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작품)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데, 들뢰즈에게 예술은 일종의 반체계, 곧 탈중심화된 자율성의 세계다. 들뢰즈는 예술은 "반-정보"를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들뢰즈에게 언어는 정보 전달 체계이고 커뮤니케이션은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이다. 말하자면 언어는 명령 체계다. 한 사람이 애인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곧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종의 명령이다.
현대사회를 통제사회라고 규정하고 이를 고속도로에 비유하는 것은 재미있다. 고속도로는 일방통행이다. 앞만 보고 달릴 수 밖에 없다. 무한히 달릴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특정한 방향으로, 즉 지시된 방향으로만 달릴 수 있다. 그럼에도 고속도로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질주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고속도로는 사실 닫힌 체계이다. 안내 표지판은 정보체계, 곧 명령체계이며 일종의 법적 체계를 상징하는 셈이다.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표지판을 볼 때마다 자주 오른 손으로 몽둥이를 들고 왼손 바닥을 탁탁치며 운전자를 꼬나보고 있는 경찰관을 떠올린다. 그런데 우리는 표지판이 없으면 난감해하는 것이다. 이게 사실 딜레마다.
예술작품이 반-정보라는 의미는 일방향에 반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중심화의 체계를 벗어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반-정보가 본래 저항 행위이지만 실제로 저항 행위가 될 때에 한해서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아니며 커뮤니케이션과 마무런 관련이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예술작품은 최소한의 정보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통제사회는 더 이상 감금의 환경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지요. 직업과 학교를 동시에 하는 것이 멋질 거라고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지금 막 태어나고 있는 테제들, 앞으로 40~50년 동안 발전될 테제들을 잘 감시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감금의 환경 속에 강제로 군집시킬 필요가 없으며, 또 우리의 미래가 되고 있는 평생교육을 통해 학교와 직업의 정체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흥미로울 것입니다. 통제는 훈육이 아닙니다. 고속도로로 사람들을 감금하지는 않지만, 고속도로를 통해 통제 수단을 늘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고속도로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전혀 갇혀 있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데도 완벽하게 통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정보는 바로 이것, 즉 주어진 사회에서 통용되는 명령어의 통제 체계라고 간주합시다.
예술작품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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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할 때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개념을 고안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것이 아주 멋진 철학적 개념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죽음에 저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로의 대답이 상당히 좋은 대답이라는 것은 우리 시대보다 3,000년 전에 만들어진 작은 조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점으로는, 최소한 예술만이 유일하게 저항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예술은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항 행위와 예술작품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여기서 나옵니다. 예술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는 저항 행위이기는 하지만, 모든 저항 행위가 예술 작품은 아닙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저항 행위는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는 예술작품은 저항 행위입니다."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엮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322-3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