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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17
    밀린 '교양'서적 이야기
    hongsili

밀린 '교양'서적 이야기

작년에도 연초에 반짝 열심히 포스팅하고 하반기로 갈수록 흐지부지하더니 ㅋㅋ

매년 비슷한 패턴 반복...  올해는 뭔가 더욱 어수선한 것이 과연 월드와이드 질풍노도 시대 다운 현상이다.

 

# 폴 블룸 [공감의 배신]

 

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시공사, 2019

 

뭘까... 도전적 문제제기에 동의하고 이걸 어떻게 풀어갔나 궁금해서 책을 골랐을 뿐인데 스티븐 핑커, 조너선 하이트, 피터 싱어 줄줄이 딸려옴...  모두 석연치 않은 사람들... ㅜ.ㅜ

그리고 책은 조금 실망스러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계속 '서론'만 반복되는 느낌이랄까.

 

사람들이 온갖 좋은 것에 공감이라는 개념을 다 가져다 붙이고,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을 구분하지 않고 쓴다는 점, 도덕적 동기가 마치 유일하게 공감에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점에는 나도 백퍼 동의.
나도 공감 싫어함. inequality of what? 이라는 아마티야 센의 질문처럼 누구에게, 무엇을 공감할 것인가에 따라 공감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일수도 있고, 세상 무서운 흉기일 수도 있음. 공감 자체에 반대한다기보다, 공감이 도덕적 잣대로 쓰이고 절대화하는 것에 반대. 도덕적 판단은 꼭 그사람이 되어보지 않아도 감정을 그대로 느끼지 않아도 가능하고 여러 가지 다른 기준들이 있음. 예컨대 정의론이 그렇잖여?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라는 저자의 비유에 "공감" (이 때의 공감이란 '동의'라는 뜻). 다수의 피해를 두고 눈앞의 생생한 서사를 보여준 개인에게 집중하는 '인식가능한 희생자 효과'로 명명할 수도 있음.


개념적으로 정의하자면 공감(empahy)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 . 애덤 스미스 등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는 이걸 sympathy 라고 지칭했는데 저자는 이를 '연민'으로 개념화 (나는 전자를 감정이입, 후자를 공감이라고 부르겠소만.. 번역 상의 문제인 것 같음). 즉 empahty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고, sympathy or pity 는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개인의 반응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듯함, 관심, 배려의 감정. 연민은 내가 타인에게 느끼는 것이지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은 아님 (심지어 명상수련자가 참여하여 이걸 functional MRI 로 실험한 연구도 있음 ㅋ)

"직감에 의존하는 판단에는 결함이 있다... 우리가 공감과 같은 직감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직감의 노예는 아니다. 전쟁에 돌입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비용편익 분석을 거치면서 내자식에게는 사랑을 느끼고 생판 남에게는 특별한 온정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내 자식의 삶이 중요한 만큼 남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판단도 행동도 더 잘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못생긴 사람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선호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마음에 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선호를 기준으로 도덕적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도 안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적 행동, 우리의 추론 능력, 우리의 도덕성과 관련하여 우리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줄 알는 능력이다.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능력 덕분이다."


도덕의 범위는 역사를 거치며 확장되었고, 소수자의 권리를 대하는 태도 또한 포괄성 쪽으로 번화해왔는데 이는 ".. 역사과정을 거치며 우리 마음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증조부모 세대보다 공감을 더 잘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정말 내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보다 더 추상적인 이해를 반영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타인의 삶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성이란 부분이 한꺼풀 벗겨내면 몹시도 취약한 것도 사실이지만 (많은 심리학 실험들이 간단한 암시에 의해서도 사람들이 도덕적 판단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줌), 그토록 취약한데 학문은 왜 존재하나? ㅋㅋㅋ 사실 이성조차도 환경 자극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성의 우수함이라고 생각하는디 ㅋ

공감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극단적 사례가 소시오패스인데, 이들은 타인의 마음 헤아리기, 즉 인지적 공감능력이 매우 빼어나지만(그래야 가학도 할 수 있음) 이를 조정하고 필요한 곳에 이용 (정서적 공감은 취약).  이걸 두고 '특정한' 공감능력 결핍을 문제삼기보다는 얕은 감정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는게낫다고 설명

 

책 자체는 공감=선 이라고 하는 헛된 믿음(마치 종교가 없으면 도덕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프레임)에 균열을 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인데 너무 논의가 얄팍해서... 에잉...

 

# 벤스 [힐빌리의 노래]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흐름출판, 2017

 

 

전반부 어린이, 청소년 시기 힐빌리로서의 직면했던 현실에 대한 담담한 서술은 낯설고도 낯익은 이야기. 지구 반대편 러스트벨트의 쇠락은 피부색을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그대로 디트로이트  흑인 이주민의 이야기.
불행을 경쟁할 필요는 없다만 백인의 피부색을 갖고도 깊은 절망과 박탈에 직면하며 무너져가는 힐빌리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여기에 더해 비자발적으로 뿌리뽑힌 고향없는 삶과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제약에 갖힌 흑인들의 삶을 저절로 떠올릴 수밖에...

멀리 부르디외 센세의 '세계의 비참',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 Thomas Sugrue의 The origins of the urban crisis, 그리고 최근의 영화 Moonlight, Florida project 까지 동시에 떠오르면서 미국 사회에 깊은 한숨...

하지만 한국의 사당동25 그리고 내가 만났던 underclass 청년들이 직면한 삶도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나는 아직도 택배 상하차 일이 제일 쉽다는 청년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음. 남들은 지옥, 노예노동이라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번듯한 졸업장과 인지적 자원, 사회적 자본, 정서적/사회적 기술을 전혀 익히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덜 부담스러운 일.....

그나마 닻이 되어주는 (그야말로 anchoring) 버팀목 하나만 있어도 아주 심연으로 추락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러한 삶의 공통점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역사 속에 배태된 개인의 회고록. 풍부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분석'에까지 이르지 못함. 아마도 이것이 세계의 비참, 혹은 The origins of the urban crisis 와 다른 점.
이웃 힐빌리들에게 따끔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당사자성이라는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겠지만, 개인이 아무리 정신차린다 해도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음. 타고난 금수저들이라면 대충 해도 가질 수 있는 자원들과 기회들인데, 모든 존재를 갈아넣어서야 그것들을 획득할 수 있다면 wear & tear - 출발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 수밖에...

 

이 책이 인기를 얻고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 심지어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좀 불편.... 

만국문화박람기도 아니고 남의 나라 빈곤과 불평등 내러티브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고통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세상에 이런 비참함이? 내가 모르는 어떤 세계, 그곳이 아마존 밀림의 어느 수렵채집부족일 수도 있고, 미국 내륙 깊숙이 힐빌리일 수도 있고.... 인간 자체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나쁘다 할 수 없으나 (나도 엄청 집중해서 읽기는 했음), 최소한 이 책이 (한국) 연구자를 위한 책이거나 (한국) 연구자에게 울림을 주는 책이어서는 안 될 것 같음. 연구자의 계급적 성격이 점차 상층 편향되면서 이런 종류의 생생한 '체험'담이 연구자들에게 간접 경험과 정서적/인지적 자극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부정하려는 건 아님.. 책 그 자체보다 책을 둘러싼 국내 사회과학 연구의 풍토, 연구자의 계급성, 출판 시장 등등.. 이런게 불편함. 연구자의 책무라면 이 책을 읽고 추천글을 남기는게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underclass 의 삶을 탐구하고 분석해야 하는게 아닐까 말이지...

 

 # 최종희 [대구경북의 사회학]

 

대구경북의 사회학 - 대구경북 사람들의 마음의 습속 탐구
대구경북의 사회학 - 대구경북 사람들의 마음의 습속 탐구
최종희
오월의봄, 2020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과연 이것이 대구경북만의 특별한 속성일까?
이를테면 다른 비수도권 지역 호남, 충청 사람들은 전혀 다른 마음의 습속을 가지고 있을까?
책이 보여준 마음의 습속은 내가 그동안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왜 이런 습속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것이 어떤 점에서 다른 비수도권 혹은 전근대의 잔재로 존재하는지 등에 대해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많이 아쉬움 ㅜ.ㅜ

 

# 마크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리시올, 2018

 

90년대 초중반에 이런 종류의 문화/정치 비평을 엄청 읽은 것 같은데.. ㅡ.ㅡ
마르크스주의, 좌파적 관점에서 대중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 마치 끝판왕처럼 보이는 현존 자본주의 체제의 균열과 틈새를 찾아내고 급진적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움직임에 몰두했던 일련의 '세대'가 한국사회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나에게 추천해주신 분들은 어떤 새로움을 보았던 것일까??

 

포스트모더니즘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저자가 선호하는 이유 -

1) 포스트모더니즘 테제가 처음 발전된 1980년대에는 적어도 명목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 있었지만 지금은 '더 깊고 훨씬 더 만연한 고갈의 느낌,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볼모의 느낌'. 그 때는 그래도 현실 사회주의가 존속하고 있던 시절. 80년대는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독트린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된 시기, 2) 그래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더이상 모더니즘과의 대면을 무대에 올리지 않으며 모더니즘에 대한 극복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 3)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온전한 한 세대 경과. 자본주의는 식민화하고 전유할 외부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 ===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가 역시 끝판왕이라고 진단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진단 어디에서 급진성을 찾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음 ㅡ.ㅡ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품고 있는 아포리아

1) 정신건강 - 이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건강질환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체계이기는 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 2) 관료주의 - 관료주의는 스탈린주의적 유물이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쇠퇴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관료주의는 일상의 일부이며 새롭고 탈중심적인 형태를 통해 오히려 증식. 이 두 가지 문제에 특별히 초점을 두는 이유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명령이 지배하는 문화영역인 교육을 특징짓고 있기 때문 ===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는 커녕, 국가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성장했다는 데이비드 하비의 분석이 더 설득력 있는데??? 정신질환은 과연 자본주의의 징후인가? 지나친 일반화 아님? 영국적 맥락에서는 그럴 법도 하다만, 전 세계로 시야를 넓혀보면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말여..  유로센트릭 관점은 사실 책 곳곳에 드러남. 읽는 아시아 사람 기분 나쁨 ㅡ.ㅡ  영국 교원노조가 팔레스타인 인권 고만 이야기하고 계급 이슈에 좀더 천착하다는 것 등...  무슨 맥락에서 말하는지는 알겠으나 말이지.

이를테면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의 바깥 테두리를 표지'해주는 상태라면 양극성장애는 자본주의 '내부'에 고유한 정신질환이라는 설명..... 응? "현재의 지배적 존재론은 정신질환의 사회적 인과성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부정한다. 정신질환의 화학-생물학화는 당연히 그것의 탈정치화로 이어지게 된다. 정신질환을 개인의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하면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게 된다 1) 원자적 개인화를 향한 자본의 추진력 강화, 2) 다국적 제약회사에 수익성 높은 시장 제공 "  === 지배적 담론이 생물학적 설명에 기울어져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미 학술 커뮤니티 안에서도 사회적 기원 혹은 사회적 요인에 의한 영향에 대한 논의가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닌데 너무 느낌적 느낌으로 기술하신 것 같음 ㅋ

 

아니 관료주의 비판하면서도 "진정으로 새로운 좌파의 목적은 국가를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일반의지에 종식시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거대 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의심에 맞서 우리는 이러한 징후들이 모두 고립된 우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적 원인, 즉 자본의 효과라고 재단언해야 한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또 지리학적으로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전략들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발전시키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 "라니, 뭔  하나마나한 공자님 훈계말씀인가. 이미 1980년대에 앙드레고르가 에콜로지카에서 " 사회주의가 만약 도구를 바꾸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보다 나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우리는 의학적 질환으로 간주되는 광범위한 정신질환 문제를 유효한 적대로 전환해야 한다. 정서적 장애들은 불만이 내면에 갇혀 있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불만은 외부로 방향을 돌려 실제 원인인 자본을 겨냥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근데 여성들은 자본만큼이나 가부장주의가 더 문제인 거 같은데? 무슨 생뚱맞은 자본주의 대환원론인지.. 20년만에 이런 거 보니 좀 참신하기는 하다 ㅋㅋㅋ 20년전 혈기왕성하고 마음 앞서나가던 마르크스주의 새내기 비평가 글을 보는 느낌적 느낌...  

 

"역사의 종언이라는 어둡고 긴 밤을 엄청난 기회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억압적으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대안적인 정치적 경제적 가능성의 의미한 기미만 보여도 뜻밖의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온 그 반동의 회색 장막에 구멍을 낼 수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 사실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계급적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데올로기를 수반했고, 항상 당대에 대안은 없다는 이념 하에서 작은 균열들이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여준 것이 사실.. 이것이 비단 자본주의만의 일은 아니잖여???
 

반성적 무기력 (reflexive impotence) - 사태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음. 이는 영국 청년, 청소년의 집단적 병리로 우울증적 쾌락 (depressive hedonia) 상태에 빠지게 만듦.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상태를 일컫는 개념

 

나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전반적으로 나랑 안 맞음 ㅋㅋㅋㅋ

실증 자료도 없고, 현실 정치 노력도 없고, 그렇다고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는 '전략'이나 주체에 대한 치열한 탐구도 없고, '부재'로부터 도출해낸 가능한 미래에 대한 상도 없고...
온라인 상에서 손꾸락 놀리는 살롱 좌파들의 평론가 놀이가 나는 싫은 거임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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