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지역지구에 노총회관을 세우고 공개사무실을 마련하자!
프롤레타리아트 힘으로 상호부조운동을 불러 일으키자
프롤레타리아트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현대그룹 조선3사가 노사투쟁으로 날선 대립을 보이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임단협 갈등으로 20년만의 파업을 앞두고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생존을 둘러싼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개별적 투쟁은 항상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성격을 갖는 생산이 이윤추구라는 개인적인 욕심이 개입하면서 경제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데, 개별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사적인 소유가 불러온 생산의 무정부성에 가로막혀 무위로 끝나고 만다. 설사 개별적인 투쟁이 성공하더라도 생산의 사회성을 억누르는 사적인 욕심을 계획성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파국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파업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사회성을 획득하고, 이러한 사회성은 정치조직을 중심으로 벌이는 집단적인 해결책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개인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이 기초가 되는 경제체제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무정부성은 사적인 소유와 사적인 이윤추구에 기인한다. 기업이 사회성을 띠어가지만 아직은 개인 것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유화를 뛰어넘어 생산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파국은 수습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존의 위기를 지키려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파업이라는 경제투쟁을 넘어 정치조직을 중심으로 의식적인 정치투쟁에 나서야 한다. 생산을 사회적으로 조절하려는 집단적 투쟁은 이미 사적인 성격은 넘어서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경제위기에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진출을 담보하는 정치세력화와 정치조직을 중심으로 벌이는 정치투쟁과 의식적 활동뿐이다.
민중운동을 조직하자!
경제위기가 악화되고 있다. 서민들의 가계부채는 1000조원을 넘어섰고, 10년동안 자영업자 10만명이 파산했다. 또한 경제위기로 인해 자영업자 부채는 평균 9000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경제위기로 국민경제는 무너져 내리고 있고 서민경제는 빚더미에 깔려 신음하고 있다. 이제 서민들은 생존의 기로에서 죽음으로 내모는 자본주의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민중운동이라는 혁명적 분출로 새로운 대중 투쟁을 시도하여야 한다.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 민중이 투쟁의 주체로 일어서야 한다.
경제위기로 고통받는 민중을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세우자
서민들이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사회운동의 주도세력이 되어야 한다.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이 서민이기 때문이다. 서민에게는 더 이상 빼앗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생산적 일자리를 빼앗고 실업이라는 굶어죽을 자유만을 보장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아무리 일해도 더 가난해지는 것을 말하며 일한 것을 모조리 빼앗기는 것을 말한다. 경제위기는 노동자에게는 절대적 생존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생존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더 이상 빼앗아가지 못하게 민중권력을 만들고 투쟁하여야 한다. 서민들이 살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하는 근로대중은 이제 정치소외에서 벗어나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야 한다.
근로대중조직이 정치운동의 주인이 되게 하자
근로대중이 정치를 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로 정치조직이 있어야 한다. 조직되지 않는 대중은 얼려지지 않는 물처럼 단단하지가 않고 투쟁에서 패배할 뿐이다. 근로대중들은 매번의 투쟁에서 성패를 경험으로 남겨야 한다. 그래야 투쟁은 전진하고 근로대중은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이든지 근로대중이든지 독점자본 앞에서 우왕좌왕하다간 투쟁은 실패하고 대중에겐 패배와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농민회를 중심으로 협동조합과 연대를 갖자
농촌에서 일하는 근로대중은 농민회로 조직되어 있다. 그러나 독점자본은 세계화를 위해 농업을 희생하고 있다. 부르주아 정부가 공격적으로 벌이는 FTA는 농업부문에서 자유무역을 촉진하고 농촌에서 실업과 이농을 부추긴다. FTA는 각국의 농민들에게 농산물 가격을 내릴 것을 강요하고 대자본 기업이 농산물 유통업을 장악하여 독점이윤을 수탈한다. 농업부문에서 자유무역화는 소작농과 소농에게 돌아가야할 잉여가치를 유통자본이 수탈함으로써 농촌을 도시에 종속시키고, 유통대기업을 앞세운 경제적 지배를 통해 수탈을 영구화한다. 이제 농촌의 주인인 농민들이 조직을 기반으로 민중권력을 형성하고 수탈에 맞서 생존권을 사수하여야 한다. 그래야 농민이 살고 농촌으로 돌아온 귀농인이 살 수 있다. 새로 생겨난 협동조합도 농민회에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농민운동과의 연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조직되지않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인 까닭은 대공장이라는 생산조직에서 계급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성의 기초는 생산계급이라는 점과 생산단위와 동일한 계급 조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황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각성하여 계급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자생성만을 가진 계급 조직은 패배를 불러온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위기 시기에 정치투쟁에 있어서 생산을 통제하는 정부를 갖지 못한다면, 그리고 계급적 투쟁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파국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대중의 자발성은 의식적 활동에서 비롯된다
대중운동에서 자발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날 때부터 똑똑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눈에서 물신성이 사라질 때만이 투쟁은 자발성을 가질 수 있다. 물신성이란 종교처럼 강조되는 신비주의로, 사회를 신격화시키는 배외주의(拜外主義)의 발로이며, 사회적인 문제해결을 방해한다. 이러한 신비주의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사회해석이 필요하다. 이 일을 맡은 역할을 하는 것이 마르크스경제학이다. 사회에 대해 물적으로 자본의 궤적을 추적하여 해명하고 경제적 해석을 통해 자본주의 신비성이 벗겨질 때, 이를 받아들이는 대중은 혁명적인 계급이 된다.
사회민주주의의 조력없이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경제투쟁이 되었든 정치투쟁이 되었든 노동조합은 마르크스경제학이라는 무기를 지녀야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이야말로 신비에 쌓인 자본주의에서 가치의 생산과 분배와 유통 그리고 자본주의적 소유를 강화하는 사적인 이윤 전취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이 가지는 물신성의 영역을 깨뜨리고 신비성을 벗겨버림으로써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존을 방어하게 한다.
상호부조운동부터 시작하자
노동자들은 사회적 가치를 생산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한 생산계급으로서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약자로서 착취를 받는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계급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이어가야 한다. 자신이 생활하면서 부닥치는 사회생활의 어려운 점은 동료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해결해야만 한다. 직업적인 동질성을 바탕으로 조직된 자발적인 상호부조는 기업적인 방법으로 해결되기보다 계급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노동조합과 정치조직은 구속, 수배, 해고와 질병, 부상, 사망, 혼인, 출산에서 필요한 동료간의 협력을 놓치게 해서는 안된다.
생활고를 이겨낼 상호부조(相互扶助)를 시작하자
생활의 필요가 상호부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자생적인 상호부조는 우리나라에서는 부조계 등으로 표현한다. 보통 친척 또는 교회나 노동조합 등의 사회적 기관을 중심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상호부조에 대한 사회적 욕구는 필연적이기에 전사회적으로 상호부조로 확산되어야 한다. 이것이 4대보험이다. 그러나 4대보험은 아직은 계급적이지 않다.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생존 욕구는 보장되어야 한다. 진보정당이나 정치조직도 이를 품고 허용해야 한다. 공적인 4대보험에 대응하는 자발적인 상조는 공적인 4대보험과는 달리 노동자들끼리 인간적 유대를 유지하게 한다. 그리고 아직은 노동운동이 민중정부나 민중권력을 형성하지 않았기에 공적인 사회보험에 대해 무조건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인 운동으로서 상호부조운동을 살려가야 한다.
상호부조운동의 물적근거지가 필요하다
만약 종교운동이 조직되어 있지 않다면 상호부조는 어디에 의존하여야 하는가? 당연히 노동조합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노동조합 안에서 만들어진 노동자모임이 이를 해결하여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는 재생산되어야 하고, 어려울 때 서로를 의지하는 상호부조는 생산대중에게 중요한 사회적 필요이기 때문이다.
‘만남의공간’에서 상호부조(相互扶助)를 시작하자
노동자들은 생산의 필요해서든 재생산의 필요해서든 자주 만나야 한다. 어려울 때 함께 공동체로 헤쳐 나가야 하며 어려운 시기 협동의 힘으로 돌파하여야 한다. 모든 어려움을 혼자 풀기보다는 공동의 힘으로 풀어야하며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돌보아야 한다. 경제적 위기는 꼭 계급의식이 아니더라도, 굶어죽지 않으려면 가족 생계의 위기조차도 공동의 협력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낮은 처우의 노동자들에게는 값싼 상조업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러나 상조기업은 많이 생겨났지만, 상조기업은 이윤추구가 목적이라서 가난한 노동자들은 기업적인 상호부조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의식적인 노력이(자발적인 상호부조운동이) 고가의 상조업을 견제하고 가격을 낮추도록 하거나 필요없는 비용거품을 제거해줄 것이다. 아니 자발적인 상조운동으로 근로대중의 욕구를 실현하도록 자발적인 상호부조를 조직하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의식적으로 기업상조에 반대하고 이러한 자생적인 노동자중심의 상조운동을 일정한 공간으로 품어서 근로대중과 조합원 대중운동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근로대중은 빈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산이든 재생산이든 근로대중의 필요는 곧 정치의 출발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 운동공간인 각 지역에 ‘만남의집’을 마련하자
생산이든지 재생산이든지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생활하는 모든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양식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것도 중요한 정치사업이고 의식적인 운동이다. 이러한 사업은 대중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어야 하고 정치운동도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렇기에 의식적인 활동가와 현장노동자가 한 공간에서 기거하고 공존하고 소통할 만남의 공간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상호부조모임과 현장모임이 ‘만남의집’에 모여들게 하자
의식적인 활동가이든지 생산을 담당하는 현장조합원이든지간에 한 역할과 한 공간을 만드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파업이든 상호부조이든 그들간의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만남의집’(노총회관)을 공간으로 확보하는 것이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하나의 현명한 길이다. 노동자들간에 인간적 유대를 강화시켜주는 의식적인 운동으로서 상호부조모임이 한 공간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하는 것이 대중운동 조직방식으로 곧 자리 잡아야 한다.<끝>
이스크라
민주노총과학기술연맹(추)
2015.3.1
민들레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