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길의 그냥그저그래 3http://blog.jinbo.net/gimche/2013-06-13T05:35:23+09:00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서평새벽길http://blog.jinbo.net/gimche/12732012-10-07T14:37:04+09:002012-10-07T14:37:04+09: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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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008.html"><strong>잃어버린 30년을 넘어 다시 복지국가로</strong></a> (한겨레21 2011.07.18 제869호, 허미경 기자 한겨레 문화부문)<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책 속의 책-구본준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15선]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strong></span><br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죽음에 임박한 한 역사학자가 이 시대에 던지는 통렬한 유언장이다. 토니 주트(1948~2010)는 2006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현대사를 분석한 역사서 <포스트워 1945~2005>를 통해 ‘미국적 생활양식’에 대비되는 ‘유럽식 사회모델’을 유럽의 성공 요인으로 ‘통찰’해 미국과 유럽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토니 주트는 2008년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그의 몸은 점점 마비됐고, 의료장비의 도움을 받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까지 악화됐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집필된, 정확히는 지인들이 그의 구술을 받아 입력해 완성된 책이다.<br />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국가, 어떤 정부를 선택하고 만들어야 하는지를 화두로 삼은 이 책에서 그는 유럽과 미국의 사례를 역사 속 당대 현실에서 천착하며, 1989년 세계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한 때부터 세계 경제위기(2008)가 몰아친 2000년대까지 최근 30년을 자유시장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의 시대로 파악한다.<br />
그가 보기에, 1970년대에 발아해 ‘공공부문에 대한 경멸과 규제받지 않는 시장, 민영화·민간부문에 대한 숭배’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쓴 이 30년은 ‘잃어버린 30년’이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뒤 유럽 나라들이, 대공황기 미국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사적 영역의 실패를 공적 영역을 통해 해결한 성과와 그 모든 노력을 이 30년 동안 무위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을 특권화하고 공적 영역을 무시한 극단적인 탈규제 정책의 진원지는 미국과 영국이었다. 문제는 그 어떤 나라도 지난 30년간 ‘경제 관리’와 ‘복지’ 파괴에 앞장서온 미·영 두 나라에 맞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8년 GM 대표가 벌어들인 소득은 GM 노동자의 66배였지만, 오늘날 월마트 대표는 월마트 노동자의 900배에 달하는 돈을 벌 만큼 미국의 빈부 양극화는 극심해졌다.<br />
이 시기에 탈규제가 심한 나라일수록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고, 사회문제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문제는 국가가 얼마나 부유한지가 아니라 국가 내부의 불평등이 얼마나 큰지였다. 선성장론(후분배론), 곧 번영과 특권은 파이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레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된다는 견해에 대해 저자는,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함을 보여준다.<br />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역사학자로서 멀리는 19세기, 가까이는 20세기 유럽·미국의 정책들을 들여다보며 역사적으로 통찰한다는 데 있다. 케인스와 루스벨트가 주도한 미국의 뉴딜정책, 전후 유럽 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뤄낸 복지국가, 전후 영국의 사회보장국가 등은 빈부 격차 해소와 사회적 불평등 억제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945년 이후 1980년대까지 약 30년간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빈부 격차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중산층은 무상교육, 무료(저가) 의료 혜택, 공공연금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빈민층과 함께 똑같은 혜택을 누리는 대신 자신들의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한 결과 1960년대에 가처분소득이 1914년 이래 사상 최대에 이르렀다. 지은이는 “세상이 그렇게 잘 돌아간” 까닭을 시장의 마술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찾는다. 곧 정부가 시장을 규제했기 때문이다.<br />
이 책은 ‘사회주의’란 말이 금기처럼 돼 있고 공공 목적의 재정지출을 옹호하는 논객들마저 ‘자유주의자’(리버럴)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지내온 역사학자로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쓴 책이지만, 그 목소리는 미국식 사회모델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의 독자에게도 절절한 울림과 함께 직접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br />
지은이는 2008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이 다름 아닌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 자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었다고 단언한다. 그의 열쇳말은 ‘큰 정부’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다. 요약하면, 사민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복지국가다. 이 역사학자가 격정적 어조로 토해내는 이야기는, 우리는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와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가? 우리가 원하는 국가는 어떤 종류의 국가인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토니 주트는 2010년 3월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뒤 그해 8월 뉴욕에서 숨졌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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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3180&yy=2011"><strong>[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토니 주트/플래닛</strong></a> (매일신문, 신남희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2011년 08월 04일)<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금융위기·복지정책 퇴조·실업률 급증…더 나은 세상은?</strong></span><br />
주요 공공 산업 부문의 민영화 요구, 효율성을 위한 기업의 대규모 구조조정, 작은 정부에 대한 지향.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신봉되어온 이런 정책들은 비정규 일자리의 양산과 실업률 급증, 결혼기피와 출산율 저하 같은 부정적 결과들을 낳고 있다. 경제적 가치를 최상으로 여기며 살아오는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의 가치는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br />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읽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아 왔다. 정말 이러한 욕망의 추구를 배제하고 나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의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br />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마비되어가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 책을 쓴 저자는, 규제받지 않은 자유 시장과 효율성을 기치로 내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온갖 불평등과 극심한 빈부 격차에 격렬한 분노와 슬픔을 드러낸다.<br />
저자는 영국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삶에 꼭 필요한 공공재를 민영화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이것은 비용절감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필수적인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복지의 축소는 사람들의 삶을 악화시키고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어렵게 채택된 복지정책들이 후퇴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닥치게 될지 우려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야기한 정치인들의 무능과 시민의 무관심을 안타까워하며, 어떤 경우에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인 정치의 영역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잃지 말 것을 호소한다.<br />
“우리는 경제 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번영과 특권은 파이의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확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br />
“<u>사람들이 정치와 정치가들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공공 정책의 의사결정에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정치적 논쟁은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u>이다.”<br />
“인간은 원래 본능적으로 도덕적 존재이며, 따라서 자신의 도덕적 본능을 표현할 만한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br />
그리고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다시 한 번 정치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떠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br />
토니 주트는 역사를 되돌아볼 것을 권한다. 1914년 이전에 세계는 이미 한 차례의 세계화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재앙으로 이어졌다. 복지국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탄생했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전례 없는 안정과 번영, 평등의 확산을 가져오며 파시즘을 불러온 원동력이었던 중산층의 불안과 불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복지국가를 버리고 다시 불안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토니 주트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20세기 역사의 아이러니를 들려준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면, 그 앎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역설한다.<br />
우리와는 고민의 시점이 다른 점도 있지만, 금융위기나 복지정책의 퇴조, 실업률의 급증 같은 세계적 추세 속에서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상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는 저자의 외침은, 책을 쓸 당시의 그의 상황과 맞물려 더욱 절실하게 공감이 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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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toggle-text" onclick="toggleMore(this)" style="display: none; cursor: pointer">더보기</span></p>
<div class="more-content" style="border-bottom: black 1px dashed; border-left: black 1px dashed; padding-bottom: 1px; margin: 1px; padding-left: 1px; padding-right: 1px; background: #efffaf; border-top: black 1px dashed; border-right: black 1px dashed; padding-top: 1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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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strong><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프레시안, 최수태 문화평론가, 2011-05-13 오후 6:05:48)<br />
<span style="color: rgb(9,0,255); font-weight: bold">[책 vs 책] '유럽식 복지 국가'를 넘어서</span><br />
1. 사회학자 엄기호는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의 '건국 신화'를 거론하면서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에 대한 서평을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질서가 서서히 퇴조해가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는 '복지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성장의 결과를 공정하게 배분하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의 재구성이다.<br />
마치 코난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듯이,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엄기호의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그는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미래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과거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226쪽)는 결론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엄기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br />
<span style="color: rgb(152,0,0)">사회주의자들뿐만이 아니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이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span><br />
이와 같은 전폭적이고 강렬한 비판에 대해 반론이 나오지 않을 리 없다. 플레닛 대표 안성열은 자신이 발행인으로 등재되어 있는 책을 직접 옹호하고자 나섰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엄기호의 서평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더 따져 묻기로 결정했다.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을 꺼내든 것이다. 우리는 그 옹호와 반박의 내용을 "그것이 왜 '정치'가 아닌지 아직도 모르나?"에서 확인할 수 있다.<br />
토니 주트의 책, 그리고 20대 비명문대 학생들의 목소리를 엄기호가 담아낸 책을 전장(戰場)으로 삼아, 예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이 다시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엄기호는 본인의 서평의 목적은 사회주의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이건, 사회민주주의건 그것을 재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화살이 어디를 겨누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그러한 엄기호의 입장에 대해 안성열은 "(엄기호가 말하는) "정치적 상상력"은 그가 <미래 소년 코난>에서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를 목격했듯이 만화적 상상력에 가까운 몽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전형적인 대응 방식이기도 하다.<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어떤 정형화된 대립 구도를 가진 논쟁은 시작되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논쟁에 참여하는 양자 모두 이미 충분히 검증된 '정답'과 '오답'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span>이다. 마치 칸트가 말한 이율배반처럼, 둘 다 옳고 동시에 둘 다 틀린 추상적인 원리가 충돌할 때, 우리의 지성은 갈 곳을 잃고 표류하고 만다. 이렇게 굳어버린 논쟁들의 역사는 비극으로, 희극으로, 그리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부조리극으로 반복된다.<br />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한 권, 혹은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우선 서평의 대상이 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있고, 또 안성열이 끄집어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도 함께 논의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전장에서 펼쳐지는 같은 싸움이다. 하지만 그 지리적 특수성과 보편성에 힘입어 우리는 이 싸움의 갈피를 잡아볼 수 있을 것이다.<br />
2.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엄기호의 독해를 '오독'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 테지만, 그가 특정한 편향성을 지니고 텍스트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 가능하다. 엄기호의 사회민주주의 비판이 이미 거의 완전한 형태로 토니 주트의 논의 속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토니 주트가 무분별하게 68 세대를 비판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span>.<br />
토니 주트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지 않는다는 엄기호의 비판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책을 펼치자마자 우선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 19쪽, 즉 서문의 페이지가 고작 세 장 넘어간 지점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 때문이다.<br />
<span style="color: rgb(152,0,0); text-decoration: underline">"요컨대, 강력한 국가와 개입주의적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국가를 다시 생각해보려는 자는 아무도 없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19쪽, 강조는 인용자)<br />
여기서 '국가를 다시 생각한다'는 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의 최종적인 결론에서 토니 주트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선택지' 중 하나로 사회민주주의의 가치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뉘앙스와 함께) 긍정한다. 하지만 그 역시 엄기호가 말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이 현재의 언어적/정치적 질서를 뛰어넘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br />
<span style="color: rgb(152,0,0)">해답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기라도 해야 해답을 찾을 것 아닌가? 우리는 변화에 대해 논의하는 방법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우리는 '혁명'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현재와는 아주 다른 질서를 상상하는 방법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바람직한 목표와 용납할 수 없는 수단을 우리 선배들보다는 더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156쪽)<br />
토니 주트에 대한 엄기호의 비판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안성열이 지적한 바와 같이 토니 주트는 68 세대의 일원으로 성장하였고 그 빛과 그림자를 모두 목격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목적이 자유주의적 정책 내에서 상대적으로 괜찮은 급진적 선택을 지지하려는 투표자들을 설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런 말들은 헛소리에 불과하다"(146쪽)고 비판하는 것은, "실제로 독일의 젊은 급진주의자 세대를 숨 막히게 만들고 그들을 "제도권 정치 바깥"으로 몰려가게 만든 것은 교육 정책부터 시작해서 외교, 공중 여가 정책 그리고 불미스런 과거사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던 두 정당의 정책적 유사성"(58쪽) 때문이었다는 문제의식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br />
하지만 결국 책의 결론에서 토니 주트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의 해답은 사회민주주의'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회민주주의가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즉 보수주의 정당과 "모든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아닌 저것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br />
토니 주트의 이 책에 대한 엄기호의 독해가 공정하다고, 혹은 편향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토니 주트 역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는 마찬가지이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우리 자신을 위해 현재와는 아주 다른 질서를 상상"해야 한다면서,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는 이유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span><br />
바로 여기서 적극적인 독해, 능동적인 해석, 창조적인 서평이 요구된다. 왜 이 죽어가는 역사학자는 자신이 비판한 체제를 그 체제의 쌍생아의 해법으로 인정하고 권유할 수밖에 없는가? 하지만 엄기호는 텍스트의 심층으로 들어가 그 자체와 씨름하는 대신, 예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구도 속으로 그것을 끌고 들어가 버렸다. 안성열의 반론은 바로 그러한 선택에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다.<br />
3. 비단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뿐 아니라,<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어떤 것이건 이미 만들어진 이율배반적 논쟁의 구도가 도입되면 그 순간 실제 논의 자체는 급격하게 소외되어버린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사람들은 상대방의 글을 읽지 않고 비판하고, 논쟁의 핵심이 되는 텍스트에 대해서도 꼼꼼한 독해를 하지 않고 내지른다.<br />
먼저 안성열의 비판을 펼쳐보자. 그는 엄기호가 토니 주트의 대의를 오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안성열에 따르면 엄기호는 신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국가"가 파괴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토니 주트의 책에 따르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기 때문이다.<br />
<span style="color: rgb(152,0,0)">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다. 엄기호는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라는 말로 책의 대의를 전달하는데,<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토니 주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삶</span>이기 때문이다.</span><br />
<span style="color: rgb(152,0,0)">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받아들인 국가와 정부 아래에서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건재했고, 오히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span>. 토니 주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span><br />
하지만 엄기호가 '나라'라는 단어로 작은따옴표를 이용해 지시한 것은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유일한 권력 집단인 정부 혹은 국가가 아니다. 엄기호가 토니 주트의 책에서 읽어내는 '나라'는 곧 사회이면서 공동체이며 삶의 형식 혹은 양태를 뜻하는 것이다.<br />
<span style="color: rgb(152,0,0)">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의 서두에서 뜬금없이 <미래 소년 코난>과 건국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책이 다름 아니라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span><br />
<span style="color: rgb(152,0,0)"><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이때의 나라란 단지 시장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조정하는 기구로서의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가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span>. 남자와 여자,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고 선언했을 때 사망 신고를 받은 것은 바로<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이 시대 인식과 공간을 공유한 동시대인 동료들의 정치 공동체인 '나라'</span>다.</span><br />
엄기호의 서평에서, 안성열이 인용한 문장의 바로 아래에 "이때의 나라란 (…)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직접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안성열은 엄기호가 '개인 대 국가'의 대립쌍 중 '국가'가 파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단정 짓고 그것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독해는 독자뿐 아니라 토니 주트에게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br />
토니 주트 본인이 "근대적 삶을 진정으로 구별 짓게 하는 것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다. 더 정확히 말해 19세기에 기원을 둔 부르주아 사회 혹은 시민 사회"(216쪽)라면서 그 시민 사회의 상징물인 철도를 논하고, "마거릿 대처가 절대로 열차를 타지 않으려 하지 했던 것이 단지 우연만은 아니"(217쪽)라고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길 때, 우리는 엄기호에 대한 안성열의 비판이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조정 기구인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개인들은 공공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토니 주트의 논점이며 그 지점까지는 엄기호 역시 동의하고 있다. 다만 차이는 그 참여의 형태가 무엇이어야 하냐는 것이다. 토니 주트는 문제도 많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현실 속에서 검증된 바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한다. 반면 엄기호는 '좋은 옛 것'보다는 '위험한 새 것'을 선택한다. 양자 모두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span>.<br />
안성열이 엄기호의 서평을 불성실하게 읽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그것 역시 불성실한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대체 왜 이와 같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오독이 강한 확신과 함께 등장할 수 있느냐이다. 물론 필자는 이미 그 이유를 이 글의 도입에서 제시했다. 엄기호와 안성열 모두 다시 한 번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필자의 지적 능력이나 성실성이 아니라, 애초에 그 구도가 도입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br />
4. 한국의 담론 지형에서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은 대략 다음과 같은 형태로 진행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적인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제도권 내에서 수행되는 것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던 요소들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고전적인 주제들, 가령 지역 갈등이나 노동 문제 등보다도 어쩌면 섹슈얼리티와 젠더, 정체성 문제, 문화적인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주제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br />
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68 혁명 이후 이른바 '신좌파'의 도래와는 무관하게, 사실 정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일차적으로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배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 안성열의 표현을 빌자면 "생존"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해로울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러므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도구인 국가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으며, 그것을 위한 실천 과정에서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정치'의 일부로 거론되는 현상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환영하지 않는다.<br />
이것은 간략한 스케치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개별적인 사람, 집단,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이데올로기적 움직임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어찌되었건 이와 같은 추상적인 구도가 실제의 논의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종의 '가족 유사성'을 지니지만, 각자의 머릿속에서 서로 합의되지 않은 채 개별적인 화자의 사고방식을 지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쟁 참여자들은 비슷한 듯하지만 서로 소통될 수 없는 각자의 방언을 이야기하며 평행선을 긋게 된다.<br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엄기호가 청년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내놓은 서술을 살펴보자. 그는 젊은이들이 냉소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정치적으로 움직이는가? 정치가 사기라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움직일 때는 정치가 오락이 되거나 혹은 정치가 오락을 방해할 때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91쪽)<br />
엄기호에게 청년들이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게이머로서 정치에 참여"(같은 책, 93쪽)하는 것은 결코 탈정치화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정치를 도덕화한 기존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같은 구절을 읽은 후 안성열은 엄기호가 "20대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재미가 있으면 반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반응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소비하는 수용자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는 애초에 오락적인 요소들을 '정치'의 일부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같은 현상을 놓고 엄기호는 젊은이들이 오락을 통해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안성열은 기존의 '정치'가 오락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을 뿐이라고 본다. 당연히 논의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각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상대방을 '무책임한 사회주의자', '고리타분한 사회민주주의자'로 간주하며 흐지부지되어가는 논쟁을 마무리 짓게 되는 것</span>이다.<br />
필자는 지금 두 사람이 시쳇말로 '병림픽'을 벌이고 있다는 식의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라는 형이상학적 구도가 정치적인 판단과 논쟁에 도입되면서 야기하는 막대한 혼돈에 대해 기술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형이상학적 이분법이 무서운 이유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앞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그것이<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특정한 형태로 추출되어 객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의 머릿속에 있는 구도는 각자의 방식으로 전부 다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질적인 논의를 방해하고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킨다.</span><br />
우리는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려,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처럼 해결될 수 없는 논쟁으로 정치적 논의가 빨려 들어가고 실종되어버리는 현상들을 '정치의 철학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정치의 철학화'로 우리는 지난 시대에 만연했던 빨갱이 사냥을 떠올릴 수 있다. 냉전 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또 고속 성장에 걸 맞는 공정한 분배를 이루기 위한 실질적인 논의들을, '빨갱이냐 아니냐' 혹은 '공산주의자냐 민주주의자냐' 같은 유사 철학적 구도가 권력의 총칼을 빌어 휩쓸어버린 그것들 말이다.<br />
무상 급식 논쟁, 복지 논쟁에 이르기까지 그 여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공짜 밥을 주는 것은 공산주의, 빨갱이다'라는 선언이 등장하는 순간 교육과 복지와 우리의 다음 세대를 둘러싼 정치적 결단은 모두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 '철학화'된다. 올바른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힘의 논리에 의해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br />
우리는 같은 현상을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의 논쟁 구도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중권은 합당론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을 한껏 조롱하지만,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조기숙이 트위터로 "당신의 주장은 국민의 명령과 같다"고 말하자 히스테리컬하게 반발한다. 그는 진보신당 잔류파들 혹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보정당의 아우라를 가지고 싶지만, 그것을 국민의 명령과 같은 포스트-노무현 시대의 정치 운동에 빼앗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민주당을 뺀 모든 정당들이 합쳐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표는 진중권과 조기숙 혹은 문성근 모두가 공유하고 있지만, 각자의 속내와 셈법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주의자'들을 규정한 채 몰아세우며, 자신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민주주의자'의 스탠스를 점유한 채,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span>.<br />
이런 식으로 '철학화' 되어버린 정치 속에서는 더 이상의 이성적, 상식적 논의가 불가능하다. 토니 주트의 책을 둘러싼 두 서평자의 논쟁 역시 그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br />
5.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정치의 철학화'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막연한 질문에 대한 해답 혹은 그 실마리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토니 주트의 책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br />
토니 주트에 따르면 68 혁명과 신보수주의 운동은 모두 같은 시대의 산물이다.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절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98쪽)이라는 서술을 곱씹어보자.<br />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토니 주트는 신좌파 운동이 지니고 있는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 문장은 '신좌파=네오콘'이라는 식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는 두 집단이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차라리 그 시대의 분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br />
비단 젊은이들 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1960년대의 집산주의적 복지국가에 대해 반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중산층 시민단체들은 공격적이고 무차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철거 사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90쪽)하였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확고하게 정권을 잡고 있었던 스웨덴에서도 공영 주택, 사회 복지, 그리고 공공 의료 정책에 수반되는 무지막지한 획일성"(90쪽)이 젊은이들을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br />
그에 대한 반발로 신좌파 운동이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허물어가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망명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이 시카고 대학과 관련된 영미권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와 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를 뒤바꿔버린다. 신보수주의 운동, 이른바 네오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토니 주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br />
<span style="color: rgb(152,0,0)">말하자면 70년대 중반부터 이후 30년간 이어진 보수주의의 승리와 그로 인한 근본적인 변화들은 필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 혁명이 낳은 결과였다. 대략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공적 담론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바뀌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104쪽)<br />
보수주의자들은 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장을 정치와 경제가 아닌 문화의 영역으로 돌림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고 토니 주트는 설명한다. 그러나<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신보수주의는 단지 철학적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결과적으로 향후 30여 년을 지배하는 정치 담론으로 변모하게 된다. '정치의 철학화'가 아닌 '철학의 정치화'를 이루어낸 것</span>이다.<br />
토니 주트 혹은 그의 대변인으로서의 안성열은 68 혁명이 이루어낸 '철학의 정치화'를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국가 권력의 점유 등과는 무관하게, 21세기를 살아가는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집단 구타를 당해도 경찰이 묵인하지 않는 세상이 온 이유는 신좌파적인 철학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정치화하였기 때문이다.<br />
불과 50년 전만 해도 동성애자들이 언젠가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한다면, 인류의 재생산을 위한 도구가 되라는 사회적 압박을 뿌리치고 여성이 지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수녀 혹은 여승이 되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모습은 '가족'의 가치를 부르짖던 신보수주의자들이 원하던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는 1960년대부터 일어난 지적 움직임이 정치의 영역에 반영된 결과물이다.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그 변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br />
<span style="color: rgb(152,0,0)"><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민영화가 공적 삶을 얼마나 황폐화시켰는지는 무심결에 내뱉는 새로운 정책 언어에서 빈번히 확인된다. 오늘날 영국의 고등 교육계에서 시장을 메타포로 사용하지 않는 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의 학장과 학과장들은 누군가가 이룬 과업의 질을 판단할 때 '산출량(output)'과 '영향(impact)'을 평가하라고 강요받는다. 영국의 정치가들과 공무원들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통적인 독점 산업들을 포기하는 이유를 대기 위해 애쓰면서 '공급자가 다양화되었다'고 둘러댄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2008년 6월 영국 노동연금부 장관은 사회 복지 사업의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를 '복지 전달의 최적화'라는 말로 묘사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122~123쪽)<br />
그렇다면 신좌파 운동은 어떨까? 멀리 갈 것도 없다. "Ill Fares The Land"라는 제목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번역되는 것만 보더라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신좌파의 언어가 없이는 새로운 정치를 말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제목은 18세기 아일랜드의 시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질병이 퍼지고 죽어가는 대지 위에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과 쌓여가는 시체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br />
굳이 한국어로 옮기자면 '죽어가는 대지에서' 정도가 될 수 있겠지만, 출판사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저 시구는 한국어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신좌파의 언어로 제목을 붙인, 하지만 본문에서는 신좌파를 비판하는 책을 읽게 된 것이다.<br />
6. 어떤 '끝없는 논쟁'에 끼어드는 것이 과연 현명하거나 유용한 행동일까? 그러한 논쟁의 구도를 도입하거나 끼어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라고 나는 이미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논의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 그 자체가 있다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br />
토니 주트의 '결론'은 사회민주주의이지만, 그의 논의 구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의 편에 서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긴 서평의 결론을 대신하여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br />
토니 주트의 논리 구조가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에서 사회주의 쪽에 더욱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앞서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이 그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정치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에 선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결론으로 내세우지만, 혁명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찾아내고자 하는 그의 열정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span><br />
둘째, 신좌파 혹은 네오콘들과 마찬가지로<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토니 주트 역시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고 사유 체계를 바꾸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구도 속에서,<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언어란 프로파간다 정도의 중요성만을 지닌다는 것, 혹은 언어를 통한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을 논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어법이 '공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토니 주트의 무게 추는 (한국의 논의 구도 속에서) 사회주의 쪽으로 쏠린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br />
<span style="color: rgb(152,0,0)">이러한 방식으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내었던 전례들이 있다. 구체제가 비틀거리고 있던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 일어났던 정치 무대는 저항 운동의 현장도, 그 저항 운동을 저지하고자 했던 국가 기구도 아니었다. 중요한 변화는 언어 그 자체에서 시작되었다. 언론인들과 팸플릿 작가들은 체제에 불만을 품은 행정가나 성직자들과 함께 정의나 인민의 권리와 같은 구체제의 언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이러한 어휘들은 민중 행동의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span><br />
<span style="color: rgb(152,0,0)"><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절대주의 군주정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고 상상함으로써, 그리고 '민중'이 믿을 수 있는 대안적인 권위의 원천들을 상정함으로써 절대 군주정의 정당성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들은 근대 정치학을 발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에 대한 언어적 거부를 통해 탄생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프랑스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 같은 새로운 정치 언어는 이미 프랑스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실제로 혁명가들은 그 언어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표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말에서 시작되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174~175쪽)<br />
셋째,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논의되는 맥락은, 토니 주트의 논의를 빌려온 후 적용하자면, 일종의 신식민지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비판될 여지가 크다. 이것은 그동안 엄기호와 안성열의 논의에서 등장하지 않은 것이므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소개되어야 한다.<br />
68 혁명은 당시까지의 사회주의적 요구와는 달리 '집산주의'(collectivism)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차원에서 사회 문제에 접근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95쪽)였던 것이다. 그 결과 60년대의 정치는 '정체성'의 정치로 탈바꿈하였고, 공동의 이해관계가 아닌 "사회나 국가에 대한 개인적인 권리들의 총합"(같은 곳)이 정치가 되어버렸다.<br />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신좌파 스스로가 속해 있던 국가, 즉 이른바 '선진국' 내에서의 사정일 뿐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 '타자'들을 향해서는 여전히 집산주의적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span>. 토니 주트는 그 점을 흥미롭게 지적하고 있다.<br />
<span style="color: rgb(152,0,0)">흥미롭게도 신좌파는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집단적 속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곳에서 신좌파들은 '빈농', '탈식민', '소외 계층(subaltern)' 등과 같은 불명료한 사회적 범주 아래 모여들었다. 하지만 자국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96쪽)<br />
'한국에서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히 급진적이다'와 같은 '한국식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이와 같은 이중적 시각과 얼마나 다른가? 과연 2011년의 대한민국이 품고 있는 '정치적' 갈등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도래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일까?<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정체성의 정치, 언어적 갈등, 대변되지 못해왔고 대변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고려하지 않아도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혹은 그러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철모르는 공상적인 사회주의 동호회 놀이'라고 매도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그것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저 높은 상공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시각, 혹은 저 유럽의 어느 먼 나라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변방의 민주적 발전 단계를 내다보는 그런 시각의 산물이 아닐까?<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환경주의, 여성주의, 젠더의 정치학, 투표율 50%가 말해주는 대의민주주의 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소외, 이른바 '다문화 가정' 및 그 자녀들의 정체성 갈등이 불러올 예견되는 파국, 즉 도농 갈등이 인종 갈등으로, 지방민에 대한 수도권 거주자들의 차별 의식이 가장 지저분한 형태의 인종 차별로 드러날 가능성에 대한 경계 등 그 모든 것을, '한국에서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히 급진적이다'와 같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명제 하나로 덮어버리려는 시각은, 토니 주트가 비판한 '68 혁명' 만큼이나 무책임할 뿐더러 오만하며, 일종의 자기 소외 혹은 자기 멸시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span>이다. '우리 주제에' 무슨 정체성 타령이야, 사회민주주의만 해도 감지덕지지. 이렇게 볼 때, 토니 주트의 사유를 통해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br />
7.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여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나나 다른 엄기호 혹은 안성열이 내릴 수 있는 것도, 또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한 권의 책이 제시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들을 더욱 더 세심하게 읽고 대담하게 해석하여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을 뿐이다.<br />
그러므로 그 책을 놓고 논쟁을 벌인 엄기호, 안성열의 논의를, 나는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우리가 가진 것이 언어뿐이라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윤리적인 행위는 오직 경청하는 것뿐일 것</span>이기 때문이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러한 노력 속에서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나올 가능성도 비로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며, '정치의 철학화'가 아닌 '철학의 정치화'를 모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도 확보될 수 있을 것</span>이라고, 나는 믿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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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weight: bold"><a class="tx-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318133637" style="border-bottom: rgb(132,0,0) 1px dashed; color: rgb(51,51,51); text-decoration: none" target="_blank">그것이 왜 '정치'가 아닌지 아직도 모르나?</a></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프레시안, 안성열 플래닛 대표, 2011-03-18 오후 7:18:13)<br />
<span style="color: rgb(9,0,255); font-weight: bold"><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vs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span><br />
엄기호에 따르면, 기성세대가 20대 대학생에게 퍼붓는 비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파의 비난으로 이들이 "힘든 일을 하기 싫어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좌파가 하는 비난으로 "완전히 탈정치화되었다"는 것이다. 우파의 비판에 대해서는 대학생들이 등록금을 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되물으면서 함부로 이들의 삶을 삭제하는 무례를 범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어서 그는 젊은이들이 탈정치화되었다는 좌파의 비난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정치의 전제조건이며, 따라서 탈정치화된 존재는 언어가 부재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그들의 언어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정리된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br />
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 말고,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면 젊은이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음이 보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엄기호 자신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의 관점에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br />
그는 처음부터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다. 엄기호는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라는 말로 책의 대의를 전달하는데, 토니 주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받아들인 국가와 정부 아래에서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건재했고, 오히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토니 주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br />
"한 가지는 확실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누구도 국가 자체를 축소하려 들지는 않았다. 마거릿 대처와 그녀에 뒤이어 등장한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 가운데 중앙 정부의 억압 기구 또는 정보 수집 기구를 옹호하는 데 주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CCTV, 도청, 미국의 국토안보부, 영국의 독립안보국을 비롯한 그 밖의 장치들 덕택에 근대 국가가 그들의 신민들에게 행사했던 전방위적인 통제는 오히려 확장일로에 있다." (113쪽)<br />
엄기호는 주트가 68혁명 세대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가혹하다"고 말한다. 좌파 기성세대와 그들의 비난을 받는 젊은이라는 그의 도식을 떠올리게 하는 판단이다.<br />
먼저 68혁명과 그 세대에 대한 토니 주트의 설명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후의 복지 국가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지만 그것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국가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오고 있었다. 복지 정책에 수반된 무지막지한 획일성은 젊은 세대를 숨 막히게 했다. 또 참혹했던 전쟁과 전후의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60년대 세대는 이전 세대 개혁가들이 내세운 목표인 사회정의와 같은 대의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의 표현에 가해지는 제약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br />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였다. '개인주의', 즉 모든 사람은 사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 자신의 욕망을 어떠한 제한 없이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이 모든 권리는 사회에 의해 존중되고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점차 좌파의 슬로건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95쪽)<br />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절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8쪽)<br />
토니 주트는 신좌파의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전후에 인기를 잃었던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존경심' 등을 내세우며 문화 전쟁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본다. 68혁명이 내세운 개인의 자유와 욕망의 해방에 대한 요구가 보수주의의 부활과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br />
엄기호는 마치 존재의 근간을 부정당한 사람처럼 주트의 비판에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주트의 분석에서 68혁명이 비판적으로 언급되는 자리마다 사회민주주의(또는 구좌파)를 집어넣는다. 아무런 설명 없이 모든 것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철저히 무능하고 무지한 사회민주주의자들 탓에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는 어이없는 강변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엄기호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토니 주트(1948~2010년) 자신이 68혁명 세대라는 점이다.<br />
토니 주트는 복지 국가의 건설을 주도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유산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오류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평하고 있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끝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엄기호는 주트의 주장이 결국 "'도로' 복지 국가"에 불과하다고 단정을 짓는다. 이어서 엄기호는 68혁명이 결국 보수주의의 도래에 일조했다는 주트의 평가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신자유주의를 초래한 주범은 사회민주주의라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펼치면서 사회주의와 어깨동무를 한다.<br />
엄기호는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한 68혁명의 구호가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이유는 "구좌파들이 이것을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한 철저한 무능과 무지의 결과이지 68혁명의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br />
반면 68 세대가 한 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 이미 정치적으로 구획된 그 정치를 해체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였으며 "그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고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엄기호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 국가가 만개한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욱 깊게 생각해 봐야 하며, 역사를 되돌아봐야 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들이 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는지, 그리고 그 삶의 요구에 대해 당시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무관심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br />
이 시점에서 나는 엄기호에게 반문하고 싶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정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인가? 또 "사회 밖으로"를 외칠 때 기본적으로 국가라는 공동체에 주어진 권력은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그리고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책 속에서 충분히 되돌아보고 있지 않은가? 1960년대 후반부터 젊은이들이 사회 복지와 공공 의료 정책의 무지막지한 획일성에 숨 막혀 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br />
주트는 68혁명의 의도가 아니라 그로 인해 초래된 두 가지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는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을 앞세우는 그들의 정서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 등장한 우파의 감정과 일치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좌파가 감정의 분출과 해방에 몰두한 나머지, 반대급부로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등을 주장하며 문화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결국 정치적 헤게모니를 그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엄기호는 토니 주트가 68혁명에 지나친 비난을 퍼부었다고 보고, 68혁명에 지워진 책임을 사회민주주의에 뒤집어씌우려 애쓰며 근거 없는 주장을 계속한다.<br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서문에서 둘 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두 책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하고 그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br />
"여론조사는 정치인과 정치 제도에 대한 냉소적인 혐오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독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꾀하면서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행동이 낳을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136쪽)<br />
하지만 이어지는 논의에서 두 책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토니 주트는 정치적 무관심이 초래할 치명적인 위험을 경고하는 반면, 엄기호는 반대로 젊은이들이 정치에 냉소적인 이유를 천작하고 정치가들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br />
엄기호는 20대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재미가 있으면 반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반응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소비하는 수용자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엄기호가 젊은이들의 정치적 언어라고 주장하는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의 실체이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정치적 능력의 주체로 설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고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시키면서, 엄기호는 위로와 격려를 해준다는 책의 의도와 달리 사실상 이들을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확정짓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br />
엄기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복지에 대한 주장만으로 아무런 현실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대체 복지에 대한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적 차별성이 있다는 것인가?<br />
우리는 한 번도 사회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설사 백 번 양보해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엄기호의 말처럼 '도로'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을지라도, 어쨌든 우리에게는 '도로'가 아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동안 벌어진 논쟁을 두고 엄기호는 우리 모두가 "복지주의자"가 되어 버렸다고 조롱한다.<br />
엄기호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는 아마도 각각이 독자성을 갖는 예술 작품처럼 자유롭고 완성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일 것이다.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말 그대로 "해방"된 삶 말이다. 그는 정치의 미학화를 꿈꾼다.<br />
엄기호가 말하는 정치에는 정당의 이름이 적혀 있는 현판이 없다. 당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상상 속에서는 개개인의 이름이 정당이고, 개개인의 삶이 이념이다. 마치 개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 작품처럼 그가 말하는 정치는 개념 속에서 포착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68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평가에 그토록 과민 반응을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거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분석은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옳았음을 드러낸다.<br />
우리는 정치를 정치적 범주 속에서 상상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범주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해나가야 할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한다. 당연히 우리만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우리 앞 세대 또한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해 왔다. 거기에는 성과도 있었고 오류도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의 바탕 위에서 상상한다. 성과를 이어받고, 오류를 삭제하며 더 나은 삶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일이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br />
엄기호가 말한 바처럼 아직도 정치는 기껏 "생존"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정치, 그리고 모든 이념은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상상하고 주장하며 많은 피를 흘려 왔고, 오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여기에 사회민주주의는 절대적인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많은 이들의 생존이 위태로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를, 그리고 복지 국가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br />
통제와 억압이 두려워 정치를 포기할 때, 우리는 어떠한 통제와 억압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존"이 보장돼야 엄기호가 그토록 강조해서 말하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생존"의 보장, 정치와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일차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로운 사회라는 미명하에,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가난한 자들의 식판을 발로 걷어차 엎어버리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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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311150422"><strong>'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strong></a> (프레시안, 엄기호 교육 공동체 '벗' 편집위원, 2011-03-11 오후 6:28:22)<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프레시안 books]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strong></span><br />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에 대한 서평의 서두에서 뜬금없이 <미래 소년 코난>과 건국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책이 다름 아니라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br />
이때의 나라란 단지 시장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조정하는 기구로서의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가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고 선언했을 때 사망 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시대 인식과 공간을 공유한 동시대인 동료들의 정치 공동체인 '나라'다.<br />
'나라'가 붕괴되고 그 여파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집어 삼켰는가에 대해 주트는 지금까지 그 어느 신자유주의 비판서보다 더 격양되고 울분에 찬 목소리로 가차 없이 폭로하고 비판한다. 사회는 더욱 불평등해졌다. 불평등은 인간 삶의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불평등해진 사회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불평등이라는 병리학적 현상을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탐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br />
그 결과 '강하다는 것'은 과거에는 고통을 인내하는 능력으로 이해가 되었지만 이제는 '남을 괴롭히는 능력'으로 전환되었다. 가난한 이가 괴롭힘을 당한다면,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사회에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신뢰, 절제, 정직, 공공선처럼 공동체를 존속시킬 수 있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부를 거머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체제로부터 얻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들 역시 이 '라이프스타일'에 빠져있다. 그 결과 사회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꿈을 꾸지도, 꿀 수도 없게 되었다.<br />
불평등을 조정하고 탈락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보살피면서 실패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것, 그것이 20세기의 진보를 규정짓는 사회 개혁의 핵심이었으며, 그 결과가 복지 국가다. 보편주의에 기초한 복지 국가는 소득과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사회 부조와 공공 서비스의 혜택을 누렸다. 책에 나온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많은 부분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 결과, 1960년대에 이르면 유럽의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가처분 소득 수준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br />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국가가 나라, 즉 정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공동의 과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공동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협동이 필요하다. 세금이 바로 이런 협동과 신뢰의 상징이다. 세금은 당대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있을 때에만, 그리고 그 세금을 국가가 올바르게 사용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신뢰가 있을 때에만, 마지막으로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인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해진다. 이렇게 신뢰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시민 공동체의 일부'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우리'의 근대적 최대치가 바로 '국가'이다. 국가를 통해서 그 공간 안에 있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동료라는 감각을 확보하고 서로 신뢰하게 된다.<br />
주트가 지적하듯이 이 정치 공동체인 국가는 1970년을 시작으로 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모든 신자유주의 비판서들이 다 거론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저자가 1970년에 들어와 복지국가가 해체되는 것에 큰 공헌을 세운 것으로 '세대'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br />
복지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한 복지의 자식들이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들고 공적 담론을 잠식했다.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신좌파의 흐름은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 즉 공동의 것에 대한 의식을 명백히 퇴조시켰다. 여기에는 오로지 개인적 주관주의, 즉 순전히 자기 기준에서만 측정한 이해관계와 욕망뿐이었다고 주트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에 빠진 복지의 자식들이 하이에크와 같은 보수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귀환을 부채질한 것이다.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가혹하다.<br />
<span style="color: #a52a2a">문제는 오늘날 그들(노인들을 의미함)이 받는 혜택의 비용을 지불하는 자들이 대공황과 전쟁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즉 복지 국가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담해야하는 비용에 분노했다. </span>(151쪽)<br />
그 결과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망쳐놓은 세계이다. 무엇보다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신자유주의에 따른 공공 부문의 민영화와 같은 정책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우리가 다른 시민들과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대인을 동료로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 그저 동시대인으로 해체되고 있다.<br />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시대인은 시간은 공유하지만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세계화는 이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이제 나의 '동료'는 지구 저편에서 나와 채팅하는 사람이지 우리 동네에 사는 김 씨 아저씨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김 씨 아저씨와 하는 것이지 지구 저편의 페르난도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화된 동시대인들 사이에는 '정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저자에 따르면 정치는 특정 공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br />
그 결과 우리는 정치 운동이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물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애틀에서부터 시작된 저 거대한 반지구화 운동이 있지 않은가? 2년에 한 번씩 전 세계의 사회운동이 모여서 세계사회포럼을 개최하지 않는가.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는 세계화에 대항하고 지구 온난화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지 않는가.<br />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도 주트는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여럿이 모여 감정을 표출하는 것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들을 하나로 아우르지 못하는 한 이것은 정치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삶에서 그저 소비자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한 마디로 응수한다. "이보다는 잘해야 한다."<br />
자, 여기까지다. 그는 '이보다는 잘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첫 단추는 공적 대화를 재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해서 만들어야 하는 그 공적 대화의 공간이자, 결과는 '도로' 복지 국가이다. 그는 책의 맨 마지막에서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였지만, 그 변혁을 통해 복귀해야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복지 국가이다.<br />
주트는 신자유주의가 유럽을 18세기로 돌려놓았다고 흥분하였지만, 그가 변혁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것도 짧게 보면 1945년에서 1970년 사이에'만' 존재하던 바로 그 '복지 국가'이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신중함을 요구하며 우리는 20세기의 업적들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에 맞선 최선의 중재 기구는 다시 '국가'이며, 국가만이 시민에게 응답할 수 있고, 시민만이 국가에 응답할 수 있다고 한다. 철도나 운동장과 같은 공공시설을 만드는 것, 즉 개인의 욕망을 전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한데 모을 수 있는 것으로 세금보다 더 나은 제도는 아직까지 없다.<br />
<span style="color: #a52a2a">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사회주의는 그 어떤 외형도, 그 어떤 아류도 실패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많은 국가에서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최초에 사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은 사람들이 가졌던 소박한 꿈을 훨씬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세기 중반에는 그저 이상에 불과해 보였던 것들이, 그리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보였던 것들이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일상적인 정치가 되었다. </span>(229쪽)<br />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주트의 단언에 조소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야말로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한 결과가 아닌가? 신자유주의와 대결하였다가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무릎을 꿇은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냐는 사회주의자들이 조소가 들려오는 듯하다.<br />
사회주의자들뿐만이 아니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이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br />
1960~70년대 청년들의 문화 운동과 신좌파 운동에 대한 주트의 이야기를 돌아보자. 사실 <신자유주의 : 간략한 역사>(한울 펴냄)를 쓴 데이비드 하비도 신자유주의가 출현할 수 있었던 문화적, 사회운동적 배경으로 68 혁명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니 주트와 의견을 같이 한다. 요컨대 앞에서 주트가 말한 '사적 자유에 대한 갈망'과 '공적 간섭에 대한 짜증'이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신자유주의와 친화력이 상당하였다는 점이다.<br />
68 혁명은 이미 모순에 처해있던 자본주의가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 것과 같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포디즘 체제의 축적 양식이 위기에 처했으며, 그 위기에 따라 노동을 더욱 심하게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통하여 새로운 축적 양식이 출현해야 하는 때에 자본주의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오히려 68 혁명이라는 이야기이다.<br />
대표적인 것으로 대학을 들 수 있다. 미셸 푸코도 1968년의 혁명은 19세기에 시작된 고등 교육 형태, 즉 소수의 젊은이를 사회적 엘리트로 변환시키는 신기한 제도로서의 대학을 효과적으로 종결시켰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회가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고 지식이란 가면 아래 자신을 전달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은 그대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등학교이다. 이에 반해 오히려 대학은 자신의 낡은 구조를 제거하고 신자본주의의 요구에 실질적으로 적응하였다고 볼 수 있다.<br />
프랑스 68 혁명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일상생활의 혁명>(주형일 옮김, 이후 펴냄)을 쓴 라울 바네겜 역시 다른 혁명과는 달리 수천 년간의 비인간적 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혁명인 68 혁명은 억압적 폭력의 회오리 속에서 완성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1968년에 경제는 자신의 '전성기와 전멸기의 매듭'을 지었다.<br />
자본주의는 생산보다 일반화된 소비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상품 체계로 전환되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스펙터클로 전환하였다. 사회는 권위주의에서 시장의 유혹으로, 저축에서 낭비로, 청교도주의에서 쾌락으로 땅과 인간을 볼모로 만드는 착취에서 환경의 영리적 재구성으로 바뀌었다.<br />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자본은 이제 사람과 사람의 창조력이 더 중요한 자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68 혁명 이후의 자본주의는 '개인보다 소중한 자본'에서 '가장 소중한 자본으로서의 인간'으로 서둘러 넘어갔다. 살아있는 자의 수익성은 더 이상 그의 소진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재구성에 기대를 걸게 된다. 그 결과는 다품종 소량 생산, 유연 생산 방식의 포스트포디즘이다.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이라는 68 혁명의 구호는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셈이다.<br />
그러나 이것이 증명하는 것은 68 혁명의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괴물과 같은 적응력,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본이 젊은 세대의 문화 운동과 신좌파들의 주장을 포섭하는 동안, 구좌파들이 이것을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한 철저한 무능과 무지의 결과이지 68 혁명 자체의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br />
그들 구좌파는 자본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의 자본주의적 의미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포섭하는 동안 젊은이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못했다. 그래서 그것이 사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징징거림 혹은 조직적 당을 파괴하려는 짓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 이미 정치적으로 구획된 그 정치를 해체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였다.<br />
이것을 위에서 이야기한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을 통해서 살펴보자. 68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써진 이 책에서 그는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권태와 그 원인을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주의의 확산과 사회의 스펙터클화에 따라 세상이 안온한 무덤이 되어가는 것 같은 그 순간에 사실 '삶에 대한 열정'이 소비에 대한 자유로 완전히 대체되고, 박탈된 자유에 대한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삶의 열정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 증가하였다.<br />
그래서 나온 68 혁명의 언어는 "착취자에게 죽음을!"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삶을!"이다. 이것이야말로 68 혁명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무엇을 지향하였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br />
바네겜은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일상생활이 주된 걱정거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생존의 풍요로움이 곧 삶의 빈곤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집단적 생존의 문명은 개인적 삶의 죽은 시간들을 증가시키기만 하였다. 따라서 아무리 스펙터클과 소비 상품들이 넘쳐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은 '신성한 것이든 통속화된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어떤 환상도 일상적 행위들의 빈곤함을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br />
사람들은 소비를 통하여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며 모든 욕망을 해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비 사회는 소비와 스펙터클에 갇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감금하는 시스템이라고 고발한다. 따라서 이들의 무기는 화염병만이 아니라 언어였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창조성이며, 창조성의 존재 양식인 자발성이었다. 따라서 68 혁명이 말과 구호, 아니 시(詩)의 축제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br />
68 혁명 당시 프랑스가 아니라 알제리에 있었던 푸코조차도 68 혁명이 없었다면 감옥과 섹슈얼리티 등의 것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5월의 운동은 교육 체제에 종속되었던 반복적인 상황과 보수주의의 가장 구속적인 형태에 종속되었던 개인들이 혁명적 전투를 전개"한 것이며 이로 인해 촉발된 "사유의 위기'는 뿌리가 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br />
사회민주주의가 안정화되어 있던 스웨덴이나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던 폴란드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한 항거가 증폭되고 있던 튀니지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다른 제도들 혹은 억압적 집단들이 행했던 일상생활에 대한 계속적 억압, 그리고 이런 불편함을 생산한 권력에 대한 항거가 68 혁명이다.<br />
푸코가 간파했듯이, 68 혁명의 주역들은 국가 권력뿐만이 아니라 대학 당국에서 텔레비전 그리고 길거리 등 사회 속에서 다양한 경로와 제도들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통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정한 제도들이 이성이나 정상성의 이름으로 행위, 존재, 실천, 발언의 방식을 확립하고 개인들을 비정상, 광인으로 낙인찍음으로 개인들의 집단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아갔던 방식을 추적하였다. 68 혁명은 사회의 특정한 계층과 청년 문화에 영향을 발휘하던 권력 형태의 전체 연결망에 대한 반란이었다.<br />
이처럼 푸코는 68 혁명의 독특성은 전통적으로 정치의 공식 영역이 아니던 부분들 전반에 걸쳐 정치를 향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본다.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주의 언어가 혼재하여 존재하는 모든 문제들을 이들 언어로 적어보려고 하였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문제와 직면하는 것에 무기력하다는 것만 입증하였다.<br />
이것으로 정치적 교의의 틀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는 종언을 고하고 정치 자체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이 던져졌다. 68 혁명이 언어의 혁명일 수 있었던 것은 이 혁명이 그동안 갇혀있던, 혹은 제기되지 않던 질문을 제기하는 행위를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더 이상 진리와 권위, 그리고 당의 이름으로 의문에 붙여지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br />
이것은 전혀 사적인 징징거림이 아니다. 또 주트가 말하는 것처럼 공동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욕망에만 충실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정치의 재구성이다. 사회민주주의/복지 국가가 만개해 있던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 지금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욱 깊게 생각해봐야한다.<br />
주트는 젊은이들이 역사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1968~70년대를 다시 돌아봐야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현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왜 청년에게 감옥으로 느껴졌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이 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요구에 당시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로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무관심했는지를 돌아보아야한다.<br />
내가 이 서평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낡은 흘러간 옛 노래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이건, 사회민주주의건 그것을 재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보라. 지금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있는 시점에서 박근혜부터 진보신당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복지주의자'가 되었다.<br />
동구 몰락 이후 모두가 민주주의자가 되었을 때 자신만 민주주의자인 척하다 망해버린 좌파의 전철을 또 밟을 것인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복지에 대한 주장만으로는 아무런 현실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다. 복지에 대한 진짜/가짜 논쟁은 장충동 족발 집에 붙어 있는 '진짜 원조', '원조 중의 원조'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어쨌든 모두가 복지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br />
따라서 사회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인류가 실험해왔던 체제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나은 것이었으니 그리로 돌아가자는 주장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에 대한 요구는 그 때보다 더 많아지고 더 커졌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그 해방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능해서 신자유주의에 패배한 것이다.<br />
지금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고민해야하는 것은 저 주장들이 신자유주의를 불렀다는 타박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은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만큼이나 그때의 사회민주주의도 넘어서는, 그런 정치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해방에 대한 욕구들에 더 선도적으로 응답할 때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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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02/h2011021812553984210.htm"><strong>"복지의 숭고한 기원 새겨라" 죽은 역사학자의 마지막 당부</strong></a> (한국, 남경욱기자, 2011/02/18 12:55:39)<br />
"우리는 경제 '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번영과 특권은 파이의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확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br />
영국 출신 역사학자 토니 주트(1948~2010)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이렇게 단언하면서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가장 핵심적 과제는 불평등의 완화임을 역설한다. 이 책은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인 주트가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마비되어가는 고통 속에서 쓴 마지막 저서다.<br />
주트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역사가답게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20세기 역사를 되돌아볼 것을 권한다. 특히 복지국가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불안의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함몰돼 있는 서구 사회에 각성을 촉구한다.<br />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등장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후 그 참담한 시절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탄생했다. 시장은 규제되었고, 복지는 자선이 아니라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됐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2차대전 이후 수십 년간 전례 없는 번영과 평등의 확산을 누렸다.<br />
복지국가가 퇴색되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 이후에 태어나 복지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1960년대 세대들이 정의나 기회균등보다는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싹텄다는 지적이 예리하다. 신좌파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 구성원들이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의 퇴조를 가져왔고 이는 우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트는 이런 태도들이 보수주의의 귀환을 불러왔다고 본다.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고 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말이 이 같은 사조를 대변한다.<br />
주트는 돈벌이에 대한 강박, 민영화와 민간 부문에 대한 숭배, 점증하는 빈부 격차 등 서구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들로 보이는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특성은 인간 조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80년대부터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또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퍼트린 것은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영미권 경제학자들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은 나치의 지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이라고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면서 서구사회가 세계 대전의 잿더미 위에서 건설한 복지국가라는 위대한 유산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br />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살아 왔다. 우리는 법원의 판결이나 의회 법안이 좋은 것인지, 공정한 것인지, 정당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묻는 법이 없다.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br />
주트의 지적은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한국 사회에도 경종을 울린다. 주트는 사회의 공동선을 위한 공동 행동의 가치와 가능성을 믿는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 서서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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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64147.html"><strong>“강력한 복지국가, 우리가 갈 길이다”</strong></a> (한겨레, 허미경 기자, 2011-02-18 오후 07:46:07)<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역사학자 토니 주트 마지막 저서<br />
불평등 키운 미국 사회모델 비판<br />
‘큰 정부’ 유럽국가들서 대안 찾아<br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토니 주트 지음·김일년 옮김/플래닛·1만3000원</strong></span><br />
<img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1/0219/1298025929_00383866701_20110219.JPG" style="float: left"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죽음에 임박한 한 역사학자가 이 시대에 던지는 통렬한 유언장이다. 토니 주트(1948~2010)는 2006년 2차대전 이후 유럽 현대사를 분석한 역사서 <포스트워 1945~2005>를 통해 ‘미국적 생활양식’에 대비되는 ‘유럽식 사회모델’을 유럽의 성공 요인으로 ‘통찰’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 태생 유대인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해온 이 역사학자는 미국의 이라크전쟁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전쟁을 강하게 비판하고, 불의를 잘못이라 말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던 지식인으로 평가된다.<br />
토니 주트는 2008년 루게릭 병을 진단받았다. 그의 몸은 점점 마비되기 시작했고 의료장비의 도움을 받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까지 악화됐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집필된, 정확히는 지인들이 그의 구술을 받아 입력하여 완성된 책이다.<br />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국가, 어떤 정부를 선택하고 만들어야 하는지를 화두 삼은 이 책에서 그는 유럽과 미국의 사례들을 역사 속 당대 현실에서 천착하면서, 1989년 세계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한 때부터 세계 경제위기(2008)가 몰아친 2000년대까지 최근 30년을 자유 시장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의 시대로 파악한다. 그가 보기에, 1970년대에 발아하여 ‘공공부문에 대한 경멸과 규제받지 않는 시장, 민영화·민간부문에 대한 숭배’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쓴 이 30년은 ‘잃어버린 30년’이다.<br />
왜냐하면 2차대전 후 유럽 나라들이, 대공황기 미국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사적 영역의 실패를 공적 영역을 통해 해결한 성과와 그 모든 노력들을 이 30년 동안 무위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을 특권화하고 공적 영역을 무시한 극단적인 탈규제 정책의 진원지는 미국과 영국이었다. 문제는 그 어떤 나라도 지난 30년간 ‘경제 관리’와 ‘복지’ 파괴에 앞장서온 미·영 두 나라에 맞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8년 지엠 대표가 벌어들인 소득은 지엠 노동자의 66배였지만 오늘날 월마트 대표는 월마트 노동자의 900배에 달하는 돈을 벌 만큼 미국의 부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영국 역시 오늘날 소득, 건강, 재산, 교육, 개인 삶 향상 기회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1920년대 이후 사상 최대로 불평등이 커졌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br />
이 시기 탈규제가 심한 나라일수록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으며 사회문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문제는 국가가 얼마나 부유한지가 아니라 국가 내부의 불평등이 얼마나 큰가였다. 선성장론(후분배론), 곧 번영과 특권은 파이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레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된다는 견해에 대해 지은이는,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함을 보여준다.<br />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역사학자로서 멀리는 19세기, 가까이는 20세기 유럽, 미국의 정책들을 들여다보며 역사적으로 통찰한다는 데 있다. <u>케인스와 루스벨트가 주도한 미국의 뉴딜정책, 전후 유럽 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뤄낸 복지국가, 전후 영국의 사회보장국가 등은 빈부 격차 해소와 사회적 불평등 억제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945년 이후 80년대까지 약 30년간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빈부 격차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중산층은 무상교육, 무료(저가) 의료 혜택, 공공연금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빈민층과 함께 똑같은 혜택을 누리는 대신 자신들의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한 결과 1960년대에 가처분소득이 1914년 이래 사상 최대에 이르렀다</u>. 지은이는 “세상이 그렇게 잘 돌아간” 까닭을 시장의 마술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찾는다. 곧 정부가 시장을 규제했기 때문이다.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사람들 마음속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자유방임국가의 잔재가 쓸려나갔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징후는 ‘계획’이었다. 좌파 진영은 소련이 그토록 잘나가는 이유가 ‘계획’에 있었다고 생각했고 우파 진영도 히틀러·무솔리니 파시즘의 인기는 상명하달 계획경제에 있었다고 믿었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br />
이 책은 ‘사회주의’란 말이 금기처럼 돼 있고 공공 목적의 재정 지출을 옹호하는 논객들마저도 ‘자유주의자’(리버럴)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지내온 역사학자로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쓴 책이지만, 그 목소리는 미국식 사회모델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의 독자들에게도 절절한 울림과 함께 직접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br />
지은이는 2008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은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고 단언한다. 그의 열쇳말은 큰 정부,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다. 요약하자면 사민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복지국가다. 오늘 미국에서 그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지만 20세기 미국의 입법·사회정책 가운데 최선에 속하는 것 대부분은 유럽인들이 사민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하며, 현재로선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그는 말한다.<br />
이 역사학자가 격정적인 어조로 토해내는 이야기는, 우리는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와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가? 우리가 원하는 국가는 어떤 종류의 국가인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토니 주트는 2010년 3월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뒤 그해 8월 뉴욕에서 숨졌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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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182049165&code=900308"><strong>[책과 삶]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strong></a> (경향, 백승찬 기자, 2011-02-18 20:49:16)<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ㆍ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공공의 목적을 생각한다면…시장 규제 ‘강력한 복지국가’가 묘약</strong></span><br />
“복지예산은 역대 최고”라고 자화자찬하는 집권자들이나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이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은 어차피 이 책에 관심이 없을 것 같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좌파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저자 토니 주트는 좌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국가를 두려워하지 마라”,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공공의 목적을 생각하라”.<br />
현대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폭압적인 국가에 시달려온 한국의 좌파들은 국가 권력을 강조하는 시각에 두드러기가 날지도 모른다. 일단 주트는 이 책이 “대서양 양안에 사는 젊은이들을 위해 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해도 미국과 서유럽의 생활양식이 한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책의 목표는 “정부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또한 국가가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기에 우리가 원하는 국가가 어떤 종류의 국가인지를 생각”하자는 것이다.<br />
2008년의 전 지구적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은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지난 30년간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를 추종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일관되게 공적 영역을 축소하고 사적 영역을 확대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1968년 GM의 CEO가 벌어들인 소득은 기본급과 수당을 합쳐 일반 노동자의 66배였다. 오늘날 월마트 CEO는 일반 노동자 임금의 900배를 번다. 소득 불평등의 정도는 유아사망률, 범죄발생 빈도, 기대수명, 정신질환 발병률과도 관련 있다. 불평등의 심화는 인간을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넣는다. 일찍이 레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 이렇게 썼다.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은 없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조건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는 말이다.”<br />
원래 세계는 이 모양이 아니었다. 1914년 이전 세계는 이미 한 차례의 세계화를 경험했다. 결과는 두번에 걸친 대재앙, 즉 세계대전이었다. 복지국가는 다시는 그러한 재앙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의 산물이었다. 시장을 규제하고 공동체의 관계를 복원했다. 그리고 세상은 평화로워졌다.<br />
평화는 권태를 불렀다. 1960년대 신좌파를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복지국가는 지루한 일상이었다. 60년대 세대를 뭉치게 한 것은 공공의 목표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였다. 다시 발흥한 우파도 비슷한 심정이었고, 그들의 반격이 시작됐다.<br />
주트는 믿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도덕적 존재이며, 따라서 자신의 도덕적 본능을 표현할 만한 언어를 필요”로 한다고. 그러므로 부익부빈익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좌파는 인간의 도덕 본능을 충족시킬 언어를 개발해야 하고, 이는 국가의 역할을 새로 생각하고 정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br />
주트는 방대한 역사서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다. 이 책이 한국에 출간된 2008년, 그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에 갇혔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지난해 8월 타계한 주트의 마지막 책이 됐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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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2/14/0200000000AKR20110214150900005.HTML"><strong>"신자유주의 대안은 복지국가" </strong></a>(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2011/02/14 16:12)<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英역사학자 주트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출간</strong></span><br />
신간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플래닛 펴냄)는 영국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복지국가론을 담은 책이다. 지난해 8월 루게릭병 합병증으로 별세한 그는 루게릭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 쓴 이 책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공동선'으로 생각되던 복지 국가가 1980년대 이후 어떻게 쇠퇴하게 됐는지 되짚어보면서 지금이야말로 강력한 복지 국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라고 역설한다.<br />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현대사를 통찰한 저서 '포스트워(Postwar)'로 유명한 그는 가차없는 현실 비판으로 책을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아 왔다. 정말 이러한 욕망의 추구를 배제하고 나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의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br />
저자는 또 현대인들이 "경제와 정치의 불안정을 넘어 인신(人身)의 안전마저 담보해 주지 못하는 불안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돈벌이에 대한 강박, 민영화에 대한 숭배, 점증하는 빈부격차 등 오늘날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분석한다.<br />
1980년대 미국과 영국이 사적인 개인의 이익 추구를 미덕으로 내세우면서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지배적 경제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시장 중심의 주류 경제학의 본산인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경제학들이었다고 말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칼 포퍼, 조지프 슘페터, 피터 드러커 등이 대표적이다. 나치의 지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은 국가의 지나친 개입이 결국 파시즘을 초래했다고 결론 내리고 시장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로 세계 경제를 이끌었다.<br />
저자는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가 남긴 유산은 처참하기 그지없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경제성장이 충분히 이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번영과 특권은 파이의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확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br />
저자는 그러면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 국가 체제를 제시한다.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전례 없는 안정과 번영, 평등의 확산을 가져왔던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 국가 체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br />
저자는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미래상을 제시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결론내린다. "2008년의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敵)은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자본주의는 조만간 자기 자신이 부린 과욕의 희생양이 되어 다시 한번 국가를 바라다보며 구조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파국에서 벗어나 정상을 되찾은 후에도 기존 방식을 되풀이한다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더 큰 파국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br />
원제는 'ILL FARES THE LAND'로, 영어판은 작년 2월 출간됐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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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6400;">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에 관한 경향신문, 한겨레의 서평기사를 보고 이 책을 사봐야지 싶었다. 사실 사주팔자 보는 걸 운명론으로 치부하는 건 조금 거시기했다. 이를 돌파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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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6400;">그런데 동아일보에 '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가 연재되고 있더라.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80000000330/2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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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6400;">벌써 60회가 넘었다. 이것도 볼만하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조금은 불편한 부분이 있다. 물론 고미숙은 동아에 연재하면서도 이로 인해 펜을 굽히는 것 없이 자기 할 말은 다했을 터이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연재하는 게 과연 진보에 도움이 될까.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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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6400;">여기서 그만. 언제부터인가 깊게 생각하는 걸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나이 탓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제목에서도 지적되었지만, '나의~'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책 제목에 딴지를 거는 이들이 있던데, 그 또한 염두에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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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6400;">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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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49689.html"><strong>신비와 미신 사이에 갇힌 ‘사주명리학’을 위한 항변</strong></a> (한겨레, 허미경 기자, 2012.08.31 20:21)</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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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0080;"><strong>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고미숙 지음/북드라망·1만3000원</strong></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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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0080;"><strong>‘수유+너머’ 태동시킨 고미숙씨 </strong></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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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0080;"><strong>사주명리학 철학적 입문서 펴내 </strong></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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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0080;"><strong>‘운명에 개입하는 길’ 안내 나서</strong></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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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2/0901/1346412057_00442371201_20120901.JPG" style="float: left; " />지은이는 명리학을 도인이나 무속인의 전유물이라고 간주하는 세간의 시각을 맹렬히 비판한다. “(신비화와 미신화) 둘 다 명리학을 지식의 외부로 축출한다.” 이때 지식의 범주는 철저히 서구적 인식론과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명리학에 대한 폄하는 서구의 시선으로 다른 지역 문화를 타자화하는 또다른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지은이는 비판한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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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의 모든 재벌들이 전용 역술가를 거느리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한국의 지적 풍토는 명리학을 신비와 미신 사이에 묶어 공적인 담론의 장에서 몰아냄으로써 사적으로 상류계급이 독점하도록 했다고 말한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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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보 단체들이 부딪치는 가장 큰 장벽은 권력의 탄압이 아니라 공동체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틈’이라면서, 활동과 일상, 명분과 현장 사이의 이 간극을 통찰하지 못하면 “진보든 혁명이든 별무소용”이라고도 주장한다. 그는 이 간극에는 인생과 자연의 단절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간극은 물질적 분배와 제도, 시스템만을 강조하는 사회과학 담론에는 자연 혹은 우주가 결락되어 있기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은이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한 방향전환의 한 방편이 사주명리학이라고 본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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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주팔자의 앎이란 결코 운명론이 아니며,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나’의 길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삶을 한 방향으로(만) 이끄는 거울을 깨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 누릴 수 있음을 말해준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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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312032555&code=900308"><strong>[책과 삶]“치유 넘칠수록 상처는 깊어져…남의 위로가 아니라 자신이 치유의 주체 되는 게 필요”</strong></a> (경향, 주영재 기자, 012-08-31 20:32:55)</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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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0080;"><strong>ㆍ‘나의 운명…’ 낸 고전평론가 고미숙</strong></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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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넘칠수록 상처 또한 더 깊고 다양해지죠. 위로를 받으면 절대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동정과 연민으론 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마저 소외를 느끼며 자기 존중감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죠. 내가 내 힘으로 치유했을 때만 떳떳할 수 있습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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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제도를 만들면 인간의 삶과 존재성이 고양될 것이라는 도식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10여년 전, 지식인 공동체를 만들면서 대학과 다른 대안적 시스템을 만들면 다 바뀔 것이라 기대했지만 실제 그렇지 않았죠. 그때부터 서양과학식 패러다임을 버렸습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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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욕망을 재구성하고 자기 삶을 긍정하는 것은 혁명을 향한 운동 안에 자신의 존재성을 결합할 때야 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혁명이 누구를 구할 수 있는가. 공적으로 표방하는 명분과 내밀한 욕망 사이의 이중 플레이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아무리 혁명을 외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되물었다. 이런 고민을 안고 건져 올린 화두가 ‘몸’이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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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역학을 신비로운 차원으로 환원하거나 지식 이하의 저급한 술수로 매도하는 것은 모두 명리학을 지식의 외부로 축출하는 점에서 동일하죠. 서구의 시선으로 다른 지역의 문화를 타자화, 하위주체화하는 것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에 다름 아닙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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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치인과 자본가를 비판하는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도 현실에서 물질적 욕망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핵가족과 가족주의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자본주의의 상품화가 공동체적 관계를 핵가족으로 끊어내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안에서는 소외와 탈락이 주는 상처를 절대 치유할 수 없다고 보았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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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0106120555" title="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0106120555"><strong>인간과 사물의 대화를 엿듣는 디자인 예언자</strong></a> (프레시안, 최수태 문화평론가, 2012-01-06 오후 5:59:25)<br />
<strong><font color="#0100fe">[최수태가 좋아하는 작가] 박해천</font></strong><br />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펴냄)는 등장과 함께 눈 밝은 독자들의 환호성을 불러왔고, 여러 매체로부터 호의적 서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지면에서 굳이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전에 <인터페이스 연대기>(디자인플럭스 펴냄)를 쓴 작가 박해천을 통해, 위 문단에서 꺼낸 문제의식을 다루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br />
말하자면 '거대 담론 없는 시대의 거대 담론'은 어떻게 시도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지금까지 한국 지성계가 시도하지 않은 경로의 도전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거창한 논의를 위해 잠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문장이 담긴 그 대목을 다시 불러와보자.<br />
<font color="#590100">결국 비판의 화살들은 내 몸에 수북이 박혀 생매장의 말 무덤을 만들지만, 나를 향한 욕망의 불도저는 막지 못한다. <strong>나는 담론의 가상 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백전백승이다</strong>.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물론 내 비판자들은 나름 전문가이긴 하다. 지면만 허락된다면, 그들은 거시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아파트 분양가나 매매가의 상승 추이에 따라 유동 자산의 흐름을 분석하고 사회 경제적 함의를 밝혀낼 것이며, 문화사회학자의 관점에서 '강부자'로 표상된 특정 계층의 속물적 행태를 분석하고 가속화된 공간의 계급적 분화에 관해 울분을 토해낼 것이다.</font> (<콘크리트 유토피아>, 56쪽, 강조는 인용자)<br />
하지만 해당 장의 화자인 '아파트'는 곧이어 이렇게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런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뿐이다. 고작." 여기서 일반적인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는 논의의 흐름은, 앞서 '아파트'가 직접 말한 "욕망의 불도저"에 기대어, '사람들은 아파트를 욕하지만 다들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하니까', '이론은 말뿐이지만 먹고 사는 것은 중요하니까' 정도로 향할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반론을 절묘하게 회피하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의 담론계에서 '사회적 논의'에 거의 도입되지 않은 무언가를 꺼내든 것, 그것이 바로 박해천이라는 작가에게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br />
미셸 푸코의 이름이 한국의 지성계에서 떠돌기 시작한지 20여 년이 지났고, 그의 논의를 비판하거나 이어받은 여러 학자들도 덩달아 수입되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 역시 그런 이름 중 하나다. 그리고 박해천은 바로 그 <u class="underline">아감벤의 '장치'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대량 생산된 아파트가 당시에 떠오르던 신중산층을 흡수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습속"을 불어넣는 기제가 되었다고 주장</u>한다.<br />
<font color="#590100">습속의 확산, 바로 이것이 앞서 언급한 내 비판자들이 헛물만 켠 채 백전백패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치명적 함정이다. <strong>그들은 내가 지닌 공간의 논리가 거주자들의 신체와 정신과 맺고 있는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strong> 결과적으로 그들이 내놓는 해결안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무능을 증명할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아파트 투기 열풍이 부동산 거품 붕괴를 재촉해 결국엔 경제적 대재난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정부의 주택 정책이 소유 중심에서 거주 중심으로 전환해야 하며 부동산 관련 세제 정비, 임대 주택 공급, 분양가 상한제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도다.</font> (<콘크리트 유토피아>, 67쪽)<br />
아파트라는 공간, 즉 '장치'가 그 속에 사는 이들의 신체 및 정신을 뒤바꿔놓는 방식.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한국 사회의 욕망의 정치학. 이런 종류의 논의를 담아낼 수 있는 담론적 양식은 아직까지 한국의 지성계에서 개발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박해천은 '픽션'이라는 표제 하에 본인이 아닌 아파트의 목소리를 끌어와야 했던 게 아닐까? 박해천은 인간 대 인간, 정당 대 정당, 권력 대 권력의 정치학이 아닌,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양상에 대해 사회적인 차원에서 서술하기 시작한 최초의 한국어 화자다(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렇다).<br />
인간과 사물의 관계, 그것은 다른 말로 (몇 단계의 논의를 생략해서) '인터페이스'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인터페이스 연대기>의 서문에서 그는 "이 개념(인터페이스)은 컴퓨터 스크린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행동반경을 넓혀가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공 환경의 접촉면을 지시하는"(8쪽)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피부 바깥에 있는 것, 심지어 잘 '관리'된 피부마저도 인터페이스의 영역으로 수렴될 수 있다.<br />
요컨대 인터페이스는 '인간'이 '인간을 뺀 모든 것'과 만나는 방식이 되며, 그리하여 한 디자인 연구자는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부터 나선형으로 발걸음을 넓혀나간다. 그런데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이미 거대 담론이 전부 죽어버리고, 그 거대 담론의 빈자리를 메우겠다고 도입된 온갖 현대 철학들이 제 쓸모를 잃고 주례사 비평에 소진되어버리고 있는, 혹은 그 잘난 '번역 논쟁'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는, 속된 말로 '고자'가 되어버린 한국의 담론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지식인 한 명을 얻게 된 것이다.<br />
<font color="#666666"><img alt="" class="resize3" height="304"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12/01/06/50120106120555(0).JPG" style="MARGIN: 0px 1em 0px 0px; FLOAT: left" width="230" />▲ <인터페이스 연대기 : 인간, 디자인, 테크놀로지>(박해천 지음, 디자인플럭스 펴냄). ⓒ디자인플럭스</font> <br />
<인터페이스 연대기>로 되돌아가보자. 이 책은 디자인과 테크놀로지의 공진화(共進化)를 다루고 있지만, 내용을 검토해보면 그 이면에는 '전쟁'과 '자본주의'의 공진화가 깔려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전쟁 상황실의 디자인적 측면에 주목한 1장 '전쟁과 디자인 : 정보의 병참학'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사회 전반의 군사화가 강화된 결과, 정체 상태에 놓여 있던 디자인 담론은 군사 전략적 상상력을 경유해서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52쪽)다는 시각은 <인터페이스 연대기>에 속한 텍스트들의 기저음을 형성하다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의 현실'에 매끄럽게 안착한다. 그 모든 과정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직접 두 책을 읽어보며 확인해보기 바란다.<br />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후반, 그리고 21세기 초까지, 이 모든 '현재'를 지배하는 구조는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의 담론계는 그 세계사적 사건을 '민족 동란'으로 축소하거나, '자본주의의 연속적 진행 과정'으로 지나치게 확장하는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전자와 후자 모두 수입된 이론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론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br />
반면 박해천은 디자인의 역사에 등장한 핵심적인 '사물'들을 먼저 검토한다. 그것이 앨런 케이가 디자인한 최초의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건, 대한민국을 욕망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양산형 콘크리트 유토피아건, 그 사물들은 이론보다 앞서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루노 라투어의 용어를 빌자면) '행위자(actor)'로서 존재하고 있다.<br />
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과도 네트워크되어 있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위계를 먼저 설정하고 그것들의 구성과 변화를 추적해야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아니라 사물들을 먼저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질서, 즉 미국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전후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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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035902"><strong>2011. 12. 24</strong><br />
박해전의『콘크리트 유토피아』를 2011 올해의 책으로 뽑은 안은별 기자의 서평을 보고,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찾아보니 이를 서평으로 자세히 다룬 기사가 거의 없다. 이전에 김영글 작가가 쓴 프레시안의 서평을 읽어본 기억이 있는데, 그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안은별 기자의 서평을 보고 다시 보니 김영글 작가의 글이 색다르게 다가온다.<br />
그러고 보면 나 또한 아파트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빌라형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기존의 아파트를 다룬 책들은 이러한 면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한국의 아파트를 다룬 책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외국과는 다른 한국의 아파트의 상황을 단지 예외적인 것으로 다루기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천작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박해전 샘의 책은 의미가 있겠다.<br />
다만 서평만으로는 분명한 대안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아파트에 적응하면서 점진적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는 걸까. 아니 아파트 자체를 한국적인 양식, 한국인의 경로의존적인 기호라고 파악하고 이를 바꾸는데 들이는 품을 다른 것에 쏟는 게 나은 걸까. 아무튼 보편성을 전제로 아파트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보다는 이를 제대로 분석하려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할 듯 싶다.</fo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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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1223144656" title="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1223144656"><strong>아파트가 들려주는 시트콤 혹은 잔혹극?</strong></a> (프레시안, 안은별 기자, 2011-12-23 오후 6:46:21)<br />
<strong><font color="#0100fe">[2011 올해의 책]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font></strong><br />
<img alt="" class="resize3" height="353"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11/12/23/50111223144656.JPG" style="MARGIN: 0px 1em 0px 0px; FLOAT: left" width="230"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토건 경제나 자연 경관에 기댄 흔한 아파트 비판서가 아니며, 그 점에서 일차적으로 독자를 흡인한다. 아파트는 담론의 영역에선 늘 투기의 온상이라는 빤한 악역을 맡아 왔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저자는 아파트의 입을 빌려 "나는 담론의 가상 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물질의 현실 세계에선 백전백승"이라고 자못 거만한 투로 본질을 발설한다.<br />
저자가 집중한 것은 아파트 스스로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주조하는 요체였다는 사실이다.<br />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란 주거 모델이 어떤 사람들을 흡수했고 그들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들이 살아가면서 새로운 습속을 어떻게 확산시켜 갔는지를 조망한다. 나아가 그 확산이 거주자에게 어떤 윤리를 갖게 했는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하게 했는지, 어떤 취향을 익히게 했는지-종합하자면 '어떤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는지를 추적한다. 이 과정엔 어항, 화초라는 자연을 닮은 인테리어 장식품의 유행부터 방문 판매 형식으로 각 거실에 침투했던 '미제' 가전제품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피아노, 태권도 학원과 가든 형 갈빗집에서의 가족 외식 등 우리가 아파트 안팎에서 겪었던 모든 행위와 기억들이 총동원된다.<br />
시대가 정치적 '사태'나 '사건'을 분출시키고 몇 번의 버블과 버블 소멸을 거듭하는 사이, 기술의 결과물이 상품으로 쏟아졌고, 아파트 역시 진화와 장소적 확장을 거듭해 갔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아파트의 진화와 함께 커간 이들에 대한 세대론적 고찰이다.<br />
가족 성장담을 4·19나 5·18, 6월 항쟁 같은 정치적인 사건을 중심에 둔 세대론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것, 그래서 조심스럽게 내 부모가 가졌던 아파트 사(史)와 그들의 탈정치성의 이유를 돌아보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이 책의 힘이다.<br />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1부는 각기 다른 화자가 등장하는 '픽션' 4개로, 2부는 언론 기사와 공식 기록 등을 편집한 '팩트'로 이루어져 있다. 픽션의 주인공은 군인과 건축가의 그것이 뒤섞인 '변종의 시선'과 '아파트' 자신, '강남 중산층인 1940년대 생 남자', 그리고 '꽃무늬'다.<br />
픽션 형식의 1차 효과는 일단 재미로 나타난다. 인용 문장이 거의 문학 작품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물론 4개의 글은 빽빽한 증거를 함께 끌고 나가야 하기에, 만일 단편 소설 같은 강약 조절 능력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숨 고르기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소설 쓰기'에 실패했다기보다 오히려 다른 수까지 포함해 목적을 초과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화자의 위악과 과장이 그들이 하는 그럴듯한 이야기에 독자들이 완전히는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br />
2부 '팩트'는 그 장황한 변호 너머의 무엇을 유추해내는 데 길잡이 구실을 해준다. 한강을 중심으로 시작된 중요한 아파트 확장의 역사를 종으로, 인테리어와 자녀 교육, 쇼핑과 여가라는 생활양식을 횡으로 엮었다. '픽션' 파트의 인용문이 주로 문학 작품인 것과 달리 '팩트' 파트는 대부분이 월간지의 르포나 사진 자료, 일간지 생활면 기사가 차지하고 있다.<br />
저자는 이 '픽션'과 '팩트' 사이의 빈 공간을 "책이 마련한 독자의 자리"라며 독자 개개인이 "길 찾기의 해법을 구하는 과정에서 아파트에 관한 자신의 '진짜' 경험담으로 채울" 자리라 강조했다. 그 상호 보완적인 독서, 자기 내러티브를 개입시키는 과정을 통해 저자가 기대하는 것은 "아파트가 구축해놓은 매혹의 자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과 일상 사물을 상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br />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올해의 책으로 꼽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아파트와 한국 시각 문화라는 주제와 아파트 속 삶이 잡혀질 듯한 생생한 묘사, 이를 가능하게 하는 훌륭한 자료들, 뛰어난 문장 등등. 그러나 특히 감동했던 건 이 책이 결론에 이를 때까지 완벽한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어떤 가설을, 이렇게 웅장하면서도 치밀하게, 조심스러우면서도 흥미롭게 다루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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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9725.html" title="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9725.html"><strong>미스터 리도 궁금한 한국 아파트의 미스터리</strong></a> (한겨레21 2011.06.06 제863호, 고나무 기자)<br />
<strong><font color="#0100fe">[표지이야기] 세계와 사뭇 다른 한국 아파트의 3대 미스터리… 부유층이 선호하고 가격 불패 신화 자랑하며 농촌에도 지어지는 이유는?</font></strong><br />
한국의 부유층이 단독주택보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분석이 제기됐다. 서정렬 영산대 교수(부동산·금융학)는 ‘순환구조론’을 근거로 제시했다. 서 교수는 전자우편을 통해 “아파트가 전체 주택 가격 상승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주택 가격 상승을 이끌 능력과 의도가 있는 계층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순환 구조가 형성돼 있다”고 분석했다.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익을 보는 계층이 자연스레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취지다. 부유층이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 대신 아파트를 선호할 만큼 경제적 이익이 크다는 취지다.<br />
김주경 오우재 건축사사무실 대표도 ‘경제적 이익’을 꼽았다. 특히 아파트가 자산으로서 지니는 환금성에 그는 주목했다. 김 대표는 “환금성이 가장 큰 요인이다. 모든 주택은 감가상각을 당하지만 아파트는 한 번도 감가상각이 문제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건물이나 물건 등 형태를 가진 모든 자산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물리적·경제적 가치가 조금씩 감소된다. 이를 계산하는 과정이 감가상각이다. 아파트도 거주자가 살다 보면 낡고 헐어 감가상각 요인이 발생한다. 그러나 한국의 아파트는 비정상적으로 높게 형성된 아파트 가격 탓에 자산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으며 환금성을 보장받는 매력적 자산이라는 게 김 대표의 분석이다.<br />
김 대표는 호화주택에 부과되는 무거운 세금도 근거로 덧붙였다. 현행 세법상 ‘고급주택’으로 분류되면 일반 주택 취득세의 5배를 내야 한다. 단독주택의 경우 △실거래가액 9억원 이상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집 △66㎡(20평) 이상의 수영장이 딸린 집 등이 고급주택으로 분류된다. 외국 영화에 등장하는 수영장이 딸린 호화로운 단독주택을 지으려면 한국의 부유층이 상당한 세금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생활의 편의성’을 근거로 제시했다.<br />
아파트가 한국 사회에서 ‘부유함의 상징’이 됐기 때문이라는 문화적 분석도 나온다. 디자인 연구자인 박해천 홍익대 연구교수는 전자우편을 통해 “한국의 초창기 아파트 단지들로부터 연원하는 ‘어떤 전통’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의 설명을 종합하면, 1970년대 초반 ‘한강맨션’, ‘여의도 시범아파트’, 구반포 등 ‘맨션의 트라이앵글’이 존재했다. 이 ‘아파트 트라이앵글’은 한국 부유층이 전통적으로 거주하던 사대문 안에서 바깥으로 팽창하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부촌 팽창의 흔적에 평창동의 고급주택가도 포함된다. 박 연구교수는 “실제로 1930년대 전후 태생의 서울 토박이 출신의 젊은 중·상류층 상당수가 (아파트로) 이주했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이들 중 상당수가 다시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이주했다. 1970년대의 한강맨션, 1980~90년대의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이어진 흐름은 2000년대의 타워팰리스로 연결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아파트의 팽창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사태 이후 용인을 중심으로 한 고급·대형 아파트와 강남·분당을 중심으로 한 주상복합의 건설로 다시 이어진다.<br />
세계의 부동산 가격이 하락해도 한국의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분석이 갈렸다. 김주경 대표는 수요가 늘 창출되기 때문이라며 ‘수요지탱론’을 제기했다. 김 대표는 “요즘 추세는 인구는 주는데 가구수는 늘어난다. 수요가 꺼지지 않는다. 수요가 있는 상황에서 환금성이 뛰어난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 이유가 없다. 요즘 금값이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라고 분석했다. 다만 김 대표도 최근 주택 소유자 사이에서 아파트의 환금성에 회의론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서정렬 교수도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 아파트 가격 하락폭이 크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중산층 계층이 집중된 서울 및 수도권의 아파트 수요가 꾸준해 가격 하락폭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해천 연구교수도 “현재의 아파트 가격은 버티기에 가깝다”면서도 “강남의 아파트 가격이 유지되는 것은 수요 때문이다. 외환위기 때도 강남 아파트 가격 하락은 상대적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 강남 주택 수요가 있고, 동시에 강남 아파트 수요자층의 자산 토대가 튼튼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br />
농지와 야산에 아파트가 솟은 한국의 농촌 풍경은 ‘아파트 신화’의 상징이다. 박해천 연구교수는 “농촌 거주민들조차 아파트가 지닌 신화적인 면모에 매혹돼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일찍 시작한 유럽에서 아파트는 노동자와 빈민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고안된 주거 형태였다. 빈곤과 비위생에 시달리는 노동자계층에게 주거복지를 제공하며 가족 단위로 구별된 주택을 제공함으로써 계급의식과 단체행동을 제약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한국에서 아파트 문화는 애초에 ‘편리한 것’ ‘우월한 것’으로 수입됐다. 박 연구교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의 평수 차이가 거주자가 속한 계층의 차이로 곧바로 연결되는 간단한 게임의 규칙은 1967년에 건설되었던 용산 이촌동의 공무원 아파트 바로 옆에 한강맨션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연스레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썼다. 아파트가 지닌 문화적 힘 때문에 농민들이 주위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를 선택한다는 게 박 연구교수의 논지다. 김주경 대표도 “농촌에서는 아파트의 환금성이 중요하지 않다. 도시에서의 아파트 선호가 농촌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도시 사람들은 (아파트에 거주)하는데 우리는 왜 못해?’ 같은 정서로 보인다”고 풀이했다.<br />
‘실용성론’이 반론으로 제기된다. 박재룡 수석연구원은 “농촌에도 ‘나 홀로’ 아파트가 많다. 이는 양면성이 있다. 농민들이라고 생활 편의를 추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며 “주위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있지만, 생활 편의 측면에서 보면 (아파트에 거주)할 수 있다. 농촌에 나이 드신 분이 많아서 단독주택이 살기에 불편하다”고 주장했다. 서정렬 교수는 상대적으로 땅값이 저렴한 농촌 토지를 기반으로 아파트 사업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건설업체의 논리가 반영된 결과로 봤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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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1021460822020.htm" title="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1021460822020.htm"><strong>[명강의를 찾아서] 박해천 홍익대 BK 연구교수 '콘크리트 유토피아'</strong></a> (한국, 김진각 편집위원, 2011/06/10 21:46:08)<br />
<strong><font color="#0100fe">한국에서 아파트란 무엇인가… 그 역사와 문화</font></strong><br />
아파트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디자인 연구 전문가인 박해천 홍익대 BK 연구교수는 "아파트는 우리의 삶과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라고 강조했다. 단순한 주거공간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 즉 역사성과 문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비주얼아트센터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한국의 아파트가 갖고 있는 의미를 독특하게 풀어냈다. 그는 "아파트는 주거 유행을 창조했고, 사람들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br />
60년대는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이 가능한지 실험하는 기간이었다.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공동주거지 개념이 생소했던 시대에 주택공사가 처음 시도한 아파트는 뜻밖에 중산층들이 찾으면서 성공을 거뒀다. 박 교수는 "주공이 그때 뿌렸던 마포아파트 홍보물을 보면 교복을 입은 초등학생들이 뛰어 노는 모습이 있다"면서 "당시 교복은 사립학교만 입었기 때문에 마포아파트에 중산층이 꽤 살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6개 동 모두가 'Y'자 형태로 똑 같은 모양이어서 틀에 박힌 군사문화를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었다고 했다.<br />
박 교수는 마포아파트의 성공이 70년대 서울시가 추진한 시민아파트 건설로 이어졌으나, 접근 방식은 전혀 달랐다고 말했다. 마포아파트는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의 가능성 여부를 시험하는 무대였던데 반해 시민아파트는 달동네를 개조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는 것이다. 시민아파트는 출발부터 도시 빈민 거주지라는 계획하에 추진됐다는 설명이다. 그래서였을까. 시민아파트인 와우아파트가 부실시공으로 70년 4월 무너졌다.<br />
이로 인해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대안으로 70년대 초반부터 전망 좋고 품질 좋은 고급아파트가 등장했다. 그게 여의도와 용산구 이촌동 일대, 옛 반포 지역 등 한강 주변에 들어선 소위 한강 맨션아파트들이다. 그는 이 3곳을 '맨션의 트라이앵글'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경제 상황과 맥이 닿아 있었다. "한강 맨션은 기존의 아파트와는 달랐다. 이전까진 60㎡ 정도가 가장 컸으나 한강 맨션은 99㎡에서 165㎡까지 지어졌다. 일본은 이때 경제호황을 누렸고, 우리도 고속도로가 만들어졌고 국산 포니차가 선을 보이는 등 고속성장기에 접어들었다. 경제발전이 중ㆍ대형 아파트를 짓게 만든 동력이었던 셈이다."<br />
75년께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은 '한강 맨션의 트라이앵글'이 기여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반포, 서초, 잠실, 압구정 등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아파트가 속속 등장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주목하라고 했다. 맨션의 트라이앵글과 강남의 아파트 단지를 잇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아파트에 대한 관점을 크게 바꿨다. 한강 맨션이 주거목적이었다면 현대아파트는 자산가치를 염두에 둔 소유, 투자의 측면이 강했다. 현대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의 20~30%가 용산과 여의도 거주자들이었다."<br />
70년대 이런 강남지역 아파트 입주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40년 이후 출생자로 지방의 명문고 출신에 꽤 큰 기업체에 다니거나 고급공무원이 적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한 세대였는데, 이들이 내 집 마련을 하는 시점에 강남에 정착한 것이다."<br />
"사회적인 관점에서 한강 맨션과 강남의 아파트 단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박 교수의 분석은 명료했다. "한강 맨션이나 여의도 아파트촌은 서울 토박이 출신의 젊은 중상류층이 기존의 계층 질서를 재생산하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반면에 강남의 아파트 단지는 서울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지방 출신의 젊은 세대들이 내 집 마련과 함께 신흥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이들이 80년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 외곽 지역에서 강남 아파트로 진입해 경제 성장을 주도하면서 이른바 '영동 문화'를 형성했다."<br />
그는 90년대 이후 형성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화에서도 아파트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처음 강남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은 70년대생, 90년대 학번들이 우리 문화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서태지, 김현철, 성시경, 싸이 같은 가수들은 모두 강남 2세대다. 이들의 공간 감각과 시각적 감각은 일반인과 확연히 다른 부분은 쉽게 목도된다." 강남 8학군의 교육열 또한 아파트가 초래했다고 파악했다. 학력과 경제력이 비슷한 중ㆍ상류층들이 강남 아파트 단지에 대거 입주하면서 자녀를 좋은 학교로 보내기 위한 부모 간의 경쟁이 자연스럽게 시작됐다는 것이다. 조기유학의 진원지도 따지고 보면 아파트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br />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아파트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박 교수는 역할이 점점 무뎌지고 있다고 했다. 금융위기가 몰아닥친 2008년 이후엔 자산형성 수단으로서 아파트의 비중은 약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중산층이 아파트를 통해 자산을 축적하는 흐름이 차단됐고, 특징적인 아파트 문화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쯤 되면 아파트가 아닌 다른 주거에 눈을 돌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요즘 세대들은 도시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지녀야 한다. 다양한 주거문화, 형태에 그들만의 시각을 갖는 것이다. 다양한 주거 공간들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 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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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422124021" title="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422124021"><strong>꽃무늬의 고백, "이것은 왜 '유토피아'가 아니란 말인가"</strong></a> (프레시안, 김영글 작가, 2011-04-22 오후 6:35:00)<br />
<strong><font color="#0100fe">[프레시안 books]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font></strong><br />
<콘크리트 유토피아> 역시 아파트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아파트에 관한 방대한 양의 정보에도 불구하고, 단연코 이 책은 아파트에 관해서 말하고자 쓰인 책이 아니다. 여기서 아파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정치, 문화,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쇳말로 작동한다.<br />
저자 박해천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책을 설명한다. "아파트는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법을 탐색하는 과정이었다고. 그러니 이 책의 여정은 아파트의 변천사를 설명하고 주거 풍속도를 훑어보는 수준에서 멈출 생각이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아파트에 투영된 현대인의 심리와 욕망, 그 작동 원리까지 그려내고자 하는 야심찬 기획이다.<br />
악취 나는 투전의 장으로 전락한 아파트의 표면적 행보를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담론의 세계에서와 달리 물질의 세계에서 그러한 비판은 별 쓸모가 없다. 현실의 아파트는 여전히 대중을 매혹시키고 있다.<br />
아파트 비판은 백전백패한다. 저자는 바로 그 이유를, 아파트가 교묘하게 구축해 놓은 시각 문화의 대중적 호소력을 간과한 데서 찾는다.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아파트는 단지 몸집만 불린 것이 아니다. 거주자의 생활양식 뿐 아니라 감각 양식까지 조직하면서, 우리가 특정한 시각 논리를 갖추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더 이상 주거 상품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시각 문화 전반에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급기야 도시 생활자의 시선과 인지 방식 자체를 변화시켜 왔다.<br />
꽃무늬는 곧 꽃무늬와 함께 했던 주부들인 것이다. 실내 장식에 애정을 쏟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기실현을 도모했던. 소비 유행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정체성의 나침반을 따라 우왕좌왕했던. 산업화의 역군이라 불린 가부장 집단과 다를 바 없이 욕망의 숨바꼭질을 통해 나름의 역사를 써온 그녀들. 집이라는 공간이 가족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거울이자 타자의 인정을 받기 위한 전시용 스크린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아파트 성공 신화를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노력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br />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개인의 기억을 소환하는 책이다. 그 안에서 나는, 강남 1세대와 386세대 사이에 낀 '이름 없는 세대'의 자식으로 출생해 외환 위기의 불안한 학창 시절을 거치고 비정규직 900만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가고 있는 내 세대의 역사까지도 덤으로 읽고 만다.<br />
아파트에 관해서 사람들은 극단적이기 쉽다. 열광하거나, 경멸하거나, 혹은 무심하다. 세 경우 모두, 아파트가 가진 힘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br />
우리는 어디를 가든, 아파트와 함께 재편된 도시적 시각 질서 속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네가 어디 사는지를 말해봐, 그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테니"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라는 개념을 불러들이는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아파트' 스스로 대담하게 고백하듯이, 아파트는 그저 아파트가 아니다. 그는 '우리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었던 것이다.<br />
저자는 아파트에게 "비판의 법정에 선 용의자가 아니라 자기 옹호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아파트가 지닌 매혹적인 힘의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p><div class="buttons-bottom right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308',1240,'/gimche','');"><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1240+%22%EB%B0%95%ED%95%B4%EC%A0%84%EC%9D%98%E3%80%8E%EC%BD%98%ED%81%AC%EB%A6%AC%ED%8A%B8%20%EC%9C%A0%ED%86%A0%ED%94%BC%EC%95%84%E3%80%8F%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1240&t=%EB%B0%95%ED%95%B4%EC%A0%84%EC%9D%98%E3%80%8E%EC%BD%98%ED%81%AC%EB%A6%AC%ED%8A%B8%20%EC%9C%A0%ED%86%A0%ED%94%BC%EC%95%84%E3%80%8F"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1240&title=%EB%B0%95%ED%95%B4%EC%A0%84%EC%9D%98%E3%80%8E%EC%BD%98%ED%81%AC%EB%A6%AC%ED%8A%B8%20%EC%9C%A0%ED%86%A0%ED%94%BC%EC%95%84%E3%80%8F','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gimche/1240?commentInput=true#entry1240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꿈의 도시…오쿠다 히데오새벽길http://blog.jinbo.net/gimche/11612011-03-15T13:32:54+09:002011-03-15T13:32:54+09:00<p>
<span style="color: #2f4f4f">이 책을 쏭동지가 곧 빌려준다고 하니...</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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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2242114515&code=900308"><strong>[책과 삶]이룰 수 없는 꿈을 좇는 소시민의 ‘악몽같은 삶’</strong></a> (경향, 이영경 기자, 2010-12-24 21:14:51)<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꿈의 도시…오쿠다 히데오 | 은행나무<br />
</strong></span><br />
<img src="http://img.khan.co.kr/news/2010/12/24/20101225.01200114000005.02S.jpg" style="float: left" />오쿠다 히데오는 <공중그네> <면장선거> 등의 작품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체로 그려왔다. “우울할 때는 오쿠다 히데오를 읽어라”라는 말이 있을 만큼 경쾌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말이 적용되지 않을 것 같다. 오쿠다 히데오는 요절복통할 유머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대신, 진지한 표정으로 정색을 한 채 현실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헤친다.<br />
<br />
일본의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몰락해가는 지역의 문제를 다이내믹한 이야기로 풀어낸 <꿈의 도시>는 현실의 우울함을 상기시키는 소설이다. <꿈의 도시>는 유다, 메카타, 노카타라는 세 개의 읍을 합병해 만든 인구 12만명의 지방 도시 유메노를 배경으로 한다. 유메노는 합병을 하면서 발전에 대한 희망으로 ‘꿈의 신도시’를 꿈꿨으나 현실은 차라리 악몽에 가깝다. 상점가의 작은 가게들은 모두 망해 문을 닫았고, 정치가들은 제 잇속을 챙기고 큰 도시로 떠날 심산이다.<br />
<br />
젊은이들은 유메노 지역에 남는 것을 패배로 받아들이고 노인들은 생활보호비로 생계를 유지할 궁리만 한다. 브라질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증가하면서 정주자와 이주자 사이의 갈등, 범죄 등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이쯤 되면 유메노의 이야기는 비단 바다 건너 일본만의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br />
<br />
소설은 욕망도, 희망도, 나이도, 성별도 각기 다른 다섯 인물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들려주면서 진행된다. 시청에서 생활보호비 수급 대상자를 관리하는 서른두살의 남자 공무원 도모노리,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어떻게든 ‘지방의 2류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일곱살의 여고생 후미에, 폭주족 출신으로 노인들만 사는 집을 골라 누전 차단기를 교체해주고 돈을 뜯어내는 회사에서 일하는 스물세살의 남자 유야, 복합 상업시설 ‘드림타운’에서 소매치기를 잡는 보안요원으로 일하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마흔여덟살의 여자 다에코,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하려는 야망으로 산업폐기물 처리시설을 추진하다가 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히는 마흔다섯살의 시의원 준이치가 그들이다.<br />
<br />
소설의 도입부는 이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면서 잔잔하게 시작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흥미를 더해가며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던 다섯 인물의 연결고리가 드러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br />
<br />
도모노리는 빠찡꼬에 빠진 생활보호비 수급자를 추적하다 빠찡꼬에서 공공연히 이뤄지는 주부 원조교제에 빠져들고, 후미에는 어느날 갑자기 공상 세계에 빠진 정신이상의 남자에게 납치당한다. 유야는 생활보조금이 삭감된 전처가 떠맡긴 갓난 아들을 떠맡아 기르게 되고, 다에코는 사이비 종교 간 세력다툼에 휘말리면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주인공들에게는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린다. 소설은 이야기의 재미와 현실 비판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br />
<br />
생활보호 대상자를 ‘케이스’라 부르며 어떻게 해서든 생활보조금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시청 공무원들은 야비해 보이지만, 일을 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면서 생활보조금을 타내려는 한심한 싱글맘들을 보면 공무원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도쿄로의 탈출에 실패한 ‘2류 젊은이’들이 대책없이 젊음을 낭비하다가 쉽게 결혼하고, 책임감 없이 아이를 낳고, 또 쉽게 이혼하는 세태는 생활보호비 수급자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서로 다른 다섯명의 이야기를 퍼즐 조각처럼 맞춰나가다 보면 지방 소도시의 문제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양윤옥 옮김. 1만4500원</p>
<div class="buttons-bottom right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308',1161,'/gimche','');"><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1161+%22%EA%BF%88%EC%9D%98%20%EB%8F%84%EC%8B%9C%E2%80%A6%EC%98%A4%EC%BF%A0%EB%8B%A4%20%ED%9E%88%EB%8D%B0%EC%98%A4%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1161&t=%EA%BF%88%EC%9D%98%20%EB%8F%84%EC%8B%9C%E2%80%A6%EC%98%A4%EC%BF%A0%EB%8B%A4%20%ED%9E%88%EB%8D%B0%EC%98%A4"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1161&title=%EA%BF%88%EC%9D%98%20%EB%8F%84%EC%8B%9C%E2%80%A6%EC%98%A4%EC%BF%A0%EB%8B%A4%20%ED%9E%88%EB%8D%B0%EC%98%A4','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gimche/1161?commentInput=true#entry1161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를>새벽길http://blog.jinbo.net/gimche/11592011-03-13T20:20:28+09:002011-03-13T20:20:28+09: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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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225162429"><strong>이건희 아닌 홍대 청소 노동자 앞에서 무릎 꿇는 이유</strong></a> (프레시안, 유강은 국제 문제 전문 번역가, 2011-02-25 오후 6:18:55)<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프레시안 books]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를>(앤서니 아노브 엮음, 황혜성 옮김, 이후 펴냄)</strong></span><br />
"중국 놈들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하워드 진이 엮은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황혜성 옮김, 이후 펴냄)의 한 구절을 읽다가 며칠 전에 가리봉동 후미진 주택가를 걷던 중에 마주친 낙서가 떠올랐다.<br />
<br />
1848년,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을 비롯한 여성 운동가들은 뉴욕 세니커폴스에서 역사적인 여성 대회를 열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고스란히 인용해 가며 작성한 선언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눈길이 잠시 멈추었다. "남성은 여성에게 가장 저속하고 무식한 원주민과 외국인에게 부여된 권한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200쪽)<br />
<br />
세니커폴스와 가리봉동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억압 받는 소수자가 오히려 다른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적대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령 1930년대에 시카고의 육류 가공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운동에서 활약한 비키 스타는 당시 노동운동의 이면을 직접 경험했다. "여자들은 노동조합에서 몹시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남자들이 노동조합에서도 그들의 편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 평등을 믿고 여자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형제 중에도 등사판 인쇄를 하거나 타이핑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br />
<br />
그렇지만 정작 노동조합에서 유급 직원을 채용할 때는 으레 남자들 차지였다. 하지만 비키 스타 같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에 나서면서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br />
<br />
<img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11/02/25/50110225162429(0).JPG" style="float: left"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은 무엇보다도 변화에 관한 책이다. 아래에서 바라본 미국의 역사, 또는 그 이름도 케케묵은 민중사를, 그것도 200편에 달하는 각각의 사료를 지금 들춰보는 일은 그래도 뭔가 변화에 대한 희망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인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 여성과 동성애자, 노동자와 사회주의자, 민권운동가와 반전운동가 등은 모두 원래는 평범한 장삼이사들이었다.<br />
<br />
아이티의 아라와크 족이 콜럼버스의 잔인무도한 만행 때문에 저항을 하기 시작했듯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자기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이주시키는 백인들에게 맞서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노예 신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땅 한 뙈기 없이 그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소작인으로 변신한 흑인들과 초창기 자본주의 공장의 위험하고 끔찍한 노동 조건 아래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노동자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br />
<br />
인간을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것이 부당한 일임을 깨달은 흑인과 백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깨달음이 닥치는 순간,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사는 게 언제나 고되고 팍팍하고, 아무것도 변할 것 같지 않은 세상이었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고 작은 변화를 이루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br />
<br />
물론 투명하게 드러나는 법이 절대 없는 억압과 차별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고, 설사 그런 현실을 깨닫는다 할지라도 일상을 조이는 현실의 무게와 거대한 체제에 맞서서 행동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64년에 흑인 투표권 등록 운동을 지원하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갖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열린 미시시피 자유 여름 행사에 참여한 북부의 백인 대학생은 1학년답게 향수병에 시달렸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학생은 속내를 드러냈다. "내가 만약 미시시피에 사는 니그로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나는 북부 백인이기 때문에 원한다면 이 일에 언제든 참여할 수 있고, 지겹거나 절망하거나 두려울 때면 또 언제든 집으로 도망갈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이런 북부 백인의 태도와 입장이 싫어.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나 자신을 경멸해." (695쪽)<br />
<br />
그렇지만 1930년대 뉴욕에서 실업자 운동을 벌인 여성의 말처럼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투쟁에서 바로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587쪽) 혼자서는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함께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힘을 느꼈고 웃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세상을 바꾸었다. "지금 미국식 생활 방식의 일부로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이, 우리가 이를 요구하기 시작한 1930년대에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들이었다. 우리는 실직 수당을 원했고, 주택 구호를 원했고, 학교에서 따뜻한 음식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고, 도시 빈민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숙소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583쪽)<br />
<br />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권리가 되고, 만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복지가 되었다. 이런 투쟁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새롭게 거듭났다. 인간의 권리를 자각하고 착취의 비밀을 간파했으며 집단의 힘을 깨달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켰고, 역사의 빛나는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소수의 저항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고, 행동과 연대 속에서 새로운 삶과 역사가 만들어졌다. "파업 후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자들은 노동운동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심지어 플린트 시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여자가 됐다. 걸음걸이가 달라졌고, 머리를 높이 들었으며, 자신감이 넘쳤다." (599쪽)<br />
<br />
이 책은 이렇게 자신과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로 가득하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지질한 인생들이 어느 순간 유창한 연설가가 되고 시인이나 가수 못지않은 노래를 읊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만큼 절절했기 때문이리라.<br />
<br />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이 거대한 물결을 이뤄 분출한 1960년대 말 이래 미국 사회는 점점 보수화되었다. 노동 운동은 이미 체제에 포섭된 지 오래였고, 신자유주의가 전면에 대두함에 따라 기업 지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빈부 양극화가 워낙에 고착되고, 소수 이민자가 자동적으로 하층계급을 이루는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서 민중의 목소리를 듣기란 어지간히 어렵다.<br />
<br />
현실은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고, 맞서 싸워야 할 적의 모습은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현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경제는 성장을 거듭하지만 '88만 원 세대'와 4000원 인생으로 대표되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잔뜩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이상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br />
<br />
그래도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민중의 역사가 있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단지 조그만 양심을 지키고, 작은 신념을 고수한 이들이다. 불과 몇 명의 행동이 수백만 명의 행진으로 이어져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다. 세상이 온통 캄캄한 어둠속 같고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전혀 의외의 곳에서 사람들이 행동한 이야기가 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민중의 역사를 기억하는 한 낙담은 금물이다. 얼마 전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주혁명과 매서운 추위 속에서 꽉 막힌 학교 당국과 싸워 결국 승리를 일궈 낸 홍익대학교 청소 노동자들을 보라.<br />
<br />
목재 회사가 1000년 묵은 미국 삼나무를 벌목하는 것을 막기 위해 738일 동안 나무 꼭대기에서 나무와 함께 산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은 원래 운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힐이 나무와 숲에서 배운 교훈은 엮은이 중 한 명인 고(故) 하워드 진을 기리는 말인 동시에 미국 민중사에 바치는 헌사이다. "더 나은 세계에 봉사하며 사는 삶은 사라지지 않는 전설이다. 이는 흔적이고 이 흔적은 매일, 매 순간 우리가 내리는 결정과 행동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멋진 사람은 젊건 늙건 상관없이 선한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누구보다 빛났고, 가장 아름답고 당당하고 감동적인 사람들이다.<br />
그들은 가장 부자인 사람보다 힘이 세고, 어떤 모델보다 아름답다. 그들의 아름다움과 힘이 그들의 몸을 통해서 생명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빛나기 때문이다. 나는 모델이나 남녀 배우, 또는 백만장자 앞에서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는다. 하지만 공통의 선을 위해서 일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절하고 싶다. 그것이 명예다. 돈이 명예가 아니다. 삶에서 진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명예다." (1039쪽)<br />
<br />
책은 하워드 진이 <미국 민중사>를 집필하면서 참고한 중요한 사료를 <미국 민중사>의 각 장별로 묶고 간단한 배경 소개를 곁들인 구성이다. 일기에서부터 선언문, 신문 기사, 편지, 구술 회고, 탄원서, 시 등 다양한 사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국 민중사>(유강은 옮김, 이후 펴냄)를 먼저 읽는 게 낫겠지만, 이 책을 먼저 읽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미국 민중사를 재구성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생한 1차 자료를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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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2f4f4f">이 책을 서점에서 대충 훑어봤을 때는 별로였는데, 서평기사들을 보니 그럴싸하다. 서동진의 프레시안 서평은 긴 내용에 비해 책 구매욕을 돋우지는 못하는 듯... </span></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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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864622" target="_blank" title="[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864622]로 이동합니다."><strong><font color="#333333">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그들만의 낙원'</font></strong></a>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2011-01-12 17:38)<br />
<strong><font color="#193da9">'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출간</font></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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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캘리포니아 남부의 풍광과 느낌, 아름다움을 홍콩으로 가져옵니다. (중략) 야자수가 늘어선 거리와 그림 같은 경치가 있습니다. 춤추는 분수와 색색의 꽃들, 향수를 자극하는 가로등과 거리의 조각상들도 놀랍습니다. 넥타이를 풀고, 양복과 롤렉스 시계를 벗어던지고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저 바라보세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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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위엔룽(元朗) 부근에 있는 폐쇄형 고급 주택단지 '팜스프링스' 광고 전단에 나오는 내용이다. 홍콩의 폐쇄형 고급 주택단지의 역사는 영국 식민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인들은 고지대인 빅토리아 피크에 거주하면서 저지대에 사는 일반 중국인들과 가급적 거리를 두려고 했다. 팜스프링스도 빅토리아 피크의 영국인 거주지만큼이나 폐쇄적이다. 팜스프링스에는 공영버스가 다니지 않으며 외부인이 단지에 들어가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철통 같은 보안은 말할 것도 없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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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아카이브 펴냄)는 팜스프링스를 비롯해 이란 사막에 세운 인공 오아시스 신도시, 두바이의 초고층 마천루와 인공섬, 제주도 면적의 4배에 달하는 CNN 창업자 테드 터너의 사유지 등 부유층의 생활공간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화려함 뒤에 감춰진 불평등의 세계를 보여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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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층 생활공간의 기본적인 조건은 '분리'와 '장벽'이다. 저자인 마이크 데이비스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 교수와 대니얼 버트런드 멍크 콜게이트대 평화연구프로그램 소장은 신자유주의가 식민지 시절의 극단적인 주거 차별과 소비 구역 분리 패턴을 부활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의 부와 호화스러운 소비는 1980년대 이래 어느 때보다도 더 담장으로 둘러쳐지고 사회에서 섬처럼 고립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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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의 '파라다이스'는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의 눈물과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는 군벌들이 가난한 이들의 땅을 빼앗아 그들을 내쫓고 그곳에 정치인, 사업가 등 엘리트와 부유층을 위한 주거지구를 만들었으며, 두바이의 화려한 고층 건물에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일한 이주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br />
원제는 'Evil Paradises : Dreamworld of Neoliberalism'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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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01/h2011011400281384210.htm" target="_blank" title="[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01/h2011011400281384210.htm]로 이동합니다."><strong><font color="#333333">신자유주의가 만든 전세계 1% 부자들 그들만의 지상낙원</font></strong></a> (한국, 남경욱기자, 2011/01/14 00:28:13)<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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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을 창립한 테드 터너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땅을 소유한 지주다. 몬태나주와 뉴멕시코주에 있는, 제주의 4배나 되는 넓이의 거대한 소유지에서는 들소 4만마리가 엘크 노새 사슴들과 함께 어슬렁거린다. 스스로 환경주의자라고 자임하는 터너는 뉴멕시코 목장에 있는 엘크를 보호하면서도 매년 엘크 사냥을 주관한다. 여기에 참가하려면 1주일에 사냥 비용으로 1만3,000달러를 내야 한다. 터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들소를 소유하고 있지만 세계 최대의 들소고기 버거 납품업자이기도 하다. 몬태나의 목장은 요즘 미국 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동산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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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부자와 빈자 간의 불평등을 지구촌 규모로 엄청나게 확산시켰다. 미국 어바인캘리포니아대 교수로 도시연구가인 마이크 데이비스 등이 쓴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는 신자유주의로 더욱 부유해진 세계 상위 1% 초부유층의 생활 공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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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東京) 중심가에 있는 55층 건물 모리타워 맨 위층에는 부동산 재벌 모리 미노루가 설립한 모리미술관이 있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도시의 노른자위 땅에 있지만 이곳에는 영구 소장품이 없어 많은 시간 미술이나 문화전시를 하지 않은 채 비워 놓는다. 전시품이 아니라 360도 회전하며 도쿄 전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이 미술관의 본질을 드러낸다. 부자들이 소유한 개인 미술관은 이처럼 소장품보다는 공간과 위치가 우선시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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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 두바이는 세계화 이후를 보여 주는 도시의 전형이다. 1990년대 초 돈세탁의 중심지로 악명 높았던 이곳은 현재는 수많은 마천루와 호화로운 개인 소유의 섬이 부자들의 은신처 역할을 계속한다. 두바이의 25개 쇼핑몰이 후원하는 쇼핑페스티벌에는 중동과 남아시아 등에서 수백만 명의 부자들이 쇼핑을 위해 찾아오지만 저임금의 건설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하는 노동권 침해는 옛 식민종주국 영국의 인도 지배를 연상케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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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특별경제구역 아르그에자디드, 미국 캘리포니아를 흉내 낸 홍콩 팜스프링스, 빈부 간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미국 교외를 모방한 폐쇄주택으로 사회가 분리된 니카라과의 마나과 등을 다룬 19편의 글들이 악의 낙원을 묘사한다. 각 도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도시계획가 건축가 역사학자 언론인 작가 등이 썼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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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도시들을 일별해 보면 신자유주의의 공간 논리가 식민지시대의 극단적 주거 차별과 소비구역 분리 패턴을 부활시키고 있으며, 부자들은 대저택과 휴양도시, 캘리포니아 교외를 복제한 폐쇄형 주택단지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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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엮은 마이크 데이비스의 말대로 억만장자와 인기 스타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과장된 보도가 넘쳐나는 탓에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엄청난 빈부 격차에 놀라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자유시장이 아니라 공공자산의 사유화, 공공고용의 외주, 금융시장의 규제완화 등을 하는 국가권력이며, 신자유주의의 주된 성과는 창조보다는 재분배에 가깝다는 지적은 새겨둘 만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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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929534&cloc=olink|article|default" target="_blank" title="[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929534&cloc=olink|article|default]로 이동합니다."><strong><font color="#333333">[BOOK] 테드 터너가 가진 땅이 제주도 면적 4배라니</font></strong></a> (중앙, 이은주 기자, 2011.01.15 00:13)<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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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만난 직설적인 책이다. 현대사회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눈에 보이는 여러 도시의 생활 공간을 증거 삼아 신랄하게 공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바이의 초고층 마천루와 인공섬, 제주도 면적의 4배에 달하는 CNN창업자 테드 터너의 사유지, 부자와 엘리트들을 위해 분리되는 도시 니콰라과 누에바 마나과, 요하네스 버그 등이 모두 도마 위에 올랐다. 신자유주의가 흥청망청 만들어낸 ‘유토피아’가 어떤 것인지 냉철한 시선으로 돌아보자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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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브라질 여행’이라는 단어를 넣고 검색해보면 이국적인 매력을 언급한 것보다 ‘강도 대응 수칙’이 먼저 눈에 띈다. “다른 나라 강도와 달리 금품만 내어주면 신체에 위해는 가하지 않는다. 절대 반항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안내문이 쓰여있다. 왜일까. 그게 다 ‘토지 문제’ 때문이란다. 전체 토지 소유주의 0.8%에 불과한 대지주가 브라질 전체 농지의 44%를 차지하는데, 농지가 일자리를 창출해내지 못할 만큼 비생산적으로 운용되고 있어 농촌 사람들이 자꾸 도시빈민가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소유지가 기계화와 규모의 경제를 보장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담론도 브라질에서는 모순이었다는 게 필자(에미르 사데르)의 설명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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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르면, 두바이는 그 자체가 신자본주의의 가치를 집약해 보여주는 도시다. 소득세나, 노동조합, 야당과 같은 없는 자유기업의 오아시스를 이룩했다는 점에서다. 2010년 올림픽이 열린 요하네스버그는 역시 도시 불평등 비율이 높은 곳으로, 세계 최고의 범죄도시 중 하나다. 대다수 서민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지 않는 고속전철은 설계 자체부터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제도)의 흔적이 남아있다. 거대한 쇼핑몰이 있는 미국도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쇼핑몰과 노인들을 위한 도시, 미네소타와 애리조나’를 쓴 마르코 데라모는 쇼핑몰은 ‘상품을 통한 소통’만으로 메워진 공간이라며 이게 과연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냐고 묻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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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역동적으로 확대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현대 경제가 무심코 야기한 결과가 아니라 경제의 동력 그 자체”라고 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과신이 만들어낸 풍경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불평등의 디스토피아’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책에 드러난 풍경들은 어둡고 무겁다. 다양한 필자들의 글은 편차도 있다.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이기도 하다. 책은 관광 안내서가 절대 얘기해주지 않는 도시의 얘기들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가장 큰 미덕은 우리 도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혁신과 발전이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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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128125837" target="_blank" title="[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128125837]로 이동합니다."><strong><font color="#333333">패리스 힐튼과 '청소 노동자'가 있는 지옥도</font></strong></a> (프레시안,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학교 교수, 2011-01-28 오후 6:53:29)<br />
<font color="#193da9"><font size="+0"><strong>[프레시안 books]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 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펴냄, <font size="+0">560쪽 | 2만5000원</font>)</strong></font> </font><br />
1<br />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 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펴냄)는 두 다리 뻗고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책 뒤표지에 실린 "자본의 상상력과 억만장자들의 욕망이 빚어낸 19편의 지옥도"란 글귀는 신랄하지만 이 책을 읽을 이들이 감지할 기분에 충분히 호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자고 작정했으면 모두 알 수 있었을 이야기를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편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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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11/01/28/50110128125837(0).JPG" style="clear: both; float: left" />이 책에 실린 이야기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억만장자의 야단스럽고 구역질나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넘쳐나리 만치 많지 않는가. 미국 호텔 재벌인 힐튼의 손녀, 패리스 힐튼의 엽기적인 일상에서부터 중국 베이징 부잣집 도련님의 명품 스포츠카 폭주족 동호회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매일 우리는 TV와 점잖은 신문에서부터 싸구려 잡지의 가십을 통해서까지, 초현실적인 부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허다하게 듣고 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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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미국 신자유주의적 도시 공간의 상징이자 증후라 할 "폐쇄형 주거 단지"가 예시하듯이 우리는 부자들만을 위한 파티와 이벤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다. 온갖 보장이 다 된다는 암 보험이니 생명 보험이니 하는 광고들이 허술한 의료 보험으로 인해 겁에 질린 가난한 이들의 낯빛을 집요하게 반사한다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개인 맞춤 건강 진단 서비스를 제공하고 첨단 의료 경영을 실현하여 수익성 높은 의료 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국내 굴지 병원들의 호들갑은 천국과 지옥이라기보다는 현실과 초현실의 차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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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엄청난 부자들에게도 천국과 지옥이 있을지 우리는 확신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새로운 도시 개발과 공간 형성의 원리를 위하여 동원된 포스트모던 철학을 비웃기 위하여 곧잘 들먹이는 철학적인 비유들 가운데 하나가 말해주듯이 말이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제3의 공간에 위치한 사람들처럼 대다수의 사람은 이 물리적인 공간 속에서 단단하게 현존하지만 그 세계가 내세우는 공간적 체험과 지각의 원리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하기는 어렵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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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각하고 체험하는 것이 세계란 것을 내세우는 이 환상적인 공간 속에서 우리는 어차피 빠져나와 있다. 서울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라기보다는 방문하고 관람하고 떠돌아다니는 공간처럼, 철학적인 잘난 체를 한다면, '현상할' 뿐이다. 이런 서울을 일러 '세계 디자인 수도'라 한다면 그건 그렇다 쳐둘 일이다. 그런데 이는 물론 포스트모던한 공간을 예찬했던 이들이 희구했던 사악한 유토피아가 실현된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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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장소 없음(placelessness)'을 개탄하며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근대적인 공간의 정언명령에서 탈출하여 그 장소에 서식하는 또는 거처하는 인간의 장소를 되찾거나 창안해야 한다는 전투적인 포스트모던 건축가들과 도시 계획자들의 심미적 이념은 공간의 경제적 현실을 은폐한다. 이 아름다운 장소 회복의 꿈은 부동산 개발 업자와 투기 자본, 지대를 추구하는 금리 생활자의 탐욕에 이바지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말이다. 나아가 그것이 진정으로 은폐하는 것은 공간이 교통, 배수, 안전을 비롯한 다양한 공적인 서비스를 위하여 구성된 근대 도시의 공간적 편성이기도 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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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전적 자유주의가 인구-도시의 짝을 만들어 냈다는 푸코의 제안을 수긍한다면 신자유주의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어떤 새로운 배치 속에 밀어 넣는 것일까. 아마 우리는 이에 답하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하비의 제안처럼 복지국가 혹은 사회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국가로의 이행은 관리주의적 도시(managerialist city)로부터 기업가적 도시(entrepreneurial city)로의 이행과 궤를 같이 한다는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있다.<br />
<br />
그렇지만 그것은 서구의 대도시를 위한 분석에 그치고 마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전직 서울 시장은 CEO 시장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기업가적 도시 행정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그를 생각할 때 하비가 관측하는 기업가적 도시 모델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를 전후한 지방자치제의 실현을 목격한 한국 사회의 공간 관리를 이해하는데 전연 손색이 없는 도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듯이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많은 도시들을 이해하는데 이 같은 모델은 많은 부족한 부분을 보여준다. <u>무엇보다 금융 세계화를 전후하여 나타난 새로운 자본의 지구적 운동이 국가 내외부에서 이뤄지는 정치적 규율과 맞물리면서 공간을 어떻게 새롭게 재편하는지 이해하는데 기업가적 도시란 모델은 너무나 국민국가란 공간적 이미지에 매달린다</u>.<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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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사스키아 사센 같은 이들이 말하는 '글로벌 도시' 역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구화가 어떻게 세계 주요 도시들을 국민국가라는 사회적 신체로부터 떼어내어 허브니 명령 센터니 하는 이름으로 자본과 지식, 정보의 폐쇄 회로를 형성하였는지 밝혀내고 그 도시들을 글로벌 도시라 부르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고 또 충분히 설득력 있다. 그렇지만 글로벌 도시와 동시 병행적으로 만들어지는 그 도시 아닌 도시들의 윤곽은 흐릿해질 뿐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비약하여 신자유주의적 공간의 시학(詩學)을 읊는 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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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파리, 도쿄, 런던, 상하이, 두바이 같은 휘황찬란한 신자유주의적 도시의 세계가 결국은 대다수의 삶을 안전 무법 지대, 일자리 없는 빈곤의 나락, 갖은 질병과 죽음의 위협이 도사린 연옥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은 전연 맞는 말이고 또한 명심할 일이다. 그러나 이를 비참과 고통의 서정적 풍경 속에 가두어 놓고 이를 다양한 철학적 요설로 감싸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을 호모 사케르라고 부르든 아니면 배제되고 추방된 자들이라 부르든 그것은 이 책의 글 가운데 하나에서 언급하듯 인도주의적 자선의 대의를 참칭하며 국제적인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저 잘난 비정부기구를 위한 윤리적인 핑계가 되어줄 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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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된 자본주의가 어떻게 공간을 규정하고 지배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걸음을 이제 떼고 있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변화의 규칙과 그에 대항할 수 있는 공간적인 투쟁을 위한 전략을 사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저분하고 구역질나는 부유한 부르주아들과 그들이 사는 장소들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착취와 탈취, 점유와 개발, 구획과 투자 같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실천이 벌어지는 곳이고 또한 그에 예속되고 착취당하며 투쟁하는 자들이 머무는 곳이자 가장 첨예한 공간적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br />
<br />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가 지닌 진가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불편하고 거북하지만 그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패와 허영의 세계를 묘파하는 풍경화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공간을 둘러싼 운동을 위해 고려해야 할 주요한 쟁점들을 망라하는 지도책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흔해 빠진 속물근성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인문 교양을 살찌우는 그저 또 한 가지 군것질거리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이 아무리 우리 시대의 공간의 질서를 둘러싼 역겨운 추문을 폭로하는 짜릿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해도 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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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r />
두바이, 아르그에자디드, 카불, 베이징, 홍콩, 요하네스버그, 노에바 마나과, 부다페스트, 메데인, 브라질, 이집트 드림랜드, 애리조나, 오렌지카운티 그리고 테드 터너의 목장, 개인 미술관, 라이프스타일 관광지가 된 수도원, 해상 도시의 꿈을 희구하며 10만 명의 주민을 태우고 유랑하겠다는 프리덤십호 프로젝트 등등.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에 등장하는 도시와 사유지, 관광지, 프로젝트 따위의 이름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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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19개가 꼽혔고, 이렇게 "새로운 배제의 지리학과 부의 풍경"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선정된 이 19개의 장소는 또한 우리 시대의 가장 불길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곳이 천국이라면 바로 길 하나 건너의 거리에 혹은 은폐된 그 곳의 어느 다락방에 지옥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부유층이 기거하는 이 19개의 아이콘적 공간은 또한 그 공간을 건축하고 유지하며 재생산하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의 참담한 세계를 끝내 숨길 수 없을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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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책과 짝을 이루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인, 이 책의 편집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눈부신 저작 <슬럼, 지구를 뒤덮다>(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에서 고발하고 있는 그 세계 말이다. 그 세계를 기억할 때 편자 서문에서 묶은 이들이 아도르노를 인용하여 말하듯이 천국과 지옥의 변증법이 고스란히 현상하는 이미지가 만들어질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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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문화 비평의 정전이 되어버린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분석은 자본이 만들어내는 신기루 같은 도시의 환등상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현실을 환영적인 풍경으로 대체하였는지 고발한다. 그런데 그의 동료였던 아도르노는 이러한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힐난하였다고 한다. 이는 또 다른 환상의 명부(冥府)인 지옥이 벤야민의 묘사 속에 지워져있다는 이유에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도르노의 비판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비판이기에 앞서 벤야민이 매혹당한 19세기 후반의 파리 풍경과 다른 지옥의 풍경에 경악한 이들이 그려낸 수많은 도시의 초상도 잊지 말자는 당부에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말로 번역된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의 상태>를 위시해 페비언협회를 이끈 베아트리스 웹의 영국 노동자 거주지에 대한 조사 같은 글들은 바로 벤야민이 매혹당한 풍경의 음화들을 묘파한다. 즉 천국의 길 건너편에는 지옥이 있다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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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천국과 지옥은 서로의 부정적 규정일 뿐이다. 천국과 지옥이 서로 다른 세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서로를 자신의 부정적인 존재조건으로 정립한다. 이는 이 책을 여는 첫 번째 글이자 편자 가운데 한 명인 마이크 데이비스가 쓴 '노동자들은 배제된 낙원, 두바이'에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낙원이 되었고, 연일 30도가 넘는 뜨거운 사막 도시인 두바이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스키장,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을 가진 도시가 되었다. 알막툼이 이끄는 왕실 가문이 지배하는 이 작은 도시-기업은 세계에서 최고, 최선이라 할 만한 것들은 모두 게걸스럽게 삼킨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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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도시의 휘황한 풍경의 보이지 않는 장막 뒤에는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에서 온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그 어떤 권리의 체계와는 아랑곳없이 그 최선과 최고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예 노동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차라리 '두바이 주식회사'의 모습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도시의 풍경을 적나라하리만치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점이지대도 가지지 않은 지옥과 천국이 동거하는 희한한 세계인 두바이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불길한 최후일 뿐이다. 과연 어느 누가 이 죄악으로 가득 찬 세계를 좌시하겠는가. 따라서 두바이는 공간을 걸고 윤리적 내기를 걸고 있을 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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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유사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이란의 인공도시 아르그에자디드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이집트의 도시들은 어떨까. 이 도시들은 너무나 불투명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글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슬람 혁명을 경과하며 퇴폐적인 서구의 라이프스타일과 가장 거리가 먼 세상으로 변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란. 그 나라의 <u>경제자유구역 도시인 아르그에자디드는 자본의 유연함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보수주의자들의 악몽에 가까운 예측과 달리 자본의 논리는 전통과 관습을 비롯한 모든 것을 형해화시키기는커녕 그것과 화해하며 나아가 그 안에서 더욱 번식하고 성장한다. 본야드라는 이슬람 재단은 이슬람 전통 경제 기관이 되어 이제는 신자유주의적인 개발의 첨병이 되어버린다</u>. 아르그에자디드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이 갖은 악담을 퍼부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적 가치의 변방이라고 규탄하는 곳에서 자본은 자유를 만끽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얻은 부를 행사하는 신심 깊은 이슬람 부르주아지들은 쾌적한 환경과 결합된 자신들의 도시에서 행복을 만끽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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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펼쳐지는 정경 역시 이란과 대동소이하다. 탈레반을 몰아내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후원을 통해 자생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키겠다는 끝없는 농담을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 저열한 구상이 어떻게 카불이란 도시를 기상천외한 도시로 만들어내는지 알아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복원이란 이름하에 진행된 새로운 개발 계획이 군벌, 정치인, 개발업자들을 배불리기 위해 어떻게 토지 강탈을 묵인하고 나아가 이를 외래 침략자들을 물리친 데 대한 대가로 자축하는 일로 되었는지 그리고 글쓴이가 '군벌 키치'라고 명명한 기괴한 건축 미학을 성행시키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예외적인 부패와 무법의 세계라는 억측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br />
<br />
이는 중국의 베이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을 총동원하여 연일 기념비적 건축물을 신축하는 중국 도시들의 빌딩 숲 속에서 사회 양극화를 거론하는 것은 이젠 숫제 민망한 일이 되어버렸다. 올림픽 개최를 전후하여 후진타오가 내건 사회적 통합의 슬로건인 '조화 사회'는 박탈당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의 울분과 원한을 잠재우는데 그들이 얼마나 발버둥치고 있는지 웅변해줄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정실 자본주의의 새로운 혈맥을 잇는 중국 경제의 예외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시시덕대는 서구 언론의 말장난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부유층들이 몰려드는 베이징 외곽의 폐쇄형 주택 단지나 그들이 이용하는 그로테스크한 쇼핑몰 등은 자본의 새로운 운동의 궤적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br />
<br />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한 이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둘러싼 환멸의 드라마 역시 요하네스버그란 도시의 비극을 통해 다시금 이해되어야 할지 모른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좌파 정치 세력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에서의 변화는 많은 이들에게 세계는 여전히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꿈을 붓는 샘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채 '선제 공격식 신자유주의'로 나아갔고, 백인 부르주아 계층과 타협을 통해 보다 자본의 운동에 유리한 세계로 개조하는 남아공식 구조 조정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들의 지지 기반이자 운동의 터전이었던 타운십과 거기에 거주하는 대다수 흑인 빈민들을 아파르트헤이트시대보다 못한 빈궁 속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그리고 요하네스버그를 둘러싼 우리의 응시가 배경을 달리하면 누에바 마나과란 도시로 다시 콜롬비아의 메데인으로 다시 홍콩의 팜스프링스로 이어진다. 이 동종 복제의 공간적 질서를 그저 공간 문화의 지역성 탓으로 돌리는 우리 시대의 흔해 빠진 문화이론은 이제 농담처럼 들려야 마땅하다.<br />
<br />
그러나 새로운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공간의 착취와 개발이 도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넓고 비옥한 경작 농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녹색 혁명을 경유하였으면서도 농산물 수입국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무토지 농민들의 토지 획득을 위한 운동이 가장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어버린 나라인 브라질에서, 도시는 농토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CNN 창립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생태운동가로 알려진 테드 터너가 소유한 제주도 네 배 넓이라는 개인 목장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엄청난 미국 갑부의 기괴한 개인 소유지가 어떻게 생태적인 비전과 새로운 소비 문화와의 제휴를 통해 짭짤한 비즈니스의 원천이 되는지를 배우는 순간, 우리는 다시 저 유명한 미국의 기념비적 쇼핑몰로 들어가게 되고 창궐하는 새로운 개인 미술관들의 세계 속으로 운반된다.<br />
<br />
그러나 이 쯤 해두도록 하자. 이 책이 소개하는 우리 시대의 공간을 주유하는 만화경은 서로 다른 수사와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빼어난 필자들의 글과 해후하면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반감시키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어떤 아름다운 솜씨도 지옥을 관람하는 불쾌를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한 불쾌를 자아내는 책을 근자에 우리가 읽은 적이 있던가.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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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1003191713375&code=900308"><strong>[책과 삶]그대, 왜 침묵하는가? “데모크라시의 길은 직접민주주의 뿐”</strong></a> (경향, 김재중 기자, 2010-03-19-17:13:37)<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ㆍ‘중간세력’이 무너진 모래시계형 전제화사회</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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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9)이 국내에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근대문학이 정치·사회·윤리적 역할을 떠맡았지만 이제 근대문학의 그런 역할은 끝났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2000년대 한국 문학계에 큰 논쟁거리를 제공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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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img.khan.co.kr/news/2010/03/19/20100320.01100113000005.03S.jpg" style="float: left" />여기저기 그를 인용한 글들이 자주 보이기에 그가 쓴 책을 처음 집어들었던 게 10년 전쯤이었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이었는데 한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일본에서 신좌익운동이 붕괴한 70년대에 쓰여진 이 책은 식상할 대로 식상해진 마르크스 해석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데 에세이 형식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나의 지적수준으로선 요령부득이었던 것이다.<br />
<br />
며칠 동안 이 책을 잡고 끙끙대다가 던져버린 뒤로 나에게 가라타니는 요령부득인 상태로 계속 남아 있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대담집을 번역한 <u><정치를 말하다>는 나처럼 ‘가라타니 읽기’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거나 처음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꼭 알맞은 책이다.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대학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사상적 궤적을 대화체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가 60년대 일본을 격렬하게 달궜던 ‘안보투쟁’을 어떻게 바라봤고, 왜 경제학을 공부하다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며, 어떻게 문학평론가가 됐다가 결국 문학을 포기했는지, 단체를 만들고 사회참여를 하다가 왜 단체를 해산해 버렸는지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u>했다.<br />
<br />
자연스럽게 그가 썼던 책들에 대한 요약과 부연이 담겨 있어 해당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논지를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u>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생산과정이 아니라 유통과정이라는 분석, 국가를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구조로 다루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한다’는 등 그의 독특한 시각들</u> 말이다.<br />
<br />
제목에도 나와 있듯 가라타니가 이번 책에서 던진 주요 메시지는 정치와 민주주의, 평화다. 가라타니는 90년대에 만개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외적으로는 제국주의, 내적으로는 전제주의로 귀결됐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일본사회에서 노조가 파괴되고 대학이 민영화되면서 중간세력이 없어졌고 전제사회가 됐다고 말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하지만 이는 곧 개인에게 가능한 것은 대표자를 뽑는 것뿐이다.<br />
<br />
가라타니는 <u>전제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의제 이외의 정치적 행위를 찾는 것이라면서 ‘데모’, 다른 말로 하자면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대의제란 대표자를 뽑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데모크라시가 아닙니다. 데모크라시는 의회가 아니라 의회 바깥의 정치활동, 예를 들어 데모 같은 형태로만 실현된다고 생각</u>합니다.”<br />
<br />
문학비평지 ‘비평공간’을 창간했다가 닫아버리고 새로운 ‘혁명운동’으로 생각하며 ‘생산·소비협동조합운동(NAM)’을 조직했다가 일거에 해산해 버린 이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어차피 끝날 거라면 아직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보다 그만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그랬다는 것이다. 가라타니에 천착해 한국 기성문학계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는 역자 조영일은 이에 대해 “실패가 아니라 엘리트의 자기우상화에 대한 강력한 거부였던 셈”이라며 “가라타니는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을 그 자신에게도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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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003242042541"><strong>[신간 탐색]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은 어떻게 형성됐나</strong></a> (2010 03/30ㅣ위클리경향 868호, 정원식 기자)<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ㆍ정치를 말하다 | 가라타니 고진 | 고아라시 구하치로 지음 | 조영일 옮김 | 도서출판 b | 1만5000원</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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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에 사망선고를 내린 <근대문학의 종언>이 지난 2004년 한국에 소개된 이후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뜨겁게 읽히는 일본 지식인이 됐다. 그의 새 책 <정치를 말하다>는 일본 작가 고아라시 구하치로가 2008년 3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그와 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br />
<br />
지식인 인터뷰를 활자화한 책이 지니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일차적으로 ‘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옮겨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될 정도로 정교한 말솜씨를 자랑하는 이가 드물게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말을 글처럼 밀도 높게 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인터뷰를 정리한 책은 종종 난해한 사상을 독자들에게 가독성 높은 방식으로 풀어 설명하는 구실을 한다. <정치를 말하다>에서 가라타니는 자신의 사상이 1960년대 이후 동시대 일본과 세계의 정치적 상황에 어떤 방식으로 반응해 온 결과물인지를 비교적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br />
<br />
가라타니는 1969년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평론으로 문학비평을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 배경에는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 ‘사회주의학생동맹’(사학동) 재건에 깊이 관여했는데, 사학동에서 손을 뗀 뒤 “계속 운동을 이어 나가기 위한 가능한 선택지”의 하나로 문학비평을 선택했다고 말한다.<br />
<br />
그러나 가라타니의 ‘비평’ 활동은 곧 기존 문학비평의 협소한 영역을 넘어 판이하게 다른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의 자술에 따르면, 그는 1970년 들어 “소설을 논하는 것만이 비평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비평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마르크스를 읽는 것, 그것도 <자본론>을 읽는 것이었다. 그것이 문학비평이라고 생각했다.”<br />
<br />
그의 중심적인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는 네이션(국민)-국가-자본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국가와 네이션을 단순히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지탱되는 일종의 환상적 표상으로서만 생각했던 데 반해 가라타니는 국가가 그 자체로 능동적인 주체라는 점을 역설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생각과 달리 계급 대립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벼리는 과정에서 그는 1960년 일·미 안보조약 개정, 1968년의 전 세계적 학생운동, 1990년대의 걸프전, 2000년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이 사유의 씨앗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br />
<br />
가라타니가 보기에 신자유주의는 자국 노동자를 내버리고 해외로 나아가는 자본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체제다. 그는 이러한 국가와 자본의 동맹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이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소비자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지역통화 등을 포함하는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이다. 그는 또한 선거로 대표자를 선출하는 대의제는 귀족정에 불과하다면서 “데모크라시(민주주의)는 의회가 아니라 의회 바깥의 정치활동, 예를 들어 데모(시위) 같은 형태로만 실현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지만, 그 주장 아래에는 그러지 않고는 개인의 원자화로 활력을 잃은 일본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기 힘들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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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1008180416"><strong>빠져나올 수 없는 어둠, 정녕 출구는 없는가?</strong></a> (프레시안, 이관형 미학자, 2010-10-08 오후 7:23:58)<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프레시안 books]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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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꾸는 자가 있는가? 인간 이성을 신뢰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라. 그 기치 하에 일어난 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혁명에 침을 뱉을 자가 있는가? 인간 이성을 조소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라. 당신이 조소하는 인간 이성과 혁명이 치열하게 이루려 한 것을. 그 위대한 문제의식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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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러시아 혁명! 그것은 애굽(이집트)의 종살이를 걷어치우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감을 보장하는 인간 이성의 약속이었다. 미륵 세상이자 천년 왕국의 약속이었다. 장자(莊子)가 소요유로,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으로, 각종의 민란과 농민 전쟁으로 꿈꾸었던 그것이었다. 엥겔스가 독일 농민 전쟁을 분석한 후 그것이 실패한 이유를 혁명의 물적 토대의 부재에서 찾고 이제 근대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생산력)에서 비로소 인류의 오랜 꿈, 모든 사상과 모든 종교가 이루고자 한 그것, 평등 세상의 실현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것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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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약속한 가나안 땅은 40년 광야 생활의 고통을 통해서야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르지 않았다. 인간이 약속한 가나안에 다다르는 데에는, 비록 수많은 이의 피가 필요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917년 혁명 발발 후 불과 5년 만에 20세기의 가나안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20세기의 가나안'에도 젖과 꿀이 흐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광야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약속은 70년도 채우지 못하고 파기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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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10/10/08/50101008180416.JPG" style="float: left" />그 7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한낮의 어둠>(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은 이 70년 초반의 10여 년간 벌어진 일을 소련 공산당 최고의 이론가 부하린을 모델로 했다는 주인공 '루바쇼프'의 최후를 통해 보여준다. '젖과 꿀이 흐르게' 하고자(?) 먼저 동지들의 '피를 흐르게' 했던 일련의 사건을 그 동지들의 대표 단수 '루바쇼프'를 통해 전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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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10여 년간 허다한 혁명의 주역들이 죽었다. 그것도 혁명 과정이 아니라 혁명을 이룬 소련에서, 적이 아닌 동지의 손에 죽어갔다. 레닌이 병석에 있던 1923년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트로이카 체계를 형성, 반 트로츠키 노선을 편다. 1924년 트로츠키와 그 파는 힘을 잃는다. 공동의 적 트로츠키가 힘을 잃자 1925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레닌의 부인인 크루프스카야 등과 손을 잡고 스탈린과 대적한다. 스탈린은 부하린 등과 연합한다. 지노비예프 등은 세를 불리기 위해 이번엔 반대로 트로츠키 등과 이른바 '통합반대파'를 결성한다. 1926~27년이다.<br />
<br />
그렇지만 1928년 이후 트로츠키는 당에서 제명되고 유배, 국외 추방의 길을 걷다가 1940년 망명지 멕시코에서 자객에게 피살된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도 부침을 거듭하다가 1936년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처형된다. 이들(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의 처형을 계기로 1937~38년 고참 볼셰비키들에 대한 처형 광풍이 몰아친다. 부하린도 이 광풍을 피하지 못한다. 그는 스탈린 진영에 가담했으나 한때 지노비예프 등을 끌어들여 스탈린과 대적하려 했던 적이 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1938년에 처형된다.<br />
<br />
책장을 넘기는 순간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갔다. 이중(二重)의 데자뷔(旣視感)를 경험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 책 안의 상황을 이미 겪었다는 느낌. 내가 무슨 대단한 투사였다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주인공 '루바쇼프'와 같은 경험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철이 바뀌어 새로 꺼내 입은 옷에 들어 있던 꼬깃꼬깃한 지폐처럼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 온갖 악다구니를 쳐도 쉴 새 없이 쏟아지던 군홧발의 아득한,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났다.<br />
<br />
더불어 'SKRM(남한 혁명 운동)'이라는, 지금 생각하니 무모하고 모호해서 오히려 가상하고 기특하기도 한, 그를 둘러싼 소위 '사투(사상 투쟁)'의 기억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의 가슴에 남은 깊은 상처들까지···.<br />
<br />
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우리가 성공했더라면? 우리 역시 수많은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와 부하린과 또 다른 박헌영과 임화를 낳지 않았을까? <한낮의 어둠>을 읽으면서 느낀 데자뷔는 우리가 겪은 1980년대의 혁명도 무엇도 아닌 상황에서조차 예상할 수 있었던 어둠, 한낮이 도래하기도 전에 느꼈던 어둠이 아니었을까?<br />
<br />
그래서였나? 나는 <한낮의 어둠>의 한 장 한 장을 쉽사리 넘기지 못했다. 인생의 "한낮"이던 푸르던 날의 푸르른 기상은 기억에 없고 "한낮"을 옥죄던 구속과 폭력의 두려움, 조직과 인간에 대한 실망, 미래에 대한 전망의 부재, 나 자신에 대한 역겨움과 좌절 등의 "어둠"만 되살아났다. 이제 초연할 만도 한데 그렇게 되질 않았다. 모든 평론이 그렇듯 서평도 그 대상과 얼마간의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은 우리의 1980년대와 오버랩(overlap)되면서 다소간의 객관성도 유지하지 못할 지경으로 나를 끌고 갔다.<br />
<br />
루바쇼프는 '우리' 볼셰비키들의 정치적 입장을 이렇게 말한다. "위태로운 전환기에는 오래된 법칙(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법칙) 외에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우린 이번 세기에 신마키아벨리즘을 도입했다. (··) 우리는 보편적 이성의 이름을 내건 신마키아벨리주의자였고 그것이 우리의 위대성이었다." (138쪽)<br />
<br />
저자 아서 쾨슬러는 '그들' 볼셰비키에 대해 덧붙인다. "그들은 권력 철폐를 지향하는 권력을 꿈꾸었고, 사람들의 지배받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 지배하는 일을 꿈꾸었다." (87쪽)<br />
<br />
루바쇼프는 이런 신념 하에 자기 자신이 훗날 똑같은 논리로 제거당할 논리를 내세워 하부 당원(리하르트)을 제거한다. "역사는 망설임과 주저를 모른다네. 완만하지만 과오 없이 자기 목표를 향해 흘러갈 뿐이지. 역사는 지나는 경로의 모든 굴곡에 그것이 실어 나르는 진흙과 익사자의 시체를 남기네. 역사는 자기 길을 알고 있고, 결코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아. 역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지 못한 자는 당원이 아니야." (67쪽)<br />
<br />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망설임과 주저'에 봉착한다. "미래에 무엇이 진리로 판단될 것인지 현재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타고난 예지적 능력도 없이 예언자의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비전을 논리적 추론으로 대치시켰다." (142쪽)<br />
<br />
결국 그는 자신이 패배하였음을 자인한다. "사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무오류성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패한 이유이다." (142쪽)<br />
<br />
그럼에도 루바쇼프는 '품위'를 버리고 '이성'을 택한다. 즉 역사를 위해, 당을 위해, 인민을 위해 최후의 봉사를 한다. 당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함에도 당의 지시를 이행한다. 자신이 반동이자 배신자라고 공개 재판을 통해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인민의 공분이 자기에게 쏠리도록 함으로써 말이다.<br />
<br />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도 그는 의문의 답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 의문을 자신의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그러나 약속된 땅은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이 방황하는 인류를 위한 그런 목표가 정말로 있었는가?" (351쪽)<br />
<br />
혹자는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이 옳았다고. 근대적 생산력이 뒷받침되어야, 즉 '젖과 꿀'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어야 혁명이 일어난다고.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필연적·법칙적 도래를 기다리자고 하지 않았다. 결국 혁명은 오히려 '약한 고리(?)'인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까지 '의지'가 개입하지 않은 '필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br />
<br />
혁명을 성취한 볼셰비키들이 이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젖과 꿀'의 문제를 놓고, 그 문제를 실현할 권력의 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스탈린이 승리했다. 그 결과 '소련'은 정확히는 69년 만에 간판을 내린다. 혹자는 스탈린이 사회주의를 말아먹었다고 한다. 혹자는 스탈린의 중공업 정책이 있었기에 그나마 소련이 69년이라도 지속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이 옳든 가정은 가정일 뿐이고 가치판단은 각자의 몫이다.<br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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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1002017014"><strong>민영화 덫에 걸린 오바마 정부 해부</strong></a> (서울, 손원천기자, 2010-10-02 17면)<br />
<span style="color: #000080"><strong>【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Ⅱ】쓰쓰미 미카 지음 문학수첩 펴냄</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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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에서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민영화된 학자금 대출이다. 학자금 대출기관인 ‘샐리 메이’에서 학자금을 대출받은 젊은이들은 곧 서브프라임 론과 마찬가지로 변동금리의 함정에 빠진다. 학생들은 6개월에 5000달러(약 600만원)씩, 연이자 3.5%에 빌리지만 3년째가 되면 대출금은 변동금리 통보와 함께 8% 고금리로 돌변한다. 이를 거부하면 전액을 일시에 갚아야 한다. 현재 미국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같은 학자금 대출의 덫에 걸려 신용불량자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가 최종 승인한 대안은 학자금 대출의 문턱을 낮춘 것이다.<br />
<br />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Ⅱ’(쓰쓰미 미카 지음, 홍성민 옮김, 문학수첩 펴냄)는 이처럼 민영화의 덫에 걸린 오바마 정부를 낱낱이 해부한다. 2008년 경제파탄으로 인한 미국의 어두운 현실을 고발해 일본에서만 30만부 넘게 팔린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의 속편 격이다. 책은 학자금 대출 외에도 의료개혁과 연금, 교도소 비즈니스 등 네 가지 큰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춰 미국의 현실을 진단한다. 이 쟁점들은 모두 오바마의 선거 공약에서 언급됐지만, 뿌리깊은 ‘코포라티즘’(정경유착)은 정부의 발목을 잡으며 개혁의지를 공허한 외침으로 만들고 있다. 1만 3000원.<br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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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2f4f4f">공유의 비극을 넘어/엘리너 오스트롬 지음·윤홍근, 안도경 옮김/488쪽·1만9800원/랜덤하우스코리아. </span></p>
<p>
<span style="color: #2f4f4f">지금쯤이면 오 교수가 한국을 떠났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놔두고 오 교수 혼자 아시아 순방길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를 맞춰서 <공유의 비극을 넘어>라는 책이 발간된 모양이다. </span></p>
<p>
<span style="color: #2f4f4f">경제신문에서는 오 교수가 정부실패를 지적하고 있음을 부각시키는데, 그의 주장의 핵심인 공동체 자치관리는 사실 오 교수 전후로 많은 이들이 지적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던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span></p>
<p>
<span style="color: #2f4f4f">서평 중에 한국일보에서 이를 4대강과 관련지어 MB정부의 무대포 추진을 비판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span>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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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a href="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15183307&Section=03" target="_blank" title="[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15183307&Section=03]로 이동합니다."><font color="#333333">노벨상 수상자의 경고 '4대강 비극을 피하려면…'</font></a></strong> (프레시안, 이정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2010-09-17 오후 6:45:36)<br />
<strong><font color="#193da9">[프레시안 books] 엘리너 오스트롬의 <공유의 비극을 넘어></font></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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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공유의 비극을 넘어>(윤홍근·안도경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의 저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올리버 윌리엄슨과 함께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그가 누구인지도 잘 모를 것이다.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정치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많이 다루지 않는 '공유재'의 문제를 연구해온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다.<br />
<br />
이 책은 공유재(혹은 공유 자원)를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 개념을 매우 개략적으로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적으로는 엄밀한 정의가 있다. 서해 연안의 물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특정 시점에서 어떤 어부가 너무 많이 잡아가면 다른 어부들이 잡을 수 있는 물고기의 숫자가 감소한다. 따라서 한정된 양의 물고기를 놓고 어부들은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특성을 경합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빵도 경합성을 가진 재화다. 빵이 100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10개를 먹어치우면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이 90개로 줄어들기 때문이다.<br />
<br />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부들이 경쟁적으로 어장으로 달려가서 물고기를 마구 잡더라도 이를 막기도 힘들다. 각종 교묘한 방법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중국 어선들이 우리 연안에 몰래 들어와서 어로 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이를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남획으로 연안의 물고기는 금방 씨가 말라 버린다. 실제로 이런 일이 비일비재로 벌어진다. 이와 같이 특정인을 배제하기 매우 힘들 때 이런 특성을 경제학에서는 비배제성이라고 한다. 어장의 물고기는 비배제성을 가진 재화다. 이런 점에서 어장의 물고기는 빵과 다르다. 예컨대, 빵이 100개 있다고 했을 때, 돈을 내지 않는 사람을 빼고 돈을 낸 사람에게만 선별적으로 이것을 공급할 수 있다. 즉, 빵의 경우에는 특정인을 쉽게 배제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만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br />
<br />
빵과 같이 경합성과 배제성을 동시에 가진 재화를 경제학에서는 사적재라고 한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대부분의 상품은 사적재다. 반대로 이 두 가지 특성 모두를 갖지 않은 재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가진 재화를 공공재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일기예보를 방송할 때 특정인, 예컨대 세금을 내지 않을 사람을 빼고 나머지 사람들만 일기예보를 듣게 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일기예보는 어장의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비배제성을 갖는다. 또 어떤 특정인이 일기예보를 더 많이 듣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일기예보를 더 많이 들으려고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공유재는 빵과 같이 경합성을 가지지만 일기예보와 같이 비배제성을 가진 재화다. 말하자면 사적재와 공공재의 중간 쯤 되는 재화다.<br />
<br />
이와 같이 공유재는 이용자들 사이의 경합성 때문에 늘 고갈 가능성을 안고 있지만, 비배제성 때문에 이용자의 수를 제한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방치하면 고갈되어 버린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장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연 환경 대부분이 공유재로 구성되어 있다. 산림, 지하수, 저수지의 용수, 목초지 등이 오스트롬이 <공유의 비극을 넘어>에서 다루고 있는 공유재이지만, 이 외에도 깨끗한 강물, 깨끗한 공기 등 다분히 공유재의 성격을 가진 것들이 많이 있다. 결국 환경오염 문제란 공유재로서의 환경이 고갈되고 파괴됨으로 인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하딘(Hardin)이 발표한 <공유재의 비극>이 환경문제에 대한 지구인의 경각심을 크게 높인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br />
<br />
각 개인이 자유롭게 이용하게 내버려두면 공유재는 고갈되거나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들이 협력해서 집단적으로 잘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연안 어장의 물고기가 고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근처의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협력해서 집단적으로 잘 관리해야 하고, 저수지의 물이 고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인근의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해서 저수지를 관리하고 적당량의 물만 빼 써야 한다. 즉, 공유재는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적 협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br />
<br />
하지만, 이런 개인들의 자발적인 집단행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무척 어렵다는 것이 그간의 정설이었다.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밝힌 가장 대표적인 이론이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이론이다. 요컨대, 집단행동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각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협동할 것을 기대하고 자신은 슬쩍 빠져서 무임승차하려는 욕심을 가지게 되는데, 저마다 이런 생각으로 얌체 짓을 하면 결과적으로 집단행동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경제학자들은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도 개인들 사이의 자발적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오직 특수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점도 수학적으로 밝혀졌다. 예컨대, 자주 만나기 때문에 안면을 몰수할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발적 협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이론에 의해서 개인들 사이의 자발적 협동에 입각한 집단행동이 어렵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은 학자들이 정부에 의한 직접 관리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였다.<br />
<br />
하지만, 오스트롬은 정부의 실패 사례를 다수 발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원인도 밝혀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공유재는 저마다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특성을 잘 알아야만 관리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각처에 흩어진 그 많은 공유재의 특성에 관하여 세세한 정보를 정부가 획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부에 의한 공유재의 직접 관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u>정부의 정책이나 규제는 획일적이라서 현장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현지인의 협조도 얻기 어렵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인원과 예산의 제약 때문에 그 많은 공유재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대로 지역 공동체들이 자치적으로 잘 관리해오던 공유재가 국유화 이후 집행 능력 부족, 감시 소홀, 부패 등의 요인 탓으로 오히려 접근 자유의 공유재로 변해버림으로써 더욱 황폐화된 사례도 있다</u>.<br />
<br />
경제학자들은 공유재의 사유화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공유화된 목초지가 결국 황폐화된다면 그 목초지를 갈라서 개인에게 분양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롬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들은 사유화된 공유재의 관리 및 유지에 소요되는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마을이 공유하던 목초지를 개인들에게 분양한다면 우선 울타리를 치고 도둑을 감시하는 비용부터 치러야 한다. 사유화가 최선의 관리 방안이 되지 못한다는 점도 오스트롬교수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사유화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물이나 수산자원처럼 움직이는 자원에 관해서는 사유권 제도의 확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이럴 경우 공유의 비극을 회피할 수 없거나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br />
<br />
요컨대, 정부가 아니면 시장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오스트롬은 역설한다. 노벨 경제학상 선정위원회는 오스트롬이 <u>사유화나 정부의 직접 관리를 지지하는 전통적인 견해에 도전하였으며, 각종 다양한 지역 공동체들이 자율적으로 공유재를 잘 관리해온 성공적 사례들을 세계 도처에서 발굴하여 <공유의 비극을 넘어>에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이론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공 원리를 찾아냈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업적</u>으로 꼽았다. 어장이나 목초지의 예에서 보듯이 공유재 이용자들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데, 공유재 관리의 성패 여부는 이러한 상호의존 관계의 구성원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상황'으로부터 '상호 조율된 전략을 채택하도록 하는 상황'으로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고 오스트롬은 보았다.<br />
<br />
그래서 오스트롬은 우선 오랫동안 존속되어온 지역 공동체의 성공적 공유재(공유 자원) 관리 사례들을 전 세계적으로 발굴하고 분석하였는데, <공유의 비극을 넘어>의 상당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할애되고 있다. 오스트롬은 이 사례 분석을 통해서 공통적 요인들을 뽑아내고 이를 <u>지역 공동체에 의한 성공적 공유재 관리 제도의 구성 원리로 제시하였다. 그는 이를 '디자인 원리'라고 표현하면서 8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핵심은 우선 공유재 이용자들이 행동 규칙을 자발적으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은 개인이 공유재를 이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이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분담하는 방법에 대한 것까지 포함한 포괄적인 것</u>이다. 물론, 이 규칙은 현지의 사정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며, 현지인들이 참여해서 완전히 합의한 것이어야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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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u>중요한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규칙을 어떻게 집행하느냐</u>이다. 기존의 이론들이 집단행동에 비관적 견해를 표명하였던 이유는, 설령 규칙을 성공적으로 만든들 이를 집행하는 것 자체가 딜레마를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은 다른 사람들만 이 규칙을 지키고 자기는 몰래 위반함으로써 무임승차 이익을 얻으려하기 때문이다. 오스트롬이 특히 강조한 것은, <u>성공한 공유재 자율 관리 조직들이 이 규칙의 준수를 감시하고 위반을 제재하는 나름대로의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하고 실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구성원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도 포함된다. 통상 감시, 제재, 분쟁 해결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지만, 성공한 공유재 자율 관리 조직들은 아주 저렴하게 실시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u>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부 기관의 도움을 얻기도 하지만, 대체로 보면 규칙의 준수 여부를 서로 서로 감시하는 내부적 방법에 크게 의존한다.<br />
<br />
하지만, 오스트롬은 정부의 개입이나 사유화논리를 전면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중앙 정부나 지방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유화의 논리를 활용할 필요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면서도 공유재 관리를 주도하는 지역 공동체의 자율성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성공적인 지역 공동체의 자율적 공유재 관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세월에 걸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현실에 맞도록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하나의 체계적 제도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에 오스트롬은 특히 주목한다. 이 결과 구성원들 사이에는 신뢰가 높아가면서 성공적 공유재 관리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자본'이 조성된다.<br />
<br />
이어서 오스트롬은 실패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실패 사례에서는 위의 8가지 디자인 원리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적용되든가, 아니면 매우 허술하게 적용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수많은 사례 연구를 통해서 8가지 디자인 원리들이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스트롬과 그의 동료들이 집단행동에 대한 기존의 많은 이론과 세계 도처에서 수집한 광범위한 사례를 연결하여 경험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론과 현실을 결합시켰다는 점을 노벨 경제학상 선정위원회가 특히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br />
<br />
오스트롬의 <공유의 비극을 넘어>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특히 현재 정부가 강행하는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4대강은 그냥 단순한 강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공유재(공유 자원)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자원이다. 4대강에 산재된 그 많은 공유 자원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오스트롬에 의하면, 이런 공유 자원의 특성은 인접한 지역 공동체의 주민들이 가장 잘 알고 있고 따라서 자율적으로 관리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사업은 획일적인 내용을 담고 전국에 걸쳐 획일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오스트롬이 경고한 대로 자칫 이런 사업이 각처에 산재한 공유 자원을 도리어 망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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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공동체에 의한 공유재의 자율적 관리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를 강화하고 사회적 자본 형성에 기여한다는 오스트롬의 지적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정부의 4대강 사업이 4대강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지역 공동체들로 하여금 4대강 살리기를 자율적으로 주도하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점점 고갈되고 있는 사회적 자본을 조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옳은 처사가 아닐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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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span class="toggle-text" onclick="toggleMore(this)" style="display: none; cursor: pointer">관련서평</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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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a href="http://news.donga.com/3/all/20100820/30646042/1" target="_blank" title="[http://news.donga.com/3/all/20100820/30646042/1]로 이동합니다."><font color="#333333">[인문사회]자원고갈 막는 길은 사용자의 자율규제</font></a></strong> (동아, 이새샘 기자, 2010-08-21 03:00) <br />
<strong><font color="#193da9">◇공유의 비극을 넘어/엘리너 오스트롬 지음·윤홍근, 안도경 옮김/488쪽·1만9800원/랜덤하우스코리아</font></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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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미국 생물학자 개릿 하딘이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 ‘공유의 비극’이 지적한 ‘공유의 비극’은 자원고갈과 환경파괴가 심화되면서 더욱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은 두 가지였다. 공유자원을 국유화해 국가가 관리하거나, 사유화 즉 개인에게 소유권을 주는 것이다.<br />
<br />
2009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저자는 수상 당시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기도 한 이 책에서 위 두 가지 방법 모두를 비판한다. 국유화의 경우 국가가 늘 합리적 효과적으로 상황을 통제할지 보장할 수 없다. 태국, 네팔, 인도 등에서 국유화 이후 비리와 감시인력 부족으로 오히려 산림 파괴가 늘어난 것이 한 가지 예다. 사유화 역시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산림이나 어장, 지하수 등은 사유화 자체가 어렵다.<br />
<br />
저자는 사유화나 국유화처럼 외부에서 강제된 해결책 대신 공유자원 사용자들이 공동체 차원에서 직접 나서 공유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공유자원을 직접 사용하는 이들이야말로 문제 해결에 가장 적합한 주인공들이다. 공유자원을 어떻게 활용 보존하느냐 여부에 자신들의 생계가 달려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공유자원을 오랫동안 활용해온 축적된 지식이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br />
<br />
스위스 북부 발레스 주의 퇴르벨 마을은 15세기 무렵부터 마을 공동 목초지를 운영해왔다. 1517년 작성된 조례에는 “여름철 초지에 내보낼 수 있는 소의 수는 겨울철에 자신이 사육할 수 있는 소의 수만큼만 허용된다”고 적혀 있다. 마을 목초지에 내보낼 가축 수를 제한하고 이를 공동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규약은 마을 전원이 참석한 투표에서 결정된다. 이 규약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으며 환경파괴나 자원고갈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일본 산악지대 농촌 마을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집합 행동을 통해 공유지를 보존, 활용해 마을 전체의 공익을 증진시킨 사례를 볼 수 있다.<br />
<br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지하수 분지 관리 제도는 이 같은 지속 가능한 공유자원 관리 제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기고 정착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지하수 분지는 주변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땅 밑에 고인 일종의 지하 저수지로, 캘리포니아 주 같은 반건조성 지역에서는 중요한 수자원이 된다. 이 중 레이먼드 지하수 분지 위에는 패서디나 시, 앨햄브라 시 등 10여 개 도시가 있다. 1920년대까지 이 지하수 분지가 고갈되지 않도록 댐을 건설하고 수량을 보충하는 일은 패서디나 시가 전담했다. 패서디나 시는 1930년대 들어 모든 지하수 생산자들이 공동으로 지하수 사용량을 감축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생산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br />
<br />
소송은 공유자원 사용 환경에 변화를 예고했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지하수 분지의 물 양수량은 안전 양수량을 매년 상당 부분 초과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법원이 전체 양수량을 감축할 것이 분명했다. 생산자들은 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을 맞는 대신 스스로 협상에 나서 합의안을 작성하기로 했다. 6개월에 걸쳐 작성된 합의안은 양수량 감축에 합의하고 감축분을 각자 비례해 분담하도록 했다. 미래에 안전 양수량이 변하는 것까지 대비했다. 법원은 이 합의안에 기초해 판결을 내렸다.<br />
<br />
이후 45년이 지났지만 이 합의가 위반된 사례는 많지 않았다. 각 지역의 수자원 전문 기구는 각 생산자의 양수량을 세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해 배포한다. 생산자들은 모두 자신이 합의를 위반할 경우 그 사실이 다른 생산자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쉽게 합의를 위반할 수 없다. 위반한다 하더라도 물을 퍼 올릴 권리를 가진 다른 생산자가 법적 조치를 통해 즉각 제재할 수 있다.<br />
<br />
물론 이 같은 공유자원 관리 제도도 종종 실패의 위기를 맞는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 분석을 통해 공유자원 관리 제도가 성공할 수 있는 디자인 원칙 8가지를 도출해낸다. 공유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공유자원 자체의 경계가 명확해야 하며, 참여자들이 직접 규칙수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지속적인 감시활동과 위반에 대한 제재가 뒤따라야 하는데 특히 반복해서 위반하거나 그 위반행위가 무거울수록 제재도 강력해져야 한다. 이 같은 제도를 디자인하는 사용자들의 자율적 권리가 정부 당국에 간섭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br />
<br />
이 같은 저자의 논의는 ‘공유의 비극’과 같은 모델이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좀 더 나은 제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개개인들의 역량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라며 “실제 상황 속 개인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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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a href="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0&no=450668" target="_blank" title="[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0&no=450668]로 이동합니다."><font color="#333333">국가·시장을 넘어 공동체 자치로 해결책 찾아라</font></a></strong> (매경, 김슬기 기자, 2010.08.20 14:47:44)<br />
<strong><font color="#193da9">`공유지의 비극` 여성 첫 노벨경제학상 오스트롬 교수의 해법</font></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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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책에서 상세한 조업규칙을 만들어 어장을 관리하는 터키 어촌, 방목장을 함께 쓰는 스위스 목장지대, 농사용 관개시설을 공유하는 스페인과 필리핀 마을 등 수백 년에서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유자원을 잘 유지해온 공동체들이 발전시켜온 정교한 제도장치를 발굴하고 분석해 성공과 실패 원인을 밝혀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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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사례를 보자. 스리랑카 건조지대에 관개시설을 개발하기 위해 19세기부터 영국인들은 제방의 폐허를 복구하고 수로를 만들었다. 독립 후 스리랑카 정부도 관개 프로젝트 등 막대한 공사를 이어 갔지만 확대되는 농토에 비해 쌀 수확량 증가는 언제나 미미했다. 이는 상류에서 개인주의적으로 물을 끌어다 쓰면 하류에는 충분한 양의 물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변화는 갈오야라 불리는 지역에서 시작됐다. 관리들이 농민과 함께 일할 `제도 조직자`를 뽑아 농부들 이익을 대변하게 한 것이 성과를 낸 것이다. 소규모 조직으로 묶인 농민들은 비당파적이었고 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새로운 제도 출현으로 농민 대다수가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윤번제 물 보급이 정착됐다. 극적인 반전이었다.<br />
<br />
오스트롬은 국가와 시장을 넘어서는 제3의 길로 `공동체 중심의 자치제도`를 제시하지만 어느 상황에나 적용되는 보편적 이론은 경계한다. `완전 경쟁시장`이라는 개념처럼 비현실적인 상황을 가정할 때 현실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는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나 시장이라는 해결책이 종종 위험한 것은 그런 해결책을 외부로부터 강요하려는 사람들이 문제의 구체적인 성격을 분석하지 않고 만병통치약과 같은 정책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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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a href="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8/h2010082021135386330.htm" target="_blank" title="[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8/h2010082021135386330.htm]로 이동합니다."><font color="#333333">공유자원의 고갈, 공동체 자치로 막아라</font></a></strong> (한국, 오미환기자, 2010/08/20 21:13:53)<br />
<strong><font color="#193da9">국가통제·사유화 해결책은 한계, 지역주민들의 자발적 협력이 중요<br />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찾은 해법</font></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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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의 비극을 넘어>는 제3의 길을 주창한다. 공동체 자치 관리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공유자원은 사용자들 공동체의 자발적 조직화와 협력으로 잘 관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 엘리노 오스트롬은 이 책으로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노벨경제학상 선정위원회는 그가 이 책을 통해 “공유자원은 제대로 관리될 수 없으며 완전히 사유화하거나 정부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견해에 도전”했다고 평가했다. 또 수많은 사례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사용자들이 자치적으로 관리하는 공유자원 관리체계에 나타나는 정교한 제도적 장치들을 발굴해 소개하고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지적했다.<br />
<br />
저자는 공유재의 자치 관리를 위한 이론적 틀과 분석 도구를 상술하고, 세계 곳곳의 구체적 사례를 검토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점검함으로써, 현실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론적 설명은 정교하고 복잡해서 읽으려면 조금 힘들 수도 있지만, 사례와 연결해 설명하는 대목은 어렵지 않다.<br />
<br />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역 주민들의 참여와 협력이다. 자발적 협력을 통해 공유자원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의사결정의 각 단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짚어서 탁상공론이 아닌 현실 적합성을 추구한다.<br />
<br />
국가의 개입이나 개인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니다. 공동체 자치관리 또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국가와 개인과 공동체의 각 수준에서 적절한 협력이 중요하다고 분명히 밝힌다. 국가의 개입은 사용자들의 욕구나 지역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획일적 규제로 나타날 수 있고, 각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곧 집단적으로도 합리적인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간 지점으로서 공동체 자치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br />
<br />
사용자 공동체의 자치에 의한 공유자원 관리가 어떤 조건, 어떤 환경에서 성공하고 또 실패하는지는 사례 연구에서 자세히 밝힌다. 터키의 작은 어촌 알라니아의 어장 관리는 전자에 속한다. 이 곳의 100여 어민들은 1970년대 경쟁적 남획으로 어장이 황폐해지고 주민들 사이에 폭력 사태까지 벌어지자 조업 구역을 나눠 순번제로 어로에 나섬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자발적 감시와 통제로 규칙 위반을 막고 어장을 지켰다. 반면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시아 어장은 실패 사례다. 그곳 어민들은 전통적으로 어장을 잘 관리해 왔는데, 정부가 어업면허제도를 도입한 뒤로 공동체 관리가 무너져 버렸다. 정부의 획일적 규제 정책에 반발한 어민들의 말을 새겨들을 만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고기를 잡아와서, 우리 어장에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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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소규모 마을 단위로 잘 관리되던 숲이 국유화 이후 망가져버린 것도 국가 개입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이 책을 한국 상황에 비추면 생각할 거리는 더 많아진다. 4대강 사업만 해도 그렇다. 정부는 일방적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의사나 공동체의 자치 관리는 애초부터 배제됐다. 4대강 사업을 걱정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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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a h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81933071" target="_blank" title="[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81933071]로 이동합니다."><font color="#333333">[책마을] 정부가 개입하면 `공유재의 비극`이 해결된다고?</font></a></strong> (한경, 서화동 기자, 2010-08-19 17:44)<br />
<strong><font color="#193da9">부락에서 잘 관리하던 산림, 국유화된 후 감시원 부족, 뇌물까지 받아 점점 황폐해져</font></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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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어장에서 모두가 원하는 만큼 고기를 잡게 하고,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자원을 마음껏 가져갈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제적 이익을 취하도록 풀어 놓는다면, 여러분은 이웃과 자신을 파멸시키고 말 것입니다. 출입이 자유로운 어장에서 좋은 상황은 열악한 상황으로 이어지고, 점점 많은 배들이 차츰 줄어드는 고기를 쫓으며, 점차 많아지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수익을 두고 다투게 될 것입니다." 1980년 3월,로메오 르블랑 당시 캐나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전국해양수산협회 50주년 대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어장을 어민들에게 맡겨 놓으면 모든 어자원이 남획될 것이므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민들에 대해 효과적인 지배력을 발휘할 관리인을 둬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1968년 개릿 하딘이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이후 다수의 사람들이 희소 자원을 공동으로 이용할 때 예측되는 환경의 악화를 상징하게 된 '공유재의 비극'이 캐나다의 어장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였다.<br />
<br />
이 같은 '공유재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지금까지 나온 처방은 크게 두 가지다.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 또는 사유재산권을 설정해 시장제도에 맡기는 것이다. 《공유의 비극을 넘어》의 저자는 시장 아니면 국가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자치관리라는 제3의 해법을 제시한다. 중앙정부의 관리나 사유화는 둘 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어서 한 가지 선택만으로는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br />
<br />
그는 최적의 제도적 해결책은 외부의 행위자 대신 사용자들이 자치적으로 관리하는 정교한 장치들이 보다 효과적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세계 도처의 사례를 제시한다. 저자는 "공유재 문제에 대해 하나의 정책 처방만 고집하는 분석가들은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에 거의 주목하지 않으며 현실을 도식화해 만든 정책은 해롭다"고 지적한다. 그는 "국가나 시장이라는 해결책이 종종 위험한 것은 그런 해결책을 외부로부터 강요하려는 사람들이 문제의 구체적인 성격을 분석하지 않고 만병통치약과 같은 정책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며 이론의 틀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출발하는 실질적인 해법을 보여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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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a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37153.html" target="_blank" title="[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37153.html]로 이동합니다."><font color="#333333">무엇이 인간을 협동하게 만드는가</font></a></strong>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0-08-27 오후 08:52:01)<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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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0/0828/1282909919_00371792501_20100828.JPG" style="float: left; clear: both" />어장·산림·지하수와 같은 자원은 어느 한 사람이 사용하면 딱 그만큼 다른 사람은 사용하지 못하는 ‘공유 자원’이다. 따라서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게임이론이 제시하는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남보다 더 많은 자원을 쓰려고 달려들 것이고, 이는 공유 자원 전체의 파괴나 고갈로 이어진다. 1968년 개릿 하딘은 이를 ‘공유재의 비극’이라고 불렀다. 그 뒤 이 비극의 해법을 놓고, 공유 자원을 사유화하면 해결된다는 시장주의와 정부 권력이 통제해야 한다는 통제주의가 맞서왔다.<br />
<br />
지난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너 오스트롬은 그의 저서 <공유의 비극을 넘어>에서 이 두 논리에 대해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도식화한다”며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스위스와 일본의 산림자원 관리, 스페인과 필리핀의 농사용 관개시설 관리 등의 여러 사례를 꼼꼼히 분석한 그는 “공동체의 자발적·자치적인 관리가 공유 자원을 지속 가능하게 관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국가나 시장이 아닌, 나름의 정교한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공유 자원을 관리해 온 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자치적으로 관리하면 된다’는 뻔한 말이 이 책의 주제는 아니다. 오스트롬은 공동체 자치 관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근본 이유를 파고든다. 곧 ‘사용자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상황’을 어떻게 하면 ‘서로 조율된 전략에 따르는 상황으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가 그의 연구 주제다. 무엇이 인간을 협동하게 만드는지, 그 원리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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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a href="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7/2010082701360.html" target="_blank" title="[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7/2010082701360.html]로 이동합니다."><font color="#333333">[Weekly BIZ] 2009 노벨 경제학상 수상 오스트롬 교수</font></a></strong> (Weekly BIZ, 박수찬 기자, 2010.08.28 03:00)<br />
<strong><font color="#193da9">"주민들 자율적 관리가 정부규제보다 효율적"<br />
"英식민정부가 마사이족보다 목초지 관리 못했다"<br />
"심각한 지구온난화 문제 국가에만 맡겨선 해결 느려…당신 사무실의 불부터 꺼라"<br />
"수천 개의 도시가 힘 모으면 지구에 좋은 변화가 온다"</font></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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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는 미국·캐나다·터키·일본의 사례 연구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지역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공유 자원을 잘 관리해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부의 통제 없이 수십년, 수백년간 말이다. 요즘 많이 훼손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되찾게 해주는 연구 결과이기도 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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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롬 교수가 단골로 꼽는 사례는 미국 메인주 연안의 바닷가재잡이 어부들이다. 1920년대 이 지역 바닷가재 어장은 남획으로 인해 바닷가재의 씨가 말랐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어부들은 한데 모여 머리를 짜낸 끝에 바닷가재 통발을 놓는 규칙, 순서 등에 대한 자치 규율을 만들었다. 그 결과 메인주 어부들은 미국 북동부의 다른 해안과 캐나다의 바닷가재 어장이 완전히 붕괴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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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간은 단기적 이익을 좇아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장기적 관점에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모습도 많이 관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지역공동체들의 자치 관리가 정부 규제보다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이론이 던지는 메시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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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획으로 황폐해진 많은 어장과 비교해 보면 말씀하신 바닷가재 어장의 성공 사례는 오히려 예외적으로 보입니다. 정부가 개입해 연안 어장을 보호한 사례도 있고요.<br />
"제가 연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건 우리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외적인 개입, 다시 말해 정부의 강제적인 규제가 없더라도 자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사례가 많다는 점입니다. 정부 개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지하수가 무분별 개발로 고갈 위기에 처하자 여러 지하수 개발업자가 위원회를 만들고 자율적으로 규칙을 정했는데, 주 정부가 나서 이들 위원회 활동을 지원한 것이 한몫했습니다. 여기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정부가 규제를 도입하더라도 그 지역에 예전부터 있었던 자율적인 규칙을 살피고, 지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사람들은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느끼게 되고 실제 제도 역시 더 잘 운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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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자율적인 합의를 이루기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대기 오염이나 산성비 문제처럼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정부의 규제를 통해 해결됐죠.<br />
"네. 맞습니다. 저도 메인주 어민들이 보여준 자치적인 해결책이 만병통치약이라거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창 밖 도로를 가리키며) 저렇게 잘 닦인 도로는 정부가 나서서 만들어야 하듯이 정부가 나설 필요도 있어요.<br />
하지만 마찬가지로 정부 개입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도 옳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은 영국 식민 지배 이전까지 부족 단위로 목초지를 잘 관리해왔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부족들이 운용해 오던 관리제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초지를 보호한다며 법을 만들고 행정력을 동원해 이용자 수를 제한했습니다. 그 결과는 비극이었어요. 자치 제도가 무너진 상황에서 초지를 감독할 감시 인력은 모자랐고, 영국이 시행하는 제도를 믿지 못한 사람들이 초지에 가축을 풀면서 결국 초지가 황폐화됐습니다. 이런 예는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많아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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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의 비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도 문제가 풀리지 않거나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씀이네요.<br />
"그렇습니다. 과테말라 정부보호구역의 예를 볼까요? 과테말라 정부는 불법 벌목을 막고 삼림자원을 보호한다면서 정부보호지역을 설치했습니다. 서로 인접한 지역에 보호구역 4개가 설정됐어요. 그런데 그 결과는 달랐어요. 보호구역 중 한 곳인 티칼이라는 지역은 삼림이 잘 보존됐고,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여 지역사회도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반면 근처에 있는 다른 곳들은 오히려 불법 벌목이 심해졌고 삼림이 황폐화됐습니다. 티칼의 경우 공동체가 유지해온 자치적인 감시 노력이 작동한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먼저 나무를 베어 가려는 벌목꾼들만 몰려들었어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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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성공적인 자치의 조건</strong><br />
오스트롬 교수는 1990년에 낸 《공유의 비극을 넘어·Governing the Commons》라는 책에서 공유지의 비극 문제를 성공적으로 푼 사례들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표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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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height="508" src="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008/27/2010082701319_4.jpg" style="width: 320px; float: left; height: 411px; clear: both" width="383" />―여러 특징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건 뭔가요?<br />
"공유자원과 그 이용자의 범위가 명확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치적인 감시활동이 가능하고, 신뢰가 생겨납니다. 그게 없다면 비용은 아주 조금 내고 많이 가져가려는 무임 승차자들을 막을 수 없고, 결국 제도도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요소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자치적인 노력은 실패하기 쉽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스리랑카 카린디오야강(江) 관개(灌漑) 프로젝트가 예다. 강 주변 주민들은 자치적으로 물을 관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대부분의 농부가 막 새로 정착한 가난한 정착민들이어서 서로에 대한 신뢰나 토지에 대한 애착이 없고, 인종적으로 이질적이었으며, 부농(富農)들이 불법적으로 수자원을 가져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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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고, 사회의 신뢰 수준도 다릅니다. 공유자원을 자치적으로 관리하는 데 국가마다 차이가 있습니까?<br />
"국가 간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더 잘 되고, 한국은 잘 안 된다는 건 아닙니다. 국가 간의 차이라면 문화보다는 정치제도가 더 강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구소련이나 자유화 이전의 동유럽의 경우 중앙집권적인 체제 때문에 지역 수준에서 공유자원 관리를 위한 자율적인 행동이 어려웠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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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관점을 요약하자면 공유지의 비극을 피하기 위한 노력은 국가부터 지역사회까지 다중심적(polycentric)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롬 교수는 이런 관점으로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한 의견도 내놨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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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점이 기후변화에는 어떻게 적용되나요?<br />
"국가끼리 단일한 합의를 이룰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시간을 끌수록 문제는 심각해지니까요. 따라서 지역 단위에서 자발적으로 나서서 온실가스를 줄이는 제도를 만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스트롬 교수는 미국 대학 기숙사의 예를 들었다. 학생들은 난방 등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규칙을 만들고, 매달 각 동에서 쓴 에너지양을 공개함으로써 경쟁을 유발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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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시도는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지 않나요?<br />
"에너지 절약을 통해 미국 건물에 사용되는 에너지의 20%를 줄일 수 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물론 기숙사 한 곳의 노력으로 당장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런 노력을 통해 온난화로 인한 리스크를 줄일 수는 있습니다. 정부의 결정을 기다리기보다 수천 개의 도시가 에너지 절약을 위해 자발적 협약을 맺고 나서면 우리는 지구에 좋은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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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1009032118445&code=900308"><strong>[책으로 읽는 경제]지구촌 파국 막는 ‘공동체 자치’</strong></a> (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 소장ㅣ경향신문, 2010-09-03 21:18:45)<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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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효과’는 요즘 학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 각광받는 주제다. 경제주체가 행한 행위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효과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쉬운 예로 신발을 생산하기 위해 열심히 공장을 돌렸는데 그 부산물로 대기나 하천을 오염시킨 것을 들 수 있겠다. 외부효과가 손해로 이어지는 것을 외부비경제, 이익으로 이어지는 것을 외부경제라고 하는데 통상 외부효과는 외부비경제를 염두에 두기 마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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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행성의 정상적인 삶의 주기와 무관한 지구온난화 역시 외부효과에 해당한다. 외부효과는 결과로 나타나지만 내용상으로는 비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신발공장의 예에서는 지구온난화를 유발한 대기오염에 대한 비용 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 대기오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비투자를 강화하고 그 비용을 신발값에 얹거나 기업이 부담하는 방법과, 오염물질을 그냥 대기로 내보내는 대신 그 비용을 신발값에 반영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후자에서는 과정이 좀 길기는 하지만, 싼값에 신발을 산 사람들이 세금을 조금 더 내 사회 전체로서 대기오염에 대응하게 된다. 비용이 사회로 전가되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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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오염 등 외부효과가 심각하다면 사회는 외부효과(비경제) 해소책을 모색하게 된다. 그동안 찾아낸 방법은 크게 정부와 시장의 두 가지이다. 재산권을 확정해주고 협상비용을 낮춰주면 시장에서 알아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견해가 대표적으로 시장해법을 지지한다. 정부해법은 크게 보면 벌금을 매기거나 보조금을 주는 것으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영향력이 크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률적인 만큼 효율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그러나 지구온난화처럼 그 범위가 지구촌에 걸쳐 있어 시장이나 정부의 범위와 일치하지 않은 때는 정부나 시장의 해법 모두 힘을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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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엘리너 오스트롬 교수는 시장과 정부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이른바 ‘공유재의 비극’을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공유재의 비극’의 널리 알려진 사례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목초지이다. 목동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양들을 풀어서 공유한 초지의 풀을 가능한 한 많이 뜯어먹게 하는 게 합리적인 행동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양들이 뜯어먹지 않으면 다른 목동의 양들이 뜯어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과잉방목으로 초지가 파괴되면서 목동들 모두가 피해를 입는다. 이처럼 모두가 피해를 입으며 파국적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라고 경제학자들은 설명한다. 오스트롬 교수는 개별 인간의 합리성이 아닌 집단적 합리성에 주목했다. 초지, 어장 등 공동의 이해가 개입된 공유자원을 집단적 합리성, 오스트롬 교수 식으로는 ‘공동체 중심의 자치제도’를 통해 모두가 불행한 결말이 아닌 모두가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게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개인의 합리성과 개인의 합리성이 충돌할 때 냉혹하거나 획일적인 방식이 아닌 인간적인 방식으로 더 많은 이익을 지켜낼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잖은 영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항상 ‘공유재의 비극’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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