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과정은 헌법과 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피고인에 대한 경찰의 수사는 영장 없이 진행된 바 영장주의에 위배되며 불법구금 및 방대한 가혹행위 등이 인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증거수집 역시 영장 없이 진행되었음이 인정됩니다."
그 순간 변호사와 자리에서 방청하고 있는 활동가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희색이 떠올랐으나, 남정길씨와 피해자들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잘 들리지 않는 판사의 말에 집중했다. 재판정에 자리한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판사는 남은 판결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자백의 임의성에 다툼이 있을 때에는 피고인이 그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되는 구체적인 사실을 입증할 것이 아니고, 검사가 그 임의성에 대한 의문점을 해소하는 입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검사는 이를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남정길 등의 자백은 불법구금 등으로 인해 임의성이 없고,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 역시 심리적 압박 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역시 임의성이 없다고 보입니다." (임의성이 없는 자백이란, 고문 협박 등에 의한 진술이나 허위 진술 등을 뜻함 - 편집자 주)
잠시 숨을 고른 판사는 다음 말을 마지막으로 긴 판결문 읽기를 끝냈다.
"판결하겠습니다. 남정길 외 각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검사 측의 이의가 없으면 일주일 뒤에 선고가 확정된다는 말을 뒤로 하고 재판이 끝났다는 말에 남정길씨와 피해자들은 종종 걸음으로 법정을 나왔다. 옆에서 변호사가 무죄가 나왔다고 말을 했지만 여전히 피해자들은 별반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법정을 나오니 유가족 한 명이 변호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래서 뭐라는 거예요?"
다른 유가족들도 덩달아 판사 목소리가 너무 작고 말이 빨라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며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말에 변호사는 환하게 웃으며 "무죄 받으셨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제야 피해자들은 서로 얼싸안고 큰 목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도 떳떳...하게 살 수 있...으니까"
▲ 무죄 선고 후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 가족들 | |
ⓒ 지금여기에 |
법정을 나온 피해자들은 저마다 속에 쌓인 이야기를 하며 함께한 변호사와 시민단체 '지금여기에'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남정길씨는 말이 불편한 와중에도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제...우리도 떳떳...하게 살 수 있...으니까."
연신 눈물을 흘리며 그는 어눌한 어투로 심경을 이어갔다.
"제가... 납북되었다... 돌아와서... 한 번... 끌려가... 그 고초를 당하고 3년 뒤에 또... 끌려가서 고통을... 받고(남정길씨는 두 번의 고초를 당했다. 두번째 끌려간 사건에 관해서도 재심을 진행하려고 한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말이... 안 나와요. 한 번은... 교도소에 있던... 다른 재소자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당신 같은... 사건은 항소해도... 소용없다고... 말하는데 그 뒤에도...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고... 죽은 것처럼 살았습니다."
흐느낌과 억울함이 한 번에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다른 유가족들이 말을 이어받았다.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요. 그 고생을 말로 어떻게 전하겠어. 그래도 이제는 잘될 일만 남았으니 다행이야. 서창덕씨도 살아서 오늘 재판을 봤어야 하는데."
서창덕씨는 몇 년 전 납북어부 사건으로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조작간첩 피해자다. 서창덕씨와 제5공진호 사건 말고도 수없이 많은 납북어부 사건들이 재심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세월 속에 잊히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 괴롭혔던 수사관들 천벌 받아야 해. 남궁길영. 내가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한다니까. 사람 허리를 절단 내고 괴롭히고. 죽어도 잊지 못해."
진실은 밝혀졌으나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고통으로 내몬 이들의 사과는 여전히 없다. 이를 위해 과거사 법의 재개정 및 고문폭력 등의 국가폭력을 사회적 폭력으로 보고 해결하려는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 무죄 선고 직후 찍은 기념사진 | |
ⓒ 지금여기에 |
"선생님들, 기념 사진 찍으시고 이 현수막 가져가시면 어떨까요?"
"당연하지. 이거 가져가서 일주일 뒤에 마을에 걸어놓을 거예요. 이제 우리도 떳떳하잖아!"
이들의 재심을 지원한 시민단체 '지금여기에'는 이날 있을 판결이 무죄로 나오길 바라며 무죄 축하 현수막을 뽑아왔다. 무죄가 나와서 다행이지 안 나왔으면 어쩔 뻔 했느냐는 변호사와 피해자들의 농담에 반드시 무죄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는 활동가의 넉살을 뒤로 하고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마을 선유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