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껌뻑

9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3/09
    엠블런스
    껌뻑
  2. 2007/03/09
    그 밤에
    껌뻑
  3. 2007/01/26
    자화자찬
    껌뻑
  4. 2007/01/12
    도망다니며(2)
    껌뻑
  5. 2006/12/22
    대화연습.(2)
    껌뻑
  6. 2006/12/15
    참을 수 없는 웃음.
    껌뻑
  7. 2006/12/13
    박탈감.
    껌뻑
  8. 2006/12/12
    사람과 닮은 글을 보고 싶.(5)
    껌뻑
  9. 2006/12/12
    필요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해.(2)
    껌뻑
  10. 2006/12/06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껌뻑

엠블런스

Republique의 광녀

 

Republique라는 이름의 지명에서 마주친 거리의 여성.

약에 취한 듯 몸을 가누지 못하다,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고 싶었지만 계속 주저앉기를 여러번.

 

걱정이 되서 도움을 요청할까 싶었지만, 전화를 걸 방법도 몰라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엠블런스 사이렌 소리가 나서 보니, 누군가 연락을 취한 모양이었다.

 

그녀와 뭔가 이야길 나누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 밤에

여행 첫 날

 

낯선 곳에서 누른 첫 셔터에, 도시의 밤이 한낮처럼 밝게 잡혔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나의 시선은, 당시의 나의 기분을

꽤나 정확하게 잡아 내곤 한다는 생각이 든다.

 

피곤한 시선으로 기울어진 건물이 지금 보니 더 재밌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화자찬

쥐구멍에라두 들어가고 싶을 만큼, 자신을 한껏 추켜세우는 게 유치할 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한 번은 그런 독극물도 들이켜야 삶이 지속될 때가 있다.

 

자기 우상화가 어리석고 유치하다고 해도

나는 그걸 인정하기루 했다.  우상화야 말로 우리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증거임을.

 

오히려 솔직하다는 느낌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도망다니며

난 가끔 모든 소통을 끊어 버리고 싶다.

더러운 똥도 피하고 싶고,

더러운 *들도 안보고 살고 싶다.

그래서 한 동안 피하며 살았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그게 운동하는 사람의 자세는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내가 이루려는 변화가 폭력과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맞설 필요가 있다.

항상 맞서는 건 불가능하지만

내가 변화를 원한다면 필요한 자세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의 이름을 도용한

소통의 단절들이 비극을 부를테니 말이다.

 

예를 들면,

 

너희들이 혁명을 떠들 자유가 있다면,

우리에겐 혁명분자들을 처형할 자유가 있다.

 

너희들이 동성애를 할 자유가 있으니,

우리에게는 동성애자를 처벌할 자유가 있다..

 

뭐, 이런 건 아니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화연습.

1. "사랑한다, 그러니 같이 있자"

   "사랑한다, 그러니 날 놓아줘"

 

2. "내가 널 위해 무슨 일을 해주면 좋겠니?"

   "널 사랑해. 널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거야"

 

3.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니?"

    "......"

 

 

4. "그건... 다른 거야"

   "나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5. "넌 몰라도 돼"

   "사랑한다면 말해줘"

 

 

6. "그걸 꼭 말로 해야 돼?"

    "사랑한다고 말해줘."

 

7. "싫으면 관둬"

     "....."

 

8. "지긋지긋하다!"

    "....."

 

9. "그냥 편하게 살자"

   "너무 피곤해"

 

10. "아무 것도 아니야"

     "응"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참을 수 없는 웃음.

오늘, 아는 남자 하나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 남자가 내게 말했다.

 

"네가 결혼제도를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전화를 받고 있는 쪽 손이 조금 떨렸다. 그 남자는 나랑 친구라는 관계에 있다. 결혼식에 와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 누구의 결혼식에도 가지 않는다고, 그래서 너의 결혼식에서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

 

그 남자가 말이 없다. 나는 그냥 간다고 거짓말을 할까 잠깐 생각했다. 그 남자를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스쳤지만,  여기서 물러나 버리면, 그 남자가  내게 전화를 다시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때마다 마음이 쓰일 것이다. 그 남자에게 가져서는 안 될 '미안한 마음' 같은 게 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 용기를 내서 그 남자가 하려는 이야기를 더 듣기로 마음 먹었다.

 

"뭐라고?"

 

"결혼제도를 반대하는 것과 내 결혼식에 오지 못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

 

"......"

 

"와서 축가를 불러주면 좋겠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약간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결혼제도를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나한테 결혼식에 와서, 그 남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라고 한다.

 

"네가 나와의 관계를 그렇게나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결혼식에 가지도 않을 뿐더러, 축하할만한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어떻게 축가를 불러 줄 수는 있겠는가?"

 

"......."

 

"그럼 피로연에라도 와라."

 

그 남자는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 남자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는 거절하기가 훨씬 쉽다. 그리고 내가 그 남자의 결혼식에 가지 않는 또다른 이유를 말하기도 훨씬 수월해진다.

 

"나는 피로연에 가지 않는다. 그 곳에 가면 너의 친구들이면서 동시에, 성폭력 가해자인 자들과 분명 대면하게 될 것이고 그럼 나는 화가 날 것이다. 네가 나를 초대하는 이유가 행복한 순간을 나누기 위함이라면, 네가 아무리 행복한 날이어도 나에겐 그렇지 않을 것이다. 너의 행복 따위는 나의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가차 없이 그 자리를 전쟁터로 만들 것이다. 나는 그들과 마무리짓지 못한 싸움을 끝낼 것이다.그래도 좋은가?"

 

그 남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사실 그 남자의 침묵은 익숙하다. 그리고 나는 그 침묵 때문에 언제나 모욕을 느낀다.

 

"모두들 너를 궁금해하고 있다"

 

그 남자는  항상 나와의 대화 끝에, 나도 잘 모르는 '모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중에 추론해 본 결과 그 '모두'는 바로 그 남자의 친구들이면서 동시에 나의 성폭력 가해자인 그들을 지칭하는 듯 했다. 나는 그 '모두들' 이 궁금할 리가 없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너에게 두 번 정도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다고. "

 

 

" .........."

 

또 익숙한 그 남자의 침묵이 이어진다. 나는 이 마지막 침묵을 견디기만 하면 된다.

 

" 그럼 결혼식 끝나고 보자, 집에서 보자"

 

 

그 남자와의 전화통화가 끝나고 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격렬하게 웃었다.

그 남자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다시 비슷한 내용으로 전화를 걸 것이다.

 

"모두들 널 궁금해 한다. 왜 이렇게 안 보이는 거냐?"

 

 

이것이 사라진 여성들의 전모이며, 이것이 진정 웃을 만한 일이다.

정말이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이렇게 진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진부한 이야기의 주이공이 나라는 사실이 정말 웃기지 않은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탈감.

한 때 부자였고,

한 때 부족할 것이 없었고,

한 때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그런데 지금은 가난하고

그런데 지금은 항상 부족하고 배고프고

그런데 지금은 외롭고, 미워하고 미움받고.

 

 

이런 변한 상황들, 이런 박탈감 때문에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내가 만약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이 공간에서 너랑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 사람들의 현재는 어쨌든 나와 함께지만, 그들의 과거는 나랑 판이하게 달랐다.

그리고 과거의 집안 몰락? 같은 급격락 추락, 박탈의 경험은 그들에게 여전히 상처라는 점...이 그들과 나 사이의 불안한 괴리를 느끼게 했다.

 

술자리에서, 자기 포함, 가족들이 경험한 그! 급격한 추락을 이야기하며 통곡하는 친구들을 위로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정말 이 '시츄에이숀'이 코메디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추락의 경험도 없다.

그리고 그들이 볼 때는 추락할 것도 없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유들이 나름대로 절절했다.

 

그들은 자신의 집이 압구정동 100평짜리에서 마포구 30평으로 줄어들었다고 울고,

아빠가 대기업 사장에서 벤쳐기업 이사되었다고 울고

자기는 삼성맨이랑 결혼했는데, 자기 친구는 삼성계열사 사장 아들놈이랑 결혼했다고 울고

아는 사람은 서울대 갔는데, 자긴 연고대,이대갔다고 울고..

그리고 이 외의  몇가지 추락 경험들 중에는 내가 잘 모르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참 울다가 밝은 얼굴로 말한다.

 

"그렇지만 이런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만나고, 내가 너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건 정말 행운이지"

 

사실 그 친구는, 나의 성심성의를 다한 위로의 댓가로,

칭찬을 선사해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듣는 나로써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들 말에선 '예수재림' 분위기가 난다. '낮은 곳에 임한' 분위기 말이다.

 

'난 낮은 곳에 있소'라고 말한 적 없고, 게다가 '낮은 곳에 와서 날 좀 이해해 주쇼'라고 이야기한 적은 더더욱 없건만, 그들은 왜 저런 착각을 머리에 간직하고 살아갈까.

 

난 단지 내가 잘은 모를지라도,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었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깨를 쓸어주었다. 그 고통에 즉각적인 공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감정이 그랬다니 친구로써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가 되긴 좀 힘들 것 같다.

 

뭐 하나 동등한 것이 없다. 그들의 머리 속에 박탈은, 인생 급추락으로 평가되고 있는 게 맞다. 위에서 아래로. 행복에서 불행으로. 높은 곳에서 아래로. 그래서 여전히 울고 있는 얼굴로 '너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서 행운이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아래로 떨어지다 보니 만나는 사람, 나.

나도 나를 되돌아 보게 된다. 난 대체  저 아래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여튼 난 기독교 제일 싫은데, 이 친구들은 하나같이 기독교도들이다.

어쩜 그래서인지도 몰라. 라고 편히 생각해 버리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 싸워야 한다. 또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피곤해. 아. 피곤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람과 닮은 글을 보고 싶.

어떤 이의 글을 보면, 글을 쓴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호감을 갖는 경우가 있다.

좋은 글은, 말 그대로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그 글을 쓴 사람조차 나를 기분좋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그렇게 되면 기분이 더욱 좋다. 나는 글을 통해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했으며 어쩌면 동지나 친구나 기타 등등의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어갈지도 모르니까. 이런 사건은, 인생에서 몇 안되는 신나는 일 중에 하나다.

 

그런데 글과 그 사람이 다를 때가 있다.

그러니까, 글이 느무나 훌륭하셔서 글쓴 사람도 꽤나 훌륭할 거라고 착각을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나의 경험상, 훌륭한 필자들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몇몇은 글이 사람의 형상으로 되살아난 듯한 경우가 있었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중  몇몇은 상상을 뛰어 넘는 못되 쳐먹은 놈들(대부분 남자들 그것도 맑시스트로 자처하는 놈들이었다.물론 남자 아닌 인간들도 있지만.)이 글솜씨만 좋은 경우다.

- 글 줄이나 써대서 관심 끈 다음에 자신만의 할렘을 만드는 그런 족속들은 그 옛날 모뎀통신시절에나 많은 줄 알았더니 지금도 여전히 많다. 사실 이런 상황들이야 말로 머리에 먹물들었다는 것과 지혜나 판단력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런 괴리가 좀 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글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렴 글쓴이와 글 사이에 실오라기 같은 공통점이 없을라고? 저런 흔적을 남긴 뇌의 어느 구석에는 분명 훌륭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하면서 어떻게든 글과 사람을 이어보려고 노력 하는 와중에도 내 눈이 썩고 귀가 썩고 인생이 썩어간다. 그런 인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이쯤 되서야 나는, 내 속물적 바램인 능력숭배를 점검하게 되는 게다. 어떤 이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좋아하는 거하고 ,그 사람하고 구분을 못하는 그런 병 말이다. 이것의 증상은, 특정한 능력을 숭앙하는 내 자신이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다. 사실 이걸 굳이 구분 안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데 그런 분리가 필요할 때가 있다. 안 그러면 정말 낭패다. 왜냐하면 그 글은 그냥 쓰레기인데 내가 거기에 목매달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 헛소리인데 거기에 목숨걸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했던 이야기들, 단지 글을 풀어나가는 솜씨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글쓴이의 인생, 철학, 삶의 태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는데 혼자 괜히 오바하는 희망을 걸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글쓰기를 그냥 능력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 조금 슬프다. 글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항상 경계를 늦추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건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래서 왠만하면 글이, 그 글을 쓴 사람하고 닮아있으면 좋겠다. 그럼 정말 소통한다는 느낌이 들테니까. 그럼 조금은 희망적으로 신나는 일을 할 용기가 생길테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필요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해.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할 때, 뒤에서 머리라도 잡아당길 그 무언인가가 없어, 항상 죽음을 생각한다는 어느 지식인의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의 글이 우스워서가 아니었다.  너무 솔직하게 글을 써서 당황했던 것이고, 그 글이 무언가를 폭로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창피했던 것이다.

 

얼굴도 붉어졌고. 부끄러운 나를 멀리서 봤더니 또 창피해서 웃음이 났다. 내가 창피했던 이유는 하나다.  내가 그토록 버리고자 했던 나의 모습이 만천하에-결국 나 자신에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꽤 오래 전에, "난 네가 필요해"라는 그런 망할 달콤함에 매달려 사는 걸 접자 했다. 부모가, 자식이, 연인이, 친구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산다..라는 삶의 태도가 나에게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았고, 그들에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 직접 들었으며, 보상이 없어도 좋은 관계란, 내가 도망갈 곳을 찾는 일종의 망상이고, 그런 마약같은 의존을 끊었야 했다.

 

이것이 마약인 이유는 그 과정에 있는 것 같다. 

필요한 사람을 자처하는 과정은 내게, 대략 이러했다.

 

그들은 무언가 갈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혹은 그러할 것이다라고 내가, 그들을 판단한다. 실제로 그럴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성명서나 문서로 작성되어 내게 배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거가 남지 않는다. )

 

그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나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알아서 보살핀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말을 할 수 없다고 착각하는 것도 있으리라.고도 여겨진다. 여튼 말을 할 수 없다는 상황 자체가, 애정을 투사하는 굉장한 동인이 된다.)

 

나는 나의 말을 줄여 나가고 그들의 바램을 앵무새처럼 따라 말한다.

(애정의 대상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대리자를 자처하며 모든 일들을 처리할 때 쯤이면 나와 그 대상의 경계 구분이 불투명해지면서 점점 나의 이야기를 대상의 요구에 섞어서 이야기하고 대상의 바램이 나의 바램과 하나라고 착각한다. 이건 엄밀히 희생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큰 쾌감이 숨이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나의 요구를 말할 수 있으며, 애정의 대상은 나에게 감사할 것으로 여겨지며 주변의 사람들은 나에 대한 평판을 높이 살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판단인거다.)

 

그들은 나를 원치 않았다고 말한다. 적어도 그런 방식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바램을 입밖으로 말한 적이 없으며, 내가 그들의 바램이라고 떠벌렸던 것은 결국 나의 바램이며, 망상이라고 결론지어져 버린 것이다. 수많은 연인관계들은 여기서 끝장을 본다. 보상받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식의 제스추어들은 언젠가 꼭 이런 식의 종말을 맞이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되풀이 됐다. 과정이 이러하니, 필연적으로 공허함이나 환멸, 스스로 상처라고 말하는 것들이 뒤따른다. 탓하는 것도 지겹고, 스스로에게도 지겹다. 원인도 모르고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결국 사는 게 항상 배고파 지는 거다.

 

난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남의 필요를 뒤집어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지겹다면, 당장 그 짓을 때려 치워야한다. - 정말 지겨웠다.

 

나의 생의 근거는 상당 부분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그나저나한 '나'여야 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나의 삶에도 보상은 있어야 하며

적절한 거리도, 밀접하지 않은 다양한 관계들도 필요하다.

 

그래서 예전에 한 번, 그 곳에서 다시 시작된 적이 있었다. 나의 친구, 나의 연인, 나의 동료...이렇게.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시작해야 할까보다.

 

 

지금은,  나는 나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그런 게 나한테 필요한 때라는 걸, 어느 솔직한 지식인이 알게 해줘, 창피하면서도 참 다행스럽다. 나는 죽을 때 머리를 당기는 이가 없을 지라도 이 삶을 살아낸 내 자신이 대견해서 죽거나 혹은 잘났다고 살아갈 거다.

 

암, 그럴꺼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