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원 훈수

2007/11/19 16:56

다이나믹 코리아의 이름값을 하는 것인지 몰라도 2007년 대선은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어지러운 양상 속에서 다음 정권을 누구에게 맡겨야 옳은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는 와중이다.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는 보수(내지는 수구세력), '87년 체제의 한계'를 얘기하는 일부 민주화세력, 거기에 '반공제일주의'의 기치를 걸고 생뚱맞게 튀어나오는 구 한나라당 일파, 비록 찻잔 속에 미풍도 일으키지 못하고 있지만 어쨌든 한 구석탱이에서 왁자지껄 하고 있는 '코리아연방'까지.

 

소위 "진보 개혁세력"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번 선거만큼 위기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타난 김경준이 어떤 폭탄을 품고 왔는지에 따라 선거판이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있는 가련한 중생들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라는 것이 그다지 명확한 것이 아니다보니 어찌되었던 공학적 계산법에 의해 제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을 통하여 판을 뒤집어야 한다는 논의도 많이 들려온다.

 

지난 1987년 이래, '민주화 세력'이라 통칭되었던 사람들은 대통령 선거시기마다 '후보단일화'라는 구호 아래 뭉쳐왔다. 돌이켜보면 이 '후보단일화'라는 거창한 구호 앞에서 항상 죄인처럼 두드려 맞았던 사람들은 "한 줌도 되지 않는", 말 그대로 진보세력들이었다. 87년, 92년의 백기완이 그랬고, 97년, 02년의 권영길이 그랬다.

 

어차피 87년 선거는 군사정권의 가공할만한 선거부정으로 인해 DJ와 YS가 후보를 단일화 했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선거였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92년 선거는 3당 합당이라는 쇼부를 친 YS의 '결단'이 있었고, 이 와중에 대항마였던 DJ가 다른 세력과의 '후보단일화'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97년 선거는 JP와 연합한 DJ가 신승을 한 한 판이었다. 이 때도 역시 빈약한 세력이었던 진보세력과 후보단일화를 하는 것이 선거승리의 결정적인 변수가 될 일도 아니었다.

 

02년 대선은 어땠나? 사실상의 인기투표로 진행된 02년 대선에서, 막판에 MJ와 합의가 틀어지게 된 노무현 측은 공공연하게 진보세력의 표를 강탈해갔다. "권영길 찍으면 이회창 된다"는 협박을 동원하여... 유시민이었던가, "이번엔 노무현을 다음번엔 민주노동당을..." 어쩌구 했던 자도 있었지?

 

이렇게 돌이켜 보면 언제나 '후보단일화' 어쩌구 하는 과정에서 생피를 보는 것은 겨우 싹을 피워보려던 진보세력이었다. 언제나 결정적 변수가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찌그러지라는 협박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 그런 아픔을 딛고 이제 그나마 의원도 만들어 국회로 보내고 겨우 진보정치의 화분에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드디어 2007년 대선.

 

항상 진보세력에게 민주화를 위해 양보하라고 설쳤던 분들이 있었다. 대놓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고,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던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 지난 2002년 대선 투표날, 권영길 후보의 주변에 늘어서 있다가 노무현이 당선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사람들은 그나마 누군지 알고나 있지, 외곽에서 얼쩡거리면서 진보세력의 등줄기로 시퍼런 칼날을 밀어 넣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류의 사람들이 어떤 수준인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때만 되면 어디선가 "비판적 지지"를 이야기하면서 "후보단일화", 이번 선거에서는 "대통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얼마 전에 일부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더니, 이번에는 "범개혁진영 사회원로"라는 사람들이 또 같은 이야기를 한다.

 

후보 단일화 하라는 이야기다. 그 단일화 대상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분들의 면면을 보면 그 이름만으로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게 만들 정도의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도대체 이분들이 무슨 근거로 이 사회의 "원로"라는 걸까? 나이 먹으면 원로인가?

 

이 분들의 성명서를 보면 다이나믹 코리아의 원로쯤 되는 분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알게 된다.

 

"그동안 시민사회가 줄기차게 주장해 온 부패척결에 나설 의욕과 자격이 있고, 경제의 성장동력을 확보하되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고 비정규직 양산 등 사회 양극화 현실에 맞서고자 하며, 바야흐로 무르익은 한반도 평화번영의 기회를 심분 활용할 열정을 품은 후보라면 그 누가 당선되어도 우리 역사의 또 한차례 큰 전진이 아니겠습니까?"

 

원로님들의 이 열정 덕분에 지난 시기 진보세력은 믿었던 원로님 이하 그 추종자들에게 허구한 날 등 뒤에 칼맞고도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지냈다. 이 원로님들 중 민주노동당이나 기타 다른 진보적 정치세력들에게 지난 각 시기 대선 끝나고 찾아와 미안하다고 사과 한 번 한 분이 없다. 원로님들은 필요 시기에 한 말씀하시고 나면 그 다음은 그냥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도 된다는 건가?

 

도대체 "그 누가 당선되어도 우리 역사의 또 한차례 큰 전진"이라는 이 발상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이 발언은 결국 한나라당의 후보나이회창만 아니라면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상관 없다는 말이 아닌가? 이분들은 결코 누구를 특정해서 지지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맥락속에 나타나는 바, 이분들이 '단일화'의 주체로 누굴 예상하는지는 분명하다. 아니, 적어도 그 중심에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이 들어설 자리를 예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결국 이 성명의 취지인 즉슨, 권영길로 하여금 이번에도 역시 대승적 관점에서 대통령 선거 포기하고 될 놈 밀어주자라는 이야기일 뿐이다. 원로님들 하시는 말씀 치고는 지나치게 속이 보인다.

 

원로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느 경우에든 자신이 가진 작은 이점에 집착하여 대사를 그르치지 말아야 하며, 패배주의에 젖어 차후의 실리를 챙기겠다는 얄팍한 계산으로 도리어 실리마저 잃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실상 이러한 성명까지 발표하면서 또다시 진보세력의 등에 칼을 꽂아 넣는 이 원로님들이야말로 뼈속까지 "패배주의에 젖어"있다는 것을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다. "한나라당 되면 이 나라가 망해", "어차피 민주노동당은 안 돼" 이런 류의 패배의식. 연세 드시면서 너무 소심해 지신 거 아닌가?

 

차라리 이분들이 각 당의 정책에 대해서 고민하고 검토하여 그 결과에 대해 비판하고, 보다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방향을 설정하여 선언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로님들이 이렇게 한 놈 밀어주자는 식으로 "패배주의"에 젖어 큰소리 한 번 울리시니, 그 중심에 서 있는 '대통합도로열린우리유사민주신당'의 후보 정동영은 "민노당과의 정책연합도 고려"하고 있다고 설레발이를 치면서 화답한다. 꼴값을 하는 거다.

 

원로님들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간단하다. 그동안 결정적 시기때마다 진보세력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치고 도망갔던 것에 대해 먼저 무릎꿇고 사과부터 하시라. 그리고 대선이 어떻게 진행되던 간에 원로답게 시대를 관통하면서 쌓아오셨던 지혜를 동원하여 사회전체에 빛이 될만한 방향을 보여주시라. 그 방향이 기껏 될 놈 밀어주자는 거라면 그건 원로의 할 짓이 아니다. 어린 것들이 언제나 불안한 어르신들의 훈수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그런 훈수가 "우리 역사의 또 한 차례 큰 전진"이 아니라 진보세력을 또다시 좌절하게 하는 '후진'이 된다는 것을 이 분들은 왜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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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 대선, 비판적지지, 원로, 이명박, 이회창, 정동영, 후보단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