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힘…… 즐거움과 숙연함을 오가며

도봉여성센터 아동인권 교육 중에서

 

“보육 돌봄 전문가”라는 낯선 이름, 그러나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영역’에 관여하게 될 분들일 거라는 추측. 지난 6월 23일 도봉여성센터에서 진행된 ‘아동학대 예방과 아동인권’ 교육은 경력단절여성들의 재취업프로그램의 하나로 개설된 ‘내일은 보육 돌봄 전문가 양성과정’ 중의 하루 일정이었습니다. 교육과정 시간표를 보니 주로 어린이집, 지역 아동센터 등을 운영할 분들을 위한 과정인 듯했습니다. 물론, 왜 하필 경력단절여성들에게 ‘돌봄노동’으로 재기하시라는 프로그램을 구성했을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며 안타깝기도 했습니다만…… 
총 4시간 교육의 전반부는 아동인권 전반에 대한 질문들을 담아 PPT 강연을, 후반부는 ‘나도 한때 아이였다-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한 책 읽기’ 정도의 주제로 모둠 활동을 하게 되었답니다. 오늘 꼬물꼬물에서는 참가자들과 그림책을 읽으며 나눈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우선 다룰 주제는 “애 취급/ 자기 결정권의 주체 / 보호주의 / 폭력”이었습니다. 애초 교육을 준비하는 회의에서는 이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사례를 구성해보고, 각 모둠에 당신들의 어린 시절,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그런 행동을 했던 어른들(보호자인 부모나 친척, 교사 등)에게 편지를 쓰도록 해보자는 것이었죠. 그러나 구성한 사례가 무척 단편적이고, 풍부한 얘기가 나오기 어려울 듯하여 동화책을 같이 읽고 모둠 활동을 하는 걸로 급선회.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지각대장 존>, <고함쟁이 엄마>. 이렇게 세 권을 골랐습니다. 함께 교육을 간 묘랑이 ‘어린이 책 공룡 트림’에서 미리 읽어보았다며 강력하게 추천했고 전 덥석 물었습니다.

네 모둠에 세 권을 고르시라고 했습니다.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를 두 모둠에서 읽고 <지각대장 존>, <고함쟁이 엄마>를 나머지 모둠에서 읽기로 했습니다. 모둠별로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눈 후, 자유롭게 전지에 표현해보시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두런두런 책을 다 읽은 참가자들은 앞에 놓인 전지를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뭔가 멋진 걸 만들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일 수도 있을 테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표현해 본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어색하게 주저주저하던 참가자들이 뭔가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약간은 부담스러웠을 모둠 작업이 끝나고 다 함께 나누는 시간. 검피 아저씨를 먼저 만나보기로 했어요. 책을 읽은 모둠 한 곳에서 책을 읽어주시고, 모두 함께 볼 수 있게 동화책은 슬라이드 화면으로 띄어놓았습니다. 검피 아저씨의 배에 아이들과 온갖 동물들이 함께 올라타고 즐거운 놀이… 동화구연을 듣는 듯, 함께 그림책을 보는 동안 분위기가 들썩합니다. 검피 아저씨처럼 그렇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을까요? 또 아이들과 약속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약속을 빙자한 규율과 통제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를 ‘어린 애 취급’하지 않고 온전한 존재로 대한다는 것에 대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눕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으로, 고함쟁이 엄마를 보았습니다. 엄마가 고함을 치자 아기 펭귄의 몸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버리고, 그것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분위기는 처참할 지경으로 숙연했습니다. 3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 정도까지의 스물대여섯 명의 참가자들이 아마도 숱하게 아이들에게 고함을 질렀을 테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무거운 공기는 왜일까요? 참가자들은 ‘내가 지르는 고함에 아이들이 저런 마음을 느낄 거라는 생각을 못 해봤다.’거나 ‘반성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함쟁이 엄마>를 읽으면서 ‘폭력’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는 것, 아이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부리게 되는 권위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야 했을까요? ‘좋은 엄마’로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짓눌리는 참가자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마지막은 지각대장 존. 아이들을 키워오며 믿어주지 않았던 일들이 떠올랐다고 하는 참가자가 있었습니다만, 자세한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네요. 고함쟁이 엄마로 가라앉은 분위기는 다행스럽게 발랄해졌습니다. “존 페트릭 노먼 맥헤너시”라는 지각대장 존의 풀네임을 반복하는 선생님의 태도는 과연 존을 존중하는 것일까? 권위의 힘으로 누르는 것일까? 불리고 싶은 이름이 있다는 것-‘나를 이렇게 불러달라’ 하고 요구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물론’의 세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 하나가 될지도 모릅니다.

참가자들이 읽어주는 동화책을 듣는 일은 참 행복했습니다. 서른 명가량의 어른들이 함께 책을 읽는 색다른 교육을 마치고 들었던 아쉬움도 있죠. 그림책의 장면들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혹은 세밀한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 아기 펭귄의 부리는 왜 산꼭대기로 갔는지, 존은 왜 점점 더 까만 새벽에 학교 가는지, 검피 아저씨는 왜 화내지 않는지…… 지각대장 존을 읽으며 ‘지각하면 안 되겠죠?’ 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ㅎㅎ

전체 줄거리를 잘 아는 것보다 그림책 한 장 한 장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을 더 찾아보고 갔더라면 더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와 이거 좋다~’ 하고 느끼는 것을 나누기 위해 진행자가 준비할 일은 참 많잖아요? 우리의 교육은 뭔가를 전하는 일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니 말이죠. 좀 더 가볍게 무게감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날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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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 11:27 2014/08/0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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