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시내버스 공공성강화 범시민대책위원회

2023/05/01 14:44

시내버스 철학

 

도시확장은 공업화와 산업화의 결과물이다. 확장된 도시에서 이동 교통 서비스는 부르주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도심이 외곽을 확장하여 자꾸 교외로 시외로 교통수단이 뻗어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농경지와 마을을 침해한다.

지금은 시내버스 (군내버스)가 국가 공영서비스에서 벗어나 하나의 산업처럼 영업화되고 있다.

도시에 시내버스가 있다면 농촌에는 시외버스와 군내버스가 있다. 또한 중소도시간에는 직행버스와 고속버스가 있다. 완행버스가 사라지면서 점차로 직행이나 직통버스로 바뀌어간다.

또한 시내버스가 공공성을 띠었다고 주장하자 준공영제(보조금제)를 하게 되었지만 정부가 직접 직영화하는 직영제(공영제)는 노동자계급의 당의 법적 해산과 미약한 정치세력화로 번번히 좌초하고 있다. 시내버스가 군내버스처럼 공영제가 되려면 노동자계급의 당이 세력화하고 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하고 연립정권이나 연립정당의 세력화로 행정부 집권을 바라보아야 한다.

 

시내버스 과학

 

일제 강점기에는 시내버스가 없었다. 기차에 이어 말(소)과 구름마가 교통수단이었다. 시발택시가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에서 인력거 및 우마차와 전차만 있었다. 1970년대까지도 목포에서는 말구름마가 있었다. 목포에서는 1964년경부터 시내버스 승합차 영업사업을 시작했다 전해진다. 인구도 많지 않았다. 20만을 넘지 않았다. 버스 노선은 1번과 2번 노선 두 개뿐이었다.(종점은 유달해수욕장이었다) 그리고 북항발 6번이 거의 동시에 생겨났다. 그 뒤로 7번과 13번이 생겨났다.(종점은 삼학도였다) 서울에서 전철과 지하철이 생긴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이다. 목포에서 공단에는 처음부터 시내버스가 가지 않았고 나중에 차고지가 이사 갔으며 시내버스는 중고등 학교와 부두, 어판장, 주택단지 그리고 교외를 연결해주었다. 시내버스 영업개시 초기 70년대 차장은 여성승무원이었고 여성노동자이었지만 안내양이라고 불렀다.

1980년 이전까지 버스는 1번이 이로동까지만 운영되었고 1980년대에 석현동 차고지가 종점이 되었다. 그 후에 2번이 생겨났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외곽의 농촌 학생들을 위해 시외노선이 생기고 노선이 연장되었고 군내버스가 공존하였지만 점차로 시내버스에 편입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101번(목포대와 청계 농공단지), 105번, 111번(나불도 유원지), 108번(일로읍)가 생겨났고 1990년대 초반에 즈음하여 좌석버스가 200번(무안읍) 노선이 생겨났다. 그 후로 시외곽을 경유하는 좌석버스 노선이 증설되었고(150번, 300번, 500번, 600번, 800번, 900번, 1000번). 2010년대 즈음에 되어서야 전자식 환승시스템을 갖추었고 버스정류장 단말정보시스템(버스 네비게이션)이 도입되었다. 노동자가 버스협동조합을 요구하자 별도 법인과 별도 배차가 아닌 사유버스 기업 관리경영체 아래에 낭만버스가 생겨났다(2020년경). 스쿨버스는 80년대에 잠깐 몇몇 중고등 학교에 있었지만 자가용의 보급과 이륜자동차와 원동기 자전거의 이용자 소멸로 동시 연관되어 없어져 버렸다. 자가용이 늘자 오토바이도 없어졌다. 승차권은 1980년대에만 이용되었다. 토큰(엽전승차권)은 서울에서만 이용되다 폐지되었다.

지금은 버스카드만 이용된다.

 

 

 (시내버스) 공영화를 바라는 목포 시민들의 모임 [공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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