne Balibar, “Structuralism: A Destitution of the Subject?” trans. James Swenson, <em>Differences: A Journal of Feminist Cultural Studies</em> 14:1 (2003): 11.</p>
</div>
<div id="ftn11">
<p><a href="#_ftnref11" name="_ftn11" title="">[11]</a> Ernesto Laclau, “Preface,” in Slavoj Zizek, <em>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em> (London: Verson, 1989), xv.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p.15]</p>
</div>
<div id="ftn12">
<p><a href="#_ftnref12" name="_ftn12" title="">[12]</a> Judith Butler, <em>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in Subjection</em>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15 and 17. 다음도 참조하라. Chapter 2, “Producción de subjectividad,” in Sandro Mezzadra, <em>La cocina de Marx: El sujeto y su producción</em>, trad. Diego Picotto (Buenos Aires: Tinta Limón, 2014), 23-33.</p>
</div>
<div id="ftn13">
<p><a href="#_ftnref13" name="_ftn13" title="">[13]</a> Yoshihiko Ichida (市田 良彦), “Héros (post-)structuraliste, politique de politique,” <em>Zinbun</em> 46, 2016.</p>
</div>
<div id="ftn14">
<p><a href="#_ftnref14" name="_ftn14" title="">[14]</a> [역주] 라자뤼스의 “정치의 역사적 양식들”에 대한 분석은, 실뱅 라자뤼스, 이종영 역, <이름의 인류학>, 새물결, 2002참고. </p>
</div>
<div id="ftn15">
<p><a href="#_ftnref15" name="_ftn15" title="">[15]</a> Badiou, <em>Theory of the Subject</em>, 115.</p>
</div>
<div id="ftn16">
<p><a href="#_ftnref16" name="_ftn16" title="">[16]</a> [역주] 2006년 6월에서 11월까지 진행된 멕시코 옥사카Oaxaca 지역의 저항운동. 교사 처우개선과 빈곤층 학생 재정지원을 요구한 옥사카시 교사노조의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옥사카 지역정부가 경찰력을 투입하자, 주민들이 봉기하여 지방정부를 몰아내고 11월 중앙정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될 때까지 5개월 간 자치적 통치를 시행하였다. 옥사카 주는 멕시코 내에서 원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400만 인구의 대략 2/3가 원주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기의 배경과 진행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는 Richard Roman and Edur Velasco Arregui, “Mexico’s Oaxaca Commune,” <em>Socialist Register</em> 44, 2008: 248-264을 참고할 수 있다.</p>
</div>
<div id="ftn17">
<p><a href="#_ftnref17" name="_ftn17" title="">[17]</a> [역주] 보스틸스의 말대로 공동체 자치 원리에 기반한 코무네로Comunero 봉기는 스페인어권 지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코무네로 봉기는 1520-21년 카를 5세의 지배와 과도한 징세에 반발해 카스티야Castile 지방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를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지역 도시민으로 구성된 지역 위원회 코무네로가 권력을 장악하고 자치적 통치를 시도하였다. 이 같은 코무네로의 자치 전통은 이후 스페인 식민통치에 맞선 남아메리카 지역민들의 저항형태 속에서 반복된다. 1721-25년, 1730-35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파라과이 지역의 코무네로 반란이나, 1780-83년 안데스 산맥 남쪽 지역에서 진행된 반란, 1781년 현재 콜롬비아 및 베네주엘라에 해당하는 뉴 그라나다New Granada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가 그 대표적 예들이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에도 이어져 멕시코 혁명 기간 동안 모렐로스Morelos 지방 소작농들은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의 지도 아래 지역 단위의 급진적인 농지개혁과 민중민주주의적 자치, 자기-방어를 위한 군사제도 설립 등의 실험을 전개한다. 아돌포 질리가 파리 코뮌과의 유비 속에서 “모렐로스 코뮌”이라 이름 붙인 이 소작농-원주민 자치 시도는, 현재도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지역의 사파티스타 해방군이나 앞서 말한 옥사카 코뮌 실험 등에 영감을 주고 있다. Adolfo Gilly, <em>The Mexican Revolution</em>, 2005 (New York: The New Press) 참고.</p>
</div>
<div id="ftn18">
<p><a href="#_ftnref18" name="_ftn18" title="">[18]</a> [역주] 알랭 드 리베라Alain de Libéra는 <콜레주 드 프랑스> 중세철학사 교수로, 주체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통념에 반대하여, 근대 이전 문헌들 속에서 주체, 자기, 자아 등의 관념들이 어떻게 사고되었고 변화되었는지 고고학·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추적한 <주체의 고고학Archéologie du sujet> 시리즈 작업들로 유명하다. 2007년에 1권 <주체의 탄생I. Naissance du sujet> (Paris: Vrin, 2007)을 출간한 이후, 2008년 2권 <정체성의 탐색II. La Quête de l'identité>, 2014년 3권 <이중 혁명. 사유행위III. La double révolution.L'acte de penser>를 집필하였다. 레온 로지츠너León Rozitchner는 아르헨티나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로, 프로이트-맑스주의의 영향 하에 주체와 권력의 관계 그리고 집단적인 주체 변형의 문제를 좌파 포퓰리즘, 우익 권위주의, 군사독재, 민주화 등 남아메리카의 구체적 정치상황에 적용시킨 분석들로 유명하다. 1980년대 이후로는 주로 역사적 분석에 천착하며 1997년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통해 기독교적 주체와 자본주의적 주체의 등장 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분석한 <사물과 십자가: 기독교와 자본주의La Cosa y la Cruz: Chistianismo y Capitalismo>(Buenos Aires: Losada, 1997)를 출판하였다. 2011년 9월 타계하였다.</p>
</div>
<div id="ftn19">
<p><a href="#_ftnref19" name="_ftn19" title="">[19]</a> Karl Marx, “Theses on Feuerbach,” Collected Works (London: International Publishers, 1975), vol. 5, 4.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박종철 출판사, 1991, p. 186]</p>
</div>
<div id="ftn20">
<p><a href="#_ftnref20" name="_ftn20" title="">[20]</a> Bruno Bosteels, <em>Badiou and Politics</em> (Duke University Press, 2011), p.xii.</p>
</div>
<div id="ftn21">
<p><a href="#_ftnref21" name="_ftn21" title="">[21]</a> Fredric Jameson, <em>The Political Unconscious</em> (Routledge, 1983), p. ix. [이경덕·서강목 역, <정치적 무의식>, 민음사, 2015]</p>
</div>
<div id="ftn22">
<p><a href="#_ftnref22" name="_ftn22" title="">[22]</a> “Traversing the Heresies: An Interview with Bruno Bosteels” <em>The Platypus Review</em> 54, 2013; 그의 책 <공산주의의 현재성>도 참고하라. </p>
</div>
<div id="ftn23">
<p><a href="#_ftnref23" name="_ftn23" title="">[23]</a> 흥미롭게도 보스틸스가 포스트-하이데거, 포스트-알튀세르 진영이라고 부르는 이들과 이 새로운 객체-지향적 사유 모두, “존재론”에 대한 강조를 자신들의 핵심 입장으로 내세우고 있다. 일종의 느슨한 발견론적 가설이지만 이를 마테이 칸디아가 제시하는 3가지 상이한 존재론적 정치의 입장, 즉, 존재론의 탈구축적, 수행적performative, 실재론적realist 측면과 각기 연결시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Matei Candea, “The Ontology of the Political Turn.” Theorizing the Contemporary, <em>Cultural Anthropology</em> website, January 13, 2014. https://culanth.org/fieldsights/469-the-ontology-of-the-political-turn.</p>
</div>
<div id="ftn24">
<p><a href="#_ftnref24" name="_ftn24" title="">[24]</a> Bruno Bosteels, “Translator’s Introduction” in Alain Badiou, <em>Theory of the Subject</em> (Continuum, 2009), p.xxiii. </p>
</div>
</div>
<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160,'/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60+%22%EB%B8%8C%EB%A3%A8%EB%85%B8%20%EB%B3%B4%EC%8A%A4%ED%8B%B8%EC%8A%A4%2C%20%22%EC%A0%95%EC%B9%98%EC%99%80%20%EC%A3%BC%EC%B2%B4%EC%84%B1%EC%97%90%20%EA%B4%80%ED%95%9C%20%EC%8A%A4%EB%AC%B4%EA%B0%80%EC%A7%80%20%ED%85%8C%EC%A0%9C%22%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60&t=%EB%B8%8C%EB%A3%A8%EB%85%B8%20%EB%B3%B4%EC%8A%A4%ED%8B%B8%EC%8A%A4%2C%20%22%EC%A0%95%EC%B9%98%EC%99%80%20%EC%A3%BC%EC%B2%B4%EC%84%B1%EC%97%90%20%EA%B4%80%ED%95%9C%20%EC%8A%A4%EB%AC%B4%EA%B0%80%EC%A7%80%20%ED%85%8C%EC%A0%9C%22"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60&title=%EB%B8%8C%EB%A3%A8%EB%85%B8%20%EB%B3%B4%EC%8A%A4%ED%8B%B8%EC%8A%A4%2C%20%22%EC%A0%95%EC%B9%98%EC%99%80%20%EC%A3%BC%EC%B2%B4%EC%84%B1%EC%97%90%20%EA%B4%80%ED%95%9C%20%EC%8A%A4%EB%AC%B4%EA%B0%80%EC%A7%80%20%ED%85%8C%EC%A0%9C%22','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160?commentInput=true#entry160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 순수증여의 존재론
캐즘
http://blog.jinbo.net/chasm/159
2019-01-21T16:12:18+09:00
2019-01-21T16:01:17+09:00
<p> </p>
<p><b>* </b><진보평론> 2014년 여름호(통권 60호) "고전 다시읽기" 코너에 실린 글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과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비교한 주제 서평입니다. </p>
<p> </p>
<p> </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 순수증여의 존재론</strong></p>
<p> </p>
<p> </p>
<p><strong>들어가며: </strong><strong>선물교환과 </strong><strong>순수증여, </strong><strong>사회와 </strong><strong>정치적인 </strong><strong>것</strong></p>
<p> </p>
<p>자신을 탄생시킨 분과학문의 영역을 넘어 다양한 인접 학문과 실천 영역에서 끊임없이 다시 읽히는 행운을 누리는 텍스트들이 있다.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행운을 누려온 텍스트들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인류학 현지조사들을 참조하여 쓰여진 이 책은, 이후 인류학 연구자들뿐 아니라 사회학·철학·문학·문화연구 일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실천 영역에서 시장경제를 문제시하고 넘어서고자 시도해 온 많은 활동가들에게도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이는 아마도 이 텍스트가 근대사회과학이 직면했던 근본적인 이론적·실천적 질문, 즉 “사회(연대)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답변을 내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뒤르켐의 조카이자 공동 연구자로도 잘 알려진 마르셀 모스는, 이 책에서 시장논리를 넘어선 사회와 사회연대의 토대로 “선물교환”과 그것의 “상호성(호혜성, reciprocity)”을 제시했으며, 이후 이러한 모스의 주장은 시장중심주의와 공리주의를 문제시하는데 있어 반드시 참조해야 할 하나의 출발점으로 자리잡았다. </p>
<p> </p>
<p>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모스의 <증여론>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 번 부흥하고 있는 것 역시, 신자유주의의 지배로 표현되는 시장경제의 확장과 사회연대의 해체,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과 대안모색 노력의 증가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a href="http://blog.jinbo.net/chasm/159#_ftn1" name="_ftnref1" title="">[1]</a> 특히 최근 한국사회에서 시장경제의 대안을 자임하며 제기되고 있는 “사회적 경제”, “연대경제”, “호혜경제”와 같은 실천적 기획들에서, 모스의 <증여론>의 영향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모스 연구자들이 불만을 표하듯이, 이들 기획들이 종종 “선물경제=선(善)”이라는 피상적인 모스 독해에 기반해 시장에 대한 도덕적 대안제시에 과도하게 기대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이러한 우려를 넘어 실천적 운동을 배경으로 진지한 이론적 탐색을 전개하는 작업 역시 하나 둘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종합적으로 이 운동들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는 연구로는,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전작 <트랜스크리틱> 등을 통해 협동조합 운동과 상호적 증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본인 스스로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을 주도하기도 했던 가라타니는, 최근 출판된 이 방대한 저서에서 다시 한 번 증여의 논리를 통해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p>
<p> </p>
<p>모스의 <증여론>(1925)과 가라타니의 <세계사의 구조>(2010)는 85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환”의 차원에서 사회구성의 문제를 접근하고, 이 교환과정에서 등장하는 “도덕”이 현대 사회에 가지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의 유사함이 눈에 띈다. 동시에 두 저작 모두 기존의 인류학적 연구들을 방대하게 참조하면서, 인류역사의 흐름을 자신의 틀 속에서 재서술하겠다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야심 역시 공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의 결론 부분에서 “증여”의 문제의식에 기반해 매우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책은 공통점을 가진다. 물론 이러한 유사성과 함께, 두 텍스트는 흥미로운 차이점 역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증여론>이 20세기 초 시장과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사회”와 “사회보험”의 영역을 선물과 증여의 이름으로 마름질하려는 시도였다면, <세계사의 구조>는 이미 모스의 이상이 부분적으로 현실화된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결합—즉 서구에서의 “사회-국가”와 그 밖의 지역에서 국가사회주의 및 발전주의 국가형태—가 위기에 봉착한 현실 속에서 시작한다. 즉, 가라타니의 논의는 단순히 모스의 <증여론>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을 역사화하고 오늘날 변화된 조건 속에서 “반복하면서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려는” 시도로 읽혀야 할 것이다. </p>
<p> </p>
<p>이 글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두 책의 공통점 및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 두 흥미로운 텍스트들을 비교․검토해보고자 한다. 다만 이들 저작들이 다루는 영역이 방대하고 그 기획이 야심 찬 만큼, 이 저작들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해설은 이 짧은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행히도 두 저작들에 대해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충실한 해설들이 이미 제출되어 있기에,<a href="#_ftn2" name="_ftnref2" title="">[2]</a> 여기서는 기존의 논의들을 반복하기보다는 조금 새로운 관점과 개념을 활용해 이 두 텍스트들을 절단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상술하자면, 이 글은 이들이 증여와 그 상호성에 기반한 “사회”의 구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한편, 동시에 이들이 선물교환의 상호성을 넘어서는 어떤 단절적 지점으로서 “순수 증여/선물”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에 기반해 이들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한계를 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p>
<p> </p>
<p>이같이 “선물교환-사회”의 연결쌍에 대비해 “순수증여”를 “정치적인 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일종의 발견론적 아이디어라 할 수 있지만, 완전히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뒤에 좀 더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일반적인 “선물증여”가 증여자와 수증자 간 상호성과 상호 인정에 기반해 있다면, 순수 증여/선물은 이러한 보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증여”, 즉 상호성을 벗어난 형태의 선물증여를 의미한다. 인류학 및 철학에서 이 “순수증여” 개념이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때로는 이에 대한 입장 차가 학문적․정치적 지향을 나누는 바로미터로 기능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순수증여”의 존재 여부는 선물순환 및 사회의 구성과 관련해 중요한 물음을 야기한다. 즉, 앞으로 살펴볼 모스의 주장처럼 사회라는 것이 일정한 도덕적 규칙과 순환경로에 기반한 상호적 증여와 인정의 산물이라면, 결국 이러한 상호성을 전제하지 않는 “최초의” 증여는 어떻게 가능한지, 혹은 기존 사회의 경계를 벗어나면서 새로운 사회의 경계를 설정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지라는 질문이 “순수증여”의 개념을 둘러싸고 제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a href="#_ftn3" name="_ftnref3" title="">[3]</a> 이러한 관점에서 모스와 가라타니가 이 “순수증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들 저작의 “정치적” 지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p>
<p> </p>
<p> </p>
<p><strong><</strong><strong>증여론>: </strong><strong>신성한 </strong><strong>사회와 </strong><strong>순수증여의 </strong><strong>불가능성 </strong></p>
<p> </p>
<p>모스는 <증여론>의 서두에서, 선물을 주제로 한 북유럽의 서사시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역설을 제기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이 역설이란, “선물은 이론상으로는 자발적이지만, 실제로는 의무적으로 주어지거나 답례된다”(47)는 것이다.<a href="#_ftn4" name="_ftnref4" title="">[4]</a> 다시 말해, 현실에서 선물증여는 “겉으로는 자유롭고 무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이며 타산적인”(47) 방식으로 행해진다. 이러한 선물의 역설은 <증여론> 전체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면서 반복된다. 예컨대, 우리는 이 자유와 의무, 자발성과 강제 간의 역설이, 선물-증여에 내재한 불확실성과 그 답례에 대한 믿음 간의 역설로 변형되어 <증여론> 곳곳에서 재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모스가 책의 말미에 이야기하듯이, 오직 친구 아니면 적이 있을 뿐 “중간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 고대사회에서, 선물-증여는 보답의 불확실성 앞에 창을 내려놓고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도약이라 할 수 있다: “교역을 개시하려면 먼저 창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되었다.”(281)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스의 선물론에서 이러한 불확실성은 빠르게 억압되고, 그의 논의 전반에 걸쳐 “선물은 그것이 답례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순환하는”(136) 것으로 묘사된다.</p>
<p> </p>
<p>모스의 논의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은, 그가 선물에 내재한 이 역설들—즉 자발성과 의무 간의 역설 혹은 증여의 불확실성과 답례의 확실성 간의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 ‘하우hau’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이다. 아마도 인류학 역사상 가장 많이 논의되고 인용되었을 단락을 예비하면서, 모스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선물을 받았을 경우, 의무적으로 답례를 하게 하는 법이나 이해관계의 규칙은 무엇인가? 받은 물건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수증자는 답례를 하는 것인가?”(48) 모스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 마오리족 현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데, 이에 따르면 선물이 순환하여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선물에 달라붙어 순환하는 영적인 에너지 ‘하우’ 때문이다:</p>
<p> </p>
<blockquote>
<p style="margin-left:.5in;">“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특정한 물품(타옹가)를 갖고 있어 그것을 나에게 준다고 가정합시다... 내가 이 물품을 제3자에게 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 그는 나에게 대가로서 무엇인가를 주려고 마음먹고 나에게 무엇인가(타옹가)를 선물합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주는 이 ‘타옹가’는 내가 당신한테서 받았으며 또 내가 그에게 넘겨준 ‘타옹가’의 영(하우)입니다. 나는 (당신한테서 온) ‘타옹가’ 때문에 내가 받은 ‘타옹가’를 당신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신이 나에게 준 타옹가의 ‘하우’ 때문입니다.”(66-67)</p>
</blockquote>
<p> </p>
<p>즉, 하우는 증여되어 순환되는 물품(타옹가)에 포함된 증여자의 ‘영혼’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증여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일부인 이 영혼을 함께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물품에 달라붙은 영혼으로 인해, 수증자는 이를 영혼의 원주인에게 상환해야 할 의무를 진다. “요컨대 하우는 그 탄생지, 숲과 씨족의 성소 그리고 그 소유자에게 돌아오려고 한다.”(70)</p>
<p> </p>
<p>모스는 이렇듯 신비스런 언어로 제시된 하우를, 선물의 교환을 보장하면서 이를 순환시키는 일종의 “사회적” 혹은 “도덕적” 힘으로 해석한다. 즉, 이 하우의 힘에 기반해 선물 교환은 주는 자와 받는 자 간에 “선물을 줄 의무, 받을 의무, 답례해야 할 의무”라는 연쇄적인 도덕적 관계를 탄생시킨다.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증여자의 영혼의 일부로 상상되는 이 하우를 통해, 선물을 주는 이와 받는 이 간의 상호인정과 연합이라는 도덕적 규범이 개인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무를 어기는 것, 즉 선물을 주거나 받기를 거부하거나 답례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선언, 즉 “결연과 교제를 거부”하고, “전쟁을 선언하는 행위”로 간주된다(74).</p>
<p> </p>
<p>모스는 더 나아가 이러한 수평적이고 내재적인 선물교환의 연쇄와 그것에 수반되는 상호적/호혜적인 도덕적 관계 맺음을 “우리 사회가 세워져 있는 인간반석의 하나”(49)로 제시한다. 메리 더글라스가 <증여론> 영어판 서문에서 압축적으로 제시하듯이, 모스에게는 “순환하는 선물체제 자체가 사회”이며, 상호 간의 “연대를 강화하지 못하는 증여는 하나의 모순”인 것이다.<a href="#_ftn5" name="_ftnref5" title="">[5]</a> 이 때 이 선물의 연쇄사슬 속에서 증여 혹은 대항-증여되는 것은, 단순히 물품뿐 아니라 “음식물, 여자, 아이, 재산, 호부, 토지, 노동, 봉사, 종교적인 봉헌, 위계”(76), 더 나아가 춤이나 노래 같은 무형적․상징적 재화까지 다양하며,<a href="#_ftn6" name="_ftnref6" title="">[6]</a>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상호증여와 상호인정들이 결합되면서 촘촘한 사회적 유대와 연대가 탄생하게 된다.</p>
<p> </p>
<p>논의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모스가 “가장 명확하고 완전하고 의식적인 증여-교환의 관행”(114)이라 칭한 쿨라(kula) 의례를 통해 이 내재적인 사회 탄생의 과정을 잠시 들여다 보자.<a href="#_ftn7" name="_ftnref7" title="">[7]</a> 서태평양 트로브리안드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선물교환인 쿨라 시스템은, 일종의 사치품이 특정한 방향을 따라 순환하면서 독립된 섬들 간에 동맹관계를 탄생시킨다. 이 때 ‘음왈리(mwali)’라 불리는 조개 껍질 팔찌는 시계 방향으로, ‘술라바(soulava)’라 불리는 목걸이는 반시계 방향으로 섬들 사이를 순환하면서 증여된다. “원칙적으로 이 부의 상징물들의 순환은 끊임없으면서도 정확하게 행해진다. 그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간직해도 안되며, 그것들을 넘겨주는 데 느려서도 안 되고 인색해서도 안된다.”(105) 이렇게 두 물품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데, 이 교환 과정은 이중적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선물 증여를 통해 선물을 준 자와 받는 자 간의 일시적 채무 관계가 형성되고, 선물을 준 자의 명예가 높아지게 될 것이다. 이 때 선물을 받은 자가 선물을 제 때 제대로 된 방법으로 답례하지 않으면, 받은 측에서는 체면을 잃을 뿐 아니라 심할 경우 노예의 위치로 전락할 수 있다.<a href="#_ftn8" name="_ftnref8" title="">[8]</a> 그러나 다른 한편, 선물을 받은 측에서 대항-증여로 기존의 채무를 청산하고 새로운 선물-채무 관계를 반복적으로 생산하면서, 선물을 준 집단과 받는 집단 간의 일종의 사회 계약이 탄생하고 연속된 사슬처럼 보조적인 선물의 증여 및 답례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115).</p>
<p> </p>
<p><증여론>에서 모스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선물교환과 상호인정을 통해 사회적 유대를 창출하는 관습이, 고대 사회는 물론 현대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2장에서 그는 멜라네시아의 쿨라 의례와 북서부 아메리카 콰키우틀 족의 포틀래치 의례 등을 통해 이러한 선물교환의 원형적 논리를 확인하며, 3장에서는 이러한 증여의 체계가 어떻게 로마법, 힌두법, 게르만법 등 고대 법체계 속에서 여전히 지속되었는지를 조명한다. 마지막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 그는 “우리의 도덕과 생활 자체의 상당한 부분은 언제나 의무와 자발성이 혼합된 증여의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다”(249)고 주장하면서, 당대의 사회보험제도가 어떻게 증여의 정신에 기반하며, 이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a href="#_ftn9" name="_ftnref9" title="">[9]</a></p>
<p> </p>
<p>이러한 논의를 통해 모스는 “증여의 정신”에 기반해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사회적 연대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기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모스의 논의에 있어서 “사회”가 가지는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위상이다. 모스는 불확실한 선물 증여와 확실한 답례의 역설을 극복하고 선물을 순환시키는 동력을 설명하기 위해 “하우”라는 “사회적” 힘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해결책은 역설을 해결하기보다는 선물교환과 사회의 상호전제라는 좀 더 근본적인 형태로 역설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메리 더글라스가 지적하듯이, 모스에게서 선물교환과 그 상호성은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는 “사회의 가능성의 조건”이다.<a href="#_ftn10" name="_ftnref10" title="">[10]</a> 그러나 동시에 모스의 분석에서, “선물이 목적지 혹은 수신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언제나-이미”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를 가능케 하는 기반을 탐색하겠다던 모스의 논의에서, 정작 사회는 선물-증여의 불확실성과 순환의 확실성 간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선험적인 전제로서 소환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의 논의에서 선물교환과 이로 인해 탄생하는 사회는 어떤 물신화된 대상으로, “문제시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p>
<p> </p>
<p>실제 “선물교환”과 사회에 대한 이러한 모스의 관점은 자신의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증여론>의 결론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모스는 확산되고 있는 공리주의나 시장주의에 맞서, 고대사회의 선물증여 정신을 되살릴 것을 촉구하면서 증여의 정신에 기반한 사회연대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삼촌이자 “연대주의”의 주창자인 뒤르켐을 따라, 사회보험, 상호부조조직, 협동조합, 직업단체, 공제조합 등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이들의 성장을 우리 사회가 다시 한 번 “집단도덕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한다(255). 이 과정에서 모스는 “사회”와 “직업집단”을 신의 자리로까지 끌어올리는데, 결론부에서 알라의 힘에 대한 코란의 경구들을 길게 인용한 후 모스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알라라는 말을 사회와 직업단체라는 말로 대체해보라. 혹시 당신에게 신앙심이 있다면, 이 세 단어를 합해 보라… 그러면 지금 등장하고 있는 경제체제에 대해 선명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273)<a href="#_ftn11" name="_ftnref11" title="">[11]</a> 이러한 일종의 사회신학을 통해 모스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회조직의 원리는, 형제애(fraternity)에 기반한 사회연대 혹은 네이션의 구성일 것이다. <증여론>의 마지막에서 그는 모두가 평등한 상태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아더왕의 원탁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는 사회와 구성원 그리고 개인들이 주고, 받고, 되돌려주는 안정된 관계를 이룰 때 진보한다. 선과 행복은 평화와 잘 조직된 노동과 부의 축적과 재분배, 상호 존경과 관대함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282) 모스에게 있어, 이 “상호성의 도덕”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가장 진화한 사회에도, 가까운 장래의 사회에도, 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미개한 사회에도 공통된 것이다”(258). </p>
<p> </p>
<p>그러나 이러한 모스의 주장에 “선물은 반드시 답례되는가” 혹은 “선물은 항상 수신자에 도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모스 이후의 많은 이들이 상호성이 전제되지 않은 증여 관계, 즉 주기는 하되 되돌려 받지 않거나 특정한 수신자 없이 제공되는 “순수증여”의 개념을 통해 모스의 사회이론을 문제화하려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증여론>에서 모스 본인은, 일관되게 “순수증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단호히 그 가능성을 일축한다. 모스는 부부 간의 증여를 순수증여로 파악한 말리노프스키를 비판하면서, 순수증여의 형태로 등장하는 모든 증여들이 실제로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완전히 탈이해관계적인 것이 아님”(265)을 역설한다. 따라서 메리 더글라스가 <증여론> 영어판 서문에 붙인 제목처럼, “공짜선물은 없다.” 순수증여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용어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스의 입장은 끝없는 상호적 도덕과 의무의 연쇄로 결합되어 있는 사회상을 가정하며, 이 사회의 구성을 문제화하는 정치적 공간을 상정할 수 없도록 만든다. 여기에서 사회연대는 사회에 내재한 화해불가능한 적대와 관련되기보다는 자발적인 상호부조집단들의 수평적 연대로 축소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증여론>의 마지막 문장은 모스 본인이 생각하는 정치의 정의를 담고 있지만, 이 때 정치는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 사고되기보다는 사회의 “관리” 혹은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정치로 환원되고 만다: “다양한 동기와 요인들의 합이 사회의 기초를 이루며 공동생활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동기와 요인들의 의식적인 관리가 최고의 기술, 즉 그 말의 소크라테스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이다.”(283)</p>
<p> </p>
<p>모스 이후 <증여론>의 논의에 기반하면서 동시에 상호성을 넘어선 “순수증여”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나간 철학적·인류학적 논의들을 상세하게 검토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a href="#_ftn12" name="_ftnref12" title="">[12]</a> 다만 여기서는 이러한 시도들이 공통적으로 모스의 사회관념과 선물론이 가질 수 있는 “폐쇄성”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순환 자체를 위협하고 단절시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 선물순환의 근본적 가능성을 조건 짓는 것의 이름으로 “순수증여”를 사유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크게 보자면, 모스의 선물교환과 사회에 대한 분석을 자본=네이션=스테이트로 이루어진 사회구성체의 한축에 대한 논의로 한정하고 이를 넘어서는 순수증여의 차원으로 교환양식 X를 제시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는, 모스 식의 폐쇄적 사회신학을 극복하려는 가장 최신의 시도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p>
<p> </p>
<p> </p>
<p><strong><</strong><strong>세계사의 </strong><strong>구조>: </strong><strong>세계공화국과 </strong><strong>순수증여의 </strong><strong>정치학</strong></p>
<p> </p>
<p>가라타니 고진이 <세계사의 구조>에서 전개하고 있는 작업은, 오늘날 변화된 현실 속에서 <증여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라타니 본인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세계사의 구조>는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교환양식’에서 다시 보려는 시도이다”(5). 그에 따르면, 경제적 하부구조를 생산양식으로 접근할 경우, 자본제 이전 사회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에서의 화폐와 신용 등의 문제를 설명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35). 이 같은 문제의식이 선물교환과 그것이 생산하는 신용-부채 관계에 오랫동안 주목해 온 모스주의 인류학의 문제의식과 깊게 공명하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가라타니의 작업은, 국가와 시장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사회연대와 사회보험의 확립을 자신의 정치적 대안으로 삼았던 모스와는 달리, 이러한 사회보험의 확립과 위기 “이후”를 배경으로 삼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가라타니는 도덕적 형제애에 기반한 네이션의 구성이라는 모스의 대안에 동의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한 축으로 파악하고,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에 기반해 이들 전체를 넘어서기 위한 자신만의 기획을 제시한다.</p>
<p> </p>
<p>이를 위해 가라타니는 우선 네 가지 상이한 형태의 교환양식을 구분하고, 이들을 경제적 하부구조로 재설정한다. 이 네 가지 구분되는 교환양식은, 선물의 증여-답례라는 호수성/상호성에 기반한 교환양식 A, 폭력에 의한 약탈 및 재분배를 의미하는 교환양식 B, 상호간의 합의에 근거한 상품교환을 의미하는 교환양식 C,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동시에 상호적인, “교환양식 A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는 “순수증여”로서의 교환양식 D 혹은 교환양식 X이다. 이 때 경제적 하부구조로서 교환양식 A, B, C는 각각의 역사적 상부구조를 가진다. 교환양식 A가 상호성이 지배하는 공동체, B는 과세와 재분배를 통해 존재해온 국가, C는 화폐경제로 구성되는 시장의 토대를 이루는데, 가라타니의 핵심 주장은 역사적으로 이들이 서로 긴밀히 맞물려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구성해왔으며, 특히 오늘날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고한 시스템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들과는 상이한 교환원리에 기반한 교환양식 D의 확장이 필수적이다. </p>
<p> </p>
<p>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교환양식 D”가 일종의 순수증여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라타니는 구체적 실체를 가진 다른 교환양식들과는 달리, 교환양식 D는 확고하게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39)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규제적 이념 혹은 초월론적 가상 같은 것으로, 하나의 지향점일 뿐 현실적인 제도로서 존재하지는 않으며, 역사적으로도 보편종교나 공산주의, 어소시에이셔니즘과 같은 유토피아적 이념이나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해왔다(198). 충분히 이해가능하게도, 가라타니는 이러한 교환양식 D를 교환양식 A와 구별하는데 공을 들인다. 그는 완전한 “공동기탁”의 유동민 사회에서 “상호적 선물교환”에 기반한 씨족사회로의 이행을 가져온 “정주혁명”을 강조하면서, 교환양식 A도 그 이전에 존재했던 “유동민의 코뮤니즘”을 “억압”한 결과로 수립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교환양식 D는 이러한 교환양식 A를 다시 한 번 “부정”함으로써 등장하는데, 이에 따라 이것은 교환양식 A에서 억압된 것의 귀환, 즉 유동민의 “공동기탁적” 삶의 방식이 이중으로 회귀하는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221). 이것은 모스의 선물교환에 관한 논의가 순수증여를 부정하고 있다는 앞서의 논의를 상기할 때 매우 날카로운 지적으로, 가라타니는 교환양식 D의 회귀를 네이션으로 손쉽게 회수되어버리는 “노스탤지어에 기반한” 선물경제(교환양식 A)의 회귀와 구분되는, 선물경제에서도 원초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것의 “무의식적 반복”으로 묘사한다 (215).</p>
<p> </p>
<p> </p>
<p><표 1><a href="#_ftn13" name="_ftnref13" title="">[13]</a></p>
<table border="1" cellpadding="0" cellspacing="0">
<tbody>
<tr>
<td style="width:222px;">
<p>교환양식 B.</p>
<p>약탈과 재분배 (지배와 보호)</p>
<p>국가</p>
<p>세계=제국</p>
</td>
<td style="width:222px;">
<p>교환양식 A.</p>
<p>호수 (증여와 답례)</p>
<p>네이션</p>
<p>미니세계시스템</p>
</td>
</tr>
<tr>
<td style="width:222px;">
<p>교환양식 C.</p>
<p>상품교환 (화폐와 상품)</p>
<p>자본</p>
<p>세계=경제(근대세계시스템)</p>
</td>
<td style="width:222px;">
<p>교환양식 D.</p>
<p>X (순수증여)</p>
<p>어소시에이셔니즘</p>
<p>세계공화국</p>
</td>
</tr>
</tbody>
</table>
<p> </p>
<p> </p>
<p>이어서 가라타니는 인류역사에서 이들 교환양식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상호 결합했으며, 그 결합형태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추적한다. 책의 1부에서 서술되는 미니세계시스템이 호수원리에 기반한 교환양식 A의 헤게모니 하에 다른 교환양식들이 접합된 형태라면, 2부에서 다루는 세계=제국은 국가중심의 교환양식 B, 3부의 근대세계시스템은 시장경제인 교환양식 C가 중심이 되는 사회구성체라 할 수 있다. 가라타니는 이들 상이한 세계시스템 간의 이행의 계기들로, 미니세계시스템을 낳은 정주혁명, 세계=제국으로의 이행의 근간이 된 국가사회의 형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근대세계시스템을 탄생시킨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을 각각 제시한다.</p>
<p> </p>
<p>이렇듯 교환양식 간 헤게모니의 교체로 세계사의 전체구조를 파악하는 가라타니의 도식적인 논의는, 마지막 4부에서 교환양식 D가 중심이 되는 사회시스템으로서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가라타니는 이 교환양식 D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형태이자 이행의 계기로 두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데, 하나가 아래로부터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서고자 하는 어소시에이션 운동이라면, 다른 하나는 UN에로의 증여를 통해 군사주권을 방기하는 평화-반전운동이다. 전자는 <트랜스크리틱>(2001)에서, 후자는 보다 최근의 <세계공화국으로>(2006)에서 제기된 아이디어인데, <세계사의 구조>에서 이들은 교환양식 D, 즉 고차원적인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을 되살리는 두 흐름으로 종합되고 있다.</p>
<p> </p>
<p>가라타니에 따르면, 이 두 운동은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가라타니는 자본주의 하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해왔으나 맑스주의에서는 주변화되었던 협동조합 어소시에이션 운동을 재평가한다. 그는 선물교환의 상호성에 기반한 소비자=생산협동조합, 보이콧 운동 및 지역통화․신용시스템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자본제 내부에서 자본과 투쟁하는” 노동조합과는 달리 이러한 윤리적 협동조합 운동들은 국가와 “자본제 바깥으로 나가려는”(350) 시도임을 역설한다. 비록 여기서 가라타니의 초점은 형제애에 기반한 네이션의 구축이 아니라 이를 넘어선 사회시스템의 추구라 할지라도, 이러한 그의 정치적 대안은 각종 공제조합과 상호부조조직들을 높이 평가했던 모스의 입장과 실천적으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p>
<p> </p>
<p>그런데 이러한 아래로부터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지양하고자 하는 시도에 덧붙여, 가라타니는 두 번째 차원의 “증여”를 덧붙인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국가는 항상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에, 기존의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결합을 넘어서는 운동은 일국적 차원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 러시아 혁명 등의 예에서 보듯이, 일국적 실천은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다른 국가들의 즉각적인 개입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로부터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서려는 어소시에이션 운동은, 위로부터의 주권의 방기, 즉 국가 간 시스템의 약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가라타니는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각국이 자신들의 군사적 주권을 유엔에 “증여”하는 “세계혁명”을 제안한다. “어떤 무력도 증여의 힘에 대항할 수 없기에”, 이러한 주권의 방기는 국가간 증여의 호수성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시스템”, 즉 세계공화국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430). 요컨대,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면서도 네이션에 포획되지 않는 어소시에이션 운동과 국가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주권의 증여가 교환양식 D에 기반한 두 가지 운동형태로 제안되는 것이다.</p>
<p> </p>
<p>가라타니의 이러한 과감한 제안은 이미 다양한 논의들을 낳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논쟁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a href="#_ftn14" name="_ftnref14" title="">[14]</a> 여기서는 <세계사의 구조> 논의 전반보다는, “순수증여”의 위상과 관련하여 가라타니의 논의가 가질 수 있는 문제점만을 짤막하게 검토해보고자 한다. 아마도 <세계사의 구조>가 <증여론>보다 결정적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을 꼽자면, 순수증여를 부정한 채 선물교환의 논리에 주목한 모스의 정치적 대안이 사실상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보로미안 링의 한 고리로 기능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을 되살려 교환양식 D를 구체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세계사의 구조> 이전에도 가라타니는 교환양식 X를 종종 암시한 바 있으나, 이는 오사와 마사치가 지적하듯이 주로 실정적 내용을 결여한 “부정적인” 방식으로, 즉 “교환양식 A도, B도, C도 아닌 어떤 것”으로 제시되곤 했다.<a href="#_ftn15" name="_ftnref15" title="">[15]</a> 그러나 <세계사의 구조>에서 가라타니는 이러한 순수증여의 차원을 구체적 프로그램들로 실정화 혹은 실체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입장변화는 그가 각종 대담에서 여러 차례 밝혔던 문제의식—즉 사회주의의 해체 이후 탈구축의 부정적인 움직임을 넘어 구체적이고 실정적인 대안을 제시할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 발전시킨 결과물일 것이다.<a href="#_ftn16" name="_ftnref16" title="">[16]</a> 물론 노학자의 이러한 이론적 전회는 충분히 이해가능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의 “부정성”으로 존재했던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이, 독립적인 교환양식이자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실체화”될 때 야기되는 문제들은 없는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p>
<p> </p>
<p>먼저 이 순수증여의 실체화 결과 무대 뒤로 물러나 비가시화되는 것은, 각 교환들에 내재한 모순과 “부정적 계기들”일 것이다. 물론 가라타니는 선물교환, 수탈 및 재분배, 시장교환 각각의 내부에 이를 위협하는 부정적 계기들이 존재하며, 이 계기들이 교환과정을 교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분석틀에서 이러한 각 교환양식들의 한계와 모순은 다른 교환양식들에 의해 보충됨으로써 해소된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교환의 한계로서 노동력의 (재)생산 문제는, 국가와 사회의 개입을 통해 보충되는 것이다 (pp.291-296). 이러한 설명은 한 사회구성체 내 각종 심급들의 능동적 상호작용을 조명하는 장점을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각 교환영역 내 모순들의 “과잉결정”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하는 형식주의적 사유에 빠질 위험을 가진다. 특히 이러한 위험은 “교환양식 X”가 실체화되어 이 운동과 기존 교환양식들 간의 관계가 일종의 “외재적인” 대립항처럼 제시될 때 더 커진다고 말할 수 있다. </p>
<p> </p>
<p>또한 반대로 이 실체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연대 형태들에 대한 다소 성급한 과대평가이다. 이는 가라타니가 교환양식 D의 실현 방안으로 제시하는 어소시에이션 운동과 유엔의 결합이, 실제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서는 대안적 위상을 가질 수 있느냐라는 질문과 연결될 것이다. 사실 시장=네이션=스테이트의 결합관계로 (근대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추적하는 것은, 가라타니 본인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고유한 문제의식은 아니다. 오히려 푸코가 지적하듯이, 내재적 시장과 초월적 국가 간의 사이 공간에 이들을 연결시키는 매개들과 장치들을 설치하고 작동시키려는 시도는, 언제나 자유주의적 통치기획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었다.<a href="#_ftn17" name="_ftnref17" title="">[17]</a> 흔히 “사회” 혹은 “네이션”이라 불리어 온 이 같은 매개 공간의 통치는, 각각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연대(뒤르켐, 모스), 헤게모니(그람시), 운동(슈미트) 같은 경쟁적 대안들을 낳았으며, 몇 차례의 위기를 거쳐 전후 유럽에서의 사회-국가, 그 밖의 지역에서의 국가사회주의 및 발전주의 국가형태로 안정화되었다. 문제는 오늘날 한 때 안정적이었던 일국 내에서의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결합이 해체되면서, 이러한 국가적 차원에 “미치지 못하는” 공동체들과 그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가적 연대 형태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들이 보여주듯이, 이 새로운 공동체들과 초국가기구들은 가능성의 공간만은 아니며, 오히려 더 촘촘히 지역화되고 세계화된 시장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면서, “국가 혹은 사회 없는 통치”라는 새로운 통치형태를 실험하고 생산해내는 장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해체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지역 커뮤니티와 국제연대를 “순수증여”의 실험장으로 “실체화”하는 가라타니의 논의는 지나치게 일면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낳는다. </p>
<p> </p>
<p><세계사의 구조>의 출간 이후 가진 대담에서, 가라타니는 오늘날 어소시에이셔니즘에 기반한 세계혁명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는 “모든 국가를 뛰어넘은 인터내셔널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동시혁명의 조건은 이미 충족된 상태”라고 주장하는가 하면,<a href="#_ftn18" name="_ftnref18" title="">[18]</a> UN 개혁을 통한 세계동시혁명의 기대감을 피력한다: “유엔 안에 전혀 어소시에이션 같지 않은 두 개의 조직이 있습니다…. 안전보장이사회와 국제통화기금을 어소시에이션 같은 조직으로 만들 수 있다면, 국가와 자본은 지양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엔의 개혁은 ‘세계동시혁명’입니다.”<a href="#_ftn19" name="_ftnref19" title="">[19]</a> 비록 글보다는 다소 느슨할 수밖에 없는 대담에서 제기된 주장이라 할지라도, 가라타니의 이러한 주장들은 그가 새로운 국제적 현실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과거 일국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삼위일체를 폭로하는 것만큼의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가 기존 시스템의 해체로 열리게 된 공간을 성급히 체제의 “외부”로 번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이러한 문제의 부분적 원인이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순수증여”의 부정성을 하나의 실정적 정치프로그램으로 성급히 실체화하려는 시도와 무관하지 않음은 다시 한 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p>
<p> </p>
<p> </p>
<p><strong>나가며: </strong><strong>순수증여의 </strong><strong>정치학을 </strong><strong>위하여</strong></p>
<p> </p>
<p>이 글은 선물교환을 사회의 토대로 보는 입장에 기반해 “순수증여”를 이 선물교환에 “내재하는 외부”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이름으로 파악하고, 이 같은 틀을 통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과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에서 선물과 순수증여, 사회와 정치가 각각 어떻게 사고되는지 살펴보았다. 선물이 평등한 개인들 간의 상호적 인정과 유대 관계를 생산한다면, 순수증여란 (최초의 증여는 항상 답례를 확신할 수 없는 증여이기에) 상호적인 사회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기반인 동시에, (기존의 상호성을 벗어나는 새로운 인정관계를 도입하기에)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완결을 방해하는, 사회 혹은 선물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 사고될 수 있다. 모스와 가라타니는 증여와 교환양식에 기반해 사회의 구성원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각자 상이한 이유로 이 순수증여의 논리, 즉 “정치적인 것”의 논리를 조명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모스는 선물교환이 어떻게 내재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하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만, 국가주의와 시장주의 양자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연대”라는 그의 정치적 프로그램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순수증여의 문제의식을 처음부터 자신의 논의에서 배제하도록 만든다. 가라타니는 모스의 선물론과 사회적 연대론이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등식 속으로 흡수될 수 있는 위험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대안으로서 “순수증여”를 성급히 독립적 교환양식으로 “실체화”하면서, 현대사회의 변화에 대한 탈정치적 분석으로 귀결되고 만다.<a href="#_ftn20" name="_ftnref20" title="">[20]</a></p>
<p> </p>
<p>물론 이러한 한계를 이들 저작의 의미 없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 글은 다층적인 함의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읽혀왔으며 앞으로도 읽힐 것이 확실한 한 편의 고전과 앞으로 고전이 될 또 한 편의 저작을, 순수증여와 정치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재검토해 본 실험적 시도일 뿐이다. 또한 증여나 교환양식에 기반해 사회의 구성을 설명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사회적인 것”의 존재양식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중요한 영감을 제공해준다. 예컨대, 우리는 모스와 가라타니의 논의가 가진 의의와 한계를,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사회적경제”, “연대경제”, “호혜경제” 영역을 분석하는데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획들 속에서, 사회는, 연대는, 정치는 각각 어떻게 상상되는가? 이들이 가정하는 선물교환은 모스가 분석한 선물교환이나 가라타니가 제안하는 교환양식 D와 어떤 부분에서 유사하고 어떤 부분에서 상이한가?<a href="#_ftn21" name="_ftnref21" title="">[21]</a></p>
<p> </p>
<p>마지막으로 “순수증여”가 결국 “증여”의 영역과 연루되어 있으며 선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순수증여의 논리를 묻는 질문은 언제나 선물과 교환에 대한 논의를 불가피하게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오늘날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언제나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경유해서만 제기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이런 면에서 <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출발점을 제공해준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불가능해지는 지점, 사회가 적대로 분열되는 지점, 즉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을 사유하기 위한 반복적 시도 속에서, 더 나은 실패를 위해 이 두 저작들로 끊임없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p>
<p> </p>
<p> </p>
<div>
<hr align="left" size="1" width="33%" />
<div id="ftn1">
<p><a href="#_ftnref1" name="_ftn1" title="">[1]</a>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데이비드 그레이버, 서정은 역,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그린비, 2009; Jacques Godbout & Alain Caillé, <em>The World of the Gift</em>,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00; Marcel Hénaff, <em>The Price of Truth: Gift, Money, and Philosophy</em>,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0.</p>
</div>
<div id="ftn2">
<p><a href="#_ftnref2" name="_ftn2" title="">[2]</a> <증여론>에 대한 상세한 해설로는, 모리스 고들리에, 오창현 역, <증여의 수수께끼>, 문학동네, 2011;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6장, 오명석, “선물의 혼과 신화적 상상력”, <한국문화인류학> 43(1), 2010; 박정호,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문화와 사회> 7, 2009를 참고할 것. <세계사의 구조>에 대한 해설로는, 가라타니 본인의 대담집인 가라타니 고진, 최혜수 역,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도서출판b, 2014;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자음과 모음, 2014, 3장 참고. </p>
</div>
<div id="ftn3">
<p><a href="#_ftnref3" name="_ftn3" title="">[3]</a> 이렇게 볼 때, 인류학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순수증여와 관련한 논의는, 오늘날 사회를 결정하는 토대이자 동시에 사회의 궁극적인 완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즉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 최근의 정치철학적 논의를 어느 정도 선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로는, 샹탈 무페, 이보경 역, <정치적인 것의 귀환>, 후마니타스, 2007; Ernesto Laclau, <em>Emacipation(s)</em>, Verso, 1996; Oliver Marchart, <em>Post-Foundational Political Thought</e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7 참고.</p>
</div>
<div id="ftn4">
<p><a href="#_ftnref4" name="_ftn4" title="">[4]</a> 이 글에서 인용되는 문구들과 페이지 표기는 모두 <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의 한글 번역본을 따른다. 마르셀 모스, 이상률 역, <증여론>, 한길사, 2002;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세계사의 구조>, 도서출판b, 2012. 다만 번역은 필요할 경우 다소 수정하였다. </p>
</div>
<div id="ftn5">
<p><a href="#_ftnref5" name="_ftn5" title="">[5]</a> Mary Douglas, “Foreword: No Free Gifts” in Marcel Mauss, <em>The Gift</em>, W. W. Norton, 1990, ix.</p>
</div>
<div id="ftn6">
<p><a href="#_ftnref6" name="_ftn6" title="">[6]</a>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이후 이러한 모스의 논의를 발전시켜, 여성, 재화, 언어의 일반화된 교환을 사회구조의 기반으로 제시한다. Claude Lévi-Strauss, <em>The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em>, Beacon Press, 1969.</p>
</div>
<div id="ftn7">
<p><a href="#_ftnref7" name="_ftn7" title="">[7]</a> 여기서 모스는 트로브리안드 제도에 대한 말리노프스키의 현지연구 자료를 참조하고 있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최협 역,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p>
</div>
<div id="ftn8">
<p><a href="#_ftnref8" name="_ftn8" title="">[8]</a> 여기서 선물의 양가적 속성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것은 선물이지만 받는 입장에서 그것은 언젠가 되갚아야 할 치명적인 ‘빚’이기도 하다. 모스는 선물의 독일어 어원에 기대어, 선물에는 ‘독’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Marcel Mauss, “Gift, Gift” in Alan Schrift ed., <em>The Logic of the Gift</em>, Routledge, 1997.</p>
</div>
<div id="ftn9">
<p><a href="#_ftnref9" name="_ftn9" title="">[9]</a> 모스는 증여의 상호성에 기반해 사회보험제도를 정당화한다. 즉, 오늘날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용주들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이중적 기여를 하고 있다. 따라서 증여의 수혜자 중 하나로서 “공동체의 대표자인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생활보장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253).</p>
</div>
<div id="ftn10">
<p><a href="#_ftnref10" name="_ftn10" title="">[10]</a> Mary Douglas, 앞의 글, xiv.</p>
</div>
<div id="ftn11">
<p><a href="#_ftnref11" name="_ftn11" title="">[11]</a> 이러한 모스의 사회신학적 입장은, 뒤르켐의 영향을 고려했을 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동시에 우리는 복지국가를 뜻하는 프랑스어인 섭리국가(État providence)가 그 자체로 신학적 함의를 담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p>
</div>
<div id="ftn12">
<p><a href="#_ftnref12" name="_ftn12" title="">[12]</a> 예컨대, 수평적 상징교환이 아닌 수직적․일방향적 교환을 강조하며 희생의 문제를 재조명한 고들리에나, “태양은 받는 것 없이 준다”는 테제에 기반해 순수증여와 비상호적 소모, 희생제의를 강조한 바따이유, 모든 사람이 빚진 자가 되는 상태를 예외상태로 규정하고 진정한 예외상태로서의 “구원”의 문제를 사유했던 벤야민, 순수증여의 아포리아를 통해 선물교환의 궁극적인 (불)가능성을 사유하고자 했던 데리다 등은, 이들 사이의 커다란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상호성”과 “순수증여”에 대한 사유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흐름 속에 위치지을 수 있을 것이다.</p>
</div>
<div id="ftn13">
<p><a href="#_ftnref13" name="_ftn13" title="">[13]</a> <세계사의 구조> p.41;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p.11의 표를 토대로 재작성</p>
</div>
<div id="ftn14">
<p><a href="#_ftnref14" name="_ftn14" title="">[14]</a> 예컨대,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에 실린 대담들을 참고할 수 있다.</p>
</div>
<div id="ftn15">
<p><a href="#_ftnref15" name="_ftn15" title="">[15]</a>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p.47. 2000년대 초반에 행해진 아사다 아키라와의 대담에서는 가라타니 고진 본인도 이 교환양식 X를 포지티브한 것으로 사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X를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이것은 히피의 코뮌과 동일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와야 할 어소시에이셔니즘”,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b, p. 235.</p>
</div>
<div id="ftn16">
<p><a href="#_ftnref16" name="_ftn16" title="">[16]</a> 예컨대,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p. 260.</p>
</div>
<div id="ftn17">
<p><a href="#_ftnref17" name="_ftn17" title="">[17]</a> 미셸 푸코, 오트르망 역,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난장, 2011. 특히 12강; 자끄 동즐로, 주형일 역, <사회보장의 발명>, 동문선, 2005 참고.</p>
</div>
<div id="ftn18">
<p><a href="#_ftnref18" name="_ftn18" title="">[18]</a>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p.94</p>
</div>
<div id="ftn19">
<p><a href="#_ftnref19" name="_ftn19" title="">[19]</a> 같은 책, p.34.</p>
</div>
<div id="ftn20">
<p><a href="#_ftnref20" name="_ftn20" title="">[20]</a> 아마도 이렇게 하나의 교환양식으로 실체화되지 않고 여전히 부정적인 계기로 작동하는 순수증여를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존재를 선물로 규정한 하이데거와, 순수증여의 아포리아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남긴 데리다, 상징적 교환의 실패 지점으로서 실재를 사고했던 라캉, 선물의 경로 이탈가능성에 대해 사유했던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 등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에 대한 상세한 검토는 이 글의 영역을 벗어난다. 이러한 사유들에 대한 선물론적 분석의 단초들은, Gerald Moore, <em>Politics of the Gift</e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1; 사토 요시유키, 김상운 역, <권력과 저항>, 난장, 2012에서 발견할 수 있다. </p>
</div>
<div id="ftn21">
<p><a href="#_ftnref21" name="_ftn21" title="">[21]</a> 오늘날 이러한 영역들에서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시장화된 선물교환”에 대한 분석으로는, 이승철, “얼굴의 도덕경제: 선물교환, 인정, 코스모폴리탄 연대”, 2013 문화인류학회 하반기 학술대회 발표문 참고.</p>
</div>
</div>
<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159,'/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9+%22%3C%EC%A6%9D%EC%97%AC%EB%A1%A0%3E%EA%B3%BC%20%3C%EC%84%B8%EA%B3%84%EC%82%AC%EC%9D%98%20%EA%B5%AC%EC%A1%B0%3E%3A%20%EC%88%9C%EC%88%98%EC%A6%9D%EC%97%AC%EC%9D%98%20%EC%A1%B4%EC%9E%AC%EB%A1%A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9&t=%3C%EC%A6%9D%EC%97%AC%EB%A1%A0%3E%EA%B3%BC%20%3C%EC%84%B8%EA%B3%84%EC%82%AC%EC%9D%98%20%EA%B5%AC%EC%A1%B0%3E%3A%20%EC%88%9C%EC%88%98%EC%A6%9D%EC%97%AC%EC%9D%98%20%EC%A1%B4%EC%9E%AC%EB%A1%A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9&title=%3C%EC%A6%9D%EC%97%AC%EB%A1%A0%3E%EA%B3%BC%20%3C%EC%84%B8%EA%B3%84%EC%82%AC%EC%9D%98%20%EA%B5%AC%EC%A1%B0%3E%3A%20%EC%88%9C%EC%88%98%EC%A6%9D%EC%97%AC%EC%9D%98%20%EC%A1%B4%EC%9E%AC%EB%A1%A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159?commentInput=true#entry159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도덕적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캐즘
http://blog.jinbo.net/chasm/158
2019-01-21T16:00:13+09:00
2019-01-21T16:00:13+09:00
<p>* <프레시안> 2014년 3월 13일자에 실린 글로, 다음 두 책에 대한 서평입니다. </p>
<p>- 프랭크 비베, 박종대 역,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세계 50대 기업에 대한 윤리 보고서> (열린책들, 2014)</p>
<p>- 라젠드라 시소디어 & 존 매키, 유지연 역, <돈, 착하게 벌 수는 없는가> (흐름출판, 2014)</p>
<p> </p>
<p>=============</p>
<p><strong>정치의 </strong><strong>언어, </strong><strong>도덕의 </strong><strong>언어</strong></p>
<p>최근 캄보디아와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한국 기업들의 노동탄압 문제를 둘러싼 두 개의 흥미로운 분석을 살펴보면서 논의를 시작해볼까 한다. 하나는 이러한 사태를 한국의 아류제국주의적 속성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보는 박노자의 분석(“아류제국주의국가, 대한민국”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20735.html)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한국기업들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무시 혹은 무지와 연결시킨 <한겨레 21>의 기사(“CSR는 나무심는 것?”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6259.html)이다.</p>
<p> </p>
<p>이 두 분석은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관점에서 동일한 현상을 “문제화”하고 있다. 먼저 박노자의 분석이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 편입된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적 착취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노동간 연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정치경제적 분석틀에 기반해 있다면, <한겨레 21>의 기사는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CSR 의식 부족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며 대안으로 국제표준 준수와 윤리의식 향상을 촉구하는 일종의 “도덕적” 분석틀을 따르고 있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어떠한 접근이 더 타당한가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이 상이한 분석틀이 드러내는 “시차(parallax)”만을 언급해두고자 한다.</p>
<p> </p>
<p>만약 한 시대의 지배적 인식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만 오늘날 독자들에게는 아마도 후자의 도덕적 접근이 좀 더 자명하고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CSR이나 “착한 기업”과 같은 용어가 낯설었던 20년 전이라면 상황이 조금 달랐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오늘날 기업이나 시장에 사회적 책임과 도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기업 본인들이 앞다투어 “사회책임경영”을 비전으로 내세울 만큼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윤리적 소비”, “사회적 경제”, “사회책임투자” 같은 용어들은 정부문서나 학술서적을 넘어, 일상생활에도 침투하고 있다. 퇴임 전 이명박 전대통령은 “국민모두가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갖춘 따뜻한 자본주의”를 우리의 비전으로 선언한 한편, 시장과 기업의 윤리화·도덕화 기획을 시장만능주의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주장들 역시 낯설지 않다. 즉, 오늘날 시장과 도덕의 만남에 대한 요구는, 정치적 입장차를 넘어선 모든 이들의 “공통의 언어”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보인다. </p>
<p> </p>
<p>하지만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어떤 현상의 진단과 처방이 사전에 자명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프레임들을 통해 사후적으로 의미화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늘날 “도덕적” 프레임의 확산을 그 자체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러한 확산이 어떠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문제들이 여타의 다른 언어와 개념이 아닌 기업의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도덕적 틀 속에서 의미화되고 번역될 때, 우리가 새롭게 얻을 수 있는 시각은 무엇이고, 동시에 어떠한 것이 이 틀로부터 배제되는가?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이 “윤리적 자본주의”의 담론적 공간 속에 번역·기입가능한 것과 번역·기입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혹은 더 나아가 이러한 도덕적 언어가 자본주의 비판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읽어낼 수 있는 시대적 변화 혹은 오늘날 자본주의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무엇일까?</p>
<p> </p>
<p> </p>
<p><strong>애플은 </strong><strong>얼마나 </strong><strong>공정한가: </strong><strong>기업의 “</strong><strong>사회적 </strong><strong>책임”</strong><strong>이라는 </strong><strong>모호한 </strong><strong>대상</strong></p>
<p>짧은 서평에서 다루기에 버거운 질문들을 제기하며 논의를 시작한 이유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루는 두 책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열린책들, 2014)와 <돈, 착하게 벌 수는 없는가>(흐름출판, 2014)가 이러한 범람하는 윤리적 자본주의의 비전에 목소리를 보태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CSR을 포함한 윤리적 자본주의 기획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무조건적 찬사와 냉소적 비판을 양 극점으로 하는 평면적인 스펙트럼에 갇혀있는데, 이 두 책은 단호히 윤리적 자본주의의 기획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한 극점의 입장을 대변한다.</p>
<p> </p>
<p>먼저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부제인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보고서”가 보여주듯이, 이 책은 나이키와 삼성 같은 초국적 기업들의 윤리적 실천에 대한 다소 딱딱한 보고서의 형식을 띠고 있다. 독일의 경제전문기자 프랭크 비베는 책의 1부에서 지난 10년 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게 부각된 배경과 기업의 윤리성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중요성을 짤막하게 설명한 후, 2부에서 이들 기업의 윤리적 실천에 대한 평가와 함께 각 기업에 별 다섯 개 만점 방식으로 점수를 매기고 있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언급하자면, 구글은 별 네 개, 애플과 삼성은 별 세 개, 이케아와 H&M은 별 두 개를 받았다.) 책 자체가 특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거나 학술적 의의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저자 말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나 기업의 윤리적 프로필이 궁금하거나 이러한 평가에 기반해 윤리적 소비와 투자를 실천하기 원하는 독자들은 한 번쯤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p>
<p> </p>
<p>저자는 오늘날 기업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도덕적 가치와 실제 기업의 활동 간에는 괴리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오늘날 초국적 기업들이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객관적·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책의 목표로 제시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비판적 의도를 과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업이 얼마나 공정할 수 있는가, 윤리적일 수 있는가라는 이 책의 물음 자체에는, 이미 기업이 윤리성과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근본적 믿음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과 관련해 한 번 검토해봐야 할 것은, 이 책이 반복적으로 던지는 기업이 “얼마나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반영된 믿음들—즉 기본적으로 기업은 윤리성과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이며 그래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공정성이나 윤리성은 양적으로 측정·평가·반성될 수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p>
<p> </p>
<p>먼저 기업이 사회에 대해 어떤 적극적인 윤리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첫 번째 가정부터 살펴보자. 이러한 논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밀튼 프리드먼은, 일찍이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은 오직 이윤증대에 있다고 천명한 바 있다. 이윤을 증대시키고 고용을 창출하며 그에 따른 세금을 낸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업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사회적 기여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부분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그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기업은 시장 경제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윤리적으로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9). “시장경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30)</p>
<p> </p>
<p>하지만 동시에 저자는 프리드먼 류의 입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반박한다 (38).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는 초국적 기업들이 시장이나 공공서비스, 조세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활동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기업이 이 사회시스템을 주도적으로 구성해나가는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38-39). 동시에 오늘날 깨어있는 시민과 소비자들은 기업에 윤리적 덕목을 요구하기에, 기업들은 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지역사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 (27-28). 오늘날 혹자는 이렇듯 기업이 자신과 관계된 지역사회에 학교·병원 등 공공서비스를 공급하고 생태·인권 이슈를 감독하는 주도적인 시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업을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이라 고쳐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p>
<p> </p>
<p>문제는 이러한 전환을 저자처럼 국가와 시스템의 빈 곳을 기업이 자발적으로 보충하는 긍정적인 실천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책임”을 명분으로 공공서비스 분야 및 전통적인 국가영역까지 비즈니스 논리를 통해 잠식해가는 기업의 영향력 확대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변화를 프리드먼 류의 시장논리로부터의 결정적 진보로 이해하겠지만, 실제 많은 연구들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명분하에 초국적 기업들이 지역공동체에서 교육·의료 등의 서비스를 공급하는 주체로 정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됨에 따라, 지역주민들의 정치적 조직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새로운 포섭과 배제의 선이 그려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초국적 광산기업 <앵글로 아메리칸>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CSR 활동에 대한 한 꼼꼼한 인류학적 연구는, 이 기업이 정부를 대신해 수행하는 광산지역에서의 에이즈 예방 및 치료 활동이, 어떻게 노동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치료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지역사회의 반기업 활동을 억제하는 도구로 활용되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Dinah Rajak, <em>In Good Company: An Anatomy of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em>, Stanford Univ. Press, 2011)</p>
<p> </p>
<p>한편 기업 윤리성의 측정 가능성이라는 두 번째 전제는, 또 다른 질문들을 야기한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각각의 기업에 별점을 매기고 있지만, 과연 특정 기업의 윤리성이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일까? 환경오염을 야기하는 기업과 노조를 탄압하는 기업의 “비도덕성”은 어떠한 기준으로 비교가능한가? 어떤 가치에 기반해 이 도덕성을 지표화할 것인가는, 그 자체로 논쟁적인 도덕적 선택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책의 경우만 하더라도,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해 신뢰도를 높였다는 저자의 주장과는 별도로, 평가과정 곳곳에서 저자의 강한 가치판단이 발견된다.</p>
<p> </p>
<p>예컨대, 리스크를 파생상품화하는 금융부분의 사업방식은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며 도이치방크에 별 한 개를 준 대목은, 평가의 적절성을 떠나 저자 본인이 “탐욕스런 금융자본 대 건전한 산업자본”이라는 의심스런 이분법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주며, 유럽의 통신회사 보다폰(Vodafone)이 개발도상국 주민들의 은행접근성을 높여줘 이들 국가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별 네 개를 받은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아마존이 나치를 긍정적으로 다룬 책의 판매를 금지하지 않았다며 윤리점수를 깎은 부분이나, 비싼 시계나 보석만큼 수명이 길고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며 사치품 생산기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항목은 가벼운 실소마저 자아낸다.</p>
<p> </p>
<p>실제로 오늘날 기업의 윤리성을 측정하는 독립적 국제기구만 60여 개에 이르고, 이를 위한 다양한 가이드라인과 지표들이 개발되어 있음에도 (대표적인 것만 몇 가지 들자면, <지역사회 속의 기업>에서 만든 기업책임지수나 GRI의 지속가능성 보고서 가이드라인, <국제표준기구>가 2010년 발효한 ISO 26000 등이 있을 것이다), 이들에 기반한 평가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예컨대, 작년 <한겨레 경제연구소>가 삼성전자를 CSR 우수기업으로 선정해 논란을 일으켰는가 하면, 포스코의 경우 인도에서의 무리한 사업추진과 산업재해, 입찰담합 등의 문제로 비판받는 와중에도 <포춘>지에서 선정하는 가장 존경받는 기업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렇게 평가 기준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도, 기업에 수여되는 각종 타이틀들은 소위 “도덕 자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장을 기업에게 부과하며, 그 기업의 “착한”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널리 활용되곤 한다.</p>
<p> </p>
<p> </p>
<p><strong>깨어있는 </strong><strong>자본주의: </strong><strong>착취와 </strong><strong>적대없는 </strong><strong>자본주의라는 </strong><strong>환상? </strong></p>
<p>이쯤 되면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가 초국적 기업들의 윤리적 실천을 촉구하기 위해 전제한 명제들이 그리 자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오히려 기업의 윤리적 역할 확대와 그 효과 측정에 관련한 문제는, 다양한 전략과 권력게임이 개입할 수 있는 불투명한 장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곧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무의미하다거나 CSR을 비롯한 기업의 실천은 단순한 기만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좀 더 흥미로운 질문은, “착한 기업”과 “윤리적 자본주의”에 대한 요구가 이러한 근본적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지배 담론의 일부가 되었다면, 이러한 현상에서 엿볼 수 있는 오늘날 지배 이데올로기의 특성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p>
<p> </p>
<p><돈, 착하게 벌 수는 없는가: 깨어있는 자본주의에서 답을 찾다>는, 바로 이러한 “윤리적 자본주의” 담론의 기저에 놓인 환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 번 훑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미국의 유기농 식품 대형판매점 <홀푸드마켓>의 공동설립자 존 매키와 벤틀리대 마켓팅과 교수인 라젠드라 시소디어가 공저한 이 책은, <의식있는/깨어있는 자본주의(Conscious Capitalism)>란 제목으로 2013년 출판되어 미국 현지에서도 꽤 화제를 모은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제시하는 윤리적 자본주의의 비전은 그리 새롭지 않다. 오히려 지난 몇 년 간 다양한 이름으로 제기됐던 도덕과 시장의 접붙임 기획들—예컨대, “박애 자본주의”, “창조적 자본주의”, 두어 해 전 한 보수언론이 소개해 유명해진 “자본주의 4.0” 등—의 또 다른 변종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p>
<p> </p>
<p>이 저자들 역시, 비베와 마찬가지로 기업과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전제 하에 자신들의 논의를 시작한다 (27). 저자들에 따르면, 기업과 자본주의(이런 종류의 책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저자들은 기업활동의 집적을 자본주의 자체와 등치시키고 있다)는, “협력과 자발적 교환”에 기반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사회혁신을 가져옴으로써 유익할 뿐 아니라 도덕적이다 (54). 초창기 시장경제 옹호자들은 기업과 자본주의에 내재한 이러한 도덕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는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가 동정과 공감 같은 사회연대의 감정들을 분석한 <도덕감정론>의 저자라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48). 그러나 저자들은 이후 경제학자들이 기업과 자본주의의 도덕성을 무시하고, 이윤극대화만이 기업의 목표라고 주장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비인간적 체제로 만드는데 일조해 왔다고 개탄한다 (48). </p>
<p> </p>
<p>매키와 시소디어는 이러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가정에 기반한 시장주의를 질타하고, “우리 삶을 개선하고 이해관계자들을 위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기업과 자본주의의 목표로 재설정한다 (53). 즉, 기업은 이제 “창조와 협력에 기반해”, 단순히 “화폐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꽃피우는 훌륭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61). 이러한 “깨어있는” 기업/자본주의를 위해 이 책이 제시하는 네 가지 방안은, 사회적 차원의 기업 목표 설정, 사회적 가치 공유를 통한 이해관계자들 간의 통합과 조정, 깨어있는 리더쉽의 함양, 평등하고 협력적인 조직 문화 창출이다 (72). 400페이지를 훌쩍 넘는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러한 네 가지 방안의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논하는데 집중하고 있다.</p>
<p> </p>
<p>사실 윤리경영에 관한 책을 한 두 권 읽어본 독자라면 이미 익숙할 듯한 이 책의 세부내용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사용하는 모든 “도덕적” 용어들이 “자본”과 “노동”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직접 재현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완곡어법(euphemism)의 모음집 같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들의 설명 속에서 노동은 기업을 통해 사회적 의미를 추구하는 “사회공헌활동”이 되고, 자본가의 역할은 이러한 공헌활동을 지원하고 보장하면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창조적” 활동으로 이해된다. 노동과 자본이 재현되지 않기에 당연히 이들 간의 착취와 적대도 재현불가능한데, 저자들에게 자본주의를 둘러싼 각종 갈등 및 적대는 상이한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 저자들은 환경과 지역공동체도 이해관계자들에 포함시킨다)이 공통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일시적 커뮤니케이션 장애로 이해될 뿐이다. (실제로 저자인 존 매키는 자신이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효율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어떻게 <홀푸드마켓> 노조를 붕괴시킬 수 있었는가를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253-255)</p>
<p> </p>
<p>따라서 이 도덕적 수사들의 이면에서 발견되는 것은, “착취없는 자본주의” 혹은 “적대없는 자본주의”라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조디 딘(Jodi Dean)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내밀한 환상”이라고 부른 관념이다. 딘에 따르면, 이러한 환상 속에서 오늘날 자본주의는 노동자-자본가 간의 착취관계가 아니라, 창의적 기업가로 변모한 수평적 개인들의 협력적·경쟁적 관계를 통해 작동하는 것으로 상상된다. 매키와 시소도어의 깨어있는 기업, 깨어있는 자본주의가 노골적으로 전파하는 것은, 그 최종 목표를 경제적 가치추구에서 도덕적·사회적 가치추구로 바꾸었을 뿐, 동일한 형식 속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무적대적 공간에 대한 환상처럼 보인다.</p>
<p> </p>
<p>또한 우리는 이러한 환상에 기반해, 비베가 왜 50개 기업 중 “애플”을 콕 집어 제목으로 사용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착한 기업” 애플은 오늘날 “착취없는 자본주의”라는 환상을 대변하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기업에서의 노동은 창조적 혁신이나 유희적·미학적 활동, 심지어 자기계발의 과정으로 표상되고, 이제는 신화적 인물이 된 스티브 잡스는 “사회적 기업가”의 대표적인 예이자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기획자, 디자이너, 심지어 혁명가로 묘사된다. 다른 기업이라면 상식이었을 법한 사실, 즉 애플의 하드웨어가 열악한 환경의 중국 폭스콘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뉴스가 그토록 큰 스캔들이 되고, 애플 최고 경영자가 현지 공장을 방문해 자살 방지용 그물을 설치할 것을 권유하고 폭스콘의 자살률이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높지 않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장면은, 애플이 대변하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환상과 실재의 괴리를 드러냈던 웃지 못할 소극(笑劇)이 아니었을까?</p>
<p> </p>
<p> </p>
<p><strong>“</strong><strong>도덕적 </strong><strong>신자유주의”</strong><strong>를 </strong><strong>넘어서</strong></p>
<p>결국 이 두 책이 공통적으로 그려내는 “윤리적 자본주의”의 세계는, 자본주의의 구조적·정치적 속성은 제거되고 투명성과 책임, 공정성과 윤리경영이라는 용어들로 묘사되는 “착한” 기업·시민과 “탐욕스런” 기업·시민 간의 도덕적 대결만 전면화된 앙상한 공간이다.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가 NGO와 시민들이 윤리적 소비와 투자를 통해 탐욕스런 기업들을 제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돈, 착하게 벌 수는 없는가>가 기업의 자기 반성과 교정 노력을 강조한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이들이 의지하는 것은 공정성/불공정성, 착함/나쁨, 책임/탐욕 같은 탈정치화된 도덕적 언어들과,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이를 교정할 “의식있는” 기업들에 대한 기대이다. 이러한 사회적 상상에는 권력과 정치, 적대의 언어가 들어설 공간이 처음부터 폐제되어 있는데, 이데올로기가 실재의 분석을 가로막고 정치적 적대를 자리바꿈하는 지배적 언어라면, 윤리적 자본주의에 대한 이들의 호소야말로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
<p> </p>
<p>물론 이러한 노골적인 이데올로그들의 주장을 근거로, 자본주의나 시장에 대한 도덕적 교정을 시도하는 흐름 일반을 뭉뚱그려 비판하는 것은, 아마 “공정치 못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도덕과 시장이 만나는 영역에는 다양한 이질적 흐름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분명한 입장차와 긴장이 존재한다. 아마도 협동조합 운동처럼 시장경제의 지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적극적인 제어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은, 이 두 책이 보여주는 시장의 근본적 윤리성에 대한 믿음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다. 또한 이 공통적인 “도덕의 언어”가 새로운 형태의 연대와 협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이러한 도덕적 비판을 간단히 기만적 이데올로기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예컨대, 국제표준 ISO 26000을 준수하라며 노동조합과 NGO, 소비자들이 함께 기업에 압력을 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연대의 탄생을 상상해보는 것은 충분히 현실적인 가능성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덕의 언어에 기반해 시장을 비판하고 기업에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묻는 이러한 담론과 실천이, 그 온도 차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담론적·통치적 공간의 특성은 무엇인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p>
<p> </p>
<p>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해 잠시 한국사회의 경우로 눈을 돌려보자. 최근 한국은 기업과 사회적 가치, 시장과 도덕의 만남이 가장 역동적으로 실험되고 있는 공간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년 이후 정부는 <사회적기업 육성 기본계획>을 수립해 “착한” 기업들을 “인증”하고 지원해주는 작업을 전개하는 한편, 재작년 제정된 <협동조합 특별법>을 통해 도덕과 시장이 만나는 영역 자체를 키워나가고 있다. 각종 캠페인을 통해 윤리적 소비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확산되고 있는 동시에, 기존 기업들의 CSR과 사회책임투자(SRI)의 규모 역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민연금기금의 투자결정에 있어 기업들의 윤리지표 반영을 확대하는 방안에 이어, 공공기관 사업입찰에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 여부를 고려하는 <사회적 가치 기본법> 등이 활발히 제안·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p>
<p> </p>
<p>그런데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도덕화된 시장”의 영역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도덕적 이상(理想)과 신자유주의의 시장 유토피아가 만나는 기묘한 접면이다. 한편에 사회서비스와 자원봉사 영역에 사회적 기업 혹은 협동조합 “사업자”의 형태로 뛰어든 운동단체, 비영리단체, 복지기관들의 도덕적 이상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사회연대의 구성 및 사회서비스 제공이라는 전통적인 국가의 임무를 기업시민과 윤리화된 시민에 권한이임하고, 이 “착한” 주체들을 감사(audit)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자 하는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필요가 존재한다. 즉, 현상적으로 보자면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거나 포기하고 있는 영역들을, “나눔과 공유를 통한 사회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윤리적 기업과 시민이 “자발적으로” 메꾸면서 이 영역에 비즈니스 논리에 기반한 새로운 시장들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 혹은 “도덕화된 시장”의 영역은, 시장경제의 대안이라기보다는 이 두 가지 상이한 욕망이 조우하여 탄생시킨 하이브리드한 장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p>
<p> </p>
<p>한 명민한 인류학자가 “도덕적 신자유주의”라 이름 붙인 이러한 시장의 도덕적 자기-비판을 통한 확장 매커니즘은,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도덕적 비판이 가진 정치적 효과를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 같다. 시장과 사회, 이윤추구와 호혜성, 경제논리와 도덕, 경제적 인간과 협동적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고 후자의 계열에 대안적 위상을 부여해온 기존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오늘날 CSR, 윤리적 소비, 사회적 경제 영역 등에서 작동하는 “도덕적 신자유주의”의 매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이 체제의 팽창에 기여할 위험성마저 지니는 것이다.</p>
<p> </p>
<p>예컨대, 많은 이들이 지난 몇 년간 신자유주의적 보수정권 하에서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영역이 급속도로 성장한 것을 하나의 “역설적 현상”이라 지적하지만, 실은 이러한 현상이 역설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도덕적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어떨까? 즉, 신자유주의적 통치 자체가 그 내부에 국가의 후퇴를 자발적으로 대리보충하며 사회적 책임을 떠맡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들의 동원을 포함하고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시장에 대한 도덕적 비판과 그것이 기반한 이분법을 넘어서, 새로운 “도덕적 신자유주의” 비판의 언어들을 창안해내야만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질문들은, 기업이 얼마나 공정할 수 있는지 혹은 돈을 착하게 벌 수는 없는지를 묻는 이 두 책의 익숙한 도덕적 프레임 속에선 결코 제기될 수도, 답해질 수도 없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시장과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시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씨름해야 할 과제 역시, 바로 이러한 질문들일 것이다.</p>
<p> </p>
<p> </p>
<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158,'/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8+%22%22%EB%8F%84%EB%8D%95%EC%A0%81%20%EC%8B%A0%EC%9E%90%EC%9C%A0%EC%A3%BC%EC%9D%98%22%EB%A5%BC%20%EB%84%98%EC%96%B4%EC%84%9C%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8&t=%22%EB%8F%84%EB%8D%95%EC%A0%81%20%EC%8B%A0%EC%9E%90%EC%9C%A0%EC%A3%BC%EC%9D%98%22%EB%A5%BC%20%EB%84%98%EC%96%B4%EC%84%9C"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8&title=%22%EB%8F%84%EB%8D%95%EC%A0%81%20%EC%8B%A0%EC%9E%90%EC%9C%A0%EC%A3%BC%EC%9D%98%22%EB%A5%BC%20%EB%84%98%EC%96%B4%EC%84%9C','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158?commentInput=true#entry158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조반나 프로카치, "사회적인 것의 통치에 관한 노트"
캐즘
http://blog.jinbo.net/chasm/153
2019-01-21T16:27:41+09:00
2015-06-01T09:53:00+09:00
<p style="text-align: justify;">얼마전 난장출판사 이재원 대표님이, <푸코 이후>의 역자인 김상운 선생님과 함께 난장출판사 독자와의 대화 행사를 가졌다며 행사 자료집을 메일로 보내주셨다. (오모다 소노에와 사카이 다카시, 이치노카와 야스타카가 "사회적인 것"을 주제로 나눈 대담을 수록한 이 자료집은 난장출판사 블로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이 투철한 서비스 정신! <a href="http://blog.naver.com/virilio73/220366731476">'독자와의 대화' 자료집</a>)</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한 눈에 봐도 흥미로워 보이는 대담이었지만 한동안 바쁜 일이 있어 좀 미뤄놨다가, 일이 대충 마무리된 이번 주말에야 자료집을 읽어봤다. 이 블로그에 띄엄띄엄 올라오는 포스팅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회적인 것"은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주제 중 하나인데, 대담들을 읽다보니 몇년 전 공부하다 천천히 뜯어보려고 번역해놨던 글이 하나 생각나 이번 기회에 블로그에 옮겨 놓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해당 글은 미셸 푸코 및 로베르 카스텔의 제자인 조반나 프로카치의 "사회적인 것의 통치에 관한 노트"로, 원문은 80년대 중반 폴 라비노우나 조너선 사이먼 등 미국의 (좀 더 정확히는 버클리 대학의) 푸코디언들이 주도해 발간했던 저널 <현재의 역사History of the Present> 1987년 가을호에 실려있다. 이 저널은 현재 폴 라비노우가 주관하고 있는 연구소 <Anthropological Research on the Contemporary> 홈페이지에서 전체를 다운 받을 수 있다. <a href="http://anthropos-lab.net/documents/pubs/history-of-the-present-1987-issue">원문 다운로드</a></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원문 자체가 잘 알려진 텍스트가 아닌지라, 글만 덩그러니 남겨놓기 휑하여 몇 마디 덧붙여야만 할 것 같다. 이 글은 노트 형식으로 쓰여진 만큼 글 자체가 복잡한 논의들을 지나치게 단순화-도식화한 면이 있고 이미 푸코의 후기 강의록과 이를 둘러싼 논의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딱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들지만, 내가 볼 때 소위 "통치성 연구"의 관점에서 "사회"의 문제에 접근하는 일반적 관점과 틀을 잘 정리하고 있을 뿐아니라 이를 넘어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지점을 가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이 글은 근대 "사회"의 발명과 설립이, 이 대상이 관계맺는 여타의 담론적-실재적 구성물들 간의 다양한 계열들 속에서 가능해진 매우 돌출적인 사건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근대 "사회"라는 특수한 관념과 상상의 등장과 그 궤적을 추적하는 것(혹은 최근 유행하듯이 그것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거나 부활의 필요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에서 보여주듯이 빈곤-노동-권리-의무-발전 간의 특수한 개념적 배치와 이들 요소 간의 논리적 회로에 대한 이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요소들 간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으로는 <푸코 효과>에 실린 프로카치의 글을 포함한 여러 글들을 참고할 수 있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둘째, 이 글에서 프로카치는 푸코가 후기에 관심을 보인 사목권력으로 대표되는 "전체이자 개별omnes et singulatim"로서의 권력형태를, 근대 "사회적인 것"의 장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특수한 합리성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푸코에 의해 일정정도 암시되기는 하지만 상당히 과감한 해석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근대 사회학을 사로잡았고 지금도 사로잡고 있을지 모를 핵심 질문(뒤르켐, 타르드, 퇴니스, 베버, 짐멜이 모두 나름의 답을 내놓았던 바로 그 물음), 즉 "점차 개별화되는 혹은 분업화되는 근대사회에서 어떻게 사회라는 공통성을 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치의 기획이라는 관점에서 문제화하고 여타의 다른 통치 기획들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화할 수 있는 관점이 열리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이 글의 끝에서 프로카치는 주권의 논리로서의 "권리"와 시장의 논리로서의 "이해관계"에 대비되는 사회의 논리로서의 "의무"를 제시하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간과되어온 이 개념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근대 시민 주체성은 언제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닌 것으로 이야기되어 왔음에도, 권리의 정의 및 재구성의 문제가 좌우파를 막론하고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데 반해, 의무의 문제는 그 동안 비판적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이는 위 자료집의 사카이와 이치노카와의 대담이 사회의 구성에 있어 '권리'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아마도 이 권리의 대응물로서의 의무,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 상호성, 책임, 더나아가 도덕의 문제를 사고하려 했던 가장 대표적인 시도는 뒤르켐-모스로 이어지는 연대 및 선물교환론의 진영에서 찾을 수 있을텐데, 따라서 프로카치의 도식은 홉스-루소식의 주권론이나 스미스-칸트 식의 시장론과의 관계 속에서 이 "의무"개념과 그 의무의 구체적 대상인 사회 혹은 네이션의 위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적인 도면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 논의나 발리바르의 국민사회국가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리 낯선 도식만은 아닐 것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이런 거대한 논의들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이 글은 위의 대담에서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최근 한국에서도 뒤르켐의 '연대'나 모스의 '선물교환', 폴라니의 '사회의 자기보호운동' 등의 아이디어에 기반해 사회의 (재)구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많이 들린다)을 둘러싸고, 푸코식 문제의식에 기반한 사카이와 그것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치노카와의 입장차가 어디서 발생하는지를 이해하고 고민을 발전시키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혹은 그러기를 바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사실 여기까지는 몇 년 전 이 글을 처음 읽고 번역할 때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이고, 오늘 번역을 좀 다듬기 위해 글을 다시 보며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내 문제의식은 지금은 조금 다른 지점으로 옮겨와 있다. 최근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은, 굳이 말하자면 사회를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하는 사카이나 사회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묻는 이치노카와의 입장과는 달리, 오늘날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와 그것의 질료로서 모럴 혹은 에토스가 과연 어떠한 새로운 상상에 기반한 것인지, 그것이 기존의 사회와 도덕에 대한 관념과는 어떻게 구별되는지, 혹은 역으로 말해 이러한 변화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새로운 인간적 조건human condition 혹은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는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가진 특정한 사회의 상상이 빈곤-노동-의무-도덕-발전과 같은 다른 요소들과의 계열 속에서 형성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주의가 가정하는 특정한 인간학적 전제들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는) 돌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존의 자유주의적 조건들이 상당부분 변화된 상황, 예컨대 빈곤-노동-의무를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해체되고 발전과 성장의 전망이 지속가능성과 생존으로 덧칠되는 변화 속에서, 즉 이른바 금융화된 신자유주의적 조건들(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신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화'보다 이 용어를 더 선호하는데) 속에서 돌출되는 사회적 상상은 기존의 사회관념과는 많은 부분에서 구분될 것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변화의 근본성은, 이 글에서 프로카치(그리고 푸코)가 통치공간으로서의 사회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참조하는 자유주의 인간학 내의 모순, 즉 주권적 주체와 이해관계의 주체 간의 근본적 갈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즉, 기존의 자유주의 논의 속에서 사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상상되는 주체가, (근본적으로 교환불가능한 것을 소유한) 주권적 주체, (양도가능한 대상의 교환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의 주체, ('주면서 보존하는' 선물교환에 연루된) 사회적 주체 간의 분열과 통합에 기반해 있었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인간학적 전제들은, (굳이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이제는 더 이상 '교환'에 기반해 상상되지 않는다는 푸코의 언급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이들과는 다른 지형 속에서 작동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예컨대 오늘날 금융화와 발맞추어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행동경제학류의 담론들은, 경제주체를 이해관계의 차갑고 합리적인 계산이 아닌, 감정과 충동, 더 나아가 때로는 공감과 협력에 기반한 주체로까지 사유할 것을 요구하며,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논의들은 단일하고 집단적인 권리를 소유한 주권자가 아니라 사안에 따라 파편화된 여론만을 가진 탈주권적 '다중'과 주권의 문턱에 이르지 못하는 난민 혹은 잉여 인구의 존재로 이분화되고 있다. 이 변화된 논의에서 전제되는 주체성은 당연히 새로운 인간적-사회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는 기존의 자유주의 주체가 가진 딜레마와 동일한 방식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고, 따라서 동일한 형태의 사회적 주체성의 구성을 통한 해결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고전적 자유주의의 인간학적 전제들, 즉 이해관계의 주체-주권적 주체-사회적 주체의 구분과 그 형상들이 모두 변화하고 있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좀 더 과감한 형태의 새로운 지도그리기를 행해야 할 것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러한 변화를 "대체" 혹은 "단절"이라는 표현으로 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예컨대, 노동사회가 탈노동사회로 대체되고 발전주의가 포스트-발전주의로 대체되었다는 식으로), 이러한 조건의 변화에 충분히 천착하지 않은 채 "사회"의 재구성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 대담에서 이치노카와가 그러하듯이) 그 동안 사회학자들이 해온 듣기 좋은 이야기만을 반복하는 형식적 주장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반면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인간적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설명해내고 그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내지 못할 경우,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조건을 (임박한) '파국'으로 느슨하게 정의하고 그 대안으로 개인의 견유주의적 윤리나 정신분석의 윤리에 기대는, 표면적으로만 급진적인 공허한 주장에서 한발짝도 더 나가기 힘들 것이다. (실제 위 대담에서 "사회"를 통한 대안에 거리를 두는 사카이 다카시가 다른 곳에서 견유주의 윤리와 유사한 주장을 전개한 바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국 개인적으로 오늘날 좌파 담론의 중요한 판돈 중 하나가 여기에 걸려있다고 보는 셈이지만, 이 새로운 지도그리기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은 턱없이 부족하며, 푸코를 포함한 몇몇 이들의 단편적이고 단절적인 실마리들과 몇 가지 성급히 제기된 가설들만이 눈 앞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큰 틀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수렴되는 주제의 논문을 쓰기로 결심한 후, 내 삶의 질과 스트레스 수치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부족한 작업 도구를 보충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기존의 자유주의에서의 사회에 대한 상상과 그것의 작동을 가능케했던 조건들, 그리고 그 실제 작동 양식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참고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검토 작업을 행할 수 있는 일종의 출발점과 간단한 안내도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프로카치의 논의는 그 도식성과 프랑스 사례에 한정된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p>
<p> </p>
<p style="text-align: justify;">=====</p>
<p> </p>
<p style="text-align: justify;">글이 짧지는 않으니, PDF로 다운받으실 분들은 아래 링크 클릭</p>
<p> </p>
<p><a href="/attach/1994/1113559930.pdf">[조반나 프라카치_사회적인 것의 통치에 관한 노트.pdf (427.47 KB) 다운받기]</a></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사회적인</strong> <strong>것의</strong> <strong>통치에</strong> <strong>관한</strong> <strong>노트 (Notes on the Government of the Social) </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right;">조반나 프로카치(Giovanna Procacci)</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통치”라는 개념과 이를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영역에 적용할 때 발생하는 각종 논점들을 다음의 노트를 통해 정리해보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1.</p>
<p style="text-align: justify;">“통치”라는 개념은, 주권의 법철학에 기반한 권력론이나 제도에 초점을 맞춘 권력분석의 대안으로, 새로운 관점의 권력분석을 도입한다. 이 새로운 관점은 지배적인 기존의 두 권력분석과는 달리, 16세기 이후 발달해 온 “통치술”에 대한 분석에 의거한다. 통치는 개인 및 집단행위의 “지도”를 의미하며, 따라서 정치권력을 따로 떼어내 설명하려는 주권이론과 달리 권력관계가 드러나는 다양한 형태들—즉 정신의 통치, 가정의 통치, 국가의 통치 등—을 상호 연결시킨다. 또한 통치라는 개념은, 정치체제나 제도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권력의 요소들, 형식들, 목표들에 관심을 가진다. 통치는 통치의 선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략적 관점에서 권력을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2.</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새로운 관점은 한편으로는 권력관계에서 주체가 점하는 위치와 관련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관계 자체의 이질적 질서가 낳은 틈새들을 권력분석에 재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측면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미셸 푸코에게 통치한다는 것은 “타인의 행위의 가능한 장을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a href="http://blog.jinbo.net/chasm/153#_edn1" name="_ednref1" title="">[i]</a> 통치의 관점에서 권력관계는, 주체가 스스로를 경험하는 행위의 형식들을 부과한다는 의미에서 주체성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 행위형식의 부과는, 이 권력관계의 반대쪽 끝에 요소들의 이질성이 존재함을 전제한다. 즉, 주체의 행위 앞에 놓인 가능성들의 장에서 발견되는 주체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행위에 대한 행위로서의 통치는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서 작동하며, 주체의 가능성의 측면에서 항상 통치를 벗어난 무언가가 존재하게 된다. “잠재적인 거부나 저항이 없이는 권력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a href="#_edn2" name="_ednref2" title="">[ii]</a></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통치관계가 구조상 항상 그것을 넘쳐흐르는 가능성의 장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면, 통치분석은 (앨버트 허쉬먼의 적절한 정식화를 빌리자면<a href="#_edn3" name="_ednref3" title="">[iii]</a>) “실현된 결과들”만을 평가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되며, 그 과정에서 회피된 것이나 소멸된 것들에 대한 분석까지 나아가야 한다. 통치관계는 그 관계의 상이한 질서들—즉, 담론의 질서, 실천의 질서, 그리고 그 효과의 질서—간에 완벽한 조응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서로 완전히 조응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질문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는 이들의 작동에 어떤 합리성도 존재치 않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통치합리성들은 그것의 내용과 한계의 범위를 결정하는 가능성들의 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통치합리성들은 여타의 다른 가능한 선택지를 배제하는 하나의 선택이며, 결과적으로 그 선택을 만들어낸 전략들간의 대립관계의 측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 전략들이 통치의 가능성들의 윤곽을 결정하며, 바로 이 윤곽은 그 관계와 분석 모두에 있어서 주체의 가능성에 상응한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3.</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통치관계에서는 주체의 행위가 자유롭다는 전제하에서만 주체성의 생산이 존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권력과 자유는 상호 연결되며, 자유는 통치와 피통치자 간의 현존하는 관계이지, 자유주의 체제에 보존된 어떤 전제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자유와 권력의 관계 때문에, 자유의 생산과 제한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이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로, 특히 자유의 정치적 사용을 전제하는 체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들 체제에서 자유가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 위치로 인해, 자유는 이질적 모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점점 복잡한 것이 되어간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유주의를 논하면서, 푸코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주권적 개인(법적 주체) 간의 모순에 관해 분석한다.<a href="#_edn4" name="_ednref4" title="">[iv]</a> 이 모순은 두 모델이 주체의 자유를 구조화하는 서로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원리를 각각의 사회화 양식 속에서 상이하게 사회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푸코는 “시민사회”라는 개념을 이 두 주체들[호모 이코노미쿠스와 주권적 개인] 사이에 공통적인 하나의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된 통치테크닉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국가에 대립적이지 않으며, 국가로부터 벗어나거나 그것에 저항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시민사회는 단순한 정치사회[국가]와는 구별되며, 특정한 통치의 테크놀로지와 관계하면서 하나의 통치관계를 그려낸다. 즉, 시민사회는 지속적으로 권력을 생산하는 동시에, 사회적 유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시민사회”라는 관념은 법이나 경제에서 빌려온 방식(이미 불충분한 것으로 밝혀진 방식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와 권위의 문제를 조절할 수 있는 참조점을 제공한다. 시장으로부터 추출된 “이해관계”라는 기준과 주권적 개인 개념의 핵심인 “권리”라는 기준 사이에, 시민사회에 의거한 테크놀로지는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disinterested interest”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의 이해관계를 통합하려는 사회적 실천들을 끼워 넣는다. 이로써 시민사회는 비-법률적, 비-경제적 사회관계의 새로운 영역을 개방하며, 이러한 경향은 개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구체적 질료를 제공하면서 근대사회의 형성과정 전체를 통해 점차 발전하게 된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시민사회”를 자신의 참조점으로 삼는 이 통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형제애fraternity”를 조직할 것인가라고 하는 혁명적 질문, 즉 자유의 생산과 제한간의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긴장 사이에서 자유의 테마를 형성해온 바로 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시민사회”를 참조하는 통치술을 그것이 정치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영역—말하자면 빈곤을 하나의 “사회문제social question”로 정의하는 새로운 합리성의 영역—과 관련해 살펴보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4.</p>
<p style="text-align: justify;">앙시앵 레짐 시기에, 빈곤은 구걸행위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빈곤은 개인의 다양한 운명의 영역, 즉 승자와 패자, 운명의 혜택을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나뉘는 질서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였고, 이런 식으로 이해된 빈곤은 오직 공적 질서의 [유지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하나의 문제로 사회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빈곤이 “사회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접근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새롭게 인식되고, 빈곤을 둘러싼 새로운 합리성, 즉 빈곤의 원인과 해결책을 사회 속에서 찾으며 빈곤의 존재와 사회 자체의 운명을 결합시키는 합리성이 등장해야만 한다. 이 빈곤의 합리성 내부에서의 변화, 즉 기존의 걸인의 형상을 벗어나 근대적 빈곤이라는 새로운 형상을 사회적 상상과 결부시키기 위한 변화의 조건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변화는 어떤 효과를 낳았는가?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상황 하에서, 빈민은 민중주권 개념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한 대의제 사회나 부의 확장이라는 목표에 기반한 [시장] 사회의 공통된 반대항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빈곤은 법적 평등으로 덧칠된 [혁명 후] 정치적 풍경에 사회적 불평등의 측면을 재도입했는데,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불평등 자체보다는 이 새로운 정치체제가 기반한 평등의 성격에 있었다. 즉, 법적 평등은 보편성에 대한 호소에 기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보편적 평등의 전제 하에 [빈곤이라는] 불평등을 정당화해야만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혁명 이후 모든 정치적 사유의 핵심이었던 시민권 개념을 예로 들어보자. 한편으로, 이는 실제 법적, 보편적 평등이 사유될 수 있는 유일한 지평으로서 구체제 질서 사이에서 자라난 평등의 관념을 표현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민권 개념이 정치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연권으로서의 시민권과 각종 실정적 권리들에 대한 접근권으로서의 시민권을 분리시키기 위한 [사회구성원 간의] 일종의 “기능적” 구분들—물론 이 기능적 구분이 과거처럼 본질적인 구분의 생산으로 연결되지는 않아야 했지만—을 도입해야만 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빈민이 재현하는 불평등은 이러한 기능적 차이의 문제로 이해될 수 없었다. 문제는 [기능적 차이에 기반해] 실정적 권리들에 대한 접근권을 조절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빈민을 법적 공간에 삽입하는 것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혁명 이후 빈민이 법적인 사회관계의 틀 속에 통합되고 권리의 주체가 되면서, 공적 부조assistance에 대한 사유는 이러한 새로운 빈곤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를 다뤄야 했다. [법적 평등의 영역에] 불평등을 재도입하면서, 빈민은 실제 그들이 평등해질 수 있는 정도 혹은 그들이 “불행에 고통받는” 자들로 배제되지 않을 수 있는 범위와 같은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같이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 빈민의 법적 영역으로의 접근 그 자체였다면, 기능적 구분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즉, 대체 무엇이 빈곤의 사회적 기능이 될 수 있었겠는가? 기능주의적 접근은 해답을 제공할 수 없었는데, 빈곤은 오직 소멸됨으로써만 사회체에 대해 하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유계급 시민들, 소위 능력을 가진 시민들은 개별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에 실정적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면, 빈민들은 법적 영역에 반사회성의 기반으로 등록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빈민의 [법적] 통합은 빈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할 것을 요구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과적으로 빈민의 법적 영역으로의 통합은, 권리와 의무의 상호성을 도입함으로써 빈곤에 침투해 그것을 박멸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자선사업이 사회적으로 별다른 효과를 낳지 못하며 사회적 변혁이 가져다 주는 실질적 이익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의 중심에는 이러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노동이 바로 이 같은 상호적 권리와 의무를 조직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오직 노동에 대한 접근을 통해서만, 빈민은 사회가 그에게 권리의 형태로 증여한 것을 되갚을만한 수단을 획득할 수 있었다. 노동만이 빈민을 사회적 교환의 장에 통합시킬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여기서 권리는 더 이상 주권에 기대지 않고 노동으로 보상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공적 부조를 국가에 의해 보장된 노동정책과 결부시키는 것은, 곧 쉽지 않은 일로 판명되었다. 이를 위해선 국가가 하나의 경제적 행위자가 되어야 했는데, 이는 자유시장 경제학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 것이었다. 게다가 이 경우 국가는 그 시민들에게 물질적 생존의 수단을 공급해야 하며, 이러한 수단이 부족할 경우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빈곤분석과 연결된 핵심 요소들은 또 다른 합리성의 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사회적인 것이라는 이 새로운 합리성의 축은 점차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종속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빈곤의 통치는 사회 속에서 경제적 주체도 법적 주체도 아닌 “시민사회”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개입이 가능한 이론적·실천적 공간을 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5.</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한편으로는 주권이라는 법적-정치적 모델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제도적 모델과 점차 거리를 두고 자율성을 획득한 새로운 권력의 문제틀이, 19세기 도시빈곤의 비극 속에서 등장한 사회적인 것의 공간을 구성하게 되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적인 것의 탄생은 궁극적으로 권리의 부과와 연결되는 주권의 논리적 결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는 실정적 권리를 도덕 주체의 주권(자연권)에 대한 참조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를 권리와 의무의 상호성을 도입하는데 활용하는 이론적·실천적 작업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또한 사회적인 것의 탄생은 국가와 시장의 제도적 모델에 기반해 분석될 수도 없다. 사실 이 두 모델은 모두 사회적인 것의 전략적 필요성에 대립하는 것이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대신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법적 주체와 경제적 주체에 공통적으로 관여하는 통치테크닉을 확립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것의 고유한 통치형태는 재분배의 원칙에 기반해 작동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사회적 정체성의 재분배를 의미하며, 더 나아가 경제적 부의 재분배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것의 통치의 중심에는, “사회적 유대” —즉, 개인이 기입되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결정하는 상호작용의 표면—의 지속적 생산이 존재한다. 개인은 직접적으로 사회화시키고 사회화되는 행위모델들을 함축한 여러 실천들에 점차 통합되며, 이로써 “통치가능한” 형태의 사회적 주체성들이 생산된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제 사회적인 것의 통치가 가진 특성은, 사회적 주체는 사전에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실천적 조건 역시 생산되어야만 하는 지속적 훈련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사회적] 주체는, 권리나 이해관계의 연장과 같은 형태로 사회의 기원에 놓일 수 없다. 오히려 이 둘 [권리의 주체와 이해관계의 주체] 사이에는 단절 지점이 있으며, 오직 사회만이 개인이 속한 사회성의 구체적인 내용을 생산함으로써 이 단절을 메꿀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같이 사회적 주체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앞서의 상이한 주체성들 간의 모순 역시 부차적인 것이 되며 사회성이 생산되는 공통의 실천영역에 모두 결합되게 된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이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는 테크닉들을 살펴보자. 이들이 공공부조, 상호부조, 위생학, 교육, 연합 등 어떠한 형태를 가지든 간에, 이들은 모두 주권의 행사나 이해관계의 자연적 작동과는 상이한 영역에 연루된다. 사실 이 모든 테크닉들은, 사회체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서 경제적 평화나 대의representation의 매커니즘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테크닉들은 공통적으로, 다른 방식으로는 조정하기 어려운 개인과 사회 간의 규제적 아이디어들을 상호의존성의 조직된 형태 속에서 균형을 맞추려 한다. 그 목적은 평등한 자들의 사회를 가로지르는 분할선을, 사회체에 대한 귀속의 형태—혹은 사람들이 곧 “연대”라고 부르게 될 형태—로 재정위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상호부조의 예를 들어보자. 뒤팽이 말했듯이, 저축은 그것이 민중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대중적 실천이 될 때에만 그 효과를 발휘한다.<a href="#_edn5" name="_ednref5" title="">[v]</a> 그러나 이 저축기금[caisses] 자체가, 대중적 저축활동을 위해 필요한 행위들을 사회 말단까지 전파시킬 수는 없었다. 이러한 행위의 확산은 오히려 개인을 목표로 삼는 일련의 실천들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는데, “노동자 현금출납부”를 만들고 고용주들이 이를 관리하는 방식은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 속에서 사회적인 것의 통치 속에서 개별화하고 사회화하는 실천을 낳는 상호부조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이러한 실천들의 목표는 상호의존성의 조직이다. 대중저축을 통한 저축기금과 같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큰 규모의 사회적 실천을 구성한다면, “현금출납부”와 같은 실천은 개인화 방향의 말단에 위치하며, 이들은 각각 사회적 품행을 변화시키는 다른 실천들을 뒷받침하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6.</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약하자면,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비-법적인 사회적 관계들이 수렴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이 요소들은 이해관계와 권리라는 개념에 대안이 되는 이론적 시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이 새 대안은 자유와 권위의 범위를 결정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적·법적 기준과 상이한 기준을 제공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이해관계라는 개념에 기대어 구성될 수 없다. 개인의 이기심에서 출발한다면, “사회문제”는 진정 통치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것”의 속성은 이미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빈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전체 사회의 문제이며, 빈곤의 분석은 우리가 앞서 말한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 즉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따라서 개별적인 것과 관련해 “탈이해관계적인” 속성을 가진 원칙에 기반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가 그 자체로 규제의 내적인 기준을 제공해줄 수는 없다. 누가 이러한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탈이해관계가 필요한 정도는 어떻게 결정될 수 있는가? 우리는 기껏해야 하나의 제도적 속성으로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를 책임질 집단적 관점을 정하는 외부적 원칙에 기댈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탈이해관계적 이해관계”라는 개념은 자유와 권위의 범위결정 문제를 다른 영역으로 전치시킬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권리의 용어로 사회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가진 위험성을 폭로한다. 노동에 대한 권리나 공적 부조에 대한 권리에 기반해 “사회문제”를 논한다면, 국가는 사회에 대해 빚진 존재가 되며 개인이 가진 주권의 범위는 크게 확대된다. 이것이 노동권 이론에서 발견되는 “빈민의 은행”으로서의 국가, 시민들이 처한 사회적 불평등에 책임을 지는 보호자-국가의 표상이다.<a href="#_edn6" name="_ednref6" title="">[vi]</a> 하지만 노동권 이론이 효과적으로 보여주듯이, 일단 불평등이 분석에 재도입되면, 권리의 문제를 “실정적 권리를 행사할 능력”의 문제로 전치시키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진다.<a href="#_edn7" name="_ednref7" title="">[vii]</a></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7.</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사회적인 것의 통치라는 과제는, 하나의 새로운 통념, 즉 의무duty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 새로운 관념은 이해관계와 탈이해관계간의 경계를 조절하고, 권리를 대체하여 사회적 상호성의 기반이 된다. 의무는 “사회적 유대”의 생산에 관여할 때에도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콩트에서 뒤르켐에 이르는 사회학자들은 이 개념을 정교화하여 사회적 연대의 핵심원리로 삼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의무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관념으로, 개인의 자유나 주권의 영역을 확대하기보다는 집합체에의 소속과 관련해 상호의존성을 조직하는 개념이다. 의무는 개인적인 특질을 증진시키지 않으며, 어떤 “우월한 자질”을 부과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의무는 개인을 일련의 주관적 경험들로 분해하는데, 여기서 주체는 본인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형식과 의미를 지닌 집단적 경험의 개별적 대응물로서만 등장하게 된다. 동시에 주체의 경험은 의무가 그/그녀에게 부과하는 매 순간의 숫자들만큼 파편화되는데, 이 순간들은 모두 부분적인 계기로서 주체의 형식도 의미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과적으로 의무는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무는 권리처럼 개인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배워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의무는 사회적인 것의 통치라는 특정한 합리성이 작동하는 방대한 교육적 기획의 모체matrix가 된다. “시민교육”은 “시민사회”에 적합한 주체를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의무는 사회적 집합체의 추상적 매커니즘을 통해서 각각의(each) 개인을 모든(all) 타인들과 연결시키며, 이를 통해 권리개념이 함축하는 개인과 국가간의 직접적 대립구도를 붕괴시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의무는 푸코가 이야기했던 전체와 개별omnes et singulatim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전략적 개념이다. 근대 정치합리성의 특징을 전체화하는 동시에 개별화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면,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의무의 개념을 통해 사회적 유대를 생산함과 동시에 개별화된 교육방식을 생산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이 절합의 결과,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개인의 권리에 기반한 민주주의로부터 모두를 향한 모두의 의무에 기반한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끝]. </p>
<div>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hr align="left" size="1" width="33%" />
<div id="edn1">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_ednref1" name="_edn1" title="">[i]</a> “The Subject and Power” in Hubert L. Dreyfus and Paul Rabinow, <em>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em>, 2n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3), p.221 [국역: "주체와 권력", 정일준 편역,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새물결, 1994]을 보라. 여기서 푸코는 통치관계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기본적으로 권력이란, 두 적대자 간의 대립이나 하나를 다른 하나에 복속시키는 문제라기보다는 통치의 문제라 할 수 있다.”</p>
</div>
<div id="edn2">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_ednref2" name="_edn2" title="">[ii]</a> Michel Foucault, “Omnes et Singulatim: Towards a Criticism of ‘Political Reason’” in <em>The Tanner Lectures on Human Values</em>, vol. II, ed. Sterling M. McMurrin (Salt Lake City: University of Utah Press, 1981), p. 253 [국역: "정치와 이성", 정일준 편역, 앞의 책].</p>
</div>
<div id="edn3">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_ednref3" name="_edn3" title="">[iii]</a> <em>The Passion and the Interests: Political Arguments for Capitalism before Its Triumph</e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7), p. 131 [국역: 김승현 역, <열정과 이해관계>, 나남, 1994]. 허쉬먼은 사회적 결정에 있어, “실현된 결과”와 의도되었지만 실현되지는 않은 것, 그럼에도 여전히 활동적이거나 “활동적으로 억압된 것” 간의 불일치를 분석한다.</p>
</div>
<div id="edn4">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_ednref4" name="_edn4" title="">[iv]</a> Colin Gordon, “Foucault en Angleterre” <em>Critique</em> 471-472 (1986): 831.</p>
</div>
<div id="edn5">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_ednref5" name="_edn5" title="">[v]</a> Charles Dupin, <em>Progrès moraux de la population parisienne depuis l’éstablissmement des Caisses d’Epargne</em> (Paris, 1842).</p>
</div>
<div id="edn6">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_ednref6" name="_edn6" title="">[vi]</a> Louis Blanc, <em>L’organisation du travail</em> (Paris, 1848).</p>
</div>
<div id="edn7">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_ednref7" name="_edn7" title="">[vii]</a> 이러한 전환과 그 결과에 대한 분석에 대해서는, Giovanna Procacci, <em>Le government de la misère</em>, Doctoral Thesis, Paris, 1983.</p>
</div>
</div>
<p>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p>
<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153,'/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3+%22%EC%A1%B0%EB%B0%98%EB%82%98%20%ED%94%84%EB%A1%9C%EC%B9%B4%EC%B9%98%2C%20%22%EC%82%AC%ED%9A%8C%EC%A0%81%EC%9D%B8%20%EA%B2%83%EC%9D%98%20%ED%86%B5%EC%B9%98%EC%97%90%20%EA%B4%80%ED%95%9C%20%EB%85%B8%ED%8A%B8%22%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3&t=%EC%A1%B0%EB%B0%98%EB%82%98%20%ED%94%84%EB%A1%9C%EC%B9%B4%EC%B9%98%2C%20%22%EC%82%AC%ED%9A%8C%EC%A0%81%EC%9D%B8%20%EA%B2%83%EC%9D%98%20%ED%86%B5%EC%B9%98%EC%97%90%20%EA%B4%80%ED%95%9C%20%EB%85%B8%ED%8A%B8%22"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3&title=%EC%A1%B0%EB%B0%98%EB%82%98%20%ED%94%84%EB%A1%9C%EC%B9%B4%EC%B9%98%2C%20%22%EC%82%AC%ED%9A%8C%EC%A0%81%EC%9D%B8%20%EA%B2%83%EC%9D%98%20%ED%86%B5%EC%B9%98%EC%97%90%20%EA%B4%80%ED%95%9C%20%EB%85%B8%ED%8A%B8%22','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153?commentInput=true#entry153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관용>, 샤를리 엡도, 그리고 몇 가지 단상
캐즘
http://blog.jinbo.net/chasm/151
2015-04-02T22:50:52+09:00
2015-04-01T12:20:52+09:00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1.</p>
<p style="text-align: justify;">조금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지난 1월 발생한 샤를리 엡도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텍스트로 웬디 브라운의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갈무리, 2010)을 추천하는 글이 두 편이나 연이어 나왔다. 정희진 선생님과 장정일 선생님의 글인데, 두 글 모두 온라인 상에서 약간의 논란을 불러 일으킨 듯 하다. (특히 동일한 책의 서평으로 제출된 두 글이 표면적으로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의 흥미를 끈 것 같다.) 두 서평은 다음의 링크에서 발견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http://hani.co.kr/arti/opinion/column/676164.html?_fr=mr1">정희진, “관용”</a></p>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513">장정일, “이슬람은 약자인가”</a></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번역자이기는 하지만, 이미 번역을 한지 몇 년의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현재로서는 딱히 이슬람이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쪽을 공부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이 논쟁이나 샤를리 엡도 사건에 대해 글을 쓸 생각도 시간도 없었고, 관련해 들어온 원고 청탁도 모두 거절해 왔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을 아끼는 건, 요즘 같은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덕목인 것 같다.) 다만 위에 언급한 서평들과 관련한 일련의 해프닝으로 인해 부득이 관련 논의들을 한 번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서, 늦었지만 잠시 짬을 내 이렇게 블로그에나마 글을 남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우에 덧붙이는 말이지만, 나는 역자가 책의 해석에 있어 어떤 특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으며,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책의 독해를 특정한 형태로 제한하려는 시도 역시 무망한 일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브라운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을 번역한 이유나 이 책이 한국사회에 가질 수 있는 의의에 대한 생각은 이미 역자후기에 자세히 밝힌 바 있다. 다만 특정한 관점에서 이 책을 소개하고 맥락화하는 위의 두 서평이 매우 흥미로운 시차(parallax)를 보여주며, 이러한 시차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단순히 한 책에 대한 해석을 넘어 오늘날 관용 담론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듯 해, 여기서는 그 부분을 중심으로 논의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혹자는 쓸데없는 오지랖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 글은 이번 논란을 통해 책을 소개받은 이들이 혹시라도 가졌을지 모를 혼란을 해소하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역자의 투철한 A/S 정신(!)의 발로이기도 하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2.</p>
<p style="text-align: justify;">한 권의 책을 몇 개의 문장으로 요약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관용>은 말하자면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치였던 관용이 어떻게 후기자유주의의 후-보편주의적(post-universalist) 조건 속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가를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추적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논의에 익숙지 않은 이들에게는 생경하게 들릴 수 있지만, 브라운이 말하는 후-보편주의적 조건이란 자유·평등과 같은 기존의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더 이상 자명한 중립성과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각종 특수성들의 도전에 직면한 상황을 말한다. 예컨대, 오늘날 자유와 평등이 그 외형적 추상성·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기독교인-백인-남성-이성애자라는 특수한 규범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관용 담론의 부흥과 같은 시기에 확산된 정치적 공정함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강박은 이러한 상식이 대중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후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브라운에 따르면, 오늘날 관용은 이러한 보편성의 위기에 직면해 자유와 평등을 “대리보충(supplement)”하기 위해 등장한다. 즉, 자유주의적 가치의 외형적 중립성과 추상성이라는 ‘형식’은 지키되, 실질적으로는 특수한 정체성들에 자유와 평등이 아닌 관용과 인정을 제공하는 형태로 기존 체제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것이 후기자유주의에서 관용 담론의 효과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초기 자유주의·계몽주의 시기에는 믿음과 표현, 양심의 자유와 관련되었던 관용은, 오늘날에는 문화, 섹슈얼리티, 생활양식 혹은 거의 인종화된 형태로 제시되는 정체성의 문제로 옮겨가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용담론은 이 보편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유주의 헤게모니를 유지·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일까? 브라운에 따르면, 이는 주권국가 내부적으로는 물신화된 세속주의를 통해 헤게모니적 정체성을 비가시화하는 동시에 다른 정체성들을 사사화하고 본질화하는 방향으로, 외부적으로는 문명담론과 결합해 자유주의의 동일자와 타자 간의 이분법을 구성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굳이 나누자면 <관용>의 전반부는 전자에, 후반부는 후자의 문제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속주의와 문명담론을 결합시키고 주권국가 내·외부의 비자유주의적 타자들 간의 단락을 형성하는 경첩이, 바로 서구자유주의에 특수한 것으로 가정되는 ‘(문화와 정체성에 가지는)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브라운에 따르면, 오늘날 자유주의는 자유와 자율성을 문화에 대해 ‘탈출구’를 가지는 것과 동일시하면서, 이에 기반해 문화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와 문화와 정체성에 침윤된 ‘저들’간의 이분법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한다. 이를 통해, 문화로부터 자율적인 우리는 관용의 ‘주체’가 되며, 문화에 사로잡힌 저들은 (이제는 정체성과 문화에 부과되는 것으로 변화한) 관용이 적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받아야 하는 ‘대상’의 자리를 할당 받게 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몇 년 전 문제가 되었던 무함마드 만평이나 이번 샤를리 엡도 사건을 둘러싼 논의들이, <관용>의 문제의식에 비추어 특별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브라운 본인은 <관용>을 출판한 다음해 무함마드 만평을 둘러싼 논의를 주제로 컨퍼런스를 주최한 바 있고, Talal Asad, Saba Mahmood, Judith Butler 등이 참여한 이 컨퍼런스에 제출된 원고는 <em>Is Critique Secular?</em> 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즉, 이 문제를 둘러싼 논의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좀 더 고전적 형태의) 관용의 문제와 이슬람이라는 인종화된 정체성에 대한 (후기자유주의적) 관용의 문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진 구조를 만들어 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예컨대 무함마드 만평을 둘러싼 논의에서, 만평을 옹호하는 입장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관용’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이슬람의 ‘불관용’을 비판하면서, 이를 그들 정체성과 문화 자체에 대한 자신의 ‘불관용적’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한다. 반대로 이슬람에 대한 관용을 강조하는 입장은, 표현의 자유가 특정한 집단의 전유물이자 역사적 산물임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부재한 이슬람의 ‘문화’를 ‘관용’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무함마드 만평을 둘러싼 논의들은 ‘표현의 자유를 관용하는 이들이 왜 이슬람의 문화적 조건은 관용하지 못하는가’ 혹은 ‘표현의 자유를 관용하지 못하는 이슬람의 문화를 관용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고전적 관용의 의미와 후기자유주의적 관용의 용법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관용의 세계는 불관용을 관용해야 하는가, 아닌가. 관용한다면 어디까지 관용해야 하는가’라는 전형적인 관용담론의 틀 속에서 맴돌게 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3.</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정희진과 장정일의 글을 다시 읽는다면, 우리는 이들의 논의가 각각 어느 지점에서 <관용>의 문제의식을 잡아내고 또 어느 부분에서 눈을 감는지, 그리고 두 글이 왜 동일한 책을 두고 상이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정희진의 글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한다. 정희진의 말처럼, 표현의 자유는 탈맥락적인 보편적 가치라기보다는, 역사적·사회적으로 구성되어 특정한—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은—정치적 효과를 발휘해 온 가치이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치를 보편적인 것으로 옹호해야 하는가’라는 규범적 질문과는 다른 차원의 논의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가치가 지닌 지배적 속성과 기만을 폭로하면서도, 사건을 둘러싼 ‘표현의 자유 대 증오발화’라는 구도의 역사적·정치적 구성을 문제 삼기보다는, 사태의 본질을 “절대약자”인 이슬람을 “모욕”한 데 대한 “누적된 분노”가 테러로 표출된 것으로 재정의한다. (서구와 이슬람의 절대적 구분이 근대적 구성물임을 무시한 채,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며 이번 사건을 본질화된 문명 정체성 간의 갈등의 일환으로 위치 짓는 과감한 주장은, 실수로 간주하고 넘어가도록 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정희진의 재정의에서 우리는 ‘상처입은 정체성(injured identity)’과 피해자화(victimization), 인정, 그리고 증오발화를 둘러싼 ‘책임’과 같은, 웬디 브라운이 오늘날 관용담론의 부흥을 뒷받침하는 후기근대적 ‘조건’(‘대안’이 아니라)으로 제시하는 언어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정치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을 모욕과 상처, 정체성과 분노의 문제로 대체하는 전형적인 후기자유주의의 어법으로, 그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는 별도로 이 글에서 정희진은 자신의 입장을 장정일이 “타락한 관용”이라 비판하는 입장과 차별화하는데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보다 흥미로운 장정일의 글은 이러한 점을 정확히 짚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글은 정희진의 글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 서평을 전후로 해 이슬람에 대한 몇 편의 단문을 발표했지만, 여기서는 이 서평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사실 위의 정희진의 글과 마찬가지로 그의 서평 역시 급하게 쓰여진 듯하며, 몇 가지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중대하다면 중대한 약점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샤를리 엡도 사건을 둘러싼 계급적 배경을 지적하는 것은 그가 주장하듯이 사태를 계급관계로 ‘환원’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 또 그가 이슬람이 약자 혹은 아이임을 자처한다고 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그는 이슬람 내부에 자기-비판의 목소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샤를리 엡도 이후 얼마나 많은 무슬림들이 테러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는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이슬람을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더 나아가 심지어 ‘어른’으로 성장해야 할 하나의 ‘인격체’—처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정일의 이슬람에 대한 수사가 ‘문명 충돌론’을 수행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은 정당하고 중요하지만, 짧은 잡지 기사의 성격에서 오는 한계일수도 있으므로 간단히 지적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관용과 관련한 문제로 좁혀 보면, 그는 이 글에서 “관용의 엄격한 사용”과 “관용의 타락한 사용”을 구분한다. 전자가 상대를 “어른”으로 대우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상대를 “아이”로 취급하고 비판을 자제하며 현상태를 유지하면서 상대를 “책임”에서 면제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슬람을 아이 취급하는 서구의 좌파(+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를 약자로 자임하는 이슬람의 기만행위를 지적할 때, 그 이슬람과 대척점에 있는 비이슬람 ‘서구’ 혹은 ‘우리’는 암묵적으로 ‘어른’으로 가정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관용의 엄격한 사용과 타락한 사용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우리는 이미 도달하였으나 이슬람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가정되는 이 ‘어른’의 조건이 무엇인지 글 어디에서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혹시 탈종교화된 세속주의일까? 아니면 개인의 자율성이나 표현의 자유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일까? 혹은 서평에 등장한 표현대로 자신에 대한 조롱에 “문화의 힘으로” 맞서는 (그야말로 관용적 태도라 부를만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브라운은 <관용>의 6장 “관용의 주체들: 문명인 ‘우리’와 야만인 ‘그들’”에서, 정확히 이러한 방식의 논의가 가진 문제점을 지적한다. 프로이트의 <집단 심리학과 자아분석>을 꼼꼼히 독해하면서, 그녀는 문화에 대한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자유주의적 신화에 기반해 집단정체성을 미성숙으로의 퇴행으로 규정한 프로이트의 논의가, 이후 어떻게 자유주의적 자율성-성숙-개인-세속주의-문명이라는 계열과 집단정체성-원시-충동-근본주의-야만성이라는 대립구도로 발전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이 오늘날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문명 담론 속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장정일과 마찬가지로 브라운도 어른과 아이의 대립구도와 그에 기반한 관용담론을 문제삼지만, 여기서 초점은 비자유주의적 타자의 ‘성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타자로서 아직 개인으로 분화되지 않은 침윤된(saturated) 정체성을 그려냄으로써 스스로를 문화 혹은 권력과 무관한 것—그러하기에 보편성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자유주의의 내밀한 환상을 폭로하는데 맞춰져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브라운의 문제의식은, ‘관용하는 어른’과 ‘관용받는 아이’라는 대립구도를 가능케 하는 자유주의의 환상과 이분법적 구조를 탈구축하고, 후기자유주의의 조건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즉, 이미 텅 비어버린 보편적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태도—가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와 결합할 위험성을 지적하는데 있다. 브라운이 <관용>의 7장 전체에 걸쳐,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다문화주의적 옹호가 페미니즘과 대립된다고 보는 수잔 오킨(Susan Okin)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 어떻게 자유주의의 비문화성이라는 환상을 재생산하고 자유주의 내 여성억압을 비가시화하는데 기여하는지 조목조목 지적하고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기근대적 조건에 대해 성찰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자유주의적 부정을 문제화하려는 브라운의 시도와는 달리, “타락한 관용”을 비판하면서 ‘미성숙’의 책임을 타자에게 돌리고 그 성숙의 기준에 대해선 암묵적으로 서구를 가정하는 듯한 장정일의 논의는 (종종 식민주의와 결합해 온) 고전적인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제스처로 회귀하고 만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볼 때, 둘의 논의는 서로 반대방향에서 출발하여, 자유주의의 가치와 후기자유주의의 조건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글들에 한정해 이해할 때, 정희진의 논의가 기존의 자유와 평등이 가진 특수한 성격을 폭로하면서 인정과 관용을 요구하는 후기자유주의의 논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면, 장정일은 후기자유주의 상황에서의 관용 담론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이에 대한 비판을 위해 다시 한 번 이미 물신화된 형식적·추상적인 자유주의의 가치들에 은밀히 기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 내부에서의 진동이야말로 후기자유주의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정치와 보편성의 문제를 사고하려는 좌파 담론이 맞닥뜨리는 곤경으로, 브라운이 이 책을 포함한 그녀의 저작들—예컨대, 그녀의 유명한 ‘좌파 멜랑콜리아론’—에서 꾸준히 문제삼고 고민해 온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4.</p>
<p style="text-align: justify;">어쩌면 논문도 아닌 짧은 신문 칼럼들에서 너무 과한 논의를 끄집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이 글을 쓰기를 저어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진동이 이들만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한국과는 또 다른 담론 지형을 가지지만) 소니의 <더 인터뷰> 사태나 샤를리 엡도 사건을 논하면서 미국의 자유주의 우파가 표현의 자유에 강조를 둔 반면 자유주의 좌파가 증오 발화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으로 입장차를 보였을 때, 이러한 분열은 앞서 이야기한 구도의 반복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오바마가 최근 연설에서 자신들의 적은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이지 무슬림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이에 대해 문명담론에 기댄 공화당 지지자들이 그러한 구분이 과연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한 것이냐고 냉소할 때, 이 논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역시 동일한 논리의 반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논의가 이러한 진동 속에 갇힐 때 발생하는 문제점 중 하나는, 이 구도 속에서는 “좋은 무슬림 대 나쁜 무슬림”(이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문제에 천착해 온 Mahmood Mamdani의 유명한 책 제목이기도 하다) 혹은 이것의 좀 더 극단적인 여성 버전으로서 (흥미롭게도 둘 다 차도르를 쓴 것으로 상상되는) “억압당하는 이슬람 여성과 여성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와 같은 대립쌍을 벗어난 다른 무슬림들의 목소리가 발화될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구도에서는 다시 한 번 이 이분법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가가 문제가 될 뿐이며, 그 배경을 이루는 것은 관용이 어디까지 허용될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앞서의 두 칼럼에서 이슬람이 ‘약자’인지 ‘강자’인지를 해명하는 문제가 그토록 중요하게 다뤄지고, 두 글 모두 ‘거짓’ 관용과 ‘진정한’ 관용을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구분하려 시도하는 숨은 이유일 것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샤를리 엡도 사건이 있기 며칠 전 나이지리아의 바가(Baga)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보코하람의 테러로 수백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벌어진 샤를리 엡도 사건과는 달리, 이 학살은 전세계 미디어의 폭발적 관심도, 각국 정상들의 어떠한 애도 표시도 받지 못했다.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미디어의 위선을 지적하거나 오늘날 엄연히 존재하는 생명간의 가치 차이—테러리즘의 논리가 은밀히 기대고 있는 바로 그 차이—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서구제국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립에 의해 가장 고통 받는 이들 그리고 가장 최전선에서 일상적·비일상적으로 이에 순응·저항·타협하고 있는 이들은 피지배 무슬림들이라는, 평범하지만 너무 자주 잊혀지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문제를 단순히 서구 대 이슬람, 세속주의 대 근본주의라는 틀에서 조명하는 것은, 바가를 잊고 샤를리 엡도만을 비췄던 미디어들처럼 전체 문제를 매우 협소하게 바라보는 시각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자유주의 내부에서의 진동을 넘어서 새로운 정치공간을 구성할 것을 촉구하는 브라운의 문제의식은, 이슬람이 (불)관용의 대상이어야 하는가를 논하는 관용담론을 벗어나 이슬람의 현재적 조건들을 다양한 역사적·정치적·사회경제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고,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회정치적 운동들의 동학에 주목하고 연대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서구사회에서 “절대약자”로 고통 받고 있음을 개탄하며 은근히 그들의 행위성을 부인하거나, 그들을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뭉뚱그리면서 미성숙을 지적하고 ‘어른’이 되라고 훈계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이론적·실천적 접근이 요구됨은 물론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5.</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장정일의 글에 전체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지점이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샤를리 엡도를 둘러싼 한국에서의 논의들이 그 사건을 한국 상황에 필요한 교훈이나 경고로서만 전유함으로써 이 사건을 “대한 늬우스”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기대어 한국 사회에서 “가짜 좌파”가 누구인지 정체성 논란을 벌이고 있는 장정일 본인이 이러한 비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는 잘 모르겠다.) 부분적으로는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참세상>을 중심으로 제출되었던 몇몇 인상 깊은 기사와 논평을 제외하면, 샤를리 엡도 이후 쏟아져 나온 이슬람에 대한 논의들은, 사건에 대한 반응들을 논평하는 것을 넘어 이슬람의 문제 자체를 다루고 논의를 풍부하게 진전시키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마도 이는 이슬람과 관련된 고민들이 아직 한국에 생생한 현실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풍부한 논의가 진행되기에는 논의의 자원 자체가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실 두 분 선생님들이 출판된 지 5년도 더 된 (원서가 출판된 지는 10년 가까이 된) '번역서'를 이번 사건과 관련한 필독서로 소개해주신 것은 고마운 일이긴 하나, 이것이 이 사건을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원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다. 특히 지난 10여년 간 부쩍 늘어난, 웬디 브라운과 유사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관점에서 이슬람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는 다양한 연구들, 예컨대 Abu-Lughod나 Asad, Mahmood나 Mamdani 등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논의된 적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비록 주로 서구-이슬람 간의 관계 속에서 논지를 전개하는 이들의 특수한 맥락으로 인해, 이들의 논의는 한국에서의 논의에 하나의 참고지점으로서만 의미가 있겠지만.)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소한 학술적·담론적 차원에서, 오늘날 이슬람은 앞서 말한 자유주의 내의 진동—즉, 이슬람과 대면하여 서구의 가치를 옹호하는 문명론적 자유주의자들과 공동체의 특수한 문화를 강조하는 다문화적 공동체주의자들 간의 대립—을 넘어, 새로운 정치와 보편성을 사유하려는 이들에게 중요한 화두로 기능하고 있다. 한편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criticism과 그것이 가능한 조건에 대한 비판critique을 엄격히 구분하며 이슬람 근본주의의 문제에 접근하는 고전적 맑스주의의 입장이 있다면, 다른 쪽에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재정의하고 달라진 조건 속에서 이를 반복해야 한다는—그러나 명백히 ‘반복(불)가능성iterability’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구분되는—입장이 존재한다. 또 누군가는 아예 칸트적 보편성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보편성이 가능한지를 질문하고 그것을 이슬람 철학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도 하며, 혹은 서구 중심의 자유주의 공리를 해체하여 이슬람의 목소리가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고 이에 따라 주체·행위성·세속주의 등의 개념을 재정의하려 시도하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흐름도 존재한다. 샤를리 엡도 이후 한국사회에서 한껏 높아진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이슬람 내부의 문제들에 대한 진중한 천착과 함께 이러한 자유주의 너머 혹은 제국주의 너머를 고민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신이 한 번도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자, 그가 바로 적이다”라는 제사(題詞)로 시작하는 <관용>의 말미에서 웬디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대안은... 자유주의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을 성찰하고, 자유주의가 지금까지 자신의 타자이자 구성적 외부로 삼아왔던 것들과의 조우 속에서 변화될 가능성을 개방하는데 있다. 이러한 개방은, 도덕적 자율성과 유기체 간의 대립 구도 혹은 세속주의와 근본주의 간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복수의 목소리를 가진 서구와 이슬람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샤를리 엡도 사건 이후 “Je Suis Charlie”라는 구호 속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러한 복수의 목소리에 개방된 공간일 것이고, 이러한 폐쇄를 우려하면서 제기된 논의들이 자유주의 양극 사이를 오갈 때 다시 한 번 잊혀진 부분도 바로 이러한 공간일 것이다. 물론 브라운 본인이 인정하듯이, 이러한 논의는 아마도 당장 손에 잡히는 선명한 해답을 제공해주지는 못하며, 오히려 앞서 말한 새로운 과제와 문제들을 제기할 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올바르게 제기된 문제는 손쉬운 답변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법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151,'/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1+%22%3C%EA%B4%80%EC%9A%A9%3E%2C%20%EC%83%A4%EB%A5%BC%EB%A6%AC%20%EC%97%A1%EB%8F%84%2C%20%EA%B7%B8%EB%A6%AC%EA%B3%A0%20%EB%AA%87%20%EA%B0%80%EC%A7%80%20%EB%8B%A8%EC%83%81%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1&t=%3C%EA%B4%80%EC%9A%A9%3E%2C%20%EC%83%A4%EB%A5%BC%EB%A6%AC%20%EC%97%A1%EB%8F%84%2C%20%EA%B7%B8%EB%A6%AC%EA%B3%A0%20%EB%AA%87%20%EA%B0%80%EC%A7%80%20%EB%8B%A8%EC%83%81"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51&title=%3C%EA%B4%80%EC%9A%A9%3E%2C%20%EC%83%A4%EB%A5%BC%EB%A6%AC%20%EC%97%A1%EB%8F%84%2C%20%EA%B7%B8%EB%A6%AC%EA%B3%A0%20%EB%AA%87%20%EA%B0%80%EC%A7%80%20%EB%8B%A8%EC%83%81','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151?commentInput=true#entry151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포스트 히스토리와 정치- 몇가지 난삽한 정리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신화
캐즘
http://blog.jinbo.net/chasm/107
2009-05-28T00:30:57+09:00
2009-05-28T00:30:57+09:00
<!--FCKeditor--><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4월에 <교수신문>에 실린 <a href="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8058#30004">아즈마 히로키의 인터뷰</a>를 며칠 전에야 발견하곤, 예전 기억을 떠올려 1년 전 쯤 썼던 글 하나를 링크해 놓는다. 그리고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블로그에 약간은 두서없이 정리해본다. 요즘 여러가지 일로 폭주 중이라 긴 포스팅을 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한 해가 거의 절반 가까이 넘어가고 있는데, 올해들어 세 번째 포스팅이니 이건 블로그를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아닌 상태이지만, 조만간 여유가 좀 생기면 EM님처럼 블로그를 한 번 손 봤으면 싶다. 특히 이 어중간한 폰트부터...</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링크를 거는 글은 재작년에 창간호 0호(혹시 누런 표지와 빽빽한 편집의 이상한(?) 책을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를 낸 ACT 1호에 보낸 글인데, 현재 ACT는 재정난 등의 이유로 웹진으로 방향을 바꾼 상태이다.(올해부턴 1년에 한 번 정도 웹진에 실린 글들을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라는 소식은 들었다.) 웹진 홈페이지 오픈은 올해 초에 이뤄졌음에도, 아직 이래저래 정돈이 안된 듯한 느낌 때문인지 방문자수는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다.(갤러리에서 내는 문화예술비평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고전적인(?) 웹디자인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조만간 새로 업데이트 할 예정이라는 소식만 들었는데, 오프라인으로 발간될 글들을 모아놓는 半-아카이브 형태의 잡지가 될지, 예전 컬티즌 같은 짧은 평론 위주의 웹진이 될 지는 잘 모르겠다.(다른 건 몰라도, 범죄소설의 팬으로서 조영일씨의 탐정론은 계속 연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a href="http://www.a-act.net/act/act.html">http://www.a-act.net/act/act.html</a></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위 링크의 목차 중 <우리, 포스트모던 동물들>이 작년에 기고한 글이다. 당시에는 오프라인 발간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 분량이 많아 온라인 상에서는 읽기 힘들지도 모르겠다.(PDF 파일을 요청하신 분이 있기에 혹시 다른 분들도 관심이 있을까 싶어, 초고의 PDF 파일도 같이 올려놓는다. 진보네 블로그에 첨부파일을 올리는 방법을 시험하다, 그냥 예전에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 해 <a href="http://blog.naver.com/towardpaz">링크</a> 걸어 놓는다. 진보네 블로그에 파일 올리는 방법을 아는 분 있으면 알려주시길..)</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사실 이 글의 주된 내용은 이 블로그의 예전 글들에서 한 번 정도 언급되었던 내용이다. 말하자면 <a href="http://blog.jinbo.net/chasm/?cid=2&pid=48">[새로운 민족국가 만들기와 동물-속물적 주체성]</a> <a href="http://blog.jinbo.net/chasm/?cid=2&pid=72">[책 두 권]</a> , [<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89">코제브의 동물/속물론]</a> 의 확장증보판인 셈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글을 쓸 당시에는 미처 참고하지 못했지만, 이후에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던 두 권의 책,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김항 역, 새물결, 2006)와 Wendy Brown의 "Politics Out of History"(Princeton Univ Press, 2001)도 이번 기회에 짧게 정리해놓는다.(최근 포스트 히스토리라는 조건과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김항씨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새물결, 2009)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직 정리할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img id="my_post_img3042272"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attach/1994/130116231.jpg')" height="275" alt="" width="200" onload="setTimeout('fixImage(3042272)',300)" src="/attach/1994/130116231.jpg" /> <img id="my_post_img4501741" style="WIDTH: 182px; CURSOR: hand; HEIGHT: 274px" onclick="viewPostImage('/attach/1994/130118329.gif')" height="246" alt="" width="160" onload="setTimeout('fixImage(4501741)',300)" src="/attach/1994/130118329.gif"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먼저 Wendy Brown의 "Politics out of History"
<politics out="" of="" history=""></politics>
<politics out="" of="" history=""></politics>
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역사의 종결 이후에 "정치"라는 것이 사유되는 방식의 변화를 다룬다. 이 책에서 Brown이 던지는 질문은, 기존의 정치적 행위들을 지탱해주던 기반으로서의 공통의 큰 이야기가 사라진 상황에서, 정치는 어떤 것으로 변화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역사의 종결 이후 "최후의 인간"들의 도덕에 대한 집착을 조롱한 니체를 따라, Brown은 포스트 히스토리 공간에서의 정치의 형태를 역사와 적대에 대한 분석을, 개인과 도덕적 선택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하는 "정치적 도덕주의(moralism)"의 범람으로 진단한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Brown에 따르면, 이 정치적 도덕주의는 총체적인 역사적 내러티브가 붕괴했으나, 여전히 새로운 대안적 담론들을 찾지 못한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이 정치적 도덕주의에서 정치에 대한 상상은, 역사적-총체적인 현실 분석을 상실한 채 개인의 선택과 그가 행한 도덕적 실천의 결과로 협소화된다. 즉, 정치적 행위는 고립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실천으로 이해되며, 정치적 갈등의 원인은 탈정치화-역사화되어 선한 개인의 행위와 악한 개인 행위 간의 대립으로 평면적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상상틀의 변화 속에서, 정치는 공통의 이야기 속에서 현존하는 차이를 극복하는 연대의 기획이라기 보다는, 현존하는 차이들 간의 본질화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임의 장으로 변해버린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Brown이 정치적 도덕주의를 이야기할 때, 그녀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정치적 공정함과 증오 발화를 둘러싼 정치적 담론들이지만, 조금 비약해 말하자면, 오늘날 정치에 대한 담론들 전반이 이러한 도덕주의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크게는 제국주의적 전쟁의 문제를 개인의 전쟁 선호증으로 돌리는 담론에서부터, 작게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착한 소비"와 "착한 기업" 같은 담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담론들의 핵심적 특징은 그 분석에서 문제가 발생한 역사적-총체적 분석을 삭제한다는데 있다. 대신 이 분석의 공백을 메꾸는 것은, 어떤 선한 혹은 악한 "개인"의 도덕적 "선택"이며, 결국 이러한 개인의 도덕적 선택을 둘러싼 갈등이 정치적 행위를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협소화된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Wendy Brown에 따르면, 이러한 정치적 도덕주의의 궁극적 효과 중 하나는, 주체를 정치적 책임과는 무관한 "순수한" 주체로 남아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정치는 나의 존재 형식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삶 속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도덕적 선택에 한정된 것이기에, 개인은 정치적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떠맡는 것에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Brown이 보기에, 오늘날 정치적 도덕주의에 공모하는 주체들을 사로잡고 있는 기본적인 자화상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부모(국가)를 비난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내가 아닌 부모이기에, 이 주체들은 이러한 제한된 상상의 틀을 넘어, 어떻게 부모가 될 수 있을까라는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거나 직접 부모가 되는 어려운 책임을 방기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설적으로 국가를 (원래 공정해야 할) 부모로 "구성하고", 자신들의 역능을 투정부리는 아이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나 자신이 부모가 되기 위한 조직의 구성이나 이에 대한 고민도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순수한 목적을 가진 존재들이고, 따라서 남은 문제는 우리의 부모가 이러한 순수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Brown의 말처럼, 바로 이러한 "순수한" 도덕적 정치주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책임을 짊어진 역사적 주체는 될 수도 없고, 되기로 싫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가치를 통해 정치의 실천을 재전유하려는 어떤 부인의 매커니즘이다.(그리고 아즈마 히로키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이러한 부인의 매커니즘이야말로 "속물적 주체성"의 기본적인 존재 형식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Wendy Brown의 책이 포스트-히스토리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속물의 정치"의 최신 판본을 그려내고 있다면,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은 김항 씨가 역자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포스트-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어떻게 새로운 초월성과 그것에 기반한 새로운 "인간의 정치"를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는 어떤 형태의 초월성도, 진리에 대한 믿음도, 그리고 이에 대한 극한의 추구도 존재하지 않는, 즉 "끝까지 가지 않는" 전후 일본 사회에 분노하고, 자신들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신화"와 초월성을 복원하려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미묘하게 정반대를 향해 있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즉, 미시마 유키오가 일본 사회에서 현존해온 초월성의 형태인 천황을 복구하여 굳건히하는 것을 꾀한다면, 전공투는 현질서의 "부정"을 통한 무(無)의 초월성을 구성하기를 꿈꾼다. 어색한 운동권 어투가 난무하는:-) 이들 사이의 격한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논점들, 즉 게임과 유희의 차이, 지속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강조와 새롭게 구성되는 공간에 대항 강조의 차이, 현존하는 관계의 존중과 이 관계에 대한 거부 간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초월성의 구성 방식에 대한 이들의 입장차 둘러싸고 순환하는 쟁점들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김홍중의 표현을 빌려와, 미시마 유키오가 과거로부터 발견된 초월적 요소를 강화하려는 "속물의 정치"를 꿈꾼다면, 전공투는 자기-부정의 폭력 자체를 새로운 신화로 구성하려는 "구원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미시마 유키오가 전공투에게 연대투쟁을 제안하며, "그래서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을 때, 그는 전공투와 자신의 논쟁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날카롭지만, 두 입장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를 뭉개버리려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뭉스럽다. 이 절대적 부정성의 추구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리 없으리라.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사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 간의 입장차는, 포스트 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새로운 역사의 정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동요하며 오가는 양 극점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를 지극히 단순화하자면, 이 두 입장차는 우파 슈미트와 좌파 벤야민 사이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이 둘 간의 상반된 입장차가 한 인물의 삶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뒤섞인 예는, 아마도 혁명적 아나코-생디칼리스트의 대표적 이론가인 동시에 파시즘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리우는, (그리고 슈미트와 벤야민 모두가 참고하고 있는) 조르쥬 소렐(Georges Sorel)의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정치 공간 속에서, 폭력과 총파업을 통한 새로운 노동자 계급의 신화 구성을 주장했던 소렐은, 이후 "위대한 프랑스 골(gaul)족의 신화"에 기반한 민족 통일성의 구축을 강조하는 열렬한, (그에게 좌우파란 전통적인 잣대의 적용이 가능하다면) 우파 민족주의자로 입장을 바꾼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충분히 이해가능하지만, 소렐 자신은 변절자라는 주위의 비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의 일관성을 변호했다고 한다. 아마도 포스트 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새로운 역사의 정치를 구성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소렐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새로운 초월성의 구성에 있어 존재하는 두 벡터의 차이, 즉 과거의 신화를 재구성하려는 "속물의 정치"의 벡터와 새로운 "구원의 정치"의 벡터 간의 차이였으리라. 그리고, 따라서 오늘날 포스트-히스토리 공간에서의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에 대한 사고 역시, 바로 이 구분의 정교화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마지막으로 따로 글을 쓰려다가.. 그냥 덧붙임.</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도덕주의와 신화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최근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한국 정치에서의 탈역사적 도덕주의의 형태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쏟아진 수많은 애도의 말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애도의 형태는, "노무현의 정치적 입장 혹은 과오를 떠나, 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 만은 존경한다"는 입장들이다. 물론 이러한 애도사에서 표면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진정성과 인간성이라는 가치에 여전히 목말라 있다는 단순한 사실일 것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하지만 이 평범한 애도사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고인의 진정성을 기리는 이 평범한 애도사의 레토릭이, 역설적이게도 고전적인 "진정성"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적 주체와 정치적 주체에게 "진정성" 혹은 "인간성"의 자리는, 정치적 입장을 뺀 나머지 "인간" 쪽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성의 자리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수영이 자신의 속물성을 탓하며, "진정성"의 가치를 통해 정치적 주체 혹은 예술적 주체로서의 김수영과 생활인 김수영 간의 불가피한 간극을 메우려 할 때, 부정되어야 할 것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김수영이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김수영이었을 것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따라서 정치인 노무현의 정치적인 죽음을 앞에 두고, 정치적 주체와 분리된 "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을 말하는 것은, 그것의 정당성을 떠나서, 인간성과 진정성에 대한 어떤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애도사에서 말하는 "인간성"과 "진정성"이란, 아마도 정치적 내용이나 역사성과는 분리되어 이해될 수 있는(혹은 이해되어야만 하는) 어떤 형식적 가치일 것이다. 고인의 인간성과 진정성을 기리기 위해 부정되어야 할 것은, 생활인으로서의 노무현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를 추구했던 정치적-역사적 주체로서의 노무현이고, 진정성과 인간성의 자리는 이제 정치와 역사 "외부"의 자리로 전치된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한 형식적 가치가 되어버린 인간성과 진정성은, 그 정치-윤리적 의미가 탈색되어 "청렴성", "사람좋음", "열정" 등으로 치환가능한 단어가 되어 버린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이러한 전치와 형식화를 통해서만, 그는 가장 "인간다운" 혹은 "진정성을 가진" 대통령으로 추모될 수 있을 것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노무현은 자살로 "진정성과 인간성의 신화"가 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그 진정성과 인간성 자체가 아무런 역사적 내용없는 텅 빈 형식적 가치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텅 빈 형식의 제시는, 노무현이라는 아이콘과 이 아이콘이 상징하는 "민주화"라는 텅 빈 내러티브(그래서 모든 적대와 투쟁들이 수렴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기능해온 역할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지난 10여년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담론은 민주화의 시간을 지속시킴으로써 역사의 종결을 지연시키는 "커다란 비이야기"로 기능해왔고, 이 담론이 작동하는 한에서만, 소위 민주화 세대는 역사가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다시 역사의 인간이 되는 것도 원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믿음 자체는 포기하지 않는, "텅 빈 것이라도 어떤 형식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고유한 "속물적" 주체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죽음으로 강화된 텅 빈 노무현의 신화가,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이 죽음이 끊어질 뻔 했던 텅 빈 형식과 가치의 생명력을 지속시키는 영양제가 될 지, <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pid=573">EM님의 말처럼</a> 지난시기 퇴화된 꼬리뼈처럼 번거롭게 남아있던 텅 빈 가치를 "애도"로써 청산하는 기제가 될지는, 아마도 노무현의 죽음을 (비)애도하는 방식을 둘러싼 다층적인 투쟁과 사회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한가지가 있다면, 두 경우 모두 새로운 역사와 고유한 "인간"의 정치를 꿈꾸는 "우리"(혹은 "누군가")에게 그리 바람직한 상황은 아닐 것 같다는 명확한 사실 뿐이리라... </p>
<p align="justify"> </p><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107,'/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07+%22%ED%8F%AC%EC%8A%A4%ED%8A%B8%20%ED%9E%88%EC%8A%A4%ED%86%A0%EB%A6%AC%EC%99%80%20%EC%A0%95%EC%B9%98-%20%EB%AA%87%EA%B0%80%EC%A7%80%20%EB%82%9C%EC%82%BD%ED%95%9C%20%EC%A0%95%EB%A6%AC%20%EA%B7%B8%EB%A6%AC%EA%B3%A0%20%EB%85%B8%EB%AC%B4%ED%98%84%EC%9D%B4%EB%9D%BC%EB%8A%94%20%EC%8B%A0%ED%99%94%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07&t=%ED%8F%AC%EC%8A%A4%ED%8A%B8%20%ED%9E%88%EC%8A%A4%ED%86%A0%EB%A6%AC%EC%99%80%20%EC%A0%95%EC%B9%98-%20%EB%AA%87%EA%B0%80%EC%A7%80%20%EB%82%9C%EC%82%BD%ED%95%9C%20%EC%A0%95%EB%A6%AC%20%EA%B7%B8%EB%A6%AC%EA%B3%A0%20%EB%85%B8%EB%AC%B4%ED%98%84%EC%9D%B4%EB%9D%BC%EB%8A%94%20%EC%8B%A0%ED%99%94"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107&title=%ED%8F%AC%EC%8A%A4%ED%8A%B8%20%ED%9E%88%EC%8A%A4%ED%86%A0%EB%A6%AC%EC%99%80%20%EC%A0%95%EC%B9%98-%20%EB%AA%87%EA%B0%80%EC%A7%80%20%EB%82%9C%EC%82%BD%ED%95%9C%20%EC%A0%95%EB%A6%AC%20%EA%B7%B8%EB%A6%AC%EA%B3%A0%20%EB%85%B8%EB%AC%B4%ED%98%84%EC%9D%B4%EB%9D%BC%EB%8A%94%20%EC%8B%A0%ED%99%94','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107?commentInput=true#entry107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괴물, 서사 그리고 관용과 안전
캐즘
http://blog.jinbo.net/chasm/95
2008-08-24T03:15:30+09:00
2008-08-24T03:15:30+09:00
<!--FCKeditor--><p align="justify"> <img id="my_post_img2084853"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attach/1994/240159215.jpg')" height="272" alt="" width="200" onload="setTimeout('fixImage(2084853)',300)" src="/attach/1994/240159215.jpg" /> <img id="my_post_img5252877" style="WIDTH: 200px; CURSOR: hand; HEIGHT: 272px" onclick="viewPostImage('/attach/1994/240159431.jpg')" height="299" alt="" width="200" onload="setTimeout('fixImage(5252877)',300)" src="/attach/1994/240159431.jpg"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요즘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는 책들은 주로 "괴물(성)(monstrosity)"에 관한 것들이다.(푸코나 문화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 블로그의 글을 주의깊게 봐왔던 사람이라면, 이 주제가 그리 뜬금없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처음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괴물이자 동시에 이웃(neighbor)의 형상인 "사이코패스"를 둘러싼 담론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대중적으로 순환되는 담론들 속에서, 사이코패스는 외형상 식별해내기 어렵지만 타고난 두뇌 결함 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과잉된" 나르시스트들이다. 그리고 이것만큼 사이코패스가 우리 시대 괴물-이웃의 대표적 형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또 있을까?)</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아무튼 사이코패스로 촉발된 관심이, 지금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드라큘라 백작과 미스터 하이드 그리고 범죄 인간(homo criminalis)을 탄생시킨 바로 그시기)의 문학과 범죄학까지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괴물이란 주제에 대한 영어 자료들은 꽤나 방대하고 그 분야도 세분화되어 있는데 반해(예컨대, 레즈비언 뱀파이어 형상에 대한 연구서들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 한국어로 된 자료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참고할만한 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몇 년 전에 번역되어 나온 리처드 커니(Richard Kearney)의 <이방인, 신, 괴물>(이지영 역, 개마고원, 2004)과 이번에 출판된 백문임씨의 <월하의 여곡성>(책세상, 2008) 정도가 그럭저럭 추천할 만한 책일 것이다.(이 두 책은 내가 올해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낸 책들이기도 하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도찰"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책들이 보통 그렇듯이:-) 실제로는 그다지 도전적인 책이 아니다. 사실 이 책에서 커니의 입장은 오히려 전통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책에서 그는 신과 괴물의 도착적 결합으로 나타나는 이방인에 대한 해체론적 형상들을 일관되게 비판하면서, "좋은" 타자와 "나쁜" 타자를 판별할 수 있는 서사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니에 따르면 타자를 식별해내는 서사를 포기한다면 타자는 신 아니면 괴물 혹은 양자 모두라는 극단적 형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극단적인 정치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커니는 데리다나 지젝처럼 신과 괴물의 궁극적 동형성(同形性)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판하면서(실제로 이들이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는 또 다른 논란꺼리이다.), 우리에게는 신과 괴물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할 수많은 타자들의 형상을 구분해낼 수 있는 서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얼핏보면 타당한 문제제기라고 생각되지만, 커니의 의견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의 포지셔닝과 접근 방식이 지금까지 타자성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수많은 논의들의 성과를 자의적으로 간과해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커니는 타자와 자아의 불분명한 경계를 특징으로 하는 멜랑콜리(melancholy)와 서사에 기반한 애도(mourning)를 대비시키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멜랑콜리가 아닌 애도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가진 문제는, 타자성에 대한 윤리를 고민해 온 이들이 극복하고자 노력해온 대상이, 바로 이러한 "애도냐, 멜랑콜리냐"라는 단순한 이항 대립 자체라는 데 있다. 커니는 당연한 듯이 우리에게 멜랑콜리와 애도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지만, 이러한 단순 구도 속에서는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멜랑콜리(allegorical melancholy)나 푸코의 반-기억(counter-memory)과 같은, 애도와 멜랑콜리의 아슬아슬한 사이길을 탐색하려는 개념적 도구와 시도들의 자리는 사라지고 만다.(좀 더 나아가자면, 커니의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시도들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순 이항 대립으로 환원시키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진정성"을 손쉽게 확보했던 과거 영미 "좌파" 학자들의 농간을 떠올리게 한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하지만 커니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더 큰 이유는, 타자의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서사에 대한 그의 호소가, 원인을 잘못짚은, 그리고 그나마 때늦은 처방이 아닐까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커니는 해체주의적 입장에 반대하면서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 서사와 해석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타자에 대한 서사의 붕괴가 어디 데리다같은 해체주의자들의 무분별함 때문이던가? 그 원인이 내외부를 교란시키고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확산이라는 조건 때문이던지, 벤야민이 일찍이 간파했듯이 이야기가 가진 효력의 상실 때문이던지 아니면 간편하게 큰 이야기의 붕괴라는 포스트모던적 전환의 결과이던지 간에, 오늘날 타자에 대한 서사의 붕괴와 그에 따른 윤리의 위기는 우리가 발딛고 선 하나의 조건인 것이 아닐까?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이러한 주제는 그 자체로 너무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니, 문제를 조금 틀어보자. 흥미롭게도 위에서 언급한 또 하나의 책 백문임의 <월하의 여곡성>은, (애도적)서사의 붕괴라는 현대적 조건을 한국 공포영화들의 내러티브 분석을 통해 짚어내고 있다. 저자의 박사논문이기도 한 이 책은, 실은 <월하의 공동묘지>로 대표되는 60년대 후반의 한국 공포 영화 분석에 가장 큰 공을 들이고 있지만(이러한 분석 역시 상당히 재미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길),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60년대 공포영화와 90년대 후반 <여고괴담>과 <링: 바이러스>를 계기로 부활한 공포영화 간의 차이에 대한 백문임의 간단한 언급이었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백문임에 따르면, 고전 한국 공포 영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월하의 공동묘지>는 완벽한 "애도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영화 속에서 억울한 모함으로 자살한 월향은, 귀신으로 돌아와 자신을 괴롭혔던 악인들을 모두 살해하고, 자신의 한을 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월향의 묘에 비석을 세워주는 오빠 춘식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월향에게 용서를 비는 남편 한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애도 행위의 결과 월향은 비로소 귀신의 형상을 벗고 승천하게 된다. 196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 속에서 월향의 괴물화(여귀화)는 정당한 이유를 가진 것이며, 복수가 완결되어 이러한 이유가 사라졌을 때 그녀의 괴물성 역시 함께 사라진다. 그녀는 이제 타자가 아니라 (비석에 새겨진 이름으로 상징되는) 거대 서사 속에 적절한 자리(proper place)를 배치받은 동일자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하지만 30년 후 1999년에 제작된 <링: 바이러스>는 어떤가? (사실 난 영화가 아니라 스즈키 코지의 소설로 <링>을 접했는데, 백문임의 설명을 보면 한국 영화 <링: 바이러스>은 스즈키 코지의 소설 내용을 충실히 반영한 것 같다.) <링: 바이러스>에서 저주받은 테이프를 보게 된 선주는, 테이프에 원한을 염사한 박은서(사다코)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고, 그녀의 시신을 재매장함으로써 그녀의 한을 풀어주려한다. 여기까지 <링: 바이러스>는 괴물에게 적절한 자리를 재배정해주는 애도의 서사라는 기존의 공포영화의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다코의 저주는 이러한 애도의 몸짓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다코의 저주는 자신의 한의 해소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저 저주의 전염과 자기 복제와 관련된 것이다. 즉, 사다코의 한을 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비디오테이프를 복제하여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전염시키는 사람만이 저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p>
<p align="justify"><br />백문임은 이 두 영화의 비교 속에서 자가 증식과 테크놀로지라는 공포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읽어내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링: 바이러스>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애도의 서사에 대한 냉소적 반응 혹은 회의적 태도이다.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애도의 서사가, 뚜렷한 내부와 외부, 선과 악의 대립구도 속에서 이들의 질서를 재확립하는 거대 서사에 대한 믿음 위에서 작동한다면, <링: 바이러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애도의 궁극적인 실패이다. 사다코는 선주의 애도 행위에도 불구하고 월향과는 달리 서사 속에서 적절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며, 바이러스처럼 자기 증식하며 기존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아마도 이러한 애도의 실패와 괴물의 자기 증식이 주는 절대적인 공포가, <링>을 주제로 한 공포영화 관련 연구서가 몇 권이나 될 정도로, 이 영화가 공포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이자 전세계적 문화현상이 된 이유일 것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여담이지만, 올해 초 내가 본 공포 영화들 -<클로버필드>나 <rec></rec><rec></rec><rec></rec><rec></rec>같은 영화들- 속에서, 이러한 애도의 서사에 대한 불신은 거의 극단으로 나아간 것 같다. 이 영화들의 괴물들에게는 애초에 애도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데, 영화 자체가 이들 괴물의 기원과 출몰 원인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킹콩이나 고질라 같은 괴물의 경우 그 발생원인과 출몰원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이 괴물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판별해 내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의 괴물이나 <rec></rec><rec></rec><rec></rec><rec></rec>의 좀비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이며 우리를 공격하는 것일까? 이유를 알 수 없기에 여기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으며, 괴물 형상에 대한 판별적 서사도 없다. 그들은 갑자기 외부에서 들이닥친 위험한 타자일 뿐이다.)</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그러면 앞서 문제로 돌아가서, 타자에게 적절한 자리를 재배정해줄 수 있는 서사의 붕괴(혹은 적어도 이러한 서사에 대한 불신의 만연)가, 커니의 주장처럼 판별적 해석학의 부활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발딛고선 하나의 시대적 조건이라면 어떨까? 오히려 나의 관심은, 서사의 붕괴라는 이러한 조건을 수용한 상태에서 타자-괴물과 우리의 관계맺음 방식과 관련된 것이다. 타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나타날 때 그리고 이들의 적절한 자리를 판별한 어떤 공통적인 서사도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아마도 이들을 단지 견뎌내거나(관용), 공포 속에서 배척하는 것(안전)일게다. 그리고 이것이 "타자를 자기 틀에 맞춰 해석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오늘날, 관용(tolerance)과 안전(security)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핵심적인 정치적 용어로서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는 이유가 아닐까?(이 두 키워드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따로 포스팅해야 할 것 같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따라서 괴물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서, 궁극적으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각각 진보적 자유주의와 우파적 보수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고 그런만큼 실은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관용과 안전의 방식이 아니라, 괴물-타자와 관계맺는 또 다른 형태의 윤리적 실천은 어떻게 가능할까? 서사로의 회귀라는 커니 식의 손쉬운 해결책에 기대지 않고, 좀 더 근본적이고 좌파적인 입장에서의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괴물-이웃에 대한 이웃사랑(neighbor love)의 실천은 어떠한 형태일 수 있을까? 지금 보고 있는 괴물과 그것의 재현에 대한 연구들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혹은 적어도 그 실마리라도) 던져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그저,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를 소심하게 바랄 뿐이다. </p>
<p align="justify"> </p><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95,'/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95+%22%EA%B4%B4%EB%AC%BC%2C%20%EC%84%9C%EC%82%AC%20%EA%B7%B8%EB%A6%AC%EA%B3%A0%20%EA%B4%80%EC%9A%A9%EA%B3%BC%20%EC%95%88%EC%A0%84%2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95&t=%EA%B4%B4%EB%AC%BC%2C%20%EC%84%9C%EC%82%AC%20%EA%B7%B8%EB%A6%AC%EA%B3%A0%20%EA%B4%80%EC%9A%A9%EA%B3%BC%20%EC%95%88%EC%A0%84%2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95&title=%EA%B4%B4%EB%AC%BC%2C%20%EC%84%9C%EC%82%AC%20%EA%B7%B8%EB%A6%AC%EA%B3%A0%20%EA%B4%80%EC%9A%A9%EA%B3%BC%20%EC%95%88%EC%A0%84%2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95?commentInput=true#entry95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코제브의 동물/속물론
캐즘
http://blog.jinbo.net/chasm/89
2008-04-26T02:11:12+09:00
2008-04-26T02:11:12+09:00
<!--FCKeditor--><p><a href="http://blog.jinbo.net/chasm"><strong>캐즘</strong></a>님의 <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48">[새로운 민족-국가 만들기 그리고 동물/속물적 주체성 ]</a> & <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72">[책 두 권]</a> 에 관련된 글<br /></p>
<p> </p>
<p align="justify">블로그에서 종종 언급했던 코제브의 (미국식) 동물과 (일본식) 속물에 대한 유명한 각주를 잠깐 짬을 내 옮겨 놓는다. 일본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 각주는, 조영일 씨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번역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한 역주로 부분 번역된 적은 있지만, (내가 아는 한) 각주 전체가 번역된 적은 없다. 이 각주가 달려있는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헤겔 독해 입문(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은 <역사와 현실변증법>이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 초반에 번역된 바 있으나, 이 각주가 속한 장 전체가 번역에서 누락되어 있다.(원래 이 책 자체가 이런저런 강의를 모아서 편집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역자의 잘못은 아니다.)</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사실 문화연구, 특히 소비문화(비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본 문화는 (직접적인 전공 대상이 아니더라도)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소비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넓이와 깊이 면에서 다른 국가들을 압도하는 방대한 서브컬처의 전통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나같은 경우는, 그저 주변에 일본 유학생들이 많아서라고 해야 하겠지만..;;)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아무튼 이러한 일본 문화를 둘러싼 논의 중 가장 유서 깊은 것이 바로 일본 문화가 뿌리부터 서구의 근대와는 구분되는 탈근대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일본문화의 "태생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관련된 논의일 것이다. 이 논의는 거슬러 올라가면 교토학파의 "근대초극론"까지 연결될 수 있고, 그 역사가 깊은 만큼, 서양의 문화연구자들이나 일본인 자신들의 오리엔탈리즘(혹은 역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단순히 치부하기엔, 논의를 둘러싼 담론의 두께가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논의는 이 포스팅에서 다룰 주제는 아닌 것 같고, 아무튼 70년대 이후 일본문화의 뿌리깊은 포스트모던한 성격을 강조하는데 한 몫한 대표적인 서양 학자들의 텍스트가, 지금 소개하는 코제브의 각주와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이란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참고 삼아, 롤랑 바르트가 <기호의 제국>에서 일본 문화를 가로지르는 특징 중 하나로 꼽고 있는 "텅 빈 중심"에 관련된 부분도 일부 옮겨놓는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일본 요리에는 중심이 없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다른 장식물을 위한 또 다른 장식물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식탁이나 쟁반 위의 요리는 부분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그 어느 것도 영양 섭취에서 순서상 우월하지 않다."(30)<br /></p>
<p align="justify">"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도시(도쿄)에는 중요한 역설이 있다. 이 도시에는 중심부가 있지만 그 중심부는 텅 비어 있다. 이 도시는 금지된 중립의 공간을 빙 둘러싸고 있다."(40, 도쿄의 중심은 천황궁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숲이다. 하지만 이 공간은 자신을 중심으로 도시의 좌표를 구획하는 서양의 왕궁과는 달리, 숲으로 둘러싸여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자 텅 빈 중심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비유는 일본의 천황과 서양의 왕(혹은 황제)를 비교하는 논의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사실 천황의 텅 빈 중심으로서의 속성에 대한 논의는 교토학파의 선조인 니시다 기타로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고 한다).-인용자)</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코제브의 "속물론"이 일본 문화의 "키치"적 성격에 대한 분석과 이어진다면, 바르트의 "텅 빈 중심"에 대한 지적은 일본문화의 유아적 성격 그리고 패스티쉬적 성격에 대한 분석과 연결된다.(이 중 유아적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88">저번 포스팅</a>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렇듯 의미없는 형식화에 대한 강박과 텅 빈 중심을 메우는 혼종성과 다문화성은 일본 문화의 "태생적 포스트모던" 가설에 대한 중요한 지지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일본 문화와 포스트모던에 대한 이야기는, 그 논쟁의 기나긴 역사 만큼이나 정교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지만, 이 논쟁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반농담처럼 인류의 미래를 묘사하고 있는 코제브의 각주는 마치 SF소설처럼 상당히 재밌게 읽힌다.(그의 나이 많은 제자 바따이유는 코제브의 이러한 엉뚱한 유머 감각을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번역 대본은 Alexandre Kojève, James Nichols(trans.), <em>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em>, Cornell Univ. Press, 1969로, 이 각주는 6장의 6번째 각주로서 158쪽에서 162쪽에 걸쳐 실려 있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strong>초판의 각주</strong> </p>
<p align="justify">역사의 종말과 인간의 소멸은, 우주의 붕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 세계는 항상 그러했듯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생물학적인 소멸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 혹은 주어진 존재(given Being)와 조화를 이룬 채 살아남을 것이다. 소멸하는 것은 고유하게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 즉 주어진 것을 부정하는 행위와 오류, 즉 일반적으로 말해 대상에 대립하는 주체(the Subject)이다. 사실상, 인간의 시간이나 역사의 종말, 즉 고유하게 그렇게 불리워질 수 있는 인간, 자유롭고 역사적인 개인의 소멸은, 행위(Action)의 종결을 의미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는 유혈 혁명과 전쟁의 소멸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철학의 소멸이기도 하다. 인간은 더 이상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진실된) 기본 원리들을 수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외의 나머지 것들, 즉 예술, 사랑, 유희 같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영구히 남아있을 것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이러한 헤겔주의적 테마가 맑스에 의해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인간들(계급들)이 인정(recognition)을 위해 서로 투쟁하고 노동을 통해 자연에 투쟁하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역사를, 맑스는 “필요의 영역”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이를 넘어선 “자유의 영역”에서는, 인간은 어떤 유보도 없이 서로를 상호적으로 인정하기에 더 이상 투쟁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노동하지도 않을 것이다.(자연은 완전히 정복되어, 인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자본론 3권 48장 III절의 두 번째 단락 마지막 부분을 보라.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strong>2판에 덧붙여진 각주</strong> <br />앞의 각주에는 모순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다소 모호한 부분이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역사의 종말 이후 인간의 소멸”을 받아들인다면, 즉 우리가 “사라지는 것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며 “인간은 동물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술, 사랑, 유희 같은 나머지 것들은 영구히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다시 동물이 된다면, 그의 예술이나 사랑, 유희 또한 순전히 “자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 이후에 인간은 마치 새가 둥지를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잣듯이 자신의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만들 것이고, 개구리와 매미처럼 음악을 연주할 것이다. 덧붙여 그들은 어린 동물처럼 유희하고, 다 자란 맹수처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을 행복(happy)하게 만든다”고 말해선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풍요와 안전 속에서 살아갈) 호모 사피엔스라는 역사-이후의 동물은, 그들의 예술적이고 에로틱하며 즐거운 행위에 만족하는(be contented with) 한, 그 행위의 결과로서 내용(content)이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하지만 조금만 더 나가보자. “고유한 인간의 소멸”은,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담론, 즉 로고스(Logos)의 소멸을 의미한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들은 음성과 “언어” 신호에 조건 반사처럼 반응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담론”이란 것은 벌의 “언어”와 유사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지는 것은, 철학이나 담론적 지혜에 대한 추구만이 아니라 지혜 바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이후 동물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과 세계에 대한 어떤 (담론적) 이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내가 위의 각주를 썼을 때(1946년)에도, 인간의 동물로의 회귀는 미래의 전망으로서 아직 생각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지 않아(1948년) 나는 헤겔과 맑스의 의미에서 역사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은 것(not yet to come)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현재이자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되었다. 현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고 예나 전투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반추해본 결과, 나는 예나 전투에서 고유한 의미에서의 역사의 종말을 본 헤겔이 옳았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나폴레옹이 예나 전투를 통해 예나에 입성하던 그 시기,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완성한 사실은 유명하다.-역주) 이 전쟁을 통해 인간성의 전위부대는 인간의 역사적 진화라는 자신의 목적이자 한계, 즉 종말에 잠재적으로 도달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프랑스에서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에 의해 현실화된 혁명적 힘들의 보편적 공간으로의 확장일 뿐이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진정한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두 번의 세계 대전과 그 사이의 크고 작은 혁명은, 주변 지역의 뒤처진 문명들을 (실재적이건 잠재적이건 간에) 가장 발달한 유럽의 역사적 지위로 끌어올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소비에트화와 중국의 공산화가 토고의 독립이나 파푸아뉴기니의 자치 선언 혹은 (히틀러로 귀결된) 독일 제국의 민주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러한 중국과 소련의 로베스피에르식 보나파르트주의의 실현이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으로 하여금 혁명 전의 낡은 유산들을 제거하는 데 좀 더 열을 올리도록 만들었다는 것 정도일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낡은 유산의 제거는, 유럽 그 자체보다는 유럽의 확장판인 북미에서 더욱 빨리 진척되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우리는 미국이 이미 맑스주의식 “공산주의”의 마지막 단계를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계급없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의 마음이 내킬 때에만 일하면서 그들에게 좋아보이는 모든 것을 전유할 수 있다. <br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1948년과 1958년 사이에 미국과 소련을 몇 번씩 오가면서 내가 받은 인상은, 미국은 부유한 중국과 소련이며, 소련과 중국은 빠르게 부유해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가난한 미국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미국식 삶의 방식”이 역사-이후에 고유한 삶의 유형이며, 미국의 현존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현재”가 될 미래를 선취한 것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동물화는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확실한 일처럼 보였다. </p>
<p align="justify"><br />내가 이러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것은, 1959년에 일본을 여행한 이후의 일이다. 나는 일본이라는, 이미 3세기 전에 “역사의 종말”을 체험한 사회를 만나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평민 출신 히데요시가 봉건제를 해체하고, 그의 계승자인 귀족 출신 이에야스가 인위적으로 고립된 국가를 만들어낸 이후로, 어떤 내전이나 외부와의 전쟁도 발생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일본의 귀족들은, 심지어 결투에서조차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 노동에 종사하지도 않지만, 동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br /> </p>
<p align="justify">“역사-이후”를 살아가는 일본 문명은, 미국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론 일본에는, 유럽적인 혹은 역사적인 의미에서 어떤 종교도, 도덕도, 정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순수 형태로서의 속물성(snobbery)은, 강요된 노동이나 혁명적 투쟁 같은 “역사적” 행위와는 또 다르게 주어진 “자연” 혹은 “동물”을 부정하는 규율들을 창조해냈다. 확실히 가면극이나 다도, 꽃꽂이 등에서 드러나는 일본식 속물성의 정점은, 여전히 귀족과 부유층의 특권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전한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본인들은 예외 없이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 즉 역사적 의미에서 모든 인간적 내용이 부재한 가치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극단적인 경우 모든 일본인들은 완전한 무상(無償)의 자살을 행할 수 있다.(고전적인 사무라이의 할복은 오늘날 비행기나 잠수정의 자살 공격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자살은 사회적•정치적 내용을 가진 “역사적” 가치를 건 투쟁 속에서 맞는 삶의 위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최근에 시작된 일본과 서구 세계의 상호작용은 결국에는 일본의 야만화가 아니라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서구의 일본화로 귀결될 것이다.</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어떤 동물도 속물이 될 수는 없기에, 일본화된 역사-이후의 시대는 고유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이 인간 내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부분에 머무는 한에서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완전한 소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자연 혹은 주어진 존재와 조화를 이루는 동물은 결코 인간일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립하는 주체로 남아있어야 한다. 비록 주어진 것과 오류를 부정하는 행위 자체는 사라진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역사-이후의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내용(content)”으로부터 “형식(form)”을 분리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이는 내용을 변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일종의 내용으로 간주되는 자신과 타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이들과 대립되는 순수 형태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끝]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덧.</p>
<p align="justify">코제브의 논의를 소개해 준 김홍중 선배는 반농담으로, 미국식 동물과 일본식 속물의 차이는 그들의 포르노그라피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미국의 포르노그라피에서 우리가 성욕의 충족을 위해 돌진하는, 코제브의 표현을 빌자면 "다자란 맹수처럼 사랑하는" 남녀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일본의 포르노그라피 속에서 우리는 마치 의례를 치르듯이 페티시화된 상대방의 육체(보통 여성의 육체)를 자극하는, 성행위에도 어떤 절제된 형식과 절차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듯한 남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두 나라의 포르노그라피를 접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러한 흥미로운 차이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p>
<p align="justify"> </p><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89,'/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89+%22%EC%BD%94%EC%A0%9C%EB%B8%8C%EC%9D%98%20%EB%8F%99%EB%AC%BC%2F%EC%86%8D%EB%AC%BC%EB%A1%A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89&t=%EC%BD%94%EC%A0%9C%EB%B8%8C%EC%9D%98%20%EB%8F%99%EB%AC%BC%2F%EC%86%8D%EB%AC%BC%EB%A1%A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89&title=%EC%BD%94%EC%A0%9C%EB%B8%8C%EC%9D%98%20%EB%8F%99%EB%AC%BC%2F%EC%86%8D%EB%AC%BC%EB%A1%A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89?commentInput=true#entry89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바디우의 레닌
캐즘
http://blog.jinbo.net/chasm/87
2008-03-12T01:36:00+09:00
2008-03-12T01:36:00+09:00
<!--FCKeditor--><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a href="http://blog.jinbo.net/chasm"><strong>캐즘</strong></a>님의 <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86">[바울과 레닌 그리고 제3항의 사유]</a> 에 관련된 글. </p>
<p align="justify"><br /><br />저번 포스팅에 달린 댓글 중에서 라임님이 바디우가 레닌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언급한 게 생각나 인터넷을 뒤지다가 바디우가 레닌을 직접 다룬 짧은 글 하나를 발견, 링크를 걸어둔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바디우가 1999년에 짧은 강의용으로 쓰고 이후에 Alberto Toscano의 번역으로 작년 출판된 The Century(Polity, 2007)에 실린 "One Divides into Two"라는 제목의 글로, 라캉닷컴에 원문을 구할 수 있다. 관심있으신 분은 <a href="http://www.lacan.com/divide.htm">클릭</a></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글 자체는 짧지만 상당히 압축적이고 흥미로운 글이다. 이 글에서 바디우는 레닌론에서 시작해 곧바로 마오와 문화혁명의 논의로 건너가 결국 자신의 정치학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글을 끝맺는다. 바디우의 정치철학이나 레닌 혹은 마오주의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짧은 글이라 일하는 중간 중간 번역을 해볼까 했지만, 당분간은 밀린 일이 많아서 그럴 짬은 없을 것 같다.)</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영어를 저어하는 분들을 위해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 글에서 바디우는 20세기를 이데올로기의 시대도 유토피아의 시대도 아닌, 바로 레닌주의의 세기로 규정한다. 이는 레닌의 정치사상이 20세기의 핵심적인 특징인 "실재에의 열망(passion for the real)"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20세기는 약속의 세기, 기다림의 세기가 아닌 실현과 행위의 시기였고, 실패의 시기가 아닌 승리의 세기였다. 그리고 레닌은 이러한 승리가 확고한 전선을 구축하고 총력전(total war)을 전개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료화한 인물이었다.(혹은 전선과 전쟁이라는 상에 기반할 때에만 우리는 '승리'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그런데 이 '전선'과 '총력전' 그리고 이를 통한 한쪽 진영의 다른 진영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라는 개념과 이에 기반한 사유는, 상호 대립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예컨대, 승리를 향한 그리고 승리를 통해 상대를 제거하려는 싸움의 원동력은, 적대 그 자체인가 아니면 하나를 향한 열망인가? 우리는 이 전쟁의 모델에서 하나를 둘로 나누는 정식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둘이 하나로 종합되는 정식을 지지할 것인가? 바디우에게 이 문제는 변증법적 종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제목이 암시하듯, 바디우가 보기에 레닌이 첫 번째 정식을 지지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글 자체에서 바디우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바디우가 암묵적으로 염두에 두는 것은, 아마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전개된 푸코의 "전쟁모델"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이 책에서 푸코는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어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다"라는 입장에 기반한 권력에 대한 전쟁모델적 접근을 식별해내고, 이러한 전쟁모델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인종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권력모델이라고 주장한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사실 이러한 푸코의 전쟁모델에 대한 탐구는 전통적인 군주권 모델과는 다른 형태의 권력 모델을 검토하고자 하는 그의 지속적인 노력의 일부로 이해될 필요가 있지만, 이런 분석적 가치를 염두에 둔다하더라도, 인종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델을 등치시키는 그의 입장이 느슨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디우는 이러한 전쟁 모델 속에 또 다시 대립적인 두 입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인종주의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준다. 바디우가 지적하듯이 이 둘의 차이는 대립 전선을 계급 사이에 설정하는냐, 인종 사이에 설정하느냐에서도 발견될 수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이들이 전쟁 모델의 핵심을 적대에 두느냐 혹은 (승리를 통해 얻게 될) 통합에 두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내에서도 물론 적대보다는 궁극적인 통합을 우위에 두는 입장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을 이것으로 환원시키기는 불가능하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다시 글로 돌아와서... 그렇기에 바디우가 보기에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마오의 권력 투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이러한 두 대립적인 노선 간의 정치적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마오를 위시한 좌파들은 하나를 둘로 나누는 정식을 지지했다면, 우파의 입장은 둘을 하나로 종합하는 정식에 기반해 있었다. 그리고 이 투쟁의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덩샤오핑의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가까운 신자본주의로의 회귀, 즉 계급투쟁의 부정과 하나의 위대한 중국으로의 종합이었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이어서 바디우는 20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실재에의 열망이 어떠한 방식으로 현실을 수용하고 그것을 그저 즐기기만 하려는 자세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는지를 언급하고,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동적 니힐리즘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짤막하게 설명하고 있다.(여기에 대한 바디우의 비판과 그가 대안으로서 이야기하는 감산적 정향에 대해서는 이 포스팅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실재에의 열망에 기반한 정화(purification)의 정향이 오늘날 어떠한 형태로 작동하는가는 지젝이 방한 때 행한 첫번째 강연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고, 바디우가 실재에의 열망을 유지하는 또 다른 형태로 내세우는 감산적 정향에 대해서는 지젝의 여러 글들과 함께, 정화의 정향과 감산적 정향을 깔끔하게 비교, 정리해 놓은 ACT <act></act>0호에 실린 박제철의 글 "(예술-비평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욕망의 레닌주의적 재발명"을 참고할 수 있겠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바디우의 레닌론에 대한 지젝의 평가는 어떤가?</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바디우와 라자뤼스가 선호하는 레닌은, 근대의 산업 집중화에 매료되어 경제와 국가기구를 재조직하는 (탈정치화된) 방법을 상상하는 <국가와 혁명>에서의 레닌이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 즉 (사회주의 혁명의식은 노동계급 외부에서 주입되어야 한다는 그의 테제에서) 마르크스의 이른바 '경제주의'를 깨버리고 정치의 자율성을 단언하는 레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마르크스주의적이라기보다는 자코뱅적인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의 '순수 정치학'은 거대한 적대자인 앵글로색슨 문화연구와 인정을 위한 투쟁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경제 영역의 몰락이라는 지점을 공유한다."(<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 p.152-153)</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p.s </p>
<p align="justify">추신으로 글의 역자 Alberto Toscano에 관한 여담 한 가지. 이탈리아 출신으로 현재 영국 Goldsmith College 사회학과에 있는 이 이론가의 글을 몇 년전부터 종종 접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가 워낙 다양한 분야와 사상가들을 건드리면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재밌는 건 Goldsmith College의 교수 소개란에서는 그의 관심분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Social theory and philosophy; contemporary French thought (Deleuze and Badiou); political subjectivity; the politics and sociology of religion (fanaticism, messianism, political theology); Marxism, communism, Italian workerism (<em>operaismo</em>) and autonomism; cognitive capitalism, immaterial labour and theories of ‘real abstraction’ in capitalism; imperialism and empire; economic sociology; biopolitics (in Agamben, Foucault, Negri); theories of collective and technological individuation (Simondon); aesthetics.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개중에 주전공(?)을 뽑자면, 바디우와 자율주의 정도가 되겠지만, 아무튼 이쯤되면 오늘날 좌파 이론의 최신 부분은 전부 다 다루겠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부디 Toscano 형님의 건투를 빈다.</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아래는가끔 찾아가는 그의 블로그. </p>
<p align="justify"> </p>
<p align="justify"><a href="http://conjunctural.blogspot.com/">http://conjunctural.blogspot.com/</a></p>
<p align="justify"> </p><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994',87,'/cha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87+%22%EB%B0%94%EB%94%94%EC%9A%B0%EC%9D%98%20%EB%A0%88%EB%8B%8C%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87&t=%EB%B0%94%EB%94%94%EC%9A%B0%EC%9D%98%20%EB%A0%88%EB%8B%8C"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idden"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chasm%2F87&title=%EB%B0%94%EB%94%94%EC%9A%B0%EC%9D%98%20%EB%A0%88%EB%8B%8C','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chasm/87?commentInput=true#entry87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