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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주를 끝내고

또 한번의 귀가주가 끝났다. 그리고 이렇게 들어왔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시간의 아슬함속에 진희 샘의 덕으로 버스를 탔다.

그러다 진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산청간디학교를 다니는 [조승진]이란 사람을 만났다.

민안이를 물어보다가 서로 말이 통해서 김해외동버스터미널까지 같이 오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학교 졸업 때까지 창원에서 다녔고, 그 뒤 교사인 아빠를 따라 김해로 왔다고 한다.

현재 집은 분성고 옆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1년남짓을 북부동한일아파트에 살았는데 엄마가 하는 한일미용실에서 자주 머리를 깎았다는 것이다. 인연이 또 닿았나보다.

 

엄마의 [한일미용실]을 보내며

 

일요일밤에 나는 엄마 미용실짐을 아빠의 창고로 옮겼다. 환업, 덕규아저씨, 아빠랑 함께 트럭에 거울이며 별 걸 다 넣었다. 치우기 전에 환업 아저씨가 머리를 깎고, 내가 마지막 사람으로 머리를 깎고 감아돌라고 했다. 그리고 물건을 다 치웠는데 이제 추억으로 남으려는 것 같다. 한편 엄마도 이제 홀가분해지는 것 같다. 빚만 남는 미용실 장사 그만두고 이제 할일을 찾는다고 한다. 부디 좋은 쪽으로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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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소외, 그리고 단절

우울하다. 학교에서 나를 보면 우울하다.

초등학교 5학년인 2000년의 왕따저주,

아니 어쩌면 1996년의 입학에 따른 폭력과 경제로 시작되었을지도

있다. 정말 희망과 절망사이를 왔다갔다하는데 정작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학교는 원래 사기꾼이지....

병원도, 상담전화, 상담기관도 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돈 줘도 잘 못 났고, 그나마 줄 돈도 없다.

 

민족생활의학 단식과 청소년인권학교 중 어느 걸 선택해야 하나

장두석 선생님으로부터 찍혔는지 모르겠지만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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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하고 대화

어젯밤 엄마와 40분이나 통화를 했다.

대구에서 사주명리학 교육을 마치고 기차타고 가는 중이랬던 엄마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특히 '저녁에 밥을 굶진 않냐?'며  "마죽을 사줄까?"란 말을 했다. 난 집에서 사서 보낼 바엔 차라리 돈을 받아서 안성읍내에 가서 사는게 났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학교가 싫다고, 이 지긋지긋한 학교 빨리 졸업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전히 반항을 할 수밖에 없는 학교의폭력들이 너무나도 많음을 말이다.

일반학교는 아직도 엄마시절인 70년유신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암담한 상황임을 말했다. 순간적으로 '좇같은 학교'란 말도 나왔다. 그런데 왠일인지 엄마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내게 그런 말은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싸움을 지지하지만 "마음은 상하지 말라"는 것을 가장 강조했다.

아빠가 그 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남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고,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남을 즐겁게 하기 때문에 지금도 건장한 것이고, 그렇기에 엄마는 항상 아빠를 존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오랜기다림(5~6년)으로 많은 준비를 하고 (섹스를 하여) 만들어졌고, 그 때마다 아빠닮은 자식을 낳아돌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민안이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지만 온가족의 관심이 나한테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하긴 민안이는 워낙 혼자서도 학교 생활을 잘하니까 그런 듯 싶다. 나야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니 당연히 신경 쓸 수 밖에 없고 말이다.

 

평소에 엄마의 잔소리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오늘은 오히려 내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 같고, 힘이 되는 것 같다.

 

이번 주 토요일 서울에서 핸드폰 토론회 하는 데 한번 가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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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

 

아빠의 블로그에 참 오랜만에 들렀다. 그 속에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아빠의 이야기도 있었네. 네이버 블로그에선 3월16일자로 싸이미니홈피에선 4월중순에 쓴 글이 마지막이었네. 아빠도 이걸 관리하셨던 사람들도 이젠 잊고 싶은 홈피가 되어버렸을까... 그래도 여기서 내 삶의 일부를 알 수 있어 좋았다. 내가 등교거부 이후 4년간의 세월을 알 수 있어 좋았다. 아빠는 다시 활동을 재게했다. 나는 아빠가 좋으나 가끔 나에게 야단칠 때는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그냥 가만히만 서 있어도 느끼는 물리력과 목소리, 그리고 한번에 나를 내칠 수 있는 능력 등이 나를 두렵게 한다

아빠, 여기는 무주 안성면 진도리의 내 셋방이야. 여기서 나는 또 하루를 살았지. 정말 여기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자꾸 의문이 드넴. 학교라는 공간에서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일까..

아빠 내 셋방을 봤을 때 분명 많이 어지롭고 정리되지 못한 모습에 실망을 많이 했겠지. 그런데 그게 내 마음이기도 하넴. 누군가 억지로 공포심을 주면서 규제해왔던 그 삶을 약간의 자유가 주어지니 이렇게 되는 것일까.... 제발 '나이 먹었으니 니가 다 책임져'같은 말은 제발 그만....
그건 너무 가혹하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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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식단과 고기파티 사이에서

오늘은 체육대회 날이었다. 다양한 행사속에 여러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점심과 저녁이 특히 특이했다.

왜냐면 점심 ㅡ 채식뷔페,  저녁 ㅡ 가든(고기)파티였기 때문이다.

 

 

점심 때는 채식뷔페를 연다고 했다. 줄이 너무 길어서 셋방에 빨래할 것을 찾으러 갔다왔는데 오는길에 음악이 들려서 가봤더니 스코틀랜드 전통관악기인 백파이프(?) 연주였다.

그리고 콩고기(콩을 빻거나 하여 고기모양으로 만든 것)가 주 메뉴였다. 콩- 육개장햄, 콩돈까스, 마파두부 +채식김치, 밥, 샐러드 + 과일 등이었다. 하나씩 먹어보느라 약간 과식을 하기도 했다.

끝나고 남은 음식을 싸돌라고 했더니 잘 싸주셨다. 그래서 셋방에 있다. 다행히 셋방(특히 바닥)은 바깥보다 서늘하거나 추워서 조금은 버틸수 있을 것 같다. 내일 아침 점심 때부터 같이 먹어야 겠다.

그리고 채식을 홍보하는 책자도 주었다. 구하고 싶었는데 참 잘된 것 같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타고 온 차를 보니 왠 중국인이 그려져 있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더니 서울에서 어느 명상공동체에서 왔다고 한다.

 

저녁밥은 점심밥이 소화가 되지 않아 배도 고프지 않은 상태에서 고기파티 하니까 정말 조금 먹게되었다. 그러다 나랑 같이 채식동지인 효원이가 밥과 김치를 들고 와서 같이 먹기도 하였다. 양지랑 진광이도 같이 와서 조금맛을 보았다.

 

어제의 예선을 딛고 본선을 했다. 나는 2인3각달리기를 맡았다.

오전에 하는 중에 방송으로 체육부장이자 '른'팀장인 슬기가 "씨름은 취소되었습니다"고 말했다.

 

제기차기가 재미있다. 바람만 안 불면 혼자 연습하기에 딱인것 같다. 그리고 1학년 여학생들하고 함께 호흡을 맞춰 운동을 해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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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적 지식인과 나

주지하다시피 ‘유기적인 지식인’이란 그람시의 옥중수고에 등장하는 용어로 ‘전통적인 지식인’과 대척점에 존재한다. 후자가 주로 사회계급과 무관하게 사회정치적 변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종교인 학자 작가 등을 일컫는데 반해, 전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제 영역에서 계급의 집단적 의식을 표명하며 구조적 모순과 정면으로 맞서는 민중들이다.

 

사실 노동자 계급에서 ‘유기적인 지식인’이 탄생하는 사례는 드물다. 그날그날 생업에 급급한 민중들이 논리적인 지식을 겸비해 행동에 나선다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허세욱 택시 노동자는 그 길을 끊임없이 추구해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등 이론에 못지않은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우리 빈철연은 허세욱 노동자가 1994년 서울 봉천동 강제철거에 맞서 투쟁에 나선 철거민 출신이라는 점에 각별히 주목한다. 그는 당시 철거민운동에 연대하던 빈민운동 활동가들과 교류하면서 한국사회의 깊은 병폐를 뼈저리게 인식했다. 이는 철거민운동이 한국의 민중적 사회변혁운동의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허세욱 노동자의 삶은 마치 노동자운동의 효시인 전태일 열사의 삶을 연상케 한다. 아니, 어쩌면 54세였던 허세욱의 삶이 더 무거웠을 수도 있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음에도 허세욱 노동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의 억압에 무릎 꿇지 않는 진보를 향한 ‘영원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빈철연은 철거민이었으며 택시노동자였던 고 허세욱 선생의 치열했던 삶을 본받아 이 사회를 민중들이 살만한 세상으로 변혁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그것은 허세욱 노동자가 한미FTA의 본질을 꿰뚫고 나선 것처럼 우리들도 ‘유기적인 지식인’이 되어 국내외 제 모순에 과학적인 세계관으로 맞서는 일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여기까지 빈철연 성명서에서 가져왔다

그렇다 내가 했던 것 역시 [유기적인 지식인]이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만큼이나 하루하루 바쁜 어린이-10대학생계급의 참된 해방을 부르짖는 것이다.

허세욱씨가 한 것처럼 전태일은 모두 '유기적 지식인'으로 한국사회의 큰 족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이었다. 그래 그렇게 끊임없이 배우며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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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과 [잘생겼다]는 말 사이

내방에는 부엌이 없다. 이제야 부탄가스를 샀고 국수가 있긴 하지만 김치조차 없다.

그래서 저녁밥주는 시간을 놓쳐서 간식으로 나온에이스5x3+요플레1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주인아주머니집에서 손주가 아주머니가 주는 따뜻한 부엌에서 먹을 떄 부러움과 함께 질투심과 쓸쓸함이

몰려왔다. ㅜ.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먹을 공간도 없고, 조리할  부엌이 없다는 것, 그러면서 나는 학교밥이 물론 좋은 재료에 조리사 아주머니들의 노력이 들어간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주는 밥만 먹게 함으로 인해(기껏해야 컵라면이나 먹는다)자립심을 오히려 꺾고 의존하게 만들고 아주머니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래가 오늘 2인3각 연습을 하는데서 내보고 [오빠, 잘 생겼어요]라는 말을 했다.

나는 [거짓말이라도 고맙다]라고 되새긴 말로 받아줬다. 그랬다, 정말 거짓말이라도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요즘같이 우울함 속에 가장 내게 힘이 되고 기분을 좋게하는 말이었다. 다래는 진심으로 한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 우유사면서 딸기우유 하나 사줬다, 그러니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가끔 [잘 생겼다, 미인이다]는 말을 농담으로라도 해줘야 할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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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피곤했던 하루

1. 지각에 대한 이야기

 

2. 제주도기행에서 올때 - 광주비행기를 타고 온다

 

    아시아나항공 5만원이다 - 반값으로 배타고 부산까지 가고 목포, 녹동, 완도로 와서 버스타고 가도

    남을 돈인데 공항에서 내려야 해산이 되니 어쩔 수 없덴다..... 제주시내에서 더 보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무지 아쉽다... 농담이지만 비행기가 결항되었으면 좋겠다

 

 

3,  체육대회가 싫게 했던 일

    

    처음에 체육대회 꿈팀 출전과목 선택하는데서 씨름하기를 강요 당한일(이런 강제가 체육을 싫게 한다)

     다행히 (그 땐 정말 구세주같았던)겨레가 내가 꿈팀이 아니라고 해서 생농실로 갔다

     그리고 다행히 2인3각 했다. (1학년 여자애랑 같이하게 되니까 애들이 '우후'했다. 나야 뭐 2인3각은

     좋고(나에게 강압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만 빼면 남자건 여자건 무슨 상관인가) 씨름도 아니니 열심히

     해야겠다

 

4.  새로봄과 인권동아리에서 빠져줄래?(!?)

 

      뭐 이건 새로봄의 몇몇 친구들이 나의 비현실적, 내이야기만 하는(이기적이다는)는 등의 이유로

     말했고, 동아리 친구들은 나를 지지했다.

 

5. 무흔 샘 - 내 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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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오늘 일기로 대충 정리 한 것이었다.  피곤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야겠다.

오늘도 방 청소에 신경이 가서  공부도 못한 것 같다. 스트레스도 받고 이 컴퓨터가 들어온이래로 일찍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아예 코드까지 뺴버리고 잔다. 조금 나아질까 생각해서 이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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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망할 놈의 시험

시험은 사람을 갈라놓는다

"지금 시험기간이야(그러니 다음에 해)"라는 말로

시험보다 더 중요한 일상의 관계를 뒤로 미루게 한다

대안학교라 해도 입시로부터 그 다지 자유로울까?

[잡아먹히기를 두려워 하며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라는 루쉰의 말은

학교시험에서 유효를 넘어 일치한다.

이렇게 혼자서 문제찍기를 강제로 하는 것이 인가학교라면

인가를 찢어버렸으면 좋겠다.... 정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오천마을의 어느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

 

우연히 학교를 마치고 오는 길에 어느 할아버지와 보았다

굽은 허리에 포대에 무엇을 들고 오던 할아버지

나는 당연히 노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들어드렸다

그다지 무겁지도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랄까

안에 보니까 풀이었다

팔각정 가는 길까지 올라가서 해오신 것 같은데

짐을 집에 갔다드리니 할머니가 나를 맞이하시며

고맙다고 하시며 [홍삼드링크]를  주셨다

[안식향산나트륨]이라는 물질 떄문에 찜찜하긴 했지만

뭐 성의를 봐서 한번 먹는다고 탈 날까 싶어 먹었다

홍삼맛은 원래 쓴데 이건 완전 설탕+화학조미료 맛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단한 삶에서 화학조미료외에는 단맛을 낼 수 있는 것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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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통 방식에 문제

달뽕 샘이 내 언어 문제가 있단다. 20일날 진희 샘, 종수 샘과의 대화 속에서 너무 거칠게 말해서 어느 샘을 울리고(누군지 다 알겠다), 청바지 구멍으로 내복이 보이고 털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이 그래서 한  등이 [인권주간]에 추천한 것이 후회가 되신다고 한다(샘들이 프로그램을 짜서 통보한 문제가 나를 거칠게 한 것도 있고, 욕설을 들으면서 그런 것도 있는데... 그건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 듯 하다). 나도 어찌보면 꽤나 오랬동안 가시밭길을 걷다 찔리며 좌절과 죽음을 왔다갔다 하며 살아왔다. 그 속에서 나에 대한 인권은 민감한데 남에 대한 인권은 무뎌진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변명하는게 얼마나 소용이 있을까만...

[비폭력대화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한테 맞는 제대로 된 비폭력대화를 하루빨리 길러야겠다.

 

만성질환이 같은 악습관이 쉽게 변할까만..... 자유동지랑 이야기도 했는데 내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고 학교의 노력도 필요하겠지. 우선 진희 샘한테 눈물이 나오게까지 한 거친 소통방식에 대해서는 사과해야겠다...

 

그리고 오늘 ㅂㄹㅁ, ㄷㅎ 등이 내게 인사를 했다. 어쨌든 나를 싫어해서 하는 인사는 아닌 것 같아 고맙기는 했는데 어떻게 받아줘야 나쁘지 않은 사이가 될지 몰라 어색했다.

 

어제(토요일) 셋방에 컴퓨터를 설치했다. 그리고 오늘은 기숙사에 있는 짐을 옮기다가 농업실에 나뒀다.

이래저래 정신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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