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을 전후하여 소비에트 연방이 주변민족에 어떠한 정책을 전개하였는지 알아보면, 프라우다 제251호에 게재된 스탈린의 논설은 볼셰비키혁명으로부터 4년 동안의 주소민족정책을 다음과 같이 총괄하고 있다.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두아니아, 폴란드 제외)의 1억 4천만 인구 가운데 러시아인은 7천 5백만이고, 6천 5백만인은 러시아 이외의 민족이다. 이들은 주로 변경에 군사적으로 가장 침략당하기 쉬운 지점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변경에는 원료, 연료, 식용생산물이 풍부하다. 이들 변경 지방에는 중앙러시아에 비하여 공업적 및 군사적 발전이 뒤져있다. 그 결과 이들 변경지방은 중앙러시아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 없이는 독립의 존재를 수호할 수가 없다. 그것은 중앙러시아가 변경지방의 연료, 원료 및 식량의 원조 없이는 그 군사적, 경제적 힘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정책은 비러시아 민족이 거주하는 주에 대한 요구와 권리를 포기하는 것, 이들 민족에 대하여 독립국가를 영위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 이들 민족과 중앙러시아 사이에 군사적, 경제적 동맹을 체결하는 것, 낙후한 민족들의 문화적, 경제적 발전을 위하여 원조를 제공하는 것. 위의 사항을 농민의 해방과 변경민족의 노동자에 전권력을 집중시키는 기초 위에서 행하는 것. 이것이 소비에트의 민족해방정책이다.
6천 5백 만여의 러시아내의 이민족, 주소민족에 대한 볼셰비키정책의 본령이 담겨져 있다. 러시아는 변경지방과 분리되어서는 군사적, 경제적 힘을 유지할 수가 없다. 또한 변경주민들은 러시아와 분리되어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 러시아는 변경지방을 어떤 형태로든 확보하고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변경지방이 러시아와 완전히 분리하려고 한다면 러시아는 자신의 존립을 위하여 그것을 허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변경 이민족과 중앙러시아 사이에 자유의사에 의거한 군사적, 경제적 동맹을 체결할 것을 전제로 하여 독립을 부여하는 것이다. 중앙 러시아의 소비에트와 똑같은 형태를 변경지역에도 만들어 양자간에 동맹을 체결하여 연방을 만든다고 했다. 중앙 러시아의 소비에트와 똑같은 소비에트 볼셰비키의 군사력에 의하여 수립되었다. 이 변경 지방의 소비에트정권들은 중앙러시아의 소비에트와 군사적, 경제적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런 절차를 밟아서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공화국을 만들었다. 민족문제를 담당하고 있었던 스탈린은 1918년 12월 15일에 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볼셰비키화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변경지방에 수립된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부는 러시아의 사회주의운동의 물결을 막으려고 소비에트정부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들은 민족 부르주아지 수중에 권력을 보수하기 위하여 변경지방에 개별적인 부르주아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부르조아 민족주의 정부라고 한 것은 다름아닌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한 변경지방의 민족주권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배제하기 위하여 볼셰비키는 러시아로부터 사회주의 운동의 물결이라는 표현과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허용한다는 선언상의 민족자결이다.
스탈린은 1919년 2월 9일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러시아 제국주의는 국가로서는 해체상태에 있다. 10월 혁명과 브레스트 강화조주(소비에트와 독일)은 이 분해 과정을 더욱 심화시켰다. 변경지방에 수립된 군소 부르주아 정부들은 중앙의 사회주의 소비에트정부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다. 그러나 낡은 제국주의 붕괴과정에서 독립의 소비에트공화국을 거쳐 러시아의 여러민족은 자유의지에 의한 새로운 형제로서의 통일에 도달하고 있다.
일제의 강점 아래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해서는 조선의 민족인텔리에게 볼셰비키의 민족정책에 대하여 공감을 느꼈던 것이다. 볼셰비키정책의 전술적 전개는 성공하고 있었다.
식민지 민족의 선진인텔리들이 볼셰비키 정책에 공감을 느낀 데에는 다음의 상황전개가 있다. 그것은 곧 러시아 밖의 주소민족국가 및 피억압민족에 대한 볼셰비키의 외교정책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방 주소 민족 내지 국가에 대한 외교적인 접촉은 중국과의 관계로부터 착수되었다. 1918년 7월 4일 제5차 소비에트 대표자회에서 레닌의 외무인민위원 치체린(트로츠키 후임)은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정러시아가 가지고 있었던 만주에서의 영토적 주탈의 포기와 이 지역에서의 중국의 주권회복을 원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 바 있다. 이 연설이 기초가 되어 1920년 7월 25일에 대중선언이 발표되었다. 카라한 선언이라고 불리는 이 선언은 제정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특권을 일체 포기할 것을 밝힌 다음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모든 불합리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즉각 교섭에 임할 용의가 있음을 제의한 것이었다.(부인민위원 카라한) 이처럼 우호적인 태도는 서유럽 열강에 대한 중국의 대항활동 지원이다. 중국은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의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식민지국가였다. 4억 인구가 반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소비에트 러시아가 차지할 수 있는 외교전략을 전개한 것이다.
동방에 대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외교공세는 이어 영국세력이 깊이 작용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접근하였다. 1921년 2월 28일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하여 주변 주소민족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것과 아프가니스탄의 문화개발을 위하여 물질적 원조를 제공할 것을 제의하였다. 1880년 이래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은 1차대전 뒤에 독립 운동을 일으켜 1919년 8월 8일에 입헌왕국으로 승인된 국가였다. 그러나 영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음에도 인접국 소비에트 러시아의 외교적 호의에 아프가니스탄이 기꺼이 응낙하여 러시아, 아프가니스탄조주을 성립시킨것은 소비에트 외교의 성공이다.
이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조주의 조인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1921년 2월 26일에 페르시아에 대해서도 제정러시아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특권의 포기뿐만 아니라 페르시아로부터 러시아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주속하였다. 이것은 영국으로 하여금 군대를 페르시아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압력을 가하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 또한 1921년 3월 16일에는 터키와 역시 같은 조주을 체결하였다. 영국의 세력을 배제하고 역사적으로는 러시아와 등지고 있는 터키를 새 러시아에 접근시키려는 것이었다. 1921년 11월 5일에는 몽고와 친선조주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상 몽고를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맹국으로 하려는 행동이었다. 이처럼 소비에트 러시아는 주변의 동방국가, 피억압민족들에 대하여 과거의 청산과 우호친선 및 원조 주속을 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러시아의 주변국가, 피억압 민족들을 최소한 중립 내지 친러시아로 이끌어 가자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서방 강대국과 그들의 관계를 대립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취주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가안전을 위하고, 긴 안목으로 볼 때 식민지 및 식민지 민족의 독립투쟁 곧 반제투쟁의 전개로 볼셰비키혁명의 세계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볼셰비키정책의 위와 같은 전술적 전개에 대하여 주변 주소국의 지도자들이 또는 피억압민족의 선진인텔리들이 맑스주의가 전세계를 몰아치며 인텔리들이 볼셰비키의 이러한 구체제 배격의 외교정책에 대하여 조선의 인텔리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폐쇄적인 국내조건 아래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있었고 해외에서 신지식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감한 유학생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조선의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맑스주의의 사상운동에 많이 가담하였던 것도 그 원인이 있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인사들이 월슨의 민족자결원칙에 고무되어 독립 청원운동을 전개하다 돌아서고 또한 3.1 운동마저 일제의 무력에 진압을 당하게 되자 소비에트 러시아의 식민지 민족후원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때 레닌의 러시아 공산주의는 그들의 세계정책상의 유용한 기구인 코민테른을 통하여 한국의 민족운동 단체들과 연대하였다.
상해의 독립운동계에서 거물급 존재였던 여운형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기독교인이며 민족주의 독립운동자였으며 상해에 파견되어 있는 코민테른의 극동부장 보이틴스키의 권고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당의 출판위원이라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보이틴스키의 재정적 원조로 맑스의 공산당선언을 비롯한 공산주의 서적들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 출판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1차대전 뒤 시베리아에 머물러 있던 체코슬라바키아군의 총사령관 가이다를 방문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논의하였던 일이 있음을 상기할 때 그가 보이틴스키와 접촉한 것도 독립운동에 관한 문제가 더 직접적인 동기였다. 그 당시 망명지사 가운데에는 민족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소비에트와 연대하려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당수 이동휘도 조선의 참령이며 경술국치 뒤에는 간도와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18년 6월에 한인사회당을 조직했고 다음해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부임하여 현직에 있으면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한 사람이다.
1차대전 뒤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독립청원은 파리 평화회의 이래 계속적으로 무시되었고 워싱턴회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일들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코민테른은 1922년 1월에 극동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자바로부터 대표들이 모여들었는데 한국에서는 파리회의에 파견되었던 김규식을 비롯하여 여운형, 장건상, 김시현, 박헌영 등과 애국부인회 대표 김원경, 권애라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동양 피억압민족에 대한 중대한 테마를 다루었고, 중국, 한국, 일본의 혁명 내지 상호관계를 중심의제로 상정했다. 이 대회에서 코민테른이 전력을 다하여 피억압 민족의 혁명적 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열정적인 정치적 환대가 베풀어졌다. 그 어느 자리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인간적인 온정과 국제적인 정치동맹이 제공되었다.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리즘을 체득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러한 관계가 맺어지었고 또 하나는 한인의 초기 공산주의운동의 경우로 민족주의 운동자들과 민족인텔리들이 코민테른의 세계혁명에 함께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