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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찌마와리

아카데미 빌딩에 극장. 곧 문을 닫을 것 같은 곳에 몇 커플들이 오고간다. 예전 광주극장이 이랬다. 사람이 별로 없는 극장엔 꼭 습기 먹은 냄새가 난다. 스륵스륵, 호텔 아프리카에서 어린 연인들이 큭큭대던 극장이 생각난다. 철 지난 영화는 그곳에서만 상영되었다. 영은이와 나는 분홍색 극장에서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를 봤다. 해피투게더는 아니였는데 그 영화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대신 영은이는 영화가 끝나고 나와 편의점에서 내게 해피투게더 ost를 주었다. 듣기 좋았다. 손을 꼭 잡았던 것 같기도 하다. 비가 눅눅하게 왔던 것도 같다.
 
 
다찌마와리를 본다. 류승완의 영화는 엉뚱하다. 설마설마하는 것들을 그는 영화로 찍어낸다. 철지난 말들과 철지난 행동들이 다시 살아난다. 다찌마와리가 질질 흘리는 콧물에서 웃음이 터진다. 설마설마 그런 걸 영화로? 이런 생각이 들 정도의 장면이 실제 한 장면으로 자리잡는다. 너무 원초적인 장면에, 너무 더러워서 웃음이 난다. 어렸을 때 똥 이야기만 나오면 큭큭였던 때로 돌아간다. 그의 웃음도 그치질 않는다. 예전에 무한도전을 보면서 몇 번 이런 웃음을 웃었다. 무한도전을 보며 미치게 웃었던 마지막은 롤러코스터에서 정준하가 자장면을 먹던 장면이었던 것 같다.
 
 
왜 대체 다찌마와리의 행동과 말들은 웃음이 날까. 단지 그 경직된 태도나 말투 때문이 아니다. 도덕교과서 같은, 아직도 도덕 교과서에서 그런 내용이 나오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제목의 부제인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와 같은 말들, 이 세상 어느 누구가 수긍하며 지키겠는가 싶은 너무도 옳은 말들. 그 옳은 말들이 우습다. 선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우습다. 대체 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혼란이 다찌마와리에게 없다. 그에게는 신의 말을 하달받은 듯한 분명함만이 보인다.
 
 
놈놈놈에서도 그러했지만 다찌마와리에서도 독립군과 일본인이 나온다. 일제강점기는 이제 우리 역사 속 스케일이 넓었던 배경으로 인식되나보다. 하지만 나는 그 배경보다 그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간형을 보게 된다. 대학교를 입학했을 때 어떤 책에서 분단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인식 속의 분단으로 남아있다는 구절을 읽었다. 난 그 구절이 당시의 시대 감각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통일을 해야한다는 당위성을 독자에게 각인하기 위한 협박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분열증, 그 분열증을 지우기 위한 지독한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 난 놈놈놈과 다찌마와리에서 그런 군상들을 본다. 그곳에서 분열되지 않은 이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다찌마와리이다. 그는 남한에 살아있지 않은 인종이다. 그래서 그가 우스운 것이다. 남한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다찌마와리처럼 살 수 있으리. 그는 현실에 있을 수 없는, 현실에 유용하지 않는, 그래서 저주 받는 가치들, 꿈, 사랑, 평화, 연대와 같다.
 
 
이명박 정권이 오래된 캐캐묵은 망령을 들고 나왔다. 색깔전, 이 오래된 색깔전이 여전히 사람들의 눈을 덧씌우리라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분단의 상태이고, 그렇기에 좌우의 색깔전은 그들에게 유효하고 유용해보이나보다. 그들의 세력을 모으기 위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그들은 오래된 망령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지금의 일들은 좌우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위협받는 생명과 관련된 문제들이 어떻게 좌우의 문제로 축소되는가. 우리는 권력의 꿰임에 줄이 걸렸다. 여기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춘다면 우린 우리의 분열증을 여전히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변명만을 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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