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어서 이 글 다 읽지는 못하겠지만 실망스럽군요. 질라 아이젠슈타인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몇가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성별분리와 노동분업은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남/녀를 구분하기 위해 노동분업이 주어졌습니까. 아니면 생산관계로부터 도출된 것입니까. 논리가 치밀하지 않군요. 원시사회에서 노동단위는 가족입니까, 아니면 공동체입니까. 재생산관계는 생산관계 아래로 포섭된다고 했는데 원시사회에서는 생산관계보다 공동체의 재생산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원시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경제의 층위가 아니라 정치의 층위인 경우도 있습니다. 왜 성적지배의 분석이 자본주의-가부장제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잘 이해가 안되는데요. 지배는 국가를 형성하기 이전 사회구성체로부터 분석이 시작되어야하는것 아닌가요. 이러한 방식은 역사 유물론적 방식이 아닙니다.
원시사회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를 때 성별노동분업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이를테면 어느 사회에서는 남성이 사냥을 하고 여성은 채집을 하는데 어느 사회에서는 남성이 채집을 하고 여성은 농사를 짓는다)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노동분업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원시사회는 강간과 전쟁이 매우 빈번한데, 서구인의 시각에 따르면 미개인은 사실상 인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부가 없고, 오늘날에도 거의 동물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16세기에 남미의 인디언들을 발견한 보고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신앙도, 법도, 왕도 없는 사람들." "그 자신이 마치 동물처럼 살고 있다"(살린스) 정치조직이 없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동물성이 관철되기 때문입니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입니다. 남성은 결코 여성을 사적으로 지배하지 못합니다. 공동체 수준에서 승인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원시사회에서 여자약탈은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부족간에 여자교환을 하고 부족간에는 경쟁관계이지만 두 부족의 족장들은 동맹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족장들은 남성들의 가족내에서의 지배를 승인해주고 이 가부장들의 지배가 가부장제로 형성되는 것이며, 국가와 자본주의가 승인하는 것입니다. 가부장제는 역사적으로 폐기될 수 있지만 남성의 지배는 그 동물성을 인식하고 반성하지 않는 한 계속 관철될 것입니다. 이는 여성에게도 관철되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자기 애 패는 여자가 한 둘입니까. 맑스와 엥겔스가 성적지배에 대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자약탈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자약탈은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메커니즘입니다. 원시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관계망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만일 내가 관계망속에 존재하는 저 여자와 성관계를 가져서 아이를 가질 때, 예컨데 내 누이와 관계를 가져서 아이를 가지게 되면 그 아이는 내 아이인 동시에 내 조카이게 됩니다. 관계망에 교란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부족에서 여자를 약탈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금기를 동물과 인간을 나누는 기준으로 보았지만 최근의 동물학 연구로 동물도 근친상간금기를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쨌든 인류의 근친상간금기의 실천으로 인해 원시사회에서는 여자약탈이 발생했고, 부족간의 평화를 위해 여자교환이 발생했습니다. 여자를 평화적으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폭력, 이데올로기적으로 여성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겠죠.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sf는 여성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지배가 벌어지고 있는 사적공간인 가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여성은 부부싸움을 할 때 흉기를 사용할까요. 얼마전 야밤에 저희 집 근처에서 한 남자가 광분해서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하고 여자도 이성을 상실해서 경찰서에 신고하겠다고 울부짖는데 저희 집은 다세대주택이 밀집된 곳이어서 저만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합세해서 아저씨 경찰서에 신고해요 하고 맞고함을 쳤습니다. 아마 그 집이 구석탱이에 쳐박혀있는데 그 남자가 경찰서에 신고도 못하게 하면 그 여자가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남자를 흉기로 찌르고 교도소에 가는 길뿐이겠죠. 윗글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정식화한 글인것같은데 지배가 생산되는 장소를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맑스가 말하길 근본적인 것은 뿌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배는 가족에서 생산되고 사업장으로 이동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닙니다.
이 장황한 댓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사회주의 플러스 재생산양식입니다. 이거가지고 여성억압 설명 못합니다. 오히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그 투박함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의 측면에서는 사회주의 페미니즘보다 훨 낫습니다. sf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여성해방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꾸 그의 이론에 기대어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게다가 맑스주의 인류학은 60년대 인류학의 폭발적 발전으로 그 실효를 거의 대부분 상실했습니다. 사적 유물론은 역사의 과학이 아닙니다.
님의 강의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댓글은 자기 논리에 자기가 빠져서 이 글이 가지는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몇 가지 지적해 보고자 하네요.
1. 이 글은 제 글이 아니라 질라 아인슈타인의 글을 우리말로 옮겨 놓은 글입니다. 마치 이 글이 제 글인 양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네 번째 댓글-“윗글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정식화한 글인것같은데 지배가 생산되는 장소를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말씀 드립니다.
2. 논리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지 감을 잡기 어렵습니다. 즉 어디에다 초점을 두고 문제 제기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글에서 나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역사 유물론적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첫 번째 댓글-“이러한 방식은 역사 유물론적 방식이 아닙니다.”) 나중에는 또 역사적 유물론의 방식을 왜 따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다섯 번째 댓글-sf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여성해방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꾸 그의 이론에 기대어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3. 이 글에 나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님께서 “sf는 여성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지배가 벌어지고 있는 사적공간인 가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네 번째 댓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 글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사적 공간인 가정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왜 가정이 사적인 공간이 되었는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의 통일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사적 공간이 되었고, 그 속에서 여성이 왜 억압되었는지를 밝혀 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님께서는 댓글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사회주의 플러스 재생산 양식”(다섯 번째 댓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생산은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서 거의 대부분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재생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텐데도 3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지 않을까요?
또한 “이거 가지고는 여성억압 설명 못합니다”(다섯 번째 댓글)라고 했는데, 왜 그러한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합니다. 이 글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에 대하여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5. 두 번째, 세 번째 댓글은 이 글의 논의에 어울리지 않는 댓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의 논의 대상이 특정한 역사적 시대인 <자본주의 시대>인데, 전 자본주의 시대인 원시 시대를 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론 고맙습니다. 저는 님에게 반박한 것이 아니라 이 글의 필자인 아이젠슈타인에 대해 반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님이 이 글을 블로그에 포스팅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역사 유물론은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정초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거기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지요. 자본주의부터 분석을 시작하고 있나요. 제가 아이젠슈타인의 분석방식이 역사 유물론적 방식이 아니라고 한 것은 왜 여성억압을 자본주의에서 시작하느냐는 것이지 다른 뜻은 아닙니다. 아이젠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 유물론 방법은 생산자와 재생산자로서 여성이 성별 노동 분업과 사회와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식화하는 방향으로 통합, 확장되어야 한다." 역사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려면 전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에서도 성별노동분업이 사회와 맺는 관계를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고, 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맑스의 탁월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여성억압에 대해서는 맑스의 설명이 매우 불충분하며 이 이론을 분석, 논박, 장식하는 것이 거의 전부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을 위해 별로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사실입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도 사적공간인 가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님이 언급하신 그대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의 통일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성억압의 역사가 전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도 지속되어왔는지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재반론 부탁드립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재생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아이젠슈타인이 언급하고 있듯이 재생산은 생산관계에 포섭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여성억압은 생산관계로부터 도출되는 것이고 여성억압은 생산양식의 이행으로 깔끔히 처리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산양식이 이행한 러시아와 중국에서 여성해방의 실험이 좌절되었던 것은 무슨 연유인가요. 그 사회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고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거 가지고는 여성억압 설명 못한다"고 한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이론적 근거들이 있습니다. 매우 빈약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레비-스트로스나 프로이트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에 대한 총체적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이 글 어디에서 여성 억압에 대하여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두번째, 세번째 댓글이 이 글의 논의에 어울리지 않는 댓글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의 뿌리에 대한 고민이 사실상 별로 없고, 부불노동에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착취"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지 "지배"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님이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외람된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그냥 사회주의와 통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남성사회주의자들도 여성해방 간절히 바랍니다. 가사노동, 정서노동, 부불노동.. 이 분들은 노동을 왜 이렇게 좋아합니까. 예전에는 사냥, 채집, 어로 기타 등등이 있었고 노동의 유적 개념이 생겨난 것은 18세기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하면 노동을 신성시하기 위한 발명품이라는 것입니다. 자본가들도 하지 않는 노동의 찬양을 하면서 노동해방은 요원하다고 생각됩니다.
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역사적 유물론 방식은 실은 역사적 유물론 방식이 아니라 초역사적, 형이상학적 분석 방식입니다. 님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역사적 유물론 분석 방식은 특정한 역사적 시대의 생산양식에 기초하여 그 시대의 생리적 구조를 파악하는 방식입니다. 님의 분석 방식으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답은 고작해야 신 또는 절대자일 따름입니다. 그 절대자가 정한 여성억압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성 억압의 뿌리를 캐자는 초역사적 방식 또는 형이상학적 방식은 결국 여성해방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잘 아시면 좋겠습니다.
서로 소통을 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군요. 이쯤에서 논쟁을 접읍시다. 가면서 몇마디 하겠습니다. 한 사회구성체의 총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다만 생산양식에 기초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은 동물이고 동물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애가 잘못했다고 비는데도 계속 매질을 하는 그 비정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소유와 지배는 억압이 아닌가요. 그것을 생산양식에 기초해서 설명하시렵니까. 인간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없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는 없습니다.
초역사적이며 형이상학적 방식 (2009/09/17 15:28)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스피노자가 윤리학의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이 나는군요. 인간은 누구나 타인이 자신의 뜻에 따라 살기를 바란다. 홉스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고 했죠. 슬프게도 이것은 인간에 대한 진실입니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는 서로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동체들이 섬처럼 존재합니다. 그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인 것을 막는 계기들이 존재합니다. 정치적인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