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준연, 김구 암살의 배후로

2026/06/05 08:36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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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김준연 편

조선 최고 인텔리가 반헌법의 설계자 된 사연

"이승만 뜻" 헌법 초안 내각제를 대통령제 바꿔

내각제 초안 5분만에 연필로 쓱쓱 대통령제로

천하의 모사꾼으로 야당 분열시킨 극우 브레인

국회프락치 발단 제공하고 반민특위 와해 앞장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김준연(金俊淵, 1895~1971) 항목의 소제목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에서 해방 후 극

우 정치인으로 변신."

"이승만 뜻에 따라 내각제 헌법초안을 대통령중심제로 급히 바꾼 장본인."

"천하의 모사꾼으로 야당을 분열시킨 극우 브레인 노릇."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회프락치 사건 발단 제공하고 반민특위 와해에 앞장서."

한 사람이다. 일제치하에서 고문과 옥고를 겪으며 조선독립을 꿈꾸던 인텔리가,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를 파괴하고, 국회프락치 사건의 불씨를 당기고, 김구 암살의 배후로 거론되고, 부역자 학살의 법적책임자가 됐다. 이 변신의 궤적이 이 글의 핵심이다.

'영암 천재',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김준연은 1895년 4월 8일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영암보통학교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를 전교 6등으로 마친 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제국대학 독법과를 졸업하고 1921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정치·법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1925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이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특파원이었다. 그는 소비에트연방 전체회의를 참관하고, 공산주의 이론가 부하린의 연설문을 번역 게재했으며, 스탈린의 저서를 39회에 걸쳐 연재했다.

1926년 재건된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선전부장을 맡았고, 1927년 9월 당 책임비서가 됐다. 1928년 2월 간부들이 모두 검거되면서 조선공산당이 붕괴됐고, 김준연도 체포돼 6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그런데 출옥 후 그는 공산주의와 절연한 정도를 뛰어넘었다. 극우정치인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이 변신에 대해 역사가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공산혁명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이었다는 설, 감옥 안에서 배신자로 의심받으면서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는 설,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와 독일어로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특수한 위치를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설. 어느 쪽이든 그 변신이 완전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준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전향자의 역사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궤적을 걸은 역사적 인물들이 떠오른다. 아르투르 쾨슬러(Arthur Koestler, 1905~1983)다. 헝가리 태생 영국 작가로 1930년대 공산당원이었다가 스탈린의 대숙청에 환멸을 느끼고 전향해 반공주의의 대표적 지식인이 됐다. 『한낮의 어둠』(1940년)은 스탈린식 재판을 고발한 걸작으로 남았다. 쾨슬러의 전향은 지적·사상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이탈리아의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 1893~1964)는 반대 방향을 걸었다.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탈리아 공산당을 이끌어 전후 이탈리아 민주화에 기여했다. 신념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다.

김준연은 둘 중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전향 후 자신이 싸우던 방향의 정반대에 서서, 친일청산을 방해하고, 국회프락치 사건의 불씨를 당기고, 부역자 학살을 법적으로 처리했다. '권모술수의 달인'으로 불린 이유가 있었다.

 

1969년의 아르투르 쾨슬러(위키피디아)

헌법의 씨앗을 대통령제로 바꾼 30분

1948년 제헌의회가 구성됐다. 처음 초안은 내각책임제였다. 국무총리가 실권을 갖고 대통령은 상징적 존재가 되는 구조였다. 그런데 대통령으로 유력시된 이승만(1875~1965)이 헌법기초위원회에 출석해 "직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책임제가 적합하다""이 헌법 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겠다"고 사실상 협박을 했다. 대통령이 없는 초대정부는 있을 수 없었다.

헌법기초위원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김준연이 나섰다.

"내가 고치겠소! 30분 이내에 고쳐놓겠소!"

그리고 초안에 연필로 죽죽 줄을 그은 뒤 "이만하면 되었소"라고 했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순간 대한민국 헌법의 권력구조가 대통령제로 바뀌었다. 훗날 헌법기초에 참여한 유진오는 탄식했다.

"이 결정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결정적으로 대통령제로 넘어가고 대통령 전제 독재의 길은 환하게 뚫려진 것이다."

김준연의 연필 한 획이 대한민국 헌정사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김준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국회프락치 사건의 불씨, 반민특위의 적

1949년 5월 9일 동아일보 1면에 김준연이 기고한 「의정 단상의 1년 회고」가 실렸다. 이 글에서 그는 민주당에 비판적인 소장파 의원들을 사실상 남로당의 지시를 따르는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이것이 국회프락치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검찰이 기고문 게재 9일 후 소장파 의원 3명을 체포했고, 이어 6월부터 8월에 걸쳐 13명의 소장파 의원들이 구속됐다. 당시 전체 국회의원의 6.5%였다.

국가보안법 발의에 앞장섰던 제헌의원 김인식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국회프락치 사건 관계자에 좌익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조작했다기보다는 김준연 의원이 만들어 이 박사를 믿게 한 것으로 본다."

같은 시기 김준연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도 적극 반대했다. 친일파 처벌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형이 가혹하다며, 조항을 대폭 축소하자고 주장했다. 친일 악질경찰 노덕술의 은닉을 도운 이두철에게 체포계획을 알려줘 도피를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중추원 참의 출신 현준호의 체포에 반대하고, 그 사실을 현준호에게 미리 알려 자수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준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구 암살의 배후 의혹

1949년 6월 26일, 김구(1876~1949)가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4·19혁명 이후 백범암살사건진상규명투쟁위원회는 김구 암살의 배후로 김준연을 지목했다. 이에 대해 김준연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며 김창숙을 고소했다. 1992년 안두희의 폭로에서도 김준연의 이름이 일부 거론됐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김준연과 신성모 등이 포함된 이른바 '88구락부'가 김구 제거에서 이해관계가 충분히 일치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진상은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이 사건과 계속 함께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말해주는 것이 있다.

 

전남 영암에 있는 낭산 김준연 기념관의 동상이 월출산을 배경으로 서 있다. 네이버 블로그 통통윤이맘 갈무리

법무부장관으로 부역자 학살을 처리하다

1950년 11월 서울 수복 후 김준연은 법무부장관에 임명됐다. 그의 재임 기간 부역 혐의자에 대한 불법 처형이 이어졌다. 홍제리(지금의 홍제동)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재소자들이 무릎 꿇린 채 총살됐다. 국제적십자위원회 대표는 법무부장관 김준연이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공산주의 혐의자들을 구금하고 "예방차원에서 학살하는 것을 정당화했다"고 보고서에 기록했다. 김준연은 이를 비상조치령에 따른 "합법적 처리"라고 주장했다. 그 비상조치령은 그가 한국전쟁 피난 도중 직접 만든 것이었다.

 

김준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사상의 전향을 연구한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있다. 가장 극단적인 전향자는 가장 극단적인 반대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것이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김준연은 해방 후 가장 극렬한 반공주의자가 됐다. 그리고 그 반공주의의 이름 아래 친일 청산을 막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소장파 의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고, 부역자 학살을 합법화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1948년 6월의 그 5분을 떠올렸다. 김준연의 연필 한 획이 대통령제로 헌법을 바꾼 그 순간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헌정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가능하게 한 헌법구조의 씨앗을 심은 사람, 그리고 그 씨앗이 70년 넘도록 어떤 열매를 맺어왔는지를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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