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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노인 속이기

아래 글은 고재욱씨가 쓴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중에서 옮겨 왔습니다.

고재욱씨는 치매노인들을 돌보는 요양보호사입니다.

 

 

모처럼 양복을 입었다.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나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조금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수백 명의 노인을 만나며 또 그만큼의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내가 아니던가.

도둑이 들었다며 경찰을 부르는 할머니에게 나는 경찰관이었으며, 자신의 방에 월세도 내지 않고 들어와 살고 있다며 옆 침대 환자를 괴롭히는 할아버지에겐 정확한 계약서를 내어주는 공인중개사가 되기도 했고, 무조건 약을 달라고 떼쓰는 할머니에겐 비타민 한 알로 모든 병을 고치는 유능한 의사로도 변할 수 있는 나였다. 나는 꽤 능숙한 연기자였다.

한편으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매일 풀죽어 있는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요양원 출입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면 노인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으으......”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킬 것이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몸을 반쯤 일으키다가 으레 포기의 자세를 취하던 노인이 반쯤 감긴 눈을 번쩍 떴다. 입은 헤 벌리고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지도 못한 채 떨이는 목소리로 말해다.

“네가...... 네가...... 드디어 왔구나. 네가 왔어.”

노인과 나는 부둥켜안은 채 얼굴을 비비며 오래간만의 재회를 한참이나 이어갔다.

 

노인과 작별 인사를 하고 요양원을 나선 뒤, 나는 다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역시 노인은 한 시간 전의 사내와 한 시간 후의 나를 구별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노인에게 물었다.

“아드님이 오랜만에 왔다 가셨다면서요? 좋으셨겠어요!”

잠시 노인은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게..... 내 아들이 아니야.”

나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고 물었다.

“네? 그럼 왜 아들이라며 부둥켜안고 그러셨어요?”

노인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싱긋이 웃었다.

“젊은 사람이 안됐잖아. 무슨 병이 들었는지, 제 아비 얼굴도 잊고서 나를 아버지로 알고 그리 좋아하는데...... 그런 사람한테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다 할 수 있나? 그치만 나도 모처럼 우리 아들이 온 것처럼 좋았구먼.”

노인을 속이는 일은 완벽하게 실패로 끝났다. 노인의 출입문 옆자리 지키기는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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