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보에서 역사의 구원으로http://blog.jinbo.net/minjung/근데 여기 '진보넷' 블로그네(읭?)2018-03-23T10:45:06+09:00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38년의 투병생활보다 더 나쁜 삶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7) 김강http://blog.jinbo.net/minjung/812007-11-19T11:32:15+09:002007-11-19T11:32:15+09:00<!--FCKeditor--><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5961973"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attach/2377/191143493.jpg')" height="309" width="465" onload="setTimeout('fixImage(5961973)',300)" alt="" src="/attach/2377/191143493.jpg" /></p>
<p align="center">노숙인 추모제에서...</p>
<p align="center"> </p>
<p> </p>
<p>요한복음 5장에 대한 묵상입니다.</p>
<p> </p>
<p>명절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활기찬 예루살렘이었지만 아마도 어제나 오늘이 별로 다르지 않은 곳이 있었으니 본문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가'였을 것입니다. 연못 주변의 다섯 개의 주랑에는 병자들과 장애인들이 노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결함과 불결함을 선과 악의 문제로 판단하고 구별하는 성전종교체제에서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장애와 병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부정한 죄인들로 취급을 받았고, 자신의 땅과 가족을 가지지 못한 채 이렇게 노숙생활이나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p>
<p> </p>
<p>이들이 이 연못가에 몰려 있는 이유는 이 연못가에 간간히 천사가 찾아온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사가 물을 휘저어 놓을 때(아마도 갑자기 연못 물이 움직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물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고치고 정결하게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났던 것이지요. 체제가 그들을 버린 이상 이들은 이런 작은 희망이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p>
<p> </p>
<p>예수님이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이들 중에 있던 한 병자를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병을 앓아온 지 서른여덟 해나 되었던 것 같습니다. 후에 병자가 그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걸로 보아서(13절) 예수는 홀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에서 그 병자를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을 고쳐주고는 이내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리셨지요. 아마도 그날이 안식일이고, 또 유대 사람들의 정치적 탄압이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예루살렘을 다니셨던 것 같습니다.(16절)</p>
<p> </p>
<p>병자가 예수님을 다시 만난 건 성전 안에서였습니다. 38년간이나 죄인으로, 병자로, 부정한 자로 살아갔던 이 사람은 드디어 성전에서 예배드릴 자격을 얻었던 것이지요. 다시 만난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 사람의 나음을 기뻐하시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라"(14절)</p>
<p> </p>
<p>이 말씀은 그가 병을 얻은 것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서의 다른 부분에서 어떤 사람이 장애인이 된 원인을 묻는 제자들에게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바 있지요. 그렇다면 병 나은 사람에게 "죄를 짓지 말아라."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p>
<p> </p>
<p>다시 베데스다 연못가로 되돌아가 봅니다. 그 곳의 풍경은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줄 때만 기다리는 병자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물이 움직이면 이들은 어떻게 반응을 보였을까요? 모두가 우물을 향해 자신이 가진 힘을 쥐어 짜내어 움직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도와줄 사람이 있는 사람은 좀 더 빨리 움직였을 것이고(7절), 이 병자처럼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몇 미터 기어가다가 포기했겠지요. 병을 고치고 정결한자가 되어 사회에 복귀하기 위한 "무한 경쟁" 그것이 이 우물가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레이스는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승자 독식" 게임이었습니다.</p>
<p> </p>
<p>예수님이 "죄"를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에 관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에서 배제되어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이런 성전체제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밀려난 이들도 밀려난 곳에서 서로를 밀치고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밀려나버린 이들의 꿈은 오직 병을 고쳐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하겠다는 마음뿐이었고, 그것을 위해 계속해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가려는 경쟁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런 모습이 성전체제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는 것을 지적하려 하신 건 아닐까요? </p>
<p> </p>
<p>저는 그리스도교의 '원죄'란 흔히들 생각하듯, 사람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죄악된 성향이나,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의 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체제나, 베데스다 연못가의 풍경처럼 모두가 누군가를 배제하며 살아가고 있는, 배제함으로써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로 하여금 이러한 성전체제의 부속품이 되어 계속하여 죄를 짓는 삶을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p>
<p> </p>
<p>예수님은 이어서 그에게 "더 나쁜 일을 당하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병보다 더 나쁜 것,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병을 고침 받고 성전에서 매일 매일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성전에 세금을 내고 살아갈수록 '죄인'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성전체제는 조금씩 더 자라납니다. 그는 아마 자신이 매우 올바르고 착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올바름과 착함' 때문에 누군가는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p>
<p> </p>
<p>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어쩌면 누군가의 희생과 배제를 그 아래에 깔고 성립된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이 사회의 정상인들이 정상적 삶을 살기 위해 아등바등 경쟁하며 성실이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어쩌면 그 배제와 희생의 넓이와 깊이는 더욱 커져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여 번 돈으로 삼성 핸드폰을 목에 걸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이마트에서 쇼핑을 할 때, 한편에서 노동자들은 탄압당하고, 아프리카의 농민들은 죽자 사자 일해도 헐값에 커피를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절망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p>
<p><br />"죄를 짓지 않고,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 삶이란, 바로 이런 죄-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며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런 삶은 스스로 성전이 되는 삶이요, 더불어 함께 살림을 살아가는 '영생'의 삶일 것입니다. 갈릴리인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한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기는 그런 삶일 것입니다.</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81,'/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81+%2238%EB%85%84%EC%9D%98%20%ED%88%AC%EB%B3%91%EC%83%9D%ED%99%9C%EB%B3%B4%EB%8B%A4%20%EB%8D%94%20%EB%82%98%EC%81%9C%20%EC%82%B6%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7%29%2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81&t=38%EB%85%84%EC%9D%98%20%ED%88%AC%EB%B3%91%EC%83%9D%ED%99%9C%EB%B3%B4%EB%8B%A4%20%EB%8D%94%20%EB%82%98%EC%81%9C%20%EC%82%B6%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7%29%2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81&title=38%EB%85%84%EC%9D%98%20%ED%88%AC%EB%B3%91%EC%83%9D%ED%99%9C%EB%B3%B4%EB%8B%A4%20%EB%8D%94%20%EB%82%98%EC%81%9C%20%EC%82%B6%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7%29%2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81?commentInput=true#entry81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한낮에 벌어진 사건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6)김강http://blog.jinbo.net/minjung/752007-10-15T13:44:07+09:002007-10-15T13:44:07+09:00<!--FCKeditor--><p class="article" align="center"> <img class="tt-resampling" style="CURSOR: pointer" onclick="open_img('/tt2/attach/1/1335485705.jpg')" height="243"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width="450" src="http://www.kimkang.net/tt2/thumbnail/1/1335485705.w450-h243.resampled.jpg" /> </p>
<p class="cap1" style="CLEAR: both; TEXT-ALIGN: center" align="center">Siemiradzki, Christ and the Samaritan Woman, 1890 </p>
<div class="article"><br />요한복음 4장에 대한 묵상입니다. </div>
<div class="article"></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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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article">햇볕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오정 즈음에 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물을 뜨러 나옵니다. 니고데모와 달리 그녀는 "스스로 성전인" 사람이었기에 낮에도 거침없이 다닐 수 있었던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는 "배제된 자"였기 때문에 낮 시간에 물 뜨러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근동의 정오란 그야말로 타는 목마름의 시간입니다. 물을 뜨고, 빨래를 하는 일상의 생활은 해가 넘어갈 무렵 이루어집니다. 여인들은 그 때가 돼서야 하나 둘씩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무도 없는 환한 낮에 나와야 했습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부정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이 여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과거를 짚어내면서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도 한 남자와 살고 있지만 남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근동 세계에서 남편이 없는 여성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떳떳한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다섯 명의 남편을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워낙 흔했던 폭정과 전쟁으로 인해 잃었을 수도 있고,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버림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 구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렇게 과부된 자는 마을 공동체가 책임을 지고 보살펴야 했지만 그녀는 그런 보살핌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녀가 택한 길은 혼인 관계 바깥에서라도 남성의 도움을 받는 그런 길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 여인이 가진 불행과 고통을 참작하기보다는 정상적 삶을 박탈당한 이 여인의 삶을 비정상적 삶으로, 비난받아야 할 불결한 삶으로 비판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의 '밤'과 이 사마리아 여인의 '낮'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는 옛 말씀의 수호자요, 하나는 옛 말씀의 피해자라는 점만이 다를 것입니다.</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는 예수에게 대뜸 '예배'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 옛 말씀의 세계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녀는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의해 버림받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또 사마리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종교 체제는 예루살렘 체제에 대한 저항 논리를 더욱 더 율법적인 종교로 발전시켰기에 그녀는 그 안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구원을 갈망했지만, 사마리아 산에서의 예배도,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도 그녀는 드릴 수 없었고, 그녀를 구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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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article">"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하느님은 영이시다."(23-24절)</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하느님은 영이시다! 이 말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전에 하느님은 곧 대제사장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사마리아 산당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종교 체제나 율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옛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을 영이라 합니다. 전에 살펴보았듯이 영은 '호흡'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영을 가진 자입니다. 하느님을 가진 자입니다.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때문에 우리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 어떤 율법을 지키느냐가 그 사람이 하느님을 참으로 예배하고 있느냐를 판가름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판가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 숨을 쉼으로써 하느님을 예배하고, 책에 씌여진 진리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진리, "살림"을 함께 삶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이 예배의 때는 일요일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닙니다. 언제나 "지금이 바로 그 때"(23절)인 것입니다. 이 예배의 장소는 예루살렘도 아니고, 사마리아 산도 아니고 바로 우리의 몸인 것입니다.</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가 베푸는 진리 앞에 놀랍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부정한 여인에게 예배에 대해 논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서 놀랍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예루살렘도, 사마리아도, 갈릴리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자입니다. 마치 붓다에게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나, 수드라나, 바이샤나 모두가 인연의 장에서 불성을 빚어내는 존재들인 것처럼, 예수에게도 그 어떤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사마리아 여인은 물 뜨러 나왔던 것도 잊은 채,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멀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마을로 돌아가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예수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진리 앞에 놀라고 감동한 여인의 '뽀스'가 그녀를 부정한 여인으로 멀리하던 마을 사람들까지 감동시킵니다. 그리하여 이제 이 마을엔 새로운 예수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2등 시민 사마리아인도 없고, 남편이 없어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부정한 여인도 없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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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article">오늘날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하는 교회는 이런 예수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불행히도 오히려 교회는 "옛 말씀"의 길, 예루살렘 종교체제의 모습을 더욱 더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정한 것도, 부정한 것도 없는 예수의 길 대신 율법과 도덕이 지배하고, 스스로 자유인이 되어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에게 교회의 교리와 조직에 충성할 것을 가르치는 교회, 영이신 하느님을 교리 속에 가두어두고, 그 교리에 세상을 끼워맞추어 심판하는(예수 천당! 불신 지옥!) 교회의 모습은 사마리아에서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예수공동체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요.</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75,'/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75+%22%ED%95%9C%EB%82%AE%EC%97%90%20%EB%B2%8C%EC%96%B4%EC%A7%84%20%EC%82%AC%EA%B1%B4%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6%29%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75&t=%ED%95%9C%EB%82%AE%EC%97%90%20%EB%B2%8C%EC%96%B4%EC%A7%84%20%EC%82%AC%EA%B1%B4%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6%29"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75&title=%ED%95%9C%EB%82%AE%EC%97%90%20%EB%B2%8C%EC%96%B4%EC%A7%84%20%EC%82%AC%EA%B1%B4%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6%29','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75?commentInput=true#entry75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살림을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영생입니다.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5)김강http://blog.jinbo.net/minjung/542007-07-24T11:41:13+09:002007-07-24T11:41:13+09:00<!--FCKeditor--><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2513333"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attach/2377/241137351.jpg')" height="300" alt="" width="358" onload="setTimeout('fixImage(2513333)',300)" src="/attach/2377/241137351.jpg" /></p>
<p> </p>
<p> </p>
<p>요한복음 3장에 대한 묵상입니다.</p>
<p><br />'옛 말씀'의 사람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옵니다. 스스로 성전인 사람(2장)들은 사람들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성전체제의 부속품인 사람들은 그처럼 거침없이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어야 예수를 찾아올 수 있었던 니고데모는 온갖 '옛 말씀'들로 자신을 묶고 있는 우리들의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p>
<p><br />니고데모는 예수의 신통력을 보고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선 묵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신통력을 보고 예수를 쫓는 것은 옛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일으키는 기적이나, 그의 멋진 말들에 감동하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예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듭난다'고 표현합니다. </p>
<p><br />8절에서 재밌는 표현을 만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다."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전에 그를 규정하던 정체성들, 옛 말씀들, 오늘날의 말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진리가 율법이나 옛 말씀이라면 그것은 자유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의 진리는 인간이 그 몸에 하느님을 갖는 성전이 되는 것, 인간이 하느님의 호흡(성령)을 가진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유롭습니다. </p>
<p><br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9절) 놀란 니고데모의 질문에 예수님은 "믿음"을 답으로 제시합니다. 믿음은 신뢰요, 따라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예수를 신뢰하고, 그가 보여준 삶의 길을 우리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럼 거듭납니다. 거듭난 이의 삶은 끊임없이 살리는 삶, 영생입니다. 옛 말씀의 논리는 심판의 논리요, 죽음의 논리입니다. 옛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정죄받고 심판을 받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민족주의 ․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따르지 않으면 비국민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TV광고가 보여주는 대로 소비하고 살지 못하면 인생의 패배자로 낙인찍힙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옛 말씀은 죽음과 심판을 배면에 깔고 있습니다. "죽기 싫으냐? 그럼 내 말을 따라라." </p>
<p><br />그러나 실상은 그 길 자체가 죽음의 길입니다. 율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수많은 폭력, '민족'과 '국가'가 저지르는 전쟁과 테러, 소비자본주의 하에서 죽어가는 인간과 자연을 우리는 매일매일 경험하고 봅니다. 결국 옛 말씀의 귀결도 '죽음'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18절)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자가 되어 누구의 증거도 필요치 않고 오직 살림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드는 이들은 죽지 않기 위해 살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빛으로 행합니다. 살리기 위해 삽니다. </p>
<p><br />그러나 다만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합니다."(14절) 십자가는 죽지 않기 위해 삶을 아등바등 붙드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십자가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혼자 깨달아 하늘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을 위한 죽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승으로만 살 수 없고 대승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p>
<p><br />이랜드-뉴코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봅니다.(그러나 그들의 십자가가 무겁지 않기를!) 예수가 옛 말씀의 사람들에게 희생당하였듯이, 그들도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에게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은 지금 옛 말씀의 실상인 '죽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뒤는 부활입니다. 죽음 다음은 살림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그 살림을 살고 싶습니다. 살림을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영생입니다.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54,'/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54+%22%EC%82%B4%EB%A6%BC%EC%9D%84%20%ED%95%A8%EA%BB%98%20%EC%82%AC%EB%8A%94%20%EA%B2%83%2C%20%EA%B7%B8%EA%B2%83%EC%9D%B4%20%EC%98%81%EC%83%9D%EC%9E%85%EB%8B%88%EB%8B%A4.%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5%29%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54&t=%EC%82%B4%EB%A6%BC%EC%9D%84%20%ED%95%A8%EA%BB%98%20%EC%82%AC%EB%8A%94%20%EA%B2%83%2C%20%EA%B7%B8%EA%B2%83%EC%9D%B4%20%EC%98%81%EC%83%9D%EC%9E%85%EB%8B%88%EB%8B%A4.%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5%29"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54&title=%EC%82%B4%EB%A6%BC%EC%9D%84%20%ED%95%A8%EA%BB%98%20%EC%82%AC%EB%8A%94%20%EA%B2%83%2C%20%EA%B7%B8%EA%B2%83%EC%9D%B4%20%EC%98%81%EC%83%9D%EC%9E%85%EB%8B%88%EB%8B%A4.%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5%29','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54?commentInput=true#entry5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헤롯 성전을 헐어라!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4)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92007-06-12T11:42:43+09:002007-06-12T11:42:43+09:00<!--FCKeditor--><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895946"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attach/2377/121128252.jpg')" height="351" alt="" width="450" onload="setTimeout('fixImage(895946)',300)" src="/attach/2377/121128252.jpg" /></p>
<p align="center">김홍도 성전(?) - 금란교회 </p>
<p> </p>
<p>계속해서 요한복음 2장에 대한 묵상입니다.</p>
<p> </p>
<p>1.<br />마흔 여섯해나 걸려서 지은 웅장한 성전. 이스라엘 본토, 지중해, 아프리카, 아라비아의 전지역에서 몰려온 유대인 순례객으로 넘쳐나는 예루살렘, 그들이 그 순례기간 동안 풀어놓는 엄청난 돈, 헌금, 그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종교적 서비스. 이런 것들이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유월절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p>
<p> </p>
<p>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서 있던 성전은 헤롯 대왕이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성전은 애초에 허름하게 지어진 성전이었고, 그나마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침략으로 훼파되고 불결하게 되어 버린 성전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도 아니었던 헤롯 대왕은 이 성전을 무려 46년에 걸쳐 그리스 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다시 지음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통치를 위한 '국민통합'을 이루려 했습니다. </p>
<p> </p>
<p>그렇게 해서 지어진 성전에 의해 만들어진 성전체제는 수탈체제였습니다. 민중에게 초월적 하느님을 '서비스'해주는 대가로 이 체제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까지 탈취했습니다. 민중은 로마제국에 바치는 세금과 함께 성전세를 이중으로 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성전이 완성됨으로써 각 지방의 토착적 유대종교는 모두 이단이 되어버리고, 성전종교에 흡수되던지, 아니면 배제되어야 했습니다. 예수의 고향인 갈릴래아 사람들도 '자신들의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의 하느님'을 강요받았을 것입니다. </p>
<p> </p>
<p>예수가 무너뜨리려 한 건 단순히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이 성전체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공중의 새와 들의 풀도 먹이시는 하느님을 성전체제는 그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아왔습니다. 예수는 그 성전체제를 향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일갈하십니다.(16절) </p>
<p> </p>
<p>2.<br />오늘도 많은 종교들이, 많은 교회들이 하느님을 팔고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잔치로 만민을, 특히 고난 받는 이들을 초청하여 먹이는 게 교회의 사명일진대 교회는 거기에 충성하는 이들에게만 하느님을 팔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죄 용서받고, 복 받고, 부자 되고, 대학 가고, 죽어서 천국 간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향해 여전히 소리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p>
<p> </p>
<p>종교의 지도자들만이 예수의 비난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들도 예수의 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 어떤 지배 체제도 대중의 공모 없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대중은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성전을 짓는다고 세금을 쥐어짜고, 노역에 동원할 때는 힘들어 저항하기도 하고, 대규모 공사에 대한 반감도 드러내지만, 막상 46년이 지어 거대한 건축물이 지어졌을 때 그들은 저항하기를 그치고 성전을 자랑스러워하며 금방 성전체제에 흡수되고 맙니다. 물론, 이건 저의 역사적 상상이지만, 단순히 상상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일이 역사에 반복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추진한 청계천 복구를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일단 지어지고 나면,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피해와 고통을 입었고, 그 결과와 과정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는 더 이상 회자되지 않고, "어쨌든 그는 성공했다."는 신화만 남아 대중의 찬사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대중은 기꺼이 그것이 만든 새로운 풍경 속에 흡수되어 버리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배제된 자들의 아픔은 은폐되고 맙니다.</p>
<p> </p>
<p>예루살렘의 대중들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이 새로운 성전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환전과 제물을 제공하고, 여행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은 꽤나 돈을 벌었을 것이고 이내 성전이 단순히 하느님 계신 곳만이 아니요, 자신들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화수분임을 깨닫고 그 체제에 충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통에, 이전까지는 함께 고통 받던 사람들을 대중들 스스로가 배제하고 성문 밖으로 내어 쫓았을 것입니다. 성전체제의 봉사자인 이들 예루살렘의 대중 역시 예수의 비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p>
<p> </p>
<p>3.<br />더 나아가 예수는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성전을 허물면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그것을 "자신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예수에게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성전과 거기에 기생하는 성전체제는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는 몸소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성전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성전 안에, 혹은 종교체제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몸 안에 계신 것입니다. </p>
<p> </p>
<p>성전체제는 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지만, 예수는 민중의 몸으로 부활하십니다. 갈릴리 촌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성령을 받고,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온 지중해로 퍼져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체제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입니다. 종교나 정치 체제, 이데올로기 같은 초월적 체제로 도피하여 자신의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직면하여 서는 사람들입니다. </p>
<p> </p>
<p>우리는 너무도 자주 '헤롯 성전'으로 도피합니다. 영화 <밀양> 속의 신애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이러한 우리들 모습의 대표격인 캐릭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바람피다가 사고로 죽은 남편이 자신에게 준 고통을 그대로 직면하지 못하여, "남편을 잊지 못해 남편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미망인"이라는 허위 의식 속으로 도피합니다. 아들이 유괴당하여 죽자, 그 고통을 직접 대면치 못하고 마약과 같은 즐거움을 주는 초월적 종교 안으로 도피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이웃과의 관계, 아들과의 관계, 그를 흠모하는 종찬(송강호)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헤롯 성전으로 도피하는 이들은 이웃과의 관계 역시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p>
<p> </p>
<p>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증언을 필요치 않습니다.(25절) 아름다운 미망인인척할 필요도 없고, 땅을 알아보러 다니는 알부자인 척 할 필요도 없고, 위대한 믿음의 일꾼인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죽는 그날까지 헤롯 성전이 마련해 준 자리에서 고통 받으며, 또 고통을 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우리를 몸-성전의 삶으로 초청합니다. 스스로 성전이 되어,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헤롯 성전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것을 무너뜨려야 우리는 성전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성전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누구의 증언도 필요치 않는 참 자유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9,'/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9+%22%ED%97%A4%EB%A1%AF%20%EC%84%B1%EC%A0%84%EC%9D%84%20%ED%97%90%EC%96%B4%EB%9D%BC%21%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4%29%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9&t=%ED%97%A4%EB%A1%AF%20%EC%84%B1%EC%A0%84%EC%9D%84%20%ED%97%90%EC%96%B4%EB%9D%BC%21%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4%29"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9&title=%ED%97%A4%EB%A1%AF%20%EC%84%B1%EC%A0%84%EC%9D%84%20%ED%97%90%EC%96%B4%EB%9D%BC%21%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4%29','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9?commentInput=true#entry49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The feast must go on!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3)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62007-05-26T01:48:30+09:002007-05-26T01:48:30+09:00<!--FCKeditor--><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5136578"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attach/2377/260147111.jpg')" height="305" alt="" width="450" onload="setTimeout('fixImage(5136578)',300)" src="/attach/2377/260147111.jpg" /></p>
<p align="center">VERONESE, Paolo, The Marriage at Cana, 1563, Oil, Musée du Louvre, Paris</p>
<p> </p>
<p> </p>
<p> 요한복음 2장에 대한 묵상입니다.</p>
<p> </p>
<p>1.</p>
<p>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행한 첫 번째 표적은 흔히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야기의 제목을 다르게 붙이고 싶습니다. "혼인 잔치가 계속되게 하신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p>
<p> </p>
<p>혼인잔치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모든 행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기쁘고, 축하 받는 일입니다.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고, 세대를 이어가는 일이 이 혼인잔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근동지방의 문화에선 혼인잔치란 며칠씩 이어지는 마을의 큰 축제였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때로는 이웃마을의 친지들도 초청하기도 했었나 봅니다. 가나 마을의 잔치에 나사렛 마을 사람 예수와 그의 어머니, 그의 제자들까지 초대된 것을 보면 말입니다.(2, 3절)</p>
<p> </p>
<p>그러나 이 혼인잔치는 이내 중단될 위기에 처합니다. 혼인잔치에 쓰일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포도주는 잔치와 식사에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음료수였습니다. 포도주가 없으면 잔치는 중단되고, 모인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작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 예수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기적,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p>
<p> </p>
<p>2.</p>
<p>예수는 어떻게 이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는 앞선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신통력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좀 다른 차원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예수가 가진 신통력을 가진 이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것은 그의 기적이 아니요, 그의 사물과 상황과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즉, 예수의 시각에서는 물과 포도주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 기적이야기에서 제가 보고 싶은 것입니다. </p>
<p> </p>
<p>본문에서 포도주로 바뀐 물은 유대 율법에 따라 밖에서 집으로 들어온 이들이 손과 발을 씻는 물이었습니다. 자신과 남을, 그리고 모든 만물을 분별과 차별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포도주와 씻는 물은 너무나 먼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는 포도주고, 물은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물과 포도주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에게서 그것들은 본질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쓰임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잔치를 지속하는데 쓰이면 그것은 포도주이고, 손과 발을 씻는데 쓰이면 그것은 물인 것입니다. 기적은 예수의 이러한 새로운 시각을 겉으로 드러내준 표면에 불과합니다.</p>
<p> </p>
<p>사람에 대한 예수의 시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 기적이 다른 곳이 아닌 '갈릴리 가나'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복음서들을 살펴보면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 예수가 일으키는 기적이나 표적의 내용이 두 부분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치유하고, 회복하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심판과 파괴와 멸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자의 것은 주로 갈릴리에서 보이시고, 후자의 것은 주로 수도 예루살렘에서 보이시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p>
<p> </p>
<p>우리는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잘 모르기에 갈릴리나 예루살렘이나 다 같은 '유대', 혹은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의 농촌 지방이 예루살렘 도성의 제사장가문이나 왕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 이전 1세기 정도부터라고 합니다.(물론 더욱 고대시기에는 하나의 이스라엘이었을 것입니다만…) 즉, 갈릴리는 유대에 병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땅의 운명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역시 100년 전에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강제 병합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기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로부터 이중의 차별과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지배자들은 갈릴리의 민중들을 "죄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과 로마의 지배자들을 위한 세금을 마련하느라 안식일도 쉬지 못하고 일할 때가 많았고, 문맹으로 인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갈릴리인과 유대인은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 '죄인'과 '의인'이었던 것입니다. </p>
<p> </p>
<p>예수의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역은 이 갈릴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에게 있어 '갈릴리 죄인들'은 '예루살렘 의인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고, 그것으로 인해 차별 받아 마땅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물과 포도주가 그에게 있어 다른 것이 아니었듯이, 갈릴리인들도 유대인들과 다른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에게는 갈릴리인들도 혼인잔치가 계속되도록 쓰임 받는 '포도주'였습니다. 예수가 갈릴리의 공동체들과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과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p>
<p> </p>
<p>3. </p>
<p>잔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별과 차별의 눈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리고 여기에서 생겨난 이기심이나 열등감을 갖고 있는 이상 잔치는 중단되고 맙니다. 잔치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예수가 본 것을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물과 포도주가, 갈릴리인과 예루살렘 의인들이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p>
<p> </p>
<p>오늘날에도 근동 지방의 혼인 잔치는 중단되곤 합니다. 지난 2004년 5월 19일 이라크 국경지대의 한 마을에서는 혼인잔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신부가 어여쁜 드레스를 입고 입장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은 한데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미군 헬기가 100개도 넘는 포탄을 결혼식이 열리는 가옥 두 채에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라크 인들이란 본질적으로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입니다. </p>
<p> </p>
<p>이라크에서, 혼인잔치는 계속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에 의해 자신의 땅을 잃은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의 잔치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차별과 배제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세계의 이주자들, 여성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땅을 빼앗긴 원주민들, 그리고 여러가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흥겨운 잔치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p>
<p> </p>
<p>어쩌면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잔치가 중단된 여러 곳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그리스도가 되고 싶습니다. 잔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 잔치이기 때문입니다.<br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6,'/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6+%22%20The%20feast%20must%20go%20on%21%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3%29%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6&t=%20The%20feast%20must%20go%20on%21%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3%29"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6&title=%20The%20feast%20must%20go%20on%21%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3%29','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6?commentInput=true#entry46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자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2)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42007-05-16T22:52:45+09:002007-05-16T22:52:45+09:00<!--FCKeditor--><p align="center"> <img id="my_post_img5078693"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attach/2377/161048409.jpg')" height="306" alt="" width="400" onload="setTimeout('fixImage(5078693)',300)" align="middle" src="/attach/2377/161048409.jpg" /></p>
<p align="center">붓다, 예수 서울에 입성하시다_이흥덕, 1998</p>
<p> </p>
<p> </p>
<p>계속해서 요한복음 1장에 대한 읽기입니다.</p>
<p> </p>
<p>1.</p>
<p>성령이 임했다(32절)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저는 그것을 예수가 하느님의 호흡을 가졌다는 말로 생각합니다. 구약의 루아흐나 신약의 프뉴마는 본래는 '숨', '공기의 흐름'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령이란 곧 하느님의 숨이 아닐까요. 숨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인지 동서양의 많은 영적 수행들은 언제나 호흡에 집중합니다. 불교에서는 호흡을 관(觀)하면 몸을 관하고고, 감각과 감정을 관하고, 마음의 작용을 관하고, 세계의 연기적 관계를 관한다고 합니다. 나의 호흡에 세계가 담긴 샘입니다. </p>
<p> </p>
<p>세례 요한은 '옛 말씀'의 사람이었지만 예수가 새로운 말씀, 곧 하느님 자신이요, 하느님 나라(차별 없는 하나인 전체 세상)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p>
<p> </p>
<p>요한은 옛 말씀에 근거하여 매우 큰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메시야'(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옛 말씀의 불충분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율법을 회복하고, 이스라엘의 회개를 부르짖자 그를 메시야로 생각했지만, 그는 메시야는 옛 말씀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예수를 만나자 그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p>
<p> </p>
<p>요한은 예수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말합니다. 유월절에 야훼의 진노를 넘어가게 한 그 어린 양을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를 대신하여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속죄일의 염소를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이 된 존재였습니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현에서 저는 요한이 한 발은 새 말씀에, 한 발은 옛 말씀에 걸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말씀의 틀에서 사유합니다. 그것은 율법과 죄와 심판의 틀입니다.</p>
<p> </p>
<p>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예수가 유대인들만을 위한 어린 양이 아니요, '세상'을 위한 어린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차별과 분별의 옛 말씀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그에게 보내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시몬과 안드레가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p>
<p> </p>
<p>2. </p>
<p>영적인 수행을 깊이 한 사람들은 때로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도교에서 신선이 된 사람들의 기록이나, 공중을 나는 요가 행자에 대한 기록들, 혹은 옛 이야기에서 마법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현자나 성인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종종 접하게 됩니다. 예수 역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한 사람이었고, 또한 이 요한복음 1장에서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천리안이라고 하던가요. </p>
<p> </p>
<p>예수의 타겟이 된 이는 나다나엘이었습니다. 그는 친구 빌립이 예수를 소개하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게 나겠느냐?"라고 묻지만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빌립을 따라 예수를 만나러 옵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미 그가 한 말을 알고 있었고, 그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도 알아 맞춥니다. 저는 왠지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47절)하신 말씀이 칭찬이 아니라 약간의 빈정거림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옛 말씀'의 시각에선 나사렛에서 선한 게 나올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면 그건 '거짓'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다나엘은 옛 말씀의 영역에 속한 사람, '거짓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것이 아닐까요.</p>
<p> </p>
<p>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밑에서 예수에 대해 냉소하던 자신의 모습을 예수가 알아 맞추자 놀라서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합니다.(49절) </p>
<p> </p>
<p>그러나 예수는 그의 태도를 책망합니다. 왜냐하면 신통력이 곧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발휘한 신통력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깊은 깨달음에 이르른 현자들은 하나같이 수행 중에 얻게 된 신통력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신통력에 취해 거기에 빠질 때 그가 수행한 열매는 간데 없이 사라지고, 다시금 자아와 타자의 분별과 이기심이 도입되기 때문입니다. 저야 그 정도 경지까지 다다라 본 일조차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렇답니다. 예수는 신통력보다 더한 것을 나다나엘이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들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랍니다. </p>
<p> </p>
<p>저는 이것을 사람의 아들들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감히 해석합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사람으로써 그 몸이 하느님 나라를 체화한 몸이었듯이, 사람의 아들들도 예수를 본받아 그와 함께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자, 그리스도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자아와 타자의 분별을 넘어서서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차별, 이기심, 탐욕을 넘어서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자신만이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자가 아니요 우리 역시 그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p>
<p> </p>
<p>'기독교인'이라 이름하는 우리는 종종 예수의 신통력에 놀라고 그의 신통력을 의지합니다. 그의 병고침이나 기적에 놀라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죄를 짓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그가 죄를 용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신통력을 발휘해 주리라 믿고 그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떠받들던 나다나엘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p>
<p> </p>
<p>우리가 예수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그의 신통력이 아니라 그가 가진 하느님의 호흡이요, 그럼으로써 그가 그 몸에 체화한 하느님(나라)가 아닐까요.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비전,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들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 비전을 우리는 과연 몸으로 경험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요. </p>
<p> <br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4,'/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4+%22%20%ED%95%98%EB%8A%90%EB%8B%98%EC%9D%98%20%ED%98%B8%ED%9D%A1%EC%9D%84%20%EA%B0%80%EC%A7%84%20%EC%9E%90%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2%29%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4&t=%20%ED%95%98%EB%8A%90%EB%8B%98%EC%9D%98%20%ED%98%B8%ED%9D%A1%EC%9D%84%20%EA%B0%80%EC%A7%84%20%EC%9E%90%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2%29"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4&title=%20%ED%95%98%EB%8A%90%EB%8B%98%EC%9D%98%20%ED%98%B8%ED%9D%A1%EC%9D%84%20%EA%B0%80%EC%A7%84%20%EC%9E%90%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2%29','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4?commentInput=true#entry4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말씀이 말씀이 아닌 게 말씀입니다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1)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32007-05-15T15:04:22+09:002007-05-15T15:04:22+09:00<!--FCKeditor--><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3029537"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attach/2377/150304031.jpg')" height="300" alt="" width="400" onload="setTimeout('fixImage(3029537)',300)" src="/attach/2377/150304031.jpg" /></p>
<p align="center">떼제 공동체</p>
<p> </p>
<p>요한복음 1장에 대한 읽기입니다.</p>
<p> <br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합니다.(1절) 그리고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은 반면,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도 이야기합니다.(17절)</p>
<p> </p>
<p>말씀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습니다. 말씀이 말씀이 아닌 것이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그 동안 '말씀'이던 것들은 '말씀'이 아닌 게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 말씀이 아닌 - 한 인간이 말씀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아닌 것이 말씀인 것입니다.</p>
<p> </p>
<p>이전에 '말씀'이었던 건 율법이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 옛 말씀의 세계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옛 말씀은 나와 너를 가르는 말씀입니다. 말하는 자와 말을 듣는 자가 있습니다. 말을 집행하는 자와 말을 집행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갈등을 해결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권력을 가진자가 이 '말씀'을 무기 삼아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기도 하고, 때로는 민중이 이 '말씀'을 무기 삼아 권력자에게 대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이 옛 말씀은 나와 너, 자신과 타자를 가르는 것입니다. </p>
<p> </p>
<p>그러므로 새 '말씀'은 '말씀이 아닌 것'이어야 했습니다. '말씀'이 자신과 타자를 분별하여 가르는 것이었다면 새 '말씀'은 분별이 없는 삶을 여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은혜와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히브리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차별없는 하나입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이나 산헤드린의 니고데모 의원님이나 차별없는 하나입니다. 물론 옛 말씀도 좋은 의도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시대에선 옛 말씀은 그저 옛 말씀일 뿐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의를 가졌습니다. 예수의 의입니다. </p>
<p> </p>
<p>이 새로운 말씀, 육화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옛 '말씀'의 틀로 가두어선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18절)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차별 없는 하나인 전체 세상 바깥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을 바깥에 계시다고 생각하니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없고 '말씀'만 남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교리만 있고, 하느님은 없는 것입니다. </p>
<p> </p>
<p>육화된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봅니다. 하느님은 곧 차별없는 전체인 세상이요, 영생이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 말씀이나 교리를 '말씀'으로 받은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말씀이 아닌 말씀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몸으로 읽는 것이고, 논리로 받는 게 아니라 실천으로 받는 것입니다. <br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3,'/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3+%22%EB%A7%90%EC%94%80%EC%9D%B4%20%EB%A7%90%EC%94%80%EC%9D%B4%20%EC%95%84%EB%8B%8C%20%EA%B2%8C%20%EB%A7%90%EC%94%80%EC%9E%85%EB%8B%88%EB%8B%A4%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1%29%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3&t=%EB%A7%90%EC%94%80%EC%9D%B4%20%EB%A7%90%EC%94%80%EC%9D%B4%20%EC%95%84%EB%8B%8C%20%EA%B2%8C%20%EB%A7%90%EC%94%80%EC%9E%85%EB%8B%88%EB%8B%A4%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1%29"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3&title=%EB%A7%90%EC%94%80%EC%9D%B4%20%EB%A7%90%EC%94%80%EC%9D%B4%20%EC%95%84%EB%8B%8C%20%EA%B2%8C%20%EB%A7%90%EC%94%80%EC%9E%85%EB%8B%88%EB%8B%A4%20-%20%EB%AA%B8%EC%9C%BC%EB%A1%9C%20%EC%9D%BD%EC%9D%80%20%EC%9A%94%ED%95%9C%EB%B3%B5%EC%9D%8C%281%29','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3?commentInput=true#entry43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