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과 몰이해의 시점에서, 즉 타자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인간 공동체에서 제거된 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계속 강제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p.130

 

 

최근 베트남 여성의 사망사건을 바라보며,

뭔가 고민을 진척해보고 싶지만, 여의치가 않다.

정신병력을 가진 한국인 남편,

'정신병'이라는 것은 살인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이 되고,

정신병력이 있는 자를 결혼중개한 중개업체가 문제시되고,

베트남에는 정신병력이 있는 경우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법이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상과 정상이 아님의 구분을 끝없이 생산해내는 이 세상에서

살인의 이유는 곧잘 정신이상, 사이코패스 등으로 결론지어지고,

그것이 개인에 대한 면죄부이자 사회에 대한 면죄부이자, 결국 인간에 대한 면죄부로 이어진다.

인간은 그럴 수 없다.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인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정말 인간은 그럴 수 없을까.

 

이 문제는 또다시 취약한 상태에 놓인 이중삼중의 억압에 놓인 소수자 이주여성의 인권과

정신병력이 있는 자의 결혼할 권리라는 충돌로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답답하다.

그 여성, 얼마나 두려웠을까.

남편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혹은 감금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아파트 창문을 넘어야했던 여성들의 이야기,

혹은 남편을 살해한 여성의 이야기,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 속에서 가족이 더이상 울타리가 되지 못하는

가족이 오히려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여성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주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범주화하고,

어떻게 '이주여성'이라는 카테고리를 보호할 것인가를 얘기한다.

'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들을 보호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는 주체는 국가가 될 것이고,

이들의 안전을 관리하게 될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요구하게 될 것인가.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고 답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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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5 11:10 2010/08/05 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