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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 홍세화

그대는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의 수많은 무식한 대학생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12년 동안 줄세우기 경쟁시험에서 앞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공식을 풀었으며 주입식 교육을 받아들였다. 선행학습,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 학습노동에 시달렸으며 사교육비로 부모님 재산을 축냈다.

그것은 시험문제 풀이 요령을 익힌 노동이었지 공부가 아니었다. 그대는 그 동안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대의 대학 주위를 둘러 보라.


그 곳이 대학가인가? 12년 동안 고생한 그대를 위해 마련된 '먹고 마시고 놀자'판의 위락시설 아니던가.

그대가 입학한 대학과 학과는 그대가 선택한 게 아니다. 그대가 선택 당한 것이다. 줄세우기 경쟁에서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그대의 성적을 보고 대학과 학과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다.


'적성' 따라 학과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성적' 따라, 그리고 제비 따라 강남 가듯 시류 따라 대학과 학과를 선택한 그대는 지금까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은 고전을 앞으로도 읽을 의사가 별로 없다.


영어영문학과,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 학생은 영어, 중국어를 배워야 취직을 잘 할 수 있어 입학했을 뿐, 세익스피어, 밀턴을 읽거나 두보, 이백과 벗하기 위해 입학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학원에 다니는 편이 좋겠는데, 이러한 점은 다른 학과 입학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문학의 위기'가 왜 중요한 물음인지 알지 못하는 그대는 인간에 대한 물음 한 번 던져보지 않은 채, 철학과, 사회학과, 역사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를 선택했고, 사회와 경제에 대해 무식한 그대가 시류에 영합하여 경영학과, 행정학과를 선택했고 의대, 약대를 선택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그대의 무식은 특기할 만한데, 왜 우리에게 현대사가 중요한지 모를 만큼 철저히 무식하다. 그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민족지'를 참칭하는 동안 진정한 민족지였던 <민족일보>가 어떻게 압살되었는지 모르고, 보도연맹과 보도지침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그대는 민족적 정체성이나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대해 그 어떤 문제의식도 갖고 있지 않을 만큼 무식하다.

그대는 무식하지만 대중문화의 혜택을 듬뿍 받아 스스로 무식하다고 믿지 않는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식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문화가 토해내는 수많은 '정보'와 진실된 '앎'이 혼동돼 아무도 스스로 무식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물며 대학생인데!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에 익숙한 그대는 '물질적 가치'를 '인간적 가치'로 이미 치환했다.


물질만 획득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 자신의 무지에 대해 성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대의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그대가 무지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좋은 선배를 만나고 좋은 동아리를 선택하려 하는가, 그리고 대학가에서 그대가 찾기 어려운 책방을 열심히 찾아내려 노력하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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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학이란 무엇인가?

전산학이란 무엇인가?

전산학은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많이 다르며, 내가 과거에 생각했던 이미지와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낀다. 전산학의 본 모습은 전산학의 수학적 기원과 그 수학 아이디어의 물리적인 실현의 의미를 살펴 봄으로써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전산학

대부분의 사람이 전산학을 단순히 '프로그램을 짜는 것'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유용하고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이론적인 작업도 함께 병행되고 있다. 오히려 전산학의 중심 그룹에서는 이론적인 작업이 실용적인 작업을 압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산학은 '요즘의 전산학'에 가까운 것 같다. 즉, 현재 전산학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며 쉽게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을 중심으로 전산학을 인식한 것이다. 컴퓨터를 켜면 그 속엔 웹 페이지, 게임, OS, 각종 응용프로그램 등등 누군가의 '열혈 코딩'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들로 가득차 있으며, 서점에 넘쳐나는 컴퓨터 책들 또한 개발 도구, 개발 방법을 다룬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현재의 용도와 유행에 기반을 둔 인식이 아쉽다. 근 20년 동안 사람들의 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컴퓨터의 빠른 계산 능력과 다양하고 좋은 응용프로그램 덕분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능력을 인정받아 화려한 스타로 부상되기 이전의 모습과 그 기반에 대한 관심은 너무도 적다. 그저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으면 그만이랄수도 있지만, 전산학을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조금 더 깊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수학의 분과로서의 전산학

전산학은 기원전부터 생긴 수학과 함께 자라와 근래에 본격적으로 갈라져 나온 수학의 한 분과이다. 컴퓨터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단위의 연산법인 Boolean Algebra, 미분, 적분, 논리식의 유츄 등의 기호 연산법, 그리고 간단한 알고리즘이라 할 수 있는 곱셈, 나눗셈에 이르기까지, 현재 전산학의 여러 가지 개념과 기본 원리는 수학에서 수세기 전에 먼저 성립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까,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기계적인 컴퓨터의 모델도 수학자 Alan Turing에 의해 만들어졌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Turing이 Turing Machine으로 본 뜨려했던 대상이 수학자'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컴퓨터의 기본적인 개념과 능력은 끈끈하게 수학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전산학이 수학 분야(대수학, 해석학 등등)로서 남지 않고 근래에 갈라져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의 컴퓨터라는 기계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배려 때문이라 생각한다. 기계를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 실제로 Computer Science라는 학문이 생긴 것도 쓸만한 기계가 나온 시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전산학이 수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물리적 실현으로서의 전산학

전산학이 기계로 실현된 역사를 살펴보자. 이것 또한 그 시작을 찾자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국의 주판으로부터 파스칼의 계산기, Babbage의 Analytical Engine, 그리고 20세기 중반의 ENIAC,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 눈앞에 있는 PC에 이른다. 이 기계들이 계산을 빠르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이들이 수학 아이디어의 실현인 것은 확실하다.

물리적으로 실현된 컴퓨터는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신대륙이었다. 새로운 공간을 제공하고 세상과 상호작용함으로써 단순히 수학 아이디어가 3차원 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과 그 속의 네티즌들, 실제를 방불케 하는 게임들, 그 공간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창조물(프로그램)을 만들기, 다른 컴퓨터나 기계와의 연결을 통해 공간 확장시키기 등, 많은 것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산인으로서 요구되는 자질

'Art of computer programming'의 저자인 Donald Knuth교수는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전산인이 되어야 함을 시너지의 관점에서 주장한 바 있다. 현재 전산학은 수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도 물리적인 실현(기계적인 컴퓨터 또는 소프트웨어적인 프로그램) 또한 중요한 학문이다.

 

수학적 모델을 만들고 그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 - Theory

전산인으로서 연구대상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이들에 대한 수학적 모델을 만들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필수적이다. 요즘의 전산학을 보면, 컴퓨터와 다른 분야를 접목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HCI, AI 처럼 사람과 컴퓨터를 같이 연구해야 하는 경우, Computer Architecture, Networking등 전기전자 지식이 필요한 경우, 생물학과 연관된 bioinformatics의 경우도 있다. 이렇게 다른 분야와 컴퓨터가 접목되는 경우, 컴퓨터는 주로 어떤 대상을 모델링하여 실험 또는 시뮬레이트하거나, 연구를 돕는 도구를 만들게 된다. 이때, 대상의 중요한 특성을 수학적으로 본뜨고 컴퓨터에 표현해 내는 능력과, 그 모델이 제대로 된 것인지,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핵심이 된다.

그와 함께 전산학의 이론 지식 또한 중요하다. 수학적인 바탕 위에 세워진 전산학의 특성을 알아야만 어느 수준까지의 모델링을 컴퓨터로 실현 가능한지, 어느 정도로 효율적으로 구현 가능하지를 알 수 있다.

수학적인 모델은 서로간의 의사소통 수단과 구현의 밑바탕으로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많은 경우 전산학이 다루는 대상의 모델을 정확하고도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수학식보다 나은 것은 없는 것 같다.

 

효율적이고 유용한 실재물을 만드는 능력, Practice

이렇게 다른 분야와 접목된 경우, 전산학에서의 역할은 좋은 프로그램 또는 기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외부적인 기대만으로도 이것의 중요성은 충분히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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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지능과 컴퓨터의 한계에 대하여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웬만한 기업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직원들이 컴퓨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고 있고, 사회적으로는 마치 컴퓨터를 모르면 당장 낙오자로 도태할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컴퓨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계속 높아가는 이 때에, 과학 소설(SF)의 관점이 아니라 과학적인 관점에서 컴퓨터의 능력과 가능성을 고찰해 보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흔히 주변에서(특히 선정주의적 언론으로부터) 마치 컴퓨터가 만능의 기계이며 머지않은 장래에는 인간 역할의 대부분을 대치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얘기를 듣는다(전산학에서 이렇게 인간의 지적 기능을 컴퓨터에게 부여하려고 하는 연구 분야를 인공 지능 분야라고 한다). 한편으로 컴퓨터의 실제 사용자들로부터는 컴퓨터란 인간의 작업 지시(=프로그래밍)가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쇳덩어리에 불과하며 지능이라고 부를 만한 고유한 속성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도 듣는다. 과연 어떤 말이 진실일까?

컴퓨터가 종종 의인화되긴 하지만 컴퓨터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컴퓨터는 엄밀하게 정의된 업무를 매우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도록 설계되었고, 실제로 잘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는 상식적인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 반면에 사람은 가끔 복잡한 계산에는 허둥대지만 이해하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핵물리학의 문제를 계산할 수 있다고 컴퓨터를 똑똑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나, 컴퓨터는 풀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똑똑하다는 의미 자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평은 컴퓨터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할 만도 하다. 비록 지시된 계산을 단순히(?) 수행하는 것이 추리나 판단같은 능력보다는 저급일지 몰라도 이러한 측면 역시 지능의 한 구성 요소라고 보는 것이 보다 공정한 판단일 법하다. 또한 어느 정도의 인식력과 추리력같은 지적 능력을 보일 수 있도록 컴퓨터를 프로그램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정말로 컴퓨터에 지능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지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갖기 때문에, 윤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오늘날의 기술 능력을 공상 과학 소설의 세계로 확장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주어진 프로그램(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잘 정의된 기계적 절차" --- 이것을 수학과 전산학 분야에서의 전문 용어로는 "알고리즘(algorithm)"이라고 한다)을 실행하는 컴퓨터의 궁극적인 능력을 알기 위한 과학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컴퓨터 능력의 한계에 관한 많은 연구 결과는 20세기초에 논리학 분야에서 수행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의 능력은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부터 충분히 예견되고 있었다. 한동안 수학으로 분류되던 분야가 요즘은 전산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어느 분야에 속하냐에 관계없이 이 주제는 수학적 사고의 능력과 한계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가 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수학자 힐베르트(Hilbert)는 어떤 수학적인 명제가 입력으로 주어질 때 이의 참과 거짓을 알아내는 알고리즘을 찾고자 하는 일종의 "수학 자동화"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후 1931년에 이 방면의 연구에서의 금자탑(사실은 수학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과 과학 분야를 통털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업적중의 하나)이라고 할 수 있는 괴델(Godel)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즉 그러한 알고리즘은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한 유명한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를 발표한 것이다. 그의 결과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모든 수학적인 논리 체계에는 그 논리 자체로써는 증명할 수 없는 참인 명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초등 기하학의 명제일지라도 그 내용은 경험이나 관찰의 결과와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기하학에서는 경험이 아닌 연역, 즉 논리적 증명으로 정리가 확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공리적 방법의 특징이다. 신뢰의 바탕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이다. 기하학의 공리적인 방법은 희랍 이후 강한 영향을 학문 세계에 끼쳐 왔다. 몇 개의 공리(이걸 공리계라고 한다)가 무한히 많은 명제를 도출하고, 논리만이 그 진리성을 보증한다. 이 간단한 방법을 통하여 인간은 수학적 공리계를 과학적 지식의 모델로 삼을 수가 있었다.

괴델의 이론은 이 공리적 방법에 한계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희랍 이후의 전통적인 수학의 진리관이 일대 충격을 받은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괴델은 어떤 수학의 논리 체계도 본질적으로는 불완전함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n개의 공리를 채택하는 수학 체계에서는 이 n개만의 공리를 바탕삼은 연산으로써는 답을 낼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이 체계를 완전히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 체계 밖에서 적어도 한 개의 새로운 공리 즉 n+1번째의 공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이 새로운 공리를 도입하여 문제의 명제를 증명했다고 생각하자. 그러나, 설령 이 명제가 증명되었다 해도 새로이 보충된 공리로 인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리계는 또 다시 자신 내에 자신의 공리계만으로는 증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명제가 있다는 것이다. 모순이 없는 어떤 공리계가 주어졌을 때, 여기서 유도될 수 없고, 그러면서 참인 명제가 그 체계 안에 있다는 것은 공리계로서는 견딜 수 없는 치부이다. 이 괴델의 정리는 모순이 없는 완전한 수학을 만들려는 인간의 의도를 허망한 바램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철학적인 면을 확대시켜서 어떤 학문 체계나 조직 사회에 적용되는 논리 구조를 생각하면, 그 속에서 통용되는 어떤 공리(척도)를 가지고 학문이나 조직의 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척도가 아닌 새로운 하나의 공리가 반드시 더 필요한 것이다. 이 원리를 확대하면 정치 문제, 경제 문제, 사회 문제 등은 언제나 그 자체 속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갖는다는 철학적인 명제가 된다. 실제로 이 원리의 내용은 수학뿐만이 아니라 철학계나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렇게 일단 풀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함이 증명된 후 많은 학자들은 풀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여 여러가지 계산 모델을 제안하였다. 클레이너(Kleene)는 "부분 재귀 함수(partial recursive function)"를, 처치(Church)는 "람다 연산(Lambda Calculus)"을, 포스트(Post)는 "포스트 체계(Post System)"를, 그리고 튜링(Turing)은 "튜링 기계(Turing Machine)"를 각각 제안하여 풀 수 있는 문제의 범위를 결정하는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이런 시도는 대개 1935년을 전후하여 된 것으로, 현대적인 컴퓨터가 발명되기 이전에 이미 사람들은 알고리즘으로 풀 수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정의되어 성능면에서도 차이가 있을 걸로 생각되는 여러가지 모델들이 실제로는 계산 능력면에서 동등함이 밝혀졌으며, 이에 근거하여 이 모델들에 의해서 계산될 수 있는 문제들이 바로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풀 수 있는 문제들과 정확히 일치할 것이라는 가정이 있는데 이를 "처치 논제(Church Thesis)" 또는 "처치-튜링 논제(Church-Turing Thesis)"라고 한다. 물론 이 가정은 아직 증명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풀 수 있는 함수 또는 문제"에 대해서 아직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정은 옳을거라는 심증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가정(conjecture)이라 하지 않고 논제(thesis)라 한다. 이들 모델중에서 현대 전산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바로 튜링 기계이다.

여러 기종의 컴퓨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컴퓨터의 궁극적인 능력을 조사하는 데에는 컴퓨터의 속성에 대한 일정한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컴퓨터 기술이 개발되기도 전인 1930년대에 튜링이 이 작업을 완료하였다. 튜링은 그의 1936년 논문에서 괴델의 이론을 재구성하여 그것을 구체적으로 기계에 적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튜링 기계라고 불리우는 튜링의 추상적인 기계는 계산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어떠한 알고리즘 기계도 튜링 기계의 한 특수한 경우라고 여겨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알고리즘적 처리에 의하여 해결 가능한 모든 것은 튜링 기계에서도 수행할 수 있다. 더구나 튜링 기계는 알고리즘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만을 수행한다. 따라서 어느 문제가 튜링 기계로 해결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그 문제는 어떤 알고리즘 기계로도, 즉 현대의 최신형 컴퓨터로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은 사실상 컴퓨터가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정한 과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게 프로그램을 할 지라도 모든 문제(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면과 관련한 문제는 아예 차치하고 수학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컴퓨터는 결코 인간의 지적 기능을 대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보라! 정서적인 측면은 고사하고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에서조차 컴퓨터 혹은 알고리즘적 기계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함이 수학적으로(수학의 한계와 수학의 능력!) 증명되지 않았는가!"라고. 실제로 이러한 주장이 인공 지능에 대한 수학적 비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주장의 헛점은 인간의 두뇌가 논리 체계가 아니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단정은 전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지적 능력의 상당 부분은 알고리즘적 논리 체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두뇌도 어느 정도는 동일한 괴델의 한계에 얽매이게 된다. 약 10년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호프스태터(Hofstadter)의 조심스러운 주장에 따르면, 괴델의 한계를 만드는 논리 체계의 특성이 오히려 컴퓨터에게 의지나 자아와 같은 인간적 특징을 나타내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고 있다.

이 이론에는 또 다른 단점이 있는데, 이는 어떠한 시스팀도 스스로의 문제점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동시에 다른 시스팀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였다. 인간의 경우에도 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 결함을 보충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컴퓨터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다른 시스팀들의 도움을 받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컴퓨터의 능력에 대한 수학적 한계는 분명하게 그어져 있다. 그러나 이 한계를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철학, 수학, 논리학, 언어학, 심리학, 생리학, 뇌신경학, 전산학 등의 종합 학문으로서의 인공 지능 연구는 그 장래가 여전히 열려 있다고 하겠다.

참고로, 이러한 내용의 전모를 쉽게 이야기해주는 괜찮은 교양서가 한권 있다.

제목: 괴델(원제: Go"del- A Life of Logic) / 몸과마음 /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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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problem?

노벨 경제학상과 튜링상을 수상했고, 인공지능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허버트 사이먼은 "문제(problem)"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뭔가를 원하는데, 그것을 얻기 위해 행하여야 할 일련의 행동을 즉각적으로 알지 못하는 경우 그 사람은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A person is confronted with a problem when he wants something and does not know immediately what series of actions he can perform to ge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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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면 가벼워지는 것을

버리면 가벼워지는 것을

-무명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무엇을 가지고자 함인가
저마다 무거운 삶의 짐 바위짐이라
허덕이며 비틀거리며 휘청이며 가네
부귀 공명을 누려도 그 뿐이요
권세 영광을 잡아채도 구름인 것을

숨막히는 턱턱한 세상인가
생명을 초개같이 버릴지라도
그 생명의 가치는 알고나 가지
귀뚜라미 울음소리 처량해도
어제 떠난 사람은 이 소리 못들을 터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지

마음을 비우면 가벼워 지는것을
욕망을 비워내면 살만한 세상인 걸
투명한 햇살 한줌 가슴에 퍼 담고
살랑이는 바람 한결 치맛자락 내어주고
잔잔한 작은 미소 얼굴에 피워올려
오늘 하루 생명의 찬가를 부르리

고뇌를 안주삼아 술을 마셔보지 않고는
절망을 이불삼아 뒤척여 보지 않고는
마지막 죽음 낭떠러지 대면해 보지 않고는
인생의 묵은 맛을 어찌 익히랴
세상 욕망 비우고 나면
다 잃어 버리는게 아니고

그때부터 삶 은 참 자유를 찾아
나무가 내게 말을 거는 소리를 듣게 되고
꽃들이 웃으며 속삭이는 소리도 듣게 되고
강물이 흐느끼며 흐르는 이유도 알게된다

이제 가볍게 감사하며 살아야지
세상 욕망 훨~~~훨 다 벗어 버리고
버리고 비우면 가벼워지는 것을.
훠~~~ 훨 ~~~ 훨
자유로워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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