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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본 이오시프 스탈린의 생애와 평가(Stalin's biography with Marx-Leninist perspective and assessment) 2023년 3월 5일은 소련의 지도자이자 독재자로 알려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국내와 서구사회에 각인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미지는 학살과 숙청 그리고 독재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나 한국사회에서는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전쟁의 책임을 스탈린에게 묻고 있으며, 이를 통한 부정적인 평가가 사회의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용한 인물로 회자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국내 방송에서도 세계사 관련 프로그램에서 스탈린을 주제로 다루다보면,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는 수준이다. 서구 사회에서 만든 스탈린 관련 다큐멘터리 또한 그러하다. 스탈린은 항상 폭군이거나 독재자 그리고 학살자여야만 한다. 또한, 편집증 적이고 무고한 사람을 의심하며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만 움직여야 하는 인물이어야만 한다. 성격과 인격도 무작정 악마여야하며, 잔혹함이 극에 달해야만 하는 인물이 아마 스탈린일 것이다. 적어도 서구 사회는 이와 같은 이미지를 과거 냉전시기에도 퍼뜨렸고, 현재도 퍼뜨리고 있으며, 2022년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더욱 강화하는 추세다. 그래서 이번엔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70주년을 맞이하여, 이오시프 스탈린의 생애를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다루고자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879년 12월 21일 현 조지아(그루지아) 동부에 있는 고리에서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였다. 스탈린의 아버지 비사리온은 제화공이었으며, 어머니 예카테리나는 농노의 딸이었다. 스탈린은 몇 안 되는 평민출신의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이는 소련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고리에 있는 학교를 다닌 스탈린은 1894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성적도 우수했다. 당시 스탈린의 성적표를 보면, 성경, 러시아 문학, 역사, 수학, 그루지아어 등에서 최고점을 받았던 것으로 기록됐다. 스탈린이 살던 조지아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고, 조지아에서도 황제 차르에 맞선 움직임이 일어났었다. 스탈린 또한 1890년대에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됐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쓴 좌파서적들을 읽으며 청년기를 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금서를 읽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1897년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조직에 가입했으며, 1900년에는 집적 노동자들이 모인 불법 집회에 나가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 이후 스탈린은 마르크스나 레닌이 쓴 서적들을 배포했으며, 1902년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위원으로서 조지아 도시의 주요 공장들에서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주도했었다. 1900년대 초 스탈린은 좌파 활동가로서 활동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로 분리되자, 스탈린은 레닌을 따라 초창기부터 볼셰비키로 활동했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이 레온 트로츠키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스탈린은 볼셰비키 활동가로서, 혁명자금을 마련하는데 열성적이었다. 스탈린은 은행 강도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건 엄밀히 말해서 자본주의와 자본가의 기구인 곳을 습격한 것이다. 볼셰비키의 이론에 따르면, 부르주아지에게 타격을 주는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활동으로 스탈린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최소 6번 이상 강제 추방당했으며, 6번 모두 탈출하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열성 활동가임을 몸소 입증했다. 스탈린의 마지막 유형 생활의 경우 북극해 근처인 투르한스크에서 보냈는데, 거기서도 살아남았고 강철과 같은 생존력을 보였다. 강철이라는 뜻을 가진 스탈린이라는 이름도 이 시절에 사용한 이름이다.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 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스탈린은 제1차 중앙위원회의 신입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때부터 스탈린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스탈린은 병역을 기피할 수 있었으나, 볼셰비키로써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스탈린은 볼셰비키의 신문사인 프라우다를 맡아 운영했으며, 케렌스키 정부 타도를 외쳤던 7월 혁명 실패 이후 레닌이 핀란드로 망명하자 볼셰비키를 이끌었다. 10월 혁명 이후 스탈린은 볼셰비키 혁명 본부의 일원이 되었고, 내무부 인민 위원을 맡았다. 1918년 제국주의 국가들이 러시아를 침공하여 적백내전이 일어났다. 적백내전 당시 스탈린은 적군을 지휘하는 군사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스탈린은 전선을 돌아다니며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했다. 특히나 당시 차리첸(현재 볼고그라드로 스탈린 시절에는 스탈린그라드라 불림)에서 적군을 지휘하여 전투에서 공로를 세웠다. 1922년 스탈린은 레닌의 추천에 의해 최고 서기장 즉 총 서기장에 임명되었고, 노동감독부와 더불어 민족문제 인민위원회를 이끌었다. 즉, 적백내전 이후 스탈린은 지속적으로 실적을 쌓았고, 볼셰비키 정부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경우 레닌이 스탈린에 맞서 아주 격렬히 저항한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스탈린이 유언을 조작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스탈린이 이렇게 했다는 증거는 신뢰할만한 출처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이며, 이러한 주장들이 현재 서구 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 좌파 학자들의 견해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그리고 스탈린이 경쟁했는데, 결국 스탈린이 승리했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적백내전 이후 소련 지도부는 스탈린이나 트로츠키를 떠나서 공업화라는 과제가 남아 있었고, 공업화라는 과제에 있어서 적어도 공통된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경우 국제사회주의와 일국사회주의를 운운하며, 스탈린이 국제혁명을 포기했다는 어리석은 주장들을 하는데, 이는 말장난일 뿐이다. 트로츠키가 말한 국제사회주의는 실현가능성이 없었으며, 특히나 적백내전기 국제사회주의는 서방과의 전면전을 불사해야할 일이었다. 내전 당시 소련-폴란드 전쟁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한 상황에서 트로츠키의 말을 추진한다는 건 자살행위다. 따라서 그 점에서 스탈린이 옳았다. 1928년부터 스탈린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휘청거렸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급속도의 공업 발전이 이루어졌고, 대공황기 미국인들이 소련에 취업하러 가는 경우도 있었다. 스탈린의 경제개발계획으로 서방의 추산치로만 봐도 연 14~15% 이상의 경제성장을 보였다. 이를 빗대어 박정희가 스탈린의 계획을 모방한 것이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이 많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스탈린과 박정희는 달랐다.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의 지원과 외화 확보를 통한 경제성장이었고, 삼성과 현대 같은 대기업들의 자본축적을 향상시키기 위한 발전이었다. 따라서 당시 민중들은 급격한 빈부격차에 시달렸고, 복지 또한 사실상 없었으며, 주거·의료·교육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로지 자본의 성장을 위해 경제발전동력을 밟았던 것이 바로 극우반공 박정희 체제였다. 반면에 스탈린 시기의 성장은 노동자들에게 무상으로 의료혜택과 교육혜택 그리고 주거혜택을 제공했으며, 연금제도와 민중들을 위한 대중적 시설들도 무상으로 제공됐다. 특히 교육의 혜택은 광범위하여, 1930년대 말기 문맹률은 10% 이하로 떨어졌으며, 특히나 노동자 계급이 우대받았다. 재벌과 자본가들이 우대받던 박정희의 반공사회와는 사회 목적이 질적으로 한참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경제 성장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말하는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다. 기근의 기원은 다소 복잡하지만,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반동적 쿨락 계급들의 테러행위, 자연재해, 성과 보고의 오류 등이었다. 기근 아사자는 보통 300~500만 명으로 서방사회에서 추산되지만, 러시아 측 자료는 소련 전역을 통틀어 64만 명으로 집계했다. 기근 아사자가 서구사회에 의해 의도적으로 과장됐음을 알 수 있다. 거기다 기근이 일어나자, 스탈린은 기근이 일어난 지역에 구제정책을 실시했고, 곡물수출량을 급격히 줄였으며, 마크 타우거 교수의 말대로 기근이 일어난 지역에 있는 민중들을 구제하는 데 비축해둔 식량을 많이 소진했다. 그런 점에서 홀로도모르가 스탈린의 학살이라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른바 대숙청을 감행했다. 대숙청에 대해 서구 사회는 수백만 명에서 많게는 1,000만 명을 학살한 것처럼 조작했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대숙청의 요구는 오히려 대다수 민중들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즉,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이 부패한 소련의 관료들을 타겟으로 삼았던 것이다. 대략 68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현재 서방의 수정주의 학계 정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아래인 10~20만 명만 형이 집행되었다는 소련 측 문서를 기반으로 한 추산도 존재한다. 서구 사회에 문제적 연구를 내놓은 아치 게티에 따르면, “스탈린 시기 대숙청에 대한 서방의 설명들 그 대부분이 지지할 수 없는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군부 숙청의 경우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이들이 주로 숙청됐다. 이들의 숙청과 더불어 스탈린의 소련은 군부대를 급속도로 증강했다. 1930년대부터 전차와 항공기를 중심으로 한 군대를 양성했으며, 1938년에는 소련 붉은 군대의 규모가 150만 명으로 성장했고, 1941년 5월 기준으로는 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과 일본에서 등장하는 파시즘에 맞서 사회주의 국가를 수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때 만들어진 군사적 토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스탈린은 소련 민중을 단결시켰다. 수많은 소련 인민들이 스탈린의 호소를 듣고 파시스트 침략자에 맞서 저항에 나섰다. 1941년 모스크바 전투와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에 맞서 승리했다.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소련군은 동부전선 전역에서 반격을 가했고, 1945년에는 대다수의 동유럽을 해방했으며, 그해 봄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의 말대로,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훌륭한 전시지도자였으며, 소련군의 빛나는 승리는 스탈린의 결정과 군 장성과의 합리적인 협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독일을 패망시킨 다음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1945년 8월 미국의 원폭투하 이후 만주와 쿠릴열도, 사할린 그리고 한반도 이북에서 진격을 게시한 소련군은 10일 동안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며 일본 제국주의 관동군 100만 명을 단기간에 항복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군인 1,000만 명과 민간인 1,700만 명을 포함해 2,70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소전쟁으로 무려 2,500만 명의 소련인이 집을 잃었고, 1,700여 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소련군은 수백만 명의 독일군과 추축국 동맹국 군대를 섬멸했고, 4만 8,000대의 적군 탱크, 16만 7,000문의 대포, 7만 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그런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과 스탈린이 세운 공로는 막대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은 전후 재건에 사력을 다했다. 전후 재건기 소련은 서방의 추산으로도 연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수치였다. 제4차 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경제개발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서방측의 경제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에 따르더라도, 국가가 계획적으로 사회의 소비를 억제하는 노력을 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재의 생산도 연률 5.8%의 비율로 확대되었다. 안드레이 란코프의 얘기에 따르더라도, 스탈린 집권 말기인 1940년대 후반에 밥을 굶는 사람은 없었고, 최소 1주일에 한번은 소련인민들이 육류를 섭취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칠과 트루먼에 의해 냉전이 시작되었는데, 스탈린은 항상 방어적이었고 탈식민주의를 지향했으며, 반식민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다. 인도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의 말대로 소련의 방패는 주로 반식민주의, 민족해방 문제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스탈린은 전후 재건기 초기에 동유럽에 자율적인 인민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1947년 10월 '몰로토프 플랜'이라는 이름의 동유럽 경제부흥계획이 수립됐고, 10월에는 9개국 공산당 대표가 모여 정보와 경험의 상호교환을 목적으로 코민포름을 결성했으며, 이러한 행위는 서구제국주의의 공세적 대응에 맞선 방어적 조치에 가까웠다. 소위 베를린 봉쇄만 하더라도 서구 제국주의가 다시 독일을 재무장하려는 모습을 보였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즉, 냉전에 있어서 스탈린은 서구 제국주의 보다 평화적인 인물이었다. 반식민지적인 성격은 이후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두드러진다. 당장, 소련의 영향을 받았던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부 수립 과정만 보더라도 그렇다. 북한에서 실행된 토지개혁을 비롯한 민주개혁은 온건적이었으며, 반일주의적 성격을 띄었다. 당시 스탈린은 북한의 김일성 정부가 반일적인 정권이 되기를 바랐으며, 따라서 친일파 청산에 있어 인적청산을 적어도 남한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한 국가를 한반도 이북에 수립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와 1950년 한국전쟁 발발에서도 스탈린은 개입주의적 성격을 보이지 않았다. 1950년대 초 독일통일 문제에서도 대중에 따른 의사를 반영하길 바랬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스탈린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꾸준히 일했다. 스탈린은 말년에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는데, 그러던 195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있었고, 그는 방부처리 되어 레닌과 더불어 레닌 묘에 전시됐으며, 이후 소련은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이끌었다. 그러던 1950년대 중반 한때 스탈린 밑에서 일했던 니키다 흐루쇼프가 집권했고, 사후 3년 만에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하여 소련 사회와 전 세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스탈린의 시신은 화장되어 크렘린 묘역에 다시 안장됐다. 그 이후에도 소련 사회에서 스탈린에 대한 향수는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특히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 된 이후 러시아 사회에선 스탈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70%를 넘겼다. 물론 이것이 대러주의적 성격이 있음을 부정하긴 힘들지만, 단순히 세뇌교육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스탈린과 그의 업적은 잔인한 제국주의 점령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전개된 혁명투쟁과도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계급투쟁을 대표했다. 당장 냉전시기만 보더라도 친소정권과 좌파정권이 대변했던 세력과 인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베트남의 예를 들어보자.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은 베트남 민중의 절대다수를 대표하는 호치민과 베트민을 지지했다. 반면 미국은 반공의 논리를 들이대며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위해 막대한 물자와 자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미국은 프랑스에 부역하는 식민지 협력자들을 자유나 반공과 같은 단어를 써가며 이들을 미화하고 지원했다. 따라서 이런 점을 토대로 보자면, 스탈린은 반제국주의 반식민지 혁명 투쟁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당장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제국주의를 지지한 이들이, “호치민은 스탈린의 제자기 때문에,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옳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본질이 들어난다. 소위 자유와 반공 그리고 반스탈린을 외치며, 개입과 침략을 합리화한 미국과 서구세력들을 보자. 이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에서 반동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세력들을 지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자비한 학살도 서슴없이 자행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최소 500~600만 명의 동남아시아인을 학살했고, 인도네시아 반공정권을 세우며 50~300만 명을 학살했다. 미국의 CIA는 남아프리카 국가비밀정보국과 함께 90만 명의 모잠비크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수많은 중남미 지역에서 미국이 후원한 반동적인 세력들에 의해 대략 10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만 미국은 이라크인 20만 명을 학살했고, 추가적인 경제제재를 가해 125만 명을 굶겨 죽이는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소위 반스탈린을 외치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실체다. 반면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런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사회주의를 수호하고자 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로 묘사돼야만 했다. 현재 스탈린이 필요 이상으로 악마화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 존재한다. 물론 스탈린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했고 과오도 저질렀다. 그러나 그러한 과오가 과연 파시스트를 지원해가며 경제제재를 포함 온갖 파시즘적 만행을 저지른 서구 제국주의자들 보다 광범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구 제국주의는 불평등한 자본주의 제도를 강요하며, 자신들의 이윤을 축적한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다. 서구 사회는 스탈린이 그러한 범죄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러한 범죄를 수도없이 저지르고 합리화하며 또 왜곡하고 은폐하는 세력은 서구 제국주의다. 그런 서구 제국주의가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스탈린보다 좋은 놈으로 묘사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의구심이 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전면적으로 재평가되야 한다. 스탈린 서거 70주년을 맞아 쓴 글을 마치기 전, 그의 명언을 인용하겠다. “나로서는 굶주린 인민들과 실직한 사람들이 누리는 개인적인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진정한 자유란 착취와 다른 사람에게 억압받지 않는 곳, 실업이 없으며 직장과 집 그리고 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오직 그러한 사회에서만이 탁상공론이 아닌 실질적인 개인과 자유가 존재할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