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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홈피, 2004. 10. 1.

오늘부터 일기를 좀 써야지. 근데 왜 일기를 아침시간에 쓰게 되는건지 -_-;; 내 생활패턴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버엉)

오늘 새 마음으로 홈피 새단장을 했다. 이딴 수단으로 새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 꼴이 우습다면 우습지만 -_-;; 어쨌든 중요한건 새 마음을 가다듬었다는 사실인 거다!! 그렇게 믿는거다 -_-;;



이성, 아우슈비츠를 불러왔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이제는 더 이상 믿을만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것. 아니, 그렇게 믿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것이랄까. 뭐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그럼 히틀러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졸라 이성적이었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게냐.

상대성, 리좀, 탈중심, 탈권위, 해체 등등의 셀수없이 많은 말장난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또 거기서 유행과 공감을 얻을 수 있게 한 이 이성이라는 거, 나도 많이 부정하고 살았다. 입으로 진보 사관을 나불거리면서도 나의 역사관은 진보 사관이 아니에요 하고 발뺌도 해봤고. 한때 푸코와 장자에 미쳐 살던 내가 스스로를 모더니스트라고 칭할 날이 올 줄이야, 하 참.

사실 이성과 감성, 합리와 비합리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어차피 똑같이 뇌의 작용 아닌가. 합리는 비합리에 의해 영향받고 비합리는 합리로 치장되기도 하는 것을. 이것은 거꾸로 뒤집으면 이성에 대한 비이성적 마녀사냥을 굳이 정당화할 수 있는 계제도 없다는 말이 될뿐이다.

얼마나 무수한 인간군상들이 인간의 비합리성과 악한 본성을 논하며 진보를 부정하고 현상태를 정당화했던가. 어차피 그런 것이니 그 속에서 최적의 전략을 찾으라... 언뜻 솔깃하게 들리는 이 레파토리는 사실,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구호 아래 세상을 바꾼 사람들의 집단이 50년만 지나면 채택하곤 하던 레파토리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 속에 행복한 천년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던 중세의 창시자들은 50년만 지나면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기 시작하고, 인간 이성의 승리와 진보를 부르짖던 부르주아들은 50년만 지나면 이성의 한계와 역사의 종말을 논하기 시작한다.

물론 보편적 이성 같은 건 존재하지도, 존재할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비합리에 대한 어떤 변명이 된다는거냐. 오히려 이성의 한계를 이성을 통해 명확히 알고, 인간이 어떤 한계선에서 어떻게 돌변할수밖에 없는가를 밝게 아는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대략 리뉴얼에 대한 변명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스트에서 모더니스트로 선회하는 나 자신의 궤적을 보노라면, 즉 직관과 의지를 찬양하던 내가 이성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언젠간 시장도 찬양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_-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의 한계와 존재를 더 밝게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 그러니까, 이성의 횃불을 들고 해방을 향한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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