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7.22 09:27 수정 : 2020.07.22 10:48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 터 남쪽 구역에서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1600년전 신라 광장이 확인됐다. 동궁 및 월지까지 500m(폭 50m)가량 이어진 이 광장의 규모는 2만5000㎡(7600평)에 달한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http://img.khan.co.kr/news/2020/07/22/l_2020072201002657400209543.jpg)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 터 남쪽 구역에서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1600년전 신라 광장이 확인됐다. 동궁 및 월지까지 500m(폭 50m)가량 이어진 이 광장의 규모는 2만5000㎡(7600평)에 달한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신라시대 최대의 사찰이던 경주 황룡사터 남쪽에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대규모 ‘광장’이 존재했다는 조사성과가 정리되어 발표됐다. 이 광장은 담장과 함께 황룡사에서 동궁 및 월지 방향으로 500m 가량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동궁 및 월지(서쪽)와 명활산성(동쪽)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의 존재도 확인됐다.
2016년부터 황룡사 남쪽 구역(3만1000㎡)을 조사중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이민형 연구원은 24일 경주에서 열리는 ‘황룡사 남쪽 광장 정비를 위한 정비 및 활용’ 학술대회에서 2만5000㎡(7600평·동서 500m×남북 약 50m)에 이르는 광장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다.
![조사구역에서 드러난 신라시대 광장. 높이 60㎝ 정도의 담장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폭은 50m 가량이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http://img.khan.co.kr/news/2020/07/22/l_2020072201002657400209541.jpg)
조사구역에서 드러난 신라시대 광장. 높이 60㎝ 정도의 담장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폭은 50m 가량이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민형 연구원은 22일 정리된 논문(‘황룡사 남쪽광장과 도시유적 조사성과’)에서 “맨먼저 조성된 광장의 배수로를 채운 유물 중에 ‘의봉 4년명’ 기와 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의봉’은 당나라 고종(재위 649~683)의 9번째 연호(676~679년)이며, 따라서 ‘의봉4년’은 679년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광장의 첫번째 조성시기는 늦어도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초로 추정된다. 광장은 지금도 도로 포장 등에 쓰는 마사토(지름 0.002mm 이하, 점토분이 12.5% 이하인 입자로 된 토양)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먹 크기의 냇돌을 촘촘히 덮은 구조로 조성했다.
![동궁과 월지까지 길게 조성된 동서도로. 후대에 이 도로 위에 광장이 조성됐다. |신라문화연구원 제공](http://img.khan.co.kr/news/2020/07/22/l_2020072201002657400209542.jpg)
동궁과 월지까지 길게 조성된 동서도로. 후대에 이 도로 위에 광장이 조성됐다. |신라문화연구원 제공
이후 1차 정비된 광장은 처음의 광장 위에 마사토와 사질점토를 덮고 자갈을 전면적으로 깐 모습이었고, 2차 정비된 광장은 20~30㎝의 냇돌을 자갈과 함께 깔아 조성했다. 광장의 동쪽 경계부에서는 길이 30.4m, 너비 280㎝ 정도의 넓은 배수로가 남북방향으로 연결된채 노출됐다. 1차로 조성된 광장으로 유입되는 물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밖에 광장보다 더 남쪽에 조성된 주거단지와의 구분을 위해 설치한 담장도 보였다. 담장은 광장보다 60㎝ 정도 높게 조성됐으며, 확인된 길이만 280m에 달했다. 이민형 연구원은 “너비 1.5m의 담장은 동궁(월지)까지 500m 정도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황룡사에서 월지 및 동궁까지 500m가량 이어진 대규모 광장의 세부구조. 광장은 지금도 도로 포장 등에 쓰는 마사토(지름 0.002mm 이하, 점토분이 12.5% 이하인 입자로 된 토양)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먹 크기의 냇돌을 촘촘히 덮은 구조로 조성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http://img.khan.co.kr/news/2020/07/22/l_2020072201002657400209544.jpg)
황룡사에서 월지 및 동궁까지 500m가량 이어진 대규모 광장의 세부구조. 광장은 지금도 도로 포장 등에 쓰는 마사토(지름 0.002mm 이하, 점토분이 12.5% 이하인 입자로 된 토양)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먹 크기의 냇돌을 촘촘히 덮은 구조로 조성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조성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팀장은 “광장의 규모는 도로를 제외한 광화문 광장(약 600m×60m) 보다는 약간 작지만 1300~1400년 전의 경주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규모”라고 설명했다. 물론 신라인들이 이 넓은 광장에서 무엇을 했는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서라벌에 절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寺寺星張 塔塔雁行)”(<삼국유사>‘원조흥법염초멸신’)는 기록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521년) 불교를 수용했다. 그러나 불교는 신라에서 꽃을 피워 신라에서 결실을 맺었다.
![광장보다 더 남쪽에 조성된 주거단지와의 구분을 위해 설치한 담장도 보였다. 담장은 광장보다 60㎝ 정도 높게 조성됐으며, 확인된 길이만 280m에 달했다.|신라문화연구원 제공](http://img.khan.co.kr/news/2020/07/22/l_2020072201002657400209545.jpg)
광장보다 더 남쪽에 조성된 주거단지와의 구분을 위해 설치한 담장도 보였다. 담장은 광장보다 60㎝ 정도 높게 조성됐으며, 확인된 길이만 280m에 달했다.|신라문화연구원 제공
17만8936호가 살았다는 왕경에 ‘별처럼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던 절과 탑을 상상해보라. 특히 월성 동북쪽에 우뚝 서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은 서라벌의 랜드마크였을 것이다. 탑 높이가 자그만치 80m나 됐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서라벌 백성들이 황룡사 앞에 조성된 광활한 광장에 모여 우뚝 솟은 목탑을 바라보며 나라의 안녕과 개인의 화복을 빌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이 광장에서 팔관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가 열렸을 가능성이 있다. 팔관회는 가을의 추수를 천신에 감사하기도 하고, 전사한 장병들의 명복을 비는 종교 행사였으며 문화제였다. “572년(진흥왕 33년)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7일간 팔관연회가 열렸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진흥왕조’ 기록이 있다. 898년(효공왕 2년)에도 “팔관회를 시작했다”는 기사(<삼국사기>)가 등장한다. 이민형 연구원은 또한 “발굴지역에서 동서도로와 남북도로 1·2호 등 도로 3곳이 확인됐으며, 시차를 두고 조성된 十자 교차로도 찾아냈다”고 밝혔다.
![광장의 담장 남쪽에 조성된 가옥군도 확인됐다. 가옥군은 남북도로와 작은 도로로 4개의 공간으록 구분됐다. 경주 도시계획의 치밀함을 보여준다.|신라문화연구원 제공](http://img.khan.co.kr/news/2020/07/22/l_2020072201002657400209546.jpg)
광장의 담장 남쪽에 조성된 가옥군도 확인됐다. 가옥군은 남북도로와 작은 도로로 4개의 공간으록 구분됐다. 경주 도시계획의 치밀함을 보여준다.|신라문화연구원 제공
동서도로와 1호 남북도로가 교차되는 도로는 시차를 두고 조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동서도로는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7세기초 만든 광장은 이 도로 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민형 연구원은 “폭 15~19m의 동서도로는 조사구역 전체(동서 316m)로 뻗어있었으며, 서쪽으로는 경주 동궁 및 월지, 동쪽으로는 명활산성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도로 양쪽 가장자리는 광장을 조성할 무렵 의도적으로 매립한 흔적이 보이며 그 안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기와 목제 도장 등의 유물과 복숭아씨, 밤껍질, 가래씨, 잣 등 자연유물이 출토됐다.
![조사구역. 광장과 도로, 가옥군까지 경주의 도시계획을 알 수 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졌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http://img.khan.co.kr/news/2020/07/22/l_2020072201002657400209547.jpg)
조사구역. 광장과 도로, 가옥군까지 경주의 도시계획을 알 수 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졌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민형 연구원은 “발굴성과 중 하나는 광장 담장 남쪽에 조성된 가옥군(주택단지)의 확인”이라고 밝혔다. 주택단지는 남북도로 2기와 작은 도로(小路) 2기에 의해 4개의 공간으로 구분됐다. 조성윤 팀장은 “신라의 공간은 140~160m 간격의 바둑판 모양처럼 구획되는 것으로 그동안 알려졌지만 이번 조사결과 그 사이 70~80m 간격의 작은 도로로도 나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밖에 황룡사는 연약한 습지 위에 흙을 성토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민형 조사원은 “특히 이 넓은 대지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크고작은 구획으로 나눠 45도 경사지게 성토한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원활한 배수를 위해 굵은 돌과 자갈, 그리고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았다”고 전했다.
![황룡사 9층목탑과 금당이 있었던 자리. 13세기 몽골침입 때 소실됐다.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만 80m 가량 되었다. 17만5000호가 된 서라벌 주민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항룡사 앞에 조성된 광장에서 나라와 개인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http://img.khan.co.kr/news/2020/07/22/l_2020072201002657400209548.jpg)
황룡사 9층목탑과 금당이 있었던 자리. 13세기 몽골침입 때 소실됐다.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만 80m 가량 되었다. 17만5000호가 된 서라벌 주민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항룡사 앞에 조성된 광장에서 나라와 개인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년) 건립된 사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은 “진흥왕이 처음엔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 조영으로 계획을 바꿨으며 17년 만인 569년(진흥왕 30년) 절(황룡사)을 완성했다”고 기록했다. 이 절에는 신라의 세가지 보물(三寶·장육존상, 9층목탑, 천사옥대) 중 두 가지인 장육존상과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지만 13세기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