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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메카닉 곰, 평화를 공부하다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갯벌에서 시작한 우리의 발걸음은 며칠째 논밭을 가로지른다. 5월 중순, 무르익은 봄은 생명의 힘을 넉넉히 보여준다. 生生不息. 사람들은 농촌을 버렸지만 산과 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마을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거의 없단다. 가장 가까운 산부인과조차 차를 타고 한 시간이나 떨어져있을 정도. 자연히 남아있던 학교들도 문을 닫고 세 읍에서 한 학교만 남게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걷는 동안 젊은 청년들을 만난 기억이 없다. 그나마 남아서 친환경 농법 등 더 많이 가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 분들도 그저 소득 때문이라 답하신다. 담백한 대답이다. 농사의 자부심 같은 걸 기대하는 거야말로 외부자의 낭만이겠지. 하지만 농촌이 웰빙 먹거리를 욕망하는 도시 소비자들을 위한 식품 납품처로 되고 있는 건 역시 쓸쓸하다.

 

지금까지 ‘개방’이라는 이름의 가장 큰 희생자는 농촌이었다. 자국민도 외면하고 등 돌리는 농촌. 아이들과 청년들이 없는 농촌, 귀농이라는 낭만을 갖고 온 이방인들도 얼마 있지 못하고 돌아간단다. 이런 상황에서 농경지를 만들겠다고 산을 헐어 바다를 메우는 저들. 한편에선 농사를 짓겠다는 농민들을 몰아내고 군사기지를 세우는 저들. 너무나 이상한 나라.

 

저녁. 평화네트워크의 정욱식 선생님이 그 이상한 나라의 군사문제와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화려하고 시원한 강의였다. 대추리로의 기지 이전. 평택 땅 280만평 중 대략 210만평으로 2008년까지, 이미 모든 사안은 확정되었다고 한다. 정작 문제는 정부가 부각시키는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아니라 2008년 이후 이전되는 2사단이다. 2사단은 현재 사용하는 부지를 언제 반환한다는 말도 없고, 이전 비용 등도 전혀 합의되지 않아서 우리가 떠안아야 할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한다.

 

만약 지금처럼 허접하게 추진된다면 우리는 엄청난 덤탱이를 쓰게 될 전망. 물론, 이 2사단은 철저히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재편된다. 이미 한국 서해안지역에는 이를 위한 MD벨트가 건설되고 있다. 서해안의 입지를 고려해 볼 때 중국견제와 세계를 향한 전략적 기지가 될 것은 자명한 일.

 

평택미군기지 이전은, 한국정부가 주장하는 자주국방 논리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두 가지가 찰떡 궁합(?)으로 만나 버무려진 사건이다. 병력과 장비의 유연성, 그리고 임무의 유연성 두 측면으로 볼 수 있는 전략적 유연성. 임무의 유연성으로 인해, 이제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역할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자주 국방 실현되었다! -ㅅ-); 그럼, 주한미군은 이제 머하냐? 딴짓 한다. 세계 모든 곳에 96시간이내 출동하며 테러와의 전쟁 같은 거 한댄다.(전쟁 일으키는 거다.) 물론 이건 명백한 상호방위조약 위반이다. 세계의 모든 일에 참견할 것 같으면 지네 땅에서 지네 군인이 하면 될 일이다. 대체 한국은 왜, 기지 이전 비용부터 몸대주기까지 하는걸까.

 

자주국방 좋다. 미군기지는 한국에게 자주국방의 기회를 주기 위해 이전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북한의 폭격거리에서 벗어나, 선제공격을 가능하게 할 상황을 만드는 거다. 평택으로 옮긴 이상 미국은 얼마든지 북한에 선제공격할 수 있다. 그리고 한반도는 언제든 전쟁의 상황이 될 수 있다. 대단한 자주국방이다.--;

 

물론, 중국으로서도 심사가 사나울 일이다. 자기네를 견제하는 한국이나 미국에 대한 억제책으로 중.러.북 동맹을 확고히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칫 또다른 냉전체계가 재편되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실제로 중국은 “주한미군기지를 대중국발진기지로 사용한다면, 중국은 한국을 공격할 것이다... 한미동맹이 양자간이 아니라 제 3국을 겨냥한다면 중국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당연한 일이다.

 

2004년 뉴욕타임즈에, 주한미군기지를 이전하면 미국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이 유리하다는 기사가 떴단다. 평택 문제는 평택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 전 세계를 자신의 기지로 만들려하는 이상 대추리는 이미 전 지구다. 근데 평택 주민과 외부세력이라고? 외부세력은 대체 누구인가. 정부와 여론의 어처구니 없는 물타기.

 

현실적인 대안은 뭘까. 정욱식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단 확정된 용산미군기지는 이전하라. 대신 2008년 이후 이전할 2사단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히 재협상 하라. 재협상 안하면 한국은 또 몸주고 돈주고 우리 국민들 힘만 빠진다. 구체적인 전략과 상을 가지고 재협상 하라. 당연히 우리의 문제가 남는다.

 

 

우선, 미국과의 협상에 개입할 수 있는 사람, 내용을 확실히 알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양과 질적으로 풍부해져야 한다. 그냥 무조건 반미. 이런 거 안된다. -_-; 워싱턴에 한반도 사안을 연구하는 그룹들이 있다한다. 근데 이들은 한국 내의 정보를 어디서 구할까? 영문서비스가 잘 갖추어진 조.중.동신문 정도일꺼다. 한국 진보진영의 인프라 구축이 아주 시급하단 말씀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의 자기반성과 자기건설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하나 더. 현재 동북아의 비전을 제시할 나라는 한곳도 없단다. 동북아 공동의 지적 자산을 만들어져야하고, 그 위에서 동북아의 거시적 비젼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 위에서 한국의 정체성과 방향성 또한 격렬히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이제 서울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길 위에서 만날 사람들은 아직도 많고 많다. 전지구적 자본이 새로이 만들어낸 전사-이주 노동자들, 무수한 간격, 무수한 문턱을 너머 움직이기 위해 온몸으로 싸우고 있는 장애인들, 그리고 아직 이름 불리우지 않은 수많은 소수자들. 벌써 소강상태에 들어선 것처럼도 보도되는 대추리 또한, 사실 이제 막 시작한 거대한 싸움이다. 광적으로 폭주하는 군사제국과의 싸움. 다행일까? 자본과 제국, 그 미친 흐름이 자꾸자꾸 더 많은 전사들을 깨우고 불러낸다는 것. 우리는 그들을 만나고 그들이 되기 위해 걷는다. 평화, 그 먼길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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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농사짓는 얘기가 나오지 않는 농촌

일곱째날인 5월 16일. 날은 화창했고, 우리는 또 다른 농촌 현장을 만나기 위해 충남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 생태마을’에서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의 ‘더불어 살기 생명농업 운동본부’까지 28킬로미터를 걸었다.

그곳은 친환경 농법과 귀농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모내기를 앞둔 농번기라 길을 걸으며 논밭에서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분들이 들려주시는 응원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한 걸음 더 힘차게 내딛게 했다.

신생아 드물어 산부인과 찾기가 힘들다

“잘 하는 일이여. 근데 걷는다고? 그 먼 길을? 대단하네...” 그 때 우리가 그분들께 돌려 드려야 하는 말은 일행 중 누군가가 혼잣말했던 한 마디였다. “어르신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농촌의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땅을 지키는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길을 나섰던 것이다.

   
 
길에서 만난 무수한 이야기들이 들려주는 바에 따르면 농촌은 미래가 없는 곳이었다. 오늘 가기로 된 곳도 폐교에 세워져 있다. 운동장을 밟고 뛰어 놀 아이들이 적어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농촌의 학교는, 이제 세 읍면을 통틀어 한 개의 학교만이 남을 예정이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없기에 산부인과 병원을 찾으려면 차로 한 시간을 내리 가야 한다. 농약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분들이 한 해 1천에서 2천여 명이라는 무거운 숫자가 있다. 그리고 60세 미만의 분들로 구성된 ‘청년회’는 한 마을 회원수가 대여섯이라는, 지나치게 가벼워 오히려 무거운 숫자가 있다.

또 다른 한편에는 초국적 기업들의 유전자조작 농산물과 그것들이 강요하는 환경 파괴적 농경방식의 압도적인 규모, 대국이 행사하는 시장개방 압력의 엄청난 무게가 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귀농’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각별했다. 농촌의 삶은 어떤 비전을 가질 수 있기에 사람들이 농촌으로 가는가? 몇 년 전 담담한 어조로 귀농의 뜻을 밝히시는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귀농에 관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땅을 지키고 환경을 지키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바른 먹거리를 제공하며 자신의 삶을 자립적인 것으로 꾸려 간다는 이념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나는 오늘의 목적지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길 기대했다. 어느 순간 나는 그날의 여정에서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거나 도시의 삶이 지나치게 힘들기에 귀농했던, ‘생각하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친환경농법 왜 하냐고? 가격이 비싸잖아”

배 이상 힘든 친환경 농법을 굳이 쓰는 분들 역시 그러할 터였다. 전날 밤 만나 뵈었던 문당리 분들, 그리고 그보다 며칠 일찍 만나 뵈었던 접산마을 분들의 열정이 수많은 이야기와 생각거리를 던져 주셨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만날 수 있었던 분은 마을 대표 한분뿐이었다. 그것도 20분이나 될까 싶은 짧은 시간 동안이었다. 그 분은 마을과 운동본부의 역사를 적은 글을 낭독하여 들려주시고, 따뜻하게 불 들어오는 방 권해 주시며 편히 쉬었다 가라는 넉넉한 말씀을 끝으로 일어서셨다.

나는 난감해졌다. 밖으로 따라 나가 못 다한 이야기를 여쭙고 있는 일행에 끼어 귀를 기울였고, 대표님을 따라 잠시 본부 사무실로 갔다. 나는 많은 것들이 궁금했다. 친환경 농법을 쓰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귀농하는 분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시장 개방 압력은 어떻게 체감하시는지, 그리고 ‘같은’ 농민인 대추리 주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등등.

사모님으로부터 전화가 계속 걸려오는 중에 핸드폰에 저장된 예쁜 손녀 사진을 구경했고 당신이 높게 평가하시는 한 청년의 중매를 의뢰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듣고 싶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애썼다. 직접적인 질문은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는 데 적절하지 않다는 주의사항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사실 나는 좋은 인터뷰어는 못 되었다. ^^)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던가? 그분은 솔직담백하게 말씀하셨다. 굳이 친환경 농법을 쓰시는 이유는 경쟁력과 높게 보장된 가격 때문이라고. 또, 조합 전체의 한 해 매출은 얼마이며 납품업체는 어디인지를 들려 주셨다. 아파트와 도시생활은 답답해서 싫고 귀농한 사람들은 일이 익지 않아 곧 떠난다고 하셨다,

도시에서 귀농한 사람들 곧 떠나는 경우 많아

   
 
대추리에 대해서는 딱하게 되었다는 말씀 이상은 하지 않으셨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마을대표께서는 댁으로 돌아가셨고, 늦게까지 일하시던 사무국장님 역시 퇴근하셨다. 나는 남겨진 사무실에서 책장과 게시판에 꽂혀져 있는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친환경 농업 활성화를 통한 농촌살리기 세미나’ 자료집과 친환경 재배 인증 절차에 대한 자료집, 친환경 농법을 위한 대체 농약/비료에 대한 안내선전물, 농작물 품질 개량에 대한 자료집과 같은 책들, 농업과 환경문제의 정기간행물들로 책장이 빼곡했다.

그러나 공백은 컸다. 나는 그 공백을 통해 마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접산마을에서처럼 FTA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분이나 인증 없이 신념만으로 저농약 재배를 하시면서 그 힘든 일을 해낸다는 자부심으로 젊게 사시는 70대 노인은 만나지 못했다.

문당리에서처럼 자신들이 실천하는 농법의 의미에 대해 잘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만나지 못했다. 귀곡리 주민들도 농업이라는 활동을 기반으로 삶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겠지만, 즐거이 이야기하신 부분은 자식이나 중매에 대한 화제들이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농촌의 이야기’를 만날 수 없었다. 농업은 즐거운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던 셈이다. 오리와 우렁이를 사용하는 친환경 농법 역시 그곳에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힘을 가진 듯 보이지 않았다.

농촌은 ‘건강한’ 먹거리를 욕망하는 도시 소비자들의 삶이라는 이야기에 부속된 하위 플롯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대추리를 떠올렸다. 그곳에서는 농사짓는 행위가 군사제국의 위협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가장 강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따라서 나는 귀곡리에서 이런 질문을 가져간다. 영농이라는 삶의 큰 부분이 이야기의 주축이 될 수 없는 것이야말로 그분들이 진정으로 박탈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지 않는가?

‘같은’ 친환경 농업이라도 더 큰 경제적 여유라는 자본의 권리에 의해 추동된 것이 아닌, 더 풍부한 삶이라는 삶의 권리, 생명의 권리에 의해 추동된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생명의 능력은, 그리고 삶의 권리는, 수많은 인연들을 섬세한 그물망으로 연결하는 이야기 구성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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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일지6] 중간 점검!

5월 16일 대장정 일정기록입니다.


이론학교 학인들을 비롯 수유와 석환샘을 해서 총 14명이 점심 먹기 직전 616번 국도에서 대장정 팀을 만났습니다. 아주 힘차게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컴배트팀을 보고 반가워하면서 자연스럽게 행진에 참여. 약 30분 정도 행진을 하고, 이론학교 학인들이 준비한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오늘, 원래 만나기로 한 분이 선거 출마 관계로 바쁘셔서

해바라기 마을로 귀농하신 이장님이 대신 오셔서 마을에 대해 소개해주시고 너무 일찍 자리를 뜨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중간 점검의 날이 되었습니다.


자, 우리 컴배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직접 들어보지요.

 

만세 - 저번에 한강투쟁 갔을 때, 속도라는게 정말 무엇인지 알았다. 대장정에서도 우리는 그런 속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걸으면서 별 잡생각이 다들고 그래서 어쩌고 7일이 남았는데 어쩌고 저쩌고

제가 ‘얼굴 찌푸리지 말자’고 규율 정했는데 사람들이 ‘너만 웃으면 돼’라고 했는데 저 거울 보면서 연습할거에요!

 

진호 - 정말 힘든건 대장정 출발 2일째, 행진 첫날이었다. 계화도, 정말 엄청난 세계가 다 파괴되어버렸더라. 12키로를 걸어야 방조제가 나오는데, 그 갯벌에서 108배를 했지만 우리가 가지고 가야할 것이 없어지진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계화도에서 만난 고은식 선생님을 보고 말이 무기라는 말이 뭔지 확실히 알겠더라. 길 위에서 만난 많은 분들이 정말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를 확인시켜줬다.

(진호와 만세가 강력하게 자신들의 말을 삭제해주길 요구했으나 무시하고 그냥 올립니다)


무수한 언니들 : 성국이 말해 성국이!


성국 - 힘이 남아돌아서 깃대 잡고 어쩌고 저쩌고. 사실 할 일이 없어요. 뭐 하려고 하면 우르르 나와서 다 하고 있고.


이때 지영 옆에서 작은 소리로 - 성국이 정말 머슴이야 -_-;

 

만세 : 성국이형은 절대 깃대를 어꺠에 걸치지 않고, 팔을 앞으로 쭉 뻗은채 그대로 들고 갑니다-_-;


전감 - 나는 그냥 찍으려고 왔는데 이 길위에서의 경험을 그냥 버리고 가긴 힘들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던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절실하고 전면적으로 다가오고 이 싸움도 전면적인 것 같다. 어쩌고 저쩌고 (잠시 사람들과 비약이 심하다고 다툼이 일어남)


재연- 저는 화토 참가하려다 대장정 참가했어요. 그저께 도착해서 오늘만 완주했는데 제가 걸으면서 생명권을 보장하라 새만금을 외치면서 나도 건사못하나 싶어서 화가 났어요. 그래도 생태마을 보면서 내가 정신적으로 부족했구나 생각했고 오늘 그래서 완주했어요. 여러모로 만족스런 하루


추장 - (밖에서 이장님과 이야기하고 들어와서 보고함)

솔직히 생태마을 신고라도 하지 않음 살 수 없다고 하셨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또한 귀농학교가 움직이니까 되더라, 생각보다 정치인의 개발설득과 귀농학교의 다른 방식의 설득이 양방향으로 같이 나오는 것 같다. 문당리 생태마을은 마을 자체가 법인이라더라. 우리 대장정은 지혜와 힘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후, 5월 18일 일정에 대해서 논의 중입니다. 현재 10시 20분.

대추리에 들어가서 문제는 두 가지 안이 제시되었으나,

외부 검열이 우려되므로 적지 않겠슴다.


종영 - 모르고 있는게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게 많더라.

대추리에서 인간띠 잇기 어떠냐. 전경들 밖에서 전경들을 감싸고 우리가 대추리를 껴안자!

 

세진 - 대추리는 과정이어야 한다.

 

추장 -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부분은, 대추리 문제의 사안에 대해서만은 대추리 주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인 것 같다. 대추리에 자행되는 폭력의 성격이 무엇인지 빨리 각인시켜야 할 것 같다.

 

등등등 무수한 말들. 말들. 말들


논의는 일명 ‘천’프로젝트와 낭독회쪽으로 기우는 중..

다 정해지면 에프키라 쪽으로 연락하겠슴다.


생태마을에 이어 오늘의 들어온 해바라기마을의 의미는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은 곳을 둘러본다는 것입니다. 추장은 길 위에서 마을을 사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코뮨을 구성해야한다는 것과 비슷하고, 농부들이 농업을 할 때 종적 다양성을 생각하는 것 역시 우리의 지식이 횡단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유사하고요. 심지어 우리 연구실에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청소년 고전학교를 구성했던 것처럼 농촌에서도 구체적이고 다양한 활동들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농촌 마을을 걸으면서 절실히 느꼈던 것은 마을 곧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균 연배가 70살인 마을에서는 아마 10년이 지난 후에는 농사를 짓는 것 자체도 불가능해지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마을의 ‘인구수’를 생각한다면 도시 개발을 바랄 수 밖에 없는 것도 현실일텐데요. 잘 살고 행복하고 싶은 마을에는, 이제 개발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지방정치의 작용논리만 판치고 있는 상황같습니다. 그러나 항상 더 강한 정치적 환상만을 심어주면서 자기 잇속만 챙기는 정치판을 저지할 수 있는 마을 자체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 또 현실이구요.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 개발의 논리와 맞서서, 생태마을이나 더불어살기 기념운동본부같이 새로운 삶의 권리와 가능성 역시 우리가 걸었던 길 위에서 만났습니다. 길 위에서 만나면 총량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얼굴로 구체적 제안이 오고 갈 수 있습니다. (“모내기를 같이 하면 쌀을 줄 수 있구요. 우리 농촌 아이들에게 오셔서 강의를 해주세요” 같은^^)

 

지혜와 힘을 얻기 위한 대장정은 계속됩니다.

내일은 예산에서 아산으로 행진합니다.

 

모두 서울 소식을 궁금해 합니다. 이제 서울과 가까워지니까 시도때도 없이 오셔서 같이 걸어주셔도 좋고 차 타고 지나가면서 구호를 같이 외쳐주셔도 좋습니다.

 

그럼 내일을 위해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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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밥알, 길 위에서 구체적인 삶의 얼굴들을 만나다.

내 두 다리는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제 6일 째. 연구실에서의 일주일은 참 빨리 지나갔었는데. 쉼 없이 걸었던 지난 6일은 무던히도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느린 속도 속에서 나는 내 몸이 변하는 걸 느낀다. 처음엔 한 편의 그림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던 논밭의 풍경도 이제는 친근하다. 한껏 물을 머금고 있는 흙 속에서, 삐죽삐죽 치기를 자랑하는 연둣빛 못자리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음이 난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쭉 자란 내게 바로 코앞에서 접하는 농촌의 풍경이란 매우 낯선 것이었다. 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들판을 바라볼 때면, 어느 지점에 눈을 둬야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다. 산, 들, 나무, 꽃, 바람... 그 모든 것들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뭔가 끊임없이 물어보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뭔가 답을 얻는 것에 급급했던 나의 질문은 쓸모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새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고요한 가운데 피어나는 싱그러움에 취해있으니까.

산, 나무, 꽃, 바람이 함께 하는 풍경은 어쩌면 도시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울에도 자연이 어우러진 쉼터를 자처하는 공원들이 여럿 있으니까. 이제 도시는 고층 빌딩과 도로들로만 꽉 채워진 삭막한 이미지를 탈피하려 한다. 친환경 개발 어쩌고 하면서 자연 마저 이식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 도시들. 그러나 그렇게 떠들썩하게 자신을 광고한 청계천이 한밤중까지 켜져 있는 조명으로 이식해둔 갈대를 말라 죽게 하고, 바닥에는 시멘트가 발라져 있는 거대한 인공분수에 불과하다.

새만금을 살해하고서도 그 곳에 친환경 개발이라는 말을 붙이면서 사람들은, 그런 게 자연이고 친환경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어쩌면 그 곳에서는 인간조차 자신을 허구로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몇 가지 수치로 계산되고 떠들썩하게 선전되는 개발의 환상 속에 무작정 몸을 내맡긴 채 떠나가면서도 그것이 자기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고 믿는.

걸으면서 마주친 들판은 숨 쉬고 있다. 그 곳에서 어떤 숫자도, 법칙도, 특정한 답도 없다. 단지 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곳에서 내가 만물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만 있을 뿐이다. 도시에서 보면서 자란 풍경들은 단지 사람들의 일상을 더 그럴듯하게 완성하는 배경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자연이란 단어에서도 어떤 실감이나 생명력을 느끼지 못한 채 광고마다 보여주는 아파트 뒤로 펼쳐진 예쁜 그림이라 생각했다. 물론 나 자신도 그 그림 속에 어울리는 세련된 이미지에 맞춰야 한다. 높은 빌딩 사이로 펼쳐진 청량한 공원, 그 아름다운 그림속을 거니는 상냥하고 우아한 사람들. 모두가 그 그림 속에 포함되기 위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들어둔 그 이미지들 어디에도, 죽어가는 농촌, 거대한 빌딩 아래의 빈민촌은 없다. 지워져 있다.

걸으면서 만난 농민 분들은 가장 직접적으로 개발 논리의 환상에 맞서서 자신의 삶을 일구어가고 계셨다. 세상이 강요하는 속도와 무관하게 지금까지 스스로 땅,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켜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곳 마을들은 여전히 점점 더 강하게 들이닥치는 파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평균 연배가 70살인 농촌 마을에 지방 정치인들은 도시 개발의 환상을 들이민다. 수많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을 파괴하면서 지겹게 반복되는 개발의 논리, 개발의 환상.


아직도 계속되는 개발 논리의 환상이 우리의 일상을, 구체적인 삶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경쟁력, 성장, 유연화 등 지식인들이 이야기하는 지식에는 각종 통계 자료와 수치들이 있을 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구체적인 얼굴은 지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길 위에서 새로운 삶의 권리와 가능성을 모색하고 실현하는 삶들을 무수히 만난다.

생태 마을, 더불어살기기념운동본부. 그들을 보면서 깨닫는다. 한 번도 진심으로 논에 서보지 않은 자들이 계산해낸 무책임한 숫자들에 의해 난도질당하는 산과 들, 농민의 삶의 얼굴들을 다시 찾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지식의 윤리라는 것. 우리가 마주친 가능성들을 연결하고 증식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공부를 하고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얼마나 구체적인 얼굴을 지닐 수 있을까. 나와 우리, 만물들의 삶의 결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그 살아 숨쉬는 싱그러운 표정들과 만나기 위해 내일도 나는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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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자본주의 외부를 만드는 생태농업

오늘은 보령에서 홍성까지 총 36km를 걸었다. 45km를 이동한 어제에 비하면 그나마 짧은 일정이었던 셈이지만, 하루하루 쌓여가는 피로와 유난히 더운 날씨 탓에 걷는 것이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들판에서 간간이 마주친 농민들이 우리를 향해 보내주는 격려는 피곤한 와중에도 큰 힘이 되었다.

오늘 묵은 곳은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 생태마을. 이 곳은 몇 년 전부터 오리를 이용해 총 900가구 이상이 순수 유기농 쌀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유기농 쌀 재배단지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 이런 성과가 관 주도가 아닌 농민들 스스로의 자발성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욱 뜻 깊다. 물론 이런 성과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풀무학교(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와 정공부(농업전문대학과정), 풀무생협과 느티나무 헌책방 등 다양한 기관이 오랫동안 크고 작은 실험들을 통해 마을을 가꿔왔던 것이다. 특히 40년의 전통을 가진 풀무학교는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길러낸다는 기치 아래 수많은 지역 일꾼들을 배출해왔다. 그리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넉넉한 마을, 함께 나누는 오순도순한 마을, 건강한 자연을 가꾸는 마을을 일구기 노력해왔다.

경쟁을 넘어서는 게 생태농업의 근본

지금이야 웰빙 바람으로 유기농산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어느 정도 커졌지만 이분들이 유기농을 시작할 때만 해도 관에서 요구하는 농사법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한다. 또 지금 역시 유기농산물 소비량이 생산량을 따르지 못해 유기농 생산자들끼리 경쟁을 해야 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쟁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생태농업의 근본이 아니겠냐는 한 마을 분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그렇기에 유기농 농사를 짓는다는 것을 무엇보다 정신을 농사짓는 것이라는. 이분들이 학교 급식에 유기농 쌀을 지원하기로 한 것도 이런 정신의 일환이었다.

   
 
유기농이 단순히 질 좋은 농산물을 비싼 값에 팔아 더 큰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을 건강하게 가꾸기 위함이라면, 무엇보다 지역의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부터 건강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윤보다는 생명을 키우기 위해 수십 년간 올곧이 유기농에 헌신해 온 생태농업 활동가들, 개발독재의 시대에서 사회주의의 몰락까지 어떤 척박한 현실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키워온 풀무학교 선생님과 학생들, 자본주의에 의해 끊어져버린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의 끈을 되살려가고 있는 마을공동체분들. 이분들은 그간 우리가 책을 통해 배워왔던 여러 지식들을 이미 자신들의 삶을 통해 자연스레 체득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경제적 수치로 환산하고 추상적 양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환상을 너머 생명의 순환, 선물의 순환을 되살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곳곳에 외부를 만들자

갯벌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들의 값어치는 새만금 방조제로 얻게 되리라는 경제적 이익과 결코 ‘교환’될 수 없다. 한미 FTA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될 무수한 농민들의 생존권은 그 희생을 바탕으로 늘어난다는 국민총생산량과 결코 ‘교환’될 수 없다. 그리고 이곳 생태마을 분들 역시 땅과 땅에 기대 살아가는 우리들 생명의 귀중함이 농약을 뿌려 얻게 될 당장의 이익과 결코 ‘교환’될 수 없음을 온 몸으로 실천해온 것이다.

물이 대지를 적시고 대지가 풀과 나무와 곡식을 살찌우고 이를 먹어 뭇짐승들이 살아가며 이들이 죽어 다시 대지를 비옥케 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준다는 의도도 없이 주는 ‘완전한 선물’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자연의 모든 부분이 서로에 대한 선물이 되어 생명의 거대한 순환을 완성시킨다는 경이로운 진리. 인간 역시 이 거대한 생명의 순환에 속해있음은 물론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선물을 순환시켜야하는 의무는 법적이거나 윤리적인 의무 이전에 생명의 요구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그 진리에 눈멀어버렸다. 경제적 이익만을 가치판단의 유일한 척도로 삼는 경제주의, 맹목적으로 경제 규모의 확대만을 추구하는 발전주의, 자연을 인간 경제활동의 도구로 전락시켜버린 인간중심주의에 가려져 선물의 순환 고리는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움켜쥐기만 할 뿐 생명의 순환으로 되돌려 주지 않게 되었으며, 사람과 사람을 선물로 맺어주었던 상호부조의 삶은 겅제적 이익을 두고 다투는 생존경쟁의 싸움터로 바뀌어버렸다.

새만금의 조개를, 대추리의 주민들을, 수십 만, 수백만의 이주노동자들과 농민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교환’의 논리다. 그렇기에 새만금 간척사업을,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농민들에게 강요되는 희생을 반대하는 우리들은 이 모든 싸움이 ‘교환’의 논리에 반대하는 하나의 싸움임을 느낀다.

그리고 여기 홍성군 문당리 생태마을에서 우리는 교환의 논리에 맞선 싸움이 단지 반대를 위한 싸움, 대안 없는 절망적 싸움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일구는 싸움임을 보았다. 교환이 지배적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도 선물이 여전히 낮지만 깊은 울림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선물과 생명이 순환하는 세상이란 단지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의 꿈이 아니라, 항상-이미 자본주의 곳곳에 외부를 만들고 있는 현실이자 바로 지금-여기서 우리가 일궈가야 하는 현실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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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일지5] 생명이냐 자본이냐!

5월 15일의 일지

 

오늘은 보령 대천흥덕교회로부터 홍성 홍동면 문당리 생태마을까지 36km 구간을 이동했습니다.
총 8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갔습니다. 오전 네 구간, 오후 네 구간. 도착은 5시 10분경.


날씨가 무척 맑고 공기도 다소 뜨거우며 바람이 별로 없어 지금껏의 날들 중에서는 기상조건이 가장 더운 편이었지만, 어제의 45km 이동에서 단련된 신체 덕분으로 별 어려움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답니다.

 

오늘의 가장 특이한 사항. 밭일/논일을 하시는 농민분들과 열댓번 이상 간단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다들 반겨 주시는 분위기였고, 많이 응원해 주셨습니다. fta라는 말만 들어도 응원해 주시는 분들, 또는 쌀수입 저지라는 말에 기뻐하시는 분들 등. 오후 2번째 휴식을 할 때에는 근처 가게에서 수고한다며 캔커피를 잔뜩 보내 주신 고마우신 분도 있었습니다. 오전 구간에서는 할아버지 한 분께서 지팡이를 짚고 다가 와 무엇 하는 것이냐고 한참 묻다 가시기도 했지요.
많은 응원을 받았던 좋은 날이었습니다.

 

저녁에는 문당리에 도착해서 저녁 식사(영실언니와 트래비스, 재연씨가 준비)를 하고 씻다가(6일만에 처음으로 샤워를 했어요. 감격.) 6시 40분에 모여 태환오빠의 글 발표를 듣고 지식인과 현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느 곳이든 현장이 될 수 있지만, 대학이라는 곳은 현장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학교의 행정적 업무 때문에 바빠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고는 하지만 80년대의 활동가들은 한가해서 현장성을 지닌 고민들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는 내용, 현장성에 대한 고민 자체가 행정적 업무로 인한 바쁨이라는 '작은' 고민으로 축소되어 버렸다는 것, 그리고 대학이 3인칭의 시점에서(누가 --해야 한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실제 자신의 자리에서 싸우는 현장은 없는 것 같다는 요지로 추장님이 이야기를 하셨고, 지영언니는 나의 현장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지금의 강한 기운이 후에 또 퇴색되는 것은 아닌가 다소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끝나고 난 후에는 사무국장님께서 운전해 주시는 트럭 뒤에 실려서(?) 마을을 둘러 보았습니다. 풀무학교와 전문대 과정이 열려 있는 학교, 그리고 갓골 풀무생협과 느티나무 헌책방(그물코 사장님께서 기획중이고, 지금 만들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개관은 5월 중에 할 것이고, 책은 앞으로 구비해야 합니다. 지금 책장 만드시고 계세요. 책 기증 환영.) 등을 둘러 보았습니다. 바람 시원했고 트럭 뒤에 타고 가는 게 참 재미있었어요. (많이 추워 몇몇은 끌어 안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생협에서 굽는 빵에 대한 소개, 학교들에 대한 소개들을 들었습니다.

 

돌아와서 저녁 9시 무렵부터는 마을 분 여섯 분과 근처 다른 마을(광천)에서 오신 한 분, 유기농업 인증을 위해 꾸려진 비정부기관인 흙살림에서 나오신 한 분 포함, 총 여덟 분과 이야기를 11시 반까지 나누었습니다. 선물로 아기자 두 권과 뺏지 듬뿍, 티셔츠 여러 장을 드렸습니다.

 

유기농업을 하는 곳이라 유기데이(6월 2일)에 모내기를 한다고, 와서 농요를 부르며 공동체의 경험을 하는 것이 지식인들에게 필수적이라는 말과 함께 모내기에 초대를 해 주시기도 했어요. 농요는 풀무학교에서 정규 교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풀무학교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스승은 풀무질하고 제자는 타오르는 곳"입니다. 엘리트 양성을 하는 일반적인 특성화 학교와는 달리 "위대한 평민"을 키워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 곳은 (최근에는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길러 내는 것이 모토라 합니다) 한 학년 27명 한 반, 총 3개 학년 80명 가량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다들 기숙사 생활을 하구요, 끼가 있는 친구들도 많대요. 지역에서 15% 정도를 뽑기로 되어 있고, 최근에는 귀농에 관심을 가진 부모님을 둔 친구들이 타지역에서 배우러 오기도 한답니다. 대학에 진학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대요.

 

홍성군은 생태농업의 메카 지역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관 주도 또는 각종 신앙이 주도한 생태농업이 시도되고 있지만, 이곳은 70년대에 설립된 지역 자치적인 생태학교가 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생태농업을 일궈 온 것이라는 점이 가장 특이합니다. 마을은 세 가지를 모토로 합니다. 1) 넉넉한 마을. 넉넉함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2) 오손도손. 함께 음식도 하고 나누는 것. 3) 건강한 자연.

 

올 6월에는 아시아 오리농 대회가 열리는데 기술정보 교류하고 연대를 맺는 일을 주로 한답니다. 다음에 카페도 개설되어 있어요.

먹는 것이 자신인 만큼, 먹는 것을 보다 진지하게 알 필요가 있다고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직접 체험이 중요하지요.

 

지역 작물이 주민들에 의해 소비되지 않고 타지로만 가는 것도 문제라, 지역 내의 순환경제를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고 하십니다. 우선은 학교 급식을 통해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몸이 민감한 청소년에게 바른 먹거리를 줘야 하는 것이지요. 왜 친환경농법으로 재배된 작물이 중요한지에 대한 지식도 더불어 선물해 줘야 하구요. "바치는 농업"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농업"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이 건강한 먹거리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 됩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수입되는 쌀들은 온도 60도까지 올라가는 적도 지방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별 수 없이 1.6% 가량을 농약으로 훈증해 범벅을 해야 합니다. 위험한 식사. 이런 급식 지원은 관행농에 의해 재배되는 쌀의 가격에 대한 차액분을 영농조합에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미래와 환경에 투자를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친환경 농업을 하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은데, 일이 워낙 힘들기에 그만 두시는 분들도 있고 관행농법을 쓰는 옆 논과 적절한 간격을 두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도 간혹 있기 때문이지요(농약이나 벌레들이 들어온대요). 하지만 함께 가야 할 분들이고, 힘들여 지으신 농작물을 수매해야 하기 때문에 일도양단의 선택은 내리지 않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 말로는 홍성에서는 그래도 그런 입장에 대개 수긍을 하시는 편이지만, 관행농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아 좀 힘드시다고 해요. 함께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좋을지(함께 살며 바른 먹거리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중이십니다. 홍성은 관 지원을 받지 않고 주민들의 자체 기금 적립으로 지금의 농업체계를 이루셨죠. 매출액도 생태농업 출하 조합 중 최고입니다(900가구에 총 60억). 여기서 추구하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하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지요. 우리가 송사리와 메뚜기를 버리면 그들도 우리를 버릴 것이다. 라는 말씀.

 

수입이 그닥 많지는 않고, 형편이 어렵습니다. 출하를 못 하는 경우도 있고, 노동집약적인 일이라 12마지기(2500평 정도)가 한 가구 평균인데, 여기서 출하되는 쌀이 500만원 가량 된다고.

 

좋은 분들이 많이 다녀 가신다고 합니다. 관의 지원을 일부 받고 자체 기금을 통해 건설되고 운영되는 교육관 등을 거쳐 한해 17000명 정도가 다녀 간다고 합니다. 저희가 머무는 숙소이기도 하지요.

 

또 하나. 농촌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많은 분들이 농약으로 목숨을 끊으시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농약은 다른 의미에서도 위험한 것이지요. 2002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 2000여 분이 음독자살을 하셨답니다. ㅜ.ㅠ  보통 많이 쓰시는 농약은 무척 몸을 고통스럽게 한대요. 아무리 뽑아 내려 해도 계속 몸 안에 돌면서 폐를 서서히 굳게 한대요. 의식이 멀쩡한 상황에서 그 고통을 계속 생생히 체험해야 합니다. 외국 일부에서는 생산, 유통, 판매가 모두 금지되어 있는 농약인데 한국에서는 심지어 학교 마당에 제초 용도로도 뿌려지고 있지요. (아이들이 많지 않아 운동장을 많이 밟지 않고, 그래서 풀이 무성해진대요.)

 

여튼 이런 취지에 공감을 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것이 FTA나 WTO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침이라고 말씀하시네요. 10년 후면 농사짓는 지방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 거의 없어집니다. 10년 전에는 가두시위를 했던 농민들이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이제는 반대로 욕설을 받을 위치에 있습니다. 나의 혈육, 나의 부모님이 아니니깐. 이전에는 부모님들과 친구들, 친척들을 생각해서라도 내 나라 농산물을 먹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겠지요. 기본적으로 농촌의 인구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눈 이야기가 더 많았지만 대략 여기까지 정리해 봅니다.

 

오늘의 행진팀: 곰, 지영, 희선, 정훈, 성국, 태환, 영진, 현민, 병권, 만세, 트래비스, 재연, 현정, 전감, 영실, 세진, 수영, (지)은숙.

영실은 오후에 학교 수업 마치고 와서 합류.
세진언니는 점심때 수영오빠와 교대하고 학교 수업하러 서울로 잠시. 내일 온대요.
트래비스와 ?는 오늘은 차를 타고 행진팀에 합류했습니다.
사진은 현정씨가 찍어 주었고, 일지는 희선이 씁니다.
지은숙씨는 희선의 인류학과 동기인 언니입니다. 반창고를 선물로 가져다 주었어요. 행사에 참여하다가 밤에 서울로 내일 수업을 위해 돌아갔습니다.

 

7:50 출발. 아침에 안세환 목사님께서 나와서 배웅해 주셨습니다.

중간에 세 번 휴식. 일정보다 빨리 걸었어요. (우와~) 그리고 점심은 수영오빠 등 중간합류팀이 사온 김밥을, 그리고 아침에 세진언니가 준비해 준 주먹밥을 맛있게 먹었지요.


간식으로는 황해숙 선생님께서 가져다 주신 주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듯 선물받은 캔커피, 수퍼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참, 캔커피 답례로 저희 뺏지를 선물해 드렸어요) 등을 먹었습니다. 생맥산도 먹었구요.
5시 10분 도착했고, 이후 일정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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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지식인이 권력이 된 시대 지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금일봉, 음료수 주던 얼굴들을 생각하며
지식인이 권력이 된 시대 지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지식이 신체성을 갖기 위해 걷는다!

이번 대장정의 모토 가운데 하나다. 동서고금의 텍스트들을 횡단하며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를 규정하는 중요한 이름들 중에 하나인 ‘지식인’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새만금에서, 대추리에서, 논밭 곳곳에서, 이 땅의 여기저기에서 무수한 삶들이 쓰러져가고 있는 이 시대에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들은 누구이며, 또 어떤 이들이어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경쟁력과 개발 그리고 국익의 이름으로 삶의 파괴를 선동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도대체 어떤 지식을 생산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우리가 연구실을 나와 길 위에 서기 전부터 늘상 가지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대학의 연구실 보다는 원남동 한 모퉁이에 있는 공부방에서 책을 붙들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연구실의 책상이 아니라 길 위에 서있는 이유도 그 질문을 보다 강밀하게 던지고 답변을 보다 치열하게 모색하기 위함이다.

   
 
  ▲흥덕교회 목사님 부부
 
어제 밤 우리는 대천 흥덕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둘러앉아 지식과 지식인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였다. 동양 고전을 다루는 연구실의 고전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두 학인(學人)이 각각 양명학에서 말하는 지식과 선불교에서 말하는 언어에 대해서 발표를 했다.

서울에서 고미숙, 이진경 선생님을 비롯하여 연구실 요가동아리 사람들과 대덕 연구단지에 계신 박문호 선생님 가족들 그리고 흥덕교회 목사님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학문의 의미를 삶에 대한 태도 그 자체에서 찾는 양명과 그 제자들의 문제의식, 말의 체계와 질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선사들의 선문답이 가진 역설적인 말의 힘에 대한 연구원들의 발표는 우리가 가진 지식과 말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련을 가져야 하는가를 물었다.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100리를 걷는 일정 뒤에 토론하기에는 쉽지 않은 주제였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가 이번 대장정 기간 동안 계속 들고 가야할 화두이고, 이번 대장정을 통하여 우리가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하였다. 자연히 토론은 강밀해질 수밖에 없었다.

투쟁의 현장과 지식인의 실천은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 더 이상 지식인이 지배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가 아니라 지식인 자체가 지배 계급이 되어버린 지식기반 사회에서 전복적 지식인의 가능성, 일상의 삶과 매일의 공부 그리고 혁명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접속되는 길에 대한 고민을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갔다.

   
 
장정을 하면서, 그리고 어제 밤 함께 토론을 하면서 지식의 신체성에 대한 나의 고민은 ‘지식의 얼굴’이란 말로 구체화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일컬어 지식 기반 사회라고 한다. 지식이 이제 곧 생산력이 된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지식인은 이미 생산력을 소유한 자들이다. 이제 지식인 자체가 지배계급이 된 것이다.

국익, 경쟁력, 개발, 성장, 유연화 등 이들 지식인들이 이야기하는 지식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구체적인 얼굴은 지워져 있다. 각종 통계자료와 수치들만이 있을 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농민, 장애인, 매장당하는 갯벌들과 난도질당하는 산들의 얼굴을 그 지식인들은 알지 못한다. 대신 그들이 생산하는 지식의 얼굴은 오로지 돈이 되는 것만이 가치를 가지며 화폐로 계산되는 이익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니 그것을 위해 살라고 명령하는 얼굴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장정에서 만난 얼굴들은 나에게 다른 지식의 얼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부안, 새만만금 갯벌, 군산, 서천, 홍성을 거치는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얼굴들. 어제 대천으로 가는 도중에 지나쳤던 어느 지역에서 우리에게 금일봉을 주시며 수고 한다고 말해주신 지역 주민, 어제밤 우리를 재워 주시며 함께 걷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고 말씀하신 교회의 목사님, 오늘 홍성으로 가는 도중 잠시 쉬어가는 우리에게 열심히 하라며 음료수를 선물해주신 가게 아저씨, 그리고 ‘FTA 반대,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이라고 외치는 우리를 만나면 언제나 힘내라고 미소지으며 말해주시던 농민들의 얼굴들이 길 위에서 내가 만났던 얼굴들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더 이상 살아있는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갯벌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조개와 그 갯벌 위에 쏟아 부을 흙과 돌을 위해 수탈당하여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산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물었다. 너의 지식은 나의 얼굴을 알고 있냐고, 너의 지식은 나의 얼굴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느냐고. 그리고 그 얼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얼굴이 네 지식의 얼굴이어야 한다고. 그 얼굴은 도움을 요청하는 약자의 얼굴이 아니라 결속과 접속을 요구하는 강자의 얼굴이었고, 투쟁을 촉발하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우리의 지식이 가져야 할 신체성이란 바로 우리의 지식이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다는 말일 것이다. 어떤 얼굴이 우리가, 내가 가져야할 지식의 얼굴일까? 어떤 얼굴이 우리 지식이 가져야할 신체성일까? 물론 답변은 자명하다. 문제는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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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김강, 생태마을을 가로지르다!

우리의 걸음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어제의 45KM 강행군이 무색하게 오늘도 38KM를 걸었다. 이제 다들 몸이 지쳐간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피곤하여 지쳐갈 수록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더욱 명확해진다. 더 이상 머리로 질문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걸음이 그대로 우리의 공부가 되고, 우리의 걸음이 그대로 우리의 질문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지치면 지칠수록 길거리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가는 곳마다 반겨주는 농민들, FTA 반대, 쌀 수입 반대를 함께 외쳐주시고 음료수를 즉석에서 주시기도 하시던 분들의 응원은 오늘 우리의 걸음에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인간과 자연, 도시와 농촌이 모두 건강한 삶을 위해

우리가 도착한 이곳 홍성 홍동면 문당리 생태마을은 오래전부터 생태농업 공동체가 들어서 있던 곳이다. 이미 70년대에 설립된 지역 자치적인 생태학교가 지역 주민들과 더불어서 생태농업을 일궈왔다고 한다.

이 마을은 세 가지의 모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1)넉넉한 마을(넉넉함이란 경제적 여유가 아니라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단다.) 2)오손도손, 함께 음식도 하고 나누며 사는 것, 3)건강한 자연. 모두가 이 마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아닐까.

타인과의 좋은 관계를 모두 잃어버린 채 오직 나의 안녕과 부유함을 위해 살아가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주로 살아온 나에게 생태마을의 세 가지 모토는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야 할 지침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연구실에서의 나의 활동 역시도 바로 이런 삶을 훈련하는 과정은 아닐까.

농촌의 사정은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한다. 이번에 추진되고 있는 한미 FTA는 그야말로 몰락하고 있는 농촌의 상황을 더 가속화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끝장내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식량주권의 위기가 오고, 농업이라는 하나의 산업이 몰락하는 것 이상의 문제다. 우리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건강한 먹거리'다. 바다를 건너오기 위해 엄청난 양의 농약을 뿌린 식품을 먹고 자라는 우리 다음 세대가 과연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 마을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생태농업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추구하고 있다. 이곳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FTA나 WTO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산업적 측면을 넘어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건강한 먹거리를 향유할 권리에 대해 더욱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급식이나 직거래, 생협 등을 통해 이러한 먹거리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일정한 소득을 올리게 될 수 있게 된다면, 손이 많이 가고, 공동체적인 작업을 요하는 이러한 친환경적인 농업은 농촌인구를 다시 늘어나게 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과 자연까지도 더불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을까.

오로지 수치로 계산되는 '경쟁력'만을 따져 우리 농업을 포기하겠다는 정부의 한미 FTA! 강행의지는 결국 국민의 건강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농촌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많은 선물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또 하나의 세계를 열기 위하여

인간과 만물의 생명의 권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이 세상 속에서도 이렇게 대안을 꿈꾸는 이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의 몸이 지쳐감에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분들과 우리의 삶과 공부가 접속되고 그것을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은 우리에게 또 어떤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어떤 이들과 만나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잠들기 전, 내 마음이 다시 출발할 때의 기대감으로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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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5월 14일 딴죽거리의 일기

[에뿌키라의 장정일기](4) - 5월 14일 딴죽거리의 일기

딴죽거리의 서천 가는 길, 몸이 트인다.

에뿌키라(수유+너머) 
왼발의 무게가 오른발로 자연스레 옮겨지지 않습니다. 걷는다는 걸 느낍니다. 몸은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발로 바닥을 차야지만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걷는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심장은 뛰고. 양손은 번갈아 앞뒤로 흔들며. 무릎은 굽혔다가 펴야 합니다. 그리고 걷는 데는 힘이 듭니다. 내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걸 점점 뚜렷하게 느낍니다. 오늘은 그렇게 40km를 왔습니다.

내 몸은 혼자 걷지 않습니다. 혼자 걷는다면 이렇게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함께 걷다가 쳐지면, 같이 노래를 합니다. 친구들의 노래는 신기하게도 내 몸을 이끌어줍니다.

딴죽거리가 걷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옛 이름을 찾았습니다. 대학교 다니던 때 세상에 딴죽 걸겠노라고 필명을 만들고는 매일같이 학교벽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분노도 있었고 눈앞의 대상을 내 말로 녹여버리겠다던 치기도 있었습니다. 그 모두가 좋았지만, 어느덧 말한다는 사실에 몸도 마음도 비어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말하면 더 공허해지는 이상한 시기에 지금의 연구실을 찾았습니다. 연구실에서는 세상을 향해 소리지르는 법이 아니라 조리 있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 건네는 법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6년이 지났습니다.

얼마 전에 지금 같이 걷는 친구들과 대추리에 갔었습니다. 5월 4일. ‘행정대집행’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대추분교 앞에서 주민들과 함께 누워 이 곳에 그저 있겠노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경찰은 한 명 한 명을 떼어 끌고 갔습니다.

그 때 내 몸은 참 별 것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별 생각을 하고 별 말을 지껄여도 결국 몸은 진입하는 시간을 다만 몇 초 정도 늦출 뿐이며, 기껏 목소리를 더해 조금 더 소란스럽게 만들 뿐이구나. 결국은 이렇게 지켜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구나. 건방진 생각이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600일을 넘도록 버텨 오신 그 주민분들을 보고도 말입니다. 아직 저는 제 몸을 잘 모르나 봅니다. 몸이 뭘 할 수 있는지 모르나 봅니다.

다시 걷습니다. 오늘은 새만금에서 떠나 온 길이 서천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걸을수록 몸은 지치지만, 더 잘 감동합니다. 마음에 몸에 솔직해져 갑니다. 지금껏 300리 길을 걸어온 내 다리에 감사하고, 함께 구호를 외칠 수 있는 내 입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힘을 주는 친구들의 여러 표정에 감사합니다.

제 몸은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로 옮기면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발이 수 만 번 바닥을 딛고 거쳐 온 길 위에서 만난 하늘과 나무와 물과 바람과 인정이 제 몸에 묻어나, 몸도 뭔가를 말하게 됩니다.

제 몸은 친구들과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걷지 못하는 몸이 되더라도 친구들과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장정 동안 몸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함께 걷는 친구들이 너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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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군산에도 서천에도 새만금이 있었다

군산에도 서천에도 새만금이 있었다
서천 농민회, 민주노동당 활동가들과의 만남…넷째날

걸으면서 질문하기 넷째 날이다. 접산리를 떠나 금강을 건너 충청남도 서천에 도착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리와 발의 통증을 호소했다. 이날 마침 연구실 동료 중 한의학을 공부하는 선배가 ‘위문진료(?)’를 위해 찾아왔다. 저녁밥을 먹은 후 우리 숙소는 순식간에 임시병동이라도 된 듯싶었다.

이날의 만남은 8시부터 시작됐다. 걸으면서 질문한다는 것은 피곤한 상황에서도 만난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신체를 키우는 것이기도 했다. 마치 운동이 위기에 처한 자리에서도 다시 시작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이날 대화에는 서천 지역 농민회와 전교조 그리고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그 분들의 고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개발의 이중성이었다.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면서도 현실적인 면을 고려할 때 반대만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대체 서천의 현실, 아니 한국의 대부분의 농촌이가 처한 현실이란 어떤 것일까?

   
 
텅 비어가는 것도, 개발로 몰려 들어오는 것도 다 문제

첫째, 오랫동안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들은 발전을 논의하기 이전에 활기 자체가 부족하다. 농사를 짓는 인구도 40대 이하는 찾을 수 없고, 대개가 60대들이다. 유권자의 65% 이상이 60대인 것이다. 이는 단지 농촌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텅 비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어떤 식으로든 개발이 추진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선거철마다 이용해 먹는 정치인들의 이해타산도 보였다. 모든 개발이 지역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지역에 할일이 없어 사람들이 떠나가고 있는데, 개발이라도 해야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그래야 지역경제도 살아날 것 아니냐”고 외치고 다닌다. 문제는 이런 선전이 점점 활기를 잃어가는 주민들의 마음을 울린다는 슬픈 현실이다.

   
 
둘째, 만약 개발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현재, 서천 땅 중 일부는 값이 크게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천 지역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사람이 ‘비어가도 문제’이지만 ‘몰려들어도’ 문제이다.

개발이라는 건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개발이 국책사업으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새만금 간척 사업 같은 것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천에도 공단을 만들기 위해 바다를 메우는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군산 쪽 공업단지도 놀고 있는 상태에서 서천의 공업단지에 기업이 들어오긴 어렵다고 한다.

현장의 아픔을 논문의 주석 정도로 보면 안 된다

   
 
새만금은 새만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군산에도 서천에도 있었다. 다른 경우 개발은 현지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외지인을 위한 것이 되기 쉽다. 서천에도 투기 바람이 부는 지역이 있다. 그러나 풍경이 좋고 땅값이 비싼 곳은 외지인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만난 농민회 사람들과 활동가 분들은 서천 땅을 개발에 내놓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야기될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서천에 뿌리박고 사는 평범한 주민이나 농민들의 삶이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외지인들에 의한 투기성 개발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현장의 아픔과 고통을 주석으로만 단다” 그 말은 치열한 현장을 무시하는 관리자와 같아진 지금의 대다수 지식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언론운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한동안은 언론고시에 붙기 위해 공부를 한다. 외우기 위주의 공부를. 그 뒤엔 서울에 취직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그들이 말하는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싸울 사람이다. 서천에는 <뉴스서천>이라는 지역 신문사가 있다. 돈을 많이 벌 수는 없지만, 치열하게 보도하고 여론을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이런 공간이 지역에 많이 생겨야 한다고 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서울에서 지역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역에서 함께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서 지역 얘기하지 말고, 지역으로 내려와라

그분들이 말씀해 주신 문제들은 새만금에서도 대야 농민회에서도 접했던 문제들이었다. 우리들도 언론에서만 보고 접했던 내용들을 직접 들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조절하게 하는 현장감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우리들은 그분들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대로 그 분들이 우리들에게 물어오고, 우리들에게 '지역 경제학의 토대 마련'을 주문하시면서 지식인의 역할을 언급하셨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개발의 이중성을 벗어나는 것. 그것은 바로 이곳에 직접 와서 이곳 대다수 농민과 주민들의 삶을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단지 서천에서만 서천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돌아간 뒤에도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어떤 현장성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발의 망령에서 희생을 강요하는 자와 희생자는 누구인지 분명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내일도 걸으면서 계속 물을 것이다.

다 같이 잘 사는 방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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