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과 최고만을 기억하는 세상. 극적인 성공만을 추앙하는 광기어린 요즘 세상이다. 누구라도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라면 - 김기덕 감독이거나 싸이거나, 김연아 거나 - 국격을 한껏 높여준 인물로 추앙해마지않으며, 그들에 대해 열광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해져버리는 묘한 집단 무의식에 빠진 사회. 이 시대를 살아갈 힘을 얻으려고 우리들은 따스했던, 지나온 어느 시절을 추억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 추억을 헤집어 펼쳐내는 작품들이 근래 음악이나 드라마, 영화와 공연으로 끊임없이 창작되는 근간일지도 모르고.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교실을 뛰어다니며 서로의 가슴을 건드리며 까르륵 거리고, 까칠하게 구는 선생님들에 대한 헛소문을 지껄이며 낄낄대던 학창 시절을 기억 할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우정 이상의 사랑을 나누고 어떤 아이들은 자기 혼자 고매한 세상 속에서 사는 냥 도도 했었지. 대부분의 평범한 아이들은 음악과 대중가수와 라디오에 열중하고 무리지어 다니며 어른들이 못하게 했던 것들을 시도하려 하곤 했었지.

 

잔잔한 연극 <정물화>는 이런 여학생들의 학창시절을 그린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어떻게 남자 연출가가 이토록 섬세하게 여자아이들의 감성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유미리의 감성과 성기웅 연출이 꽤 괜찮은 조화를 이루면서 관객을 추억으로 이끌었고, 치하루와 카오리는 지금 고등학교 교실에서 데려온 것처럼 여고생다운 모습 그대로를 연기해 우리를 웃게 해주었다. 우울해 보이는 두 소녀 후유미와 나나코, 소년 같은 모습의 나츠코, 수녀 두 명까지 연기자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묵주를 목에 건 수녀 의상이 좀 거슬렸을 뿐, 깔끔한 조명과 무대도 소녀시절의 학교를 떠올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공연이 따스했던 만큼 생각나는 일들이 많았다. 첫사랑과 이루지 못해 맘 아팠던 몇몇 짝사랑들, 그 때 읽던 시, 소설, 나를 열광케 했던 음악들, 친구들과 나누던 편지, 공부한다며 큰 잔에 커피를 타 놓고 라디오에 귀 기울이인 채 쉴 새 없이 끄적이며 지새웠던 밤들… - 그때 서울의 밤하늘이 붉다는 것을 처음 알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또 얼마나 많은 말들을 의미도 모른 채 내뱉고 살아왔는지……. ‘운명의 장난’이라거나 ‘고독’이라거나 혹은 ‘민주주의’며 ‘혁명’이라는 말까지. 더욱이 다 자란 나를 아이 취급하는 세상에 대해선 또 얼마나 불만이 많았던가. 하지만 내가 늘 모자라고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도 기억하고 있으며, 내가 되뇌던 말들이 엄청난 무게를 지녔음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그런 말들은 이제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하고 있다.<

 

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의 시기는 건너뛰었으면 좋겠다는 연극 <정물화>의 대사처럼 나도 다시 새로운 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스무 살 언저리로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마무리 지으려는 마음에 결정했던 늦은 나이의 결혼과 출산, 육아는 나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주고 지치게 하지만, 인생에서의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가족들과의 하루하루를 쌓아가며 이루어가는 것임을 알게 해 주었다.&

 

여전히 나는 꿈꾸는 존재다. 백 살까지나 늘어나 버린 인간의 시간이 가끔 무섭고 두렵기는 하지만 그만큼 길어진 인생을 어떻게 행복한 시간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두려워하면서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내 인생도 거창할 것 같았고 꿈도 원대했으나 내 생각 혹은 계획대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좌절하기도 여러 번. 이제는 평범하게 별 일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때,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알았더라면 덜 불안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늘 불안하면서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때가 바로 10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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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1:09 2014/02/0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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