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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야 정신 차리나?

민들레 71호에 실린 김정현 씨의 ‘군대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나’라는 글을 읽으며 나도 지난 시절을 적어보고 싶었다. 마침 오장풍께서 자신의 행위는 체벌 행위였기에 자신에 대한 처벌(?)을 재심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래서 예전 기억을 떠올려본다.


1991년 제대를 하고 지금에 와서 글을 쓰고 있으니 분명 제대로 된 기억은 아닐 것이다. 세월의 깊은 늪속에서 건져 올린 몇 가지 단편들이 온전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저 옛 추억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쓴다.


내가 일병 끝자락에 선 1990년 초 포대에 들어온 지 일주일도 안 된 김이 자해를 해서 포대가 발칵 뒤집혔다. 사건이 있은 후 난 일병 휴가를 다녀왔고 내가 부대로 복귀하던 날 김의 동기 12월 군번들이 김을 화장하고 돌아왔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자대 배치를 받은 후 김이 첫 근무를 나갔다. 김과 함께 유류고 보초를 나간 사람은 포대에서 군기를 잡는 군번 대에 처음 진입한 10월 군번이었다. 내가 속한 포대는 사병들의 군기를 상병 선에서 잡았다.


가뜩이나 복잡한 심사에 첫 근무를 나갔을 김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 하려던 것인지 아니면 심심했던지 상대방은 김에게 암기사항을 외우게 했고, 저쪽을 돌아 이쪽으로 뛰게 하고, 엎어졌다, 뒤집어졌다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근무를 마치고 점호 준비를 하던 김은 홀로 포상 방공호에 들어가 자해를 했다.


김의 자해로 포대는 난리가 났다. 당시 구타 문제로 군 내부에서 말들이 많았던 때라 포대 상황은 심각했다. 여러 곳에서 사건을 조사했고, 결국 10월 군번 대부분이 남한산성에서 제대를 했다. 덕분에 난 포대 군기를 잡아야 하는 자리에 올랐다.


나보다 군 생활을 먼저 한 선배들은 더 했겠지만, 사실 우리 선임병들은 우리가 좋을 때 군대에 들어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하지만 우리도 제법 맞았다. 군기 잡는 군번들이 운전병이 많으면 수송 창고로, 통신병이 많으면 통신 창고로, 포반이 많으면 전포창고로 집합이라는 소리에 우리는 매 맞을 장소에 모여 훈계를 듣고 집단으로 맞았다.


선임병들은 매를 맞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 “요즘 하는 짓들이 엉망이다.” “왜 그렇게 밖에 못하냐?” “정신들을 어디다 두고 살고 있느냐?” 등 여러 말들을 했지만 ‘너희는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아주 단순한 논리를 복잡하게 풀어낸 것일 뿐이었다.


우리는 군대라는 것이 원래 이런 곳이다는 생각에 선임병들의 폭력에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욕하면 듣고 때리면 맞았다. 아침 식사 전에 식사를 마친 후 어느 창고로 집합이라는 소리가 전해질 땐 짜증도 났지만 밥을 모두 먹은 후 매 맞을 장소로 모여 들었다.


김의 자해가 있은 후 사단 헌병대에서 구타 문제에 대해 전반적인 조사를 했을 때 나와 내 바로 위 아래 군번들은 선임병들에게 맞은 일이 없다고 말을 한 반면 내 아래 군번들은 맞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결국 나를 때렸던 군번들은 안전했고, 이제 막 때릴 군번대에 들어섰던 내 바로 앞 군번들은 피를 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병장들은 포대에 막 배치 받은 신병들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조직적인 폭력이 없어지자 때때로 상상 하기도 힘든 일들이 벌어졌고 우리는 어찌해야 좋을지 당황스러웠다. 단적인 예로 선임병들은 잠을 자다가 불침번이 실수로 자신을 건드리면 근무 나가라고 깨우는 줄 알고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불침번인 하늘같은 병장이 근무에 나가라고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니 놀란 선임병이 후임병보다 먼저 일어나 근무 나갈 준비를 하는 일이 생겼다.


당황스러운 일이 생길 때 마다 선임병들은 나에게 한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요즘 포대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때때로 하사관들과 장교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요즘 포대가 이상하지 않냐?”


우리는 위에서의 압력보다는 우리 내부에서의 혼란스러움을 정리하고자 모였다. 다시 조직적으로 후임병들을 때려야 하느냐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느냐를 정리하기 위해 나를 포함한 포대 군기를 잡을 군번들이 모여 한참을 이야기했다.


나보다 몇 개월 위 고참은 자주 때려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자주는 아니지만 한두 번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데 한 6월 군번은 후임병들의 잘못이 아니라 선임병들의 잘못이 크다고 주장했다. 운동을 하다가 입대를 한 그는 어느 집합이 있던 날 자신은 운동을 하면서 선배들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억울해서 못살겠다며 내게 눈물을 보였던 후임병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 그날 긴 시간 서로의 생각들을 이야기했고, 결국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결론 내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나는 제대를 했다. 제대를 한 후 우연하게 나보다 한 참 아랫군번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내게 후임병들이 자신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하소연을 했다. 처음 군 생활을 시작하던 그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기에 난 그에게 그저 힘들겠다는 말만 했다.


체벌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체벌하지 않고 어떻게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을 본다. 오죽하면 오장풍이 자신의 행위는 아이의 잘못을 바로 잡고자 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을까? 사실 내가 우리 교육 현장에 대해 너무 모르는 탓인지 모른다. 하지만 폭력이 아닌 다른 문화를 찾아야 한다. 느려도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짧은 군대 생활에서 폭력에 물들었던 우리는 군대에서 누가 맞아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땐 “요즘 애들은 맞지 않아서 조금만 때려도 죽는다” 라는 말들을 너무 쉽게 하곤 했었다. 폭력이 왜 문제인지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피해자면서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갔었다.


혼란스럽겠지만 이제 그만 폭력을 버리자. 우리 자신이 폭력에 얼마나 익숙해져 버렸는지 돌아본다면 투박하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던 선임병들의 생각을 버린 나와 동료들의 혼란스러웠던 1990년처럼,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체벌을 금지함으로 아이들 교육에 문제가 생긴다는 생각을 버리는 2010년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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