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항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김선옥씨가 지난 4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38년 전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딸에게도 그 일만은 숨기고 싶었다. 그래도 인터뷰를 반대하는 딸을 설득해야 했다.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하고 글을 적어서 보여줬다. “나를 차에 태워서 밖으로 나가서 밥을 먹인 뒤, 나를 끌고 여관으로 갔어요. 나는 그때 저항할 수가 없었어요. 스물세살 나를, 그 수사관이 짓밟고 나서….” 딸이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를 꼭 안았다.
5·18 민주유공자 김선옥(60)씨는 지난 4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나 전날 딸(37)과 나눈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얼마 전에 여검사가 미투를 해서 38년 만에 나도 용기를 냈다”며 그동안 묻어뒀던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놓았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그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던 그는 5월22일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맡아 도청에 들어갔다. 상황실에서 출입증, 유류보급증, 야간통행증, 무기회수 등의 업무와 안내 방송을 하는 역할을 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민주인사들을 가둔 뒤 고문했던 옛 상무대 영창은 과거 모습대로 재현돼 있다. 정대하 기자
폭행과 고문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막 들어가자마자 발로 지겨불고(짓누르고) 엄청나게 때리더라고요. 여기 이마가 폭 들어간 데가 있는데 그때 책상 모서리에 찧어서 그래요. 피가 철철 나면서 정신없이 맞았어요.”
폭행과 고문으로 점철된 조사가 끝날 무렵인 9월4일 소령 계급을 달고 계장으로 불리던 그 수사관은 김씨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비빔밥 한 그릇을 사줬다. 오랜만에 본 햇살이 눈부셨던 날 김씨는 인근 여관으로 끌려가 대낮에 그 수사관한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전에 죽도록 두들겨맞았던 일보다도 내가 저항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까지 비참했어요. 자존심과 말할 수 없는 수치감….” 9월5일까지 꼬박 65일 동안 구금됐던 그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김씨는 그 사건 이후로 삶이 산산조각 났다. 방황하면서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을 임신했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김씨의 엄마는 충격을 받은 뒤 급성간암으로 세상을 떴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도 교직에서 쫓겨났다.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무도 만날 수가 없게 된 거예요.” 1981년 겨울 첫눈 오는 날 혼자 딸을 출산했다. 교육청에 진정서를 내 1983년 중학교 음악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5·18의 ‘5’ 자도 꺼내지 않고 숨어 살았다. 오직 딸이 삶의 전부였다.
광주시 서구 치평동 자유공원 터에 있던 상무대 영창의 원래 모습. 5·18기념재단 누리집 화면 갈무리
그에게 5·18은 현재형이다. “가끔 나 혼자 먼 데 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잠도 잘 못 자. 사람과의 관계도 잘 못하고. 남들은 결혼해서, 시가에서 남편하고 어쩌고저쩌고하는데 나는 5·18로 멈춰져버렸어요. 그 뒤로 딸 키우려고 아등바등 산 거밖에 없어. 할 이야기가 없어요.” 김씨는 “지금도 군인들이 나오는 영화는 잘 보지 못해요”라고 했다. “전두환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저놈 오래 살 것이다’라고 하면 딸이 막 웃어.”
80년 5·18 때 군인이 시민을 구타하는 모습. 5·18기념재단 누리집 화면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