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일 시민기자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6월 3일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유례 없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지금까지의 보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91개 투표소에서 7194장, 서울에서만 4206장의 투표용지가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다. 11일 김민석 국무총리는 선거권 침해 관련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며 국민의 목소리를 빌어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해체까지 언급했다.
투표율을 엄밀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선거인(유권자) 숫자만큼 투표용지를 인쇄하지 않는 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예상하지 못한 투표용지의 부족으로 투표용지를 추가적으로 인쇄하여 배부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므로 투표시간을 연장하는 상황도 이해할 수는 있다. 이전에도 투표시간 막판에 투표자가 몰리면 투표시간을 연장했던 선례도 있다.
물론 선관위의 안일한 대처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선관위가 탄생한 배경을 되돌아보면 섣부른 선관위 해체론, 그것도 국무총리가 직접 언급한 선관위 해체는 매우 부적절하다. 오히려 선관위가 독립적인 헌법기관으로 설치된 목적에 부합하지 않게 작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할 시점이다.
선관위는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4·19혁명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설치된 헌법기관이다. 1960년 헌법(제3차 개정헌법)은 헌법기관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설치하면서 편제에서도 제5장 정부와 제7장 법원 사이에 중앙선관위를 위치시킴으로써 그 헌법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중앙선관위 전체 위원 9명 가운데 3명은 대법관 가운데 호선하며 위원장도 대법관인 위원 가운데 호선하도록 규정하였다. 중앙선관위원장을 대법관이 맡는 전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표제에 ‘통치기구’라는 불편한 용어가 등장한 1962년 헌법(제5차 개정헌법)에서 중앙선관위는 국회, 정부, 법원에 이어 제4절에 편제되면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2명, 국회에서 선출하는 2명, 대법원 판사회의에서 선출하는 5명으로 구성되었다. 중앙선관위의 구성에서 대법원의 역할이 강화되었으나 중앙선관위원을 반드시 법관 중에서 선출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대법원에서 선출되는 중앙선관위원을 법관 중에서 선출하는 관례는 유지되었다. 중앙선관위원의 정치적 중립성이 강조되었으며 중앙선관위의 규칙 제정권이 부여되어 독립성도 강화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전대미문의 국가기관을 설치한 1972년 헌법(제7차 개정헌법)에서 선관위는 중앙선관위와 각급 선관위로 조직되어 이전보다 체계성을 갖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법률에서 선관위를 중앙선관위와 각급 선관위로 조직하고 있었다. 중앙선관위원은 9명으로 유지되었지만 이 가운데 3명은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여 임명하고, 국회에서 선출된 3명, 대법원장이 지명한 3명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위원의 숫자가 3명으로 축소되었으며 위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됨으로써 중앙선관위는 행정부 의존성이 강화되어 독립된 헌법기관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앙선관위의 구성과 관련하여 1980년 헌법(제8차 개정헌법)은 1972년 헌법을 거의 그대로 따랐으나 위원장을 위원들이 직접 서로 협의하여 선출하는 방식(호선)으로 개정되어 독립성을 회복하였다. 현행 헌법인 1987년 헌법(제9차 개정헌법)에서도 중앙선관위의 구성은 위원의 임기만 6년으로 연장되었을 뿐이고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대법원장이 법관 중에서 중앙선관위원을 지명하는 관례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중앙선관위와 각급 선관위로 조직되는 선관위는 헌 법개정 없이는 폐지할 수 없는 헌법기관에 해당하며 독립된 국가기관이므로 중앙선관위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나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계엄군의 중앙선관위 침탈은 위헌적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내려진 바 있다.
헌법의 위임을 받아 제정된 〈선거관리위원회법〉에 따르면 선관위는 중앙선관위와 함께 4개 종류로 구분된다. 중앙선관위뿐만 아니라 각급 선관위의 위원으로 법률에서 정한 최소한의 법관이 포함되어야 하며 법관을 우선하여 위촉해야 한다는 규정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성방식이 선관위를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설치한 헌법의 취지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헌법 어디에도 선관위원의 자격을 법관으로 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독립적 헌법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구성단계에서부터 법관의 비중이 높다. 정치적 지향성이 강한 입법부나 행정부보다 사법부가 선거관리에서 상대적으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여기까지는 납득할 수 있지만 권력분립 원칙의 관점에서 보면 현직 법관이 독립적 헌법기관인 선관위의 위원으로 임명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대법원장이 중앙선관위원을 지명하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으나 현직 법관을 선관위원으로 임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위원들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상임위원이라는 점이다. 중앙선관위의 상임위원은 호선이 원칙이지만 관례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 가운데 한 명이 상임위원이 된다. 선관위는 의결기구이며 이를 집행하는 기구로 사무처를 두는데 중앙선관위의 사무처에는 사무총장과 사무차장, 시ㆍ도선관위의 사무처에는 사무처장을 둔다. 이러한 사무처를 감독하는 권한을 상임위원이 갖는데 현실적으로 상임위원 한 명이 사무처를 감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사무처에 대한 효과적인 감독을 위해서는 상임위원의 숫자를 증원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투표시간과 관련하여 원칙적으로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인데 대기자가 있는 경우에 번호표를 부여하여 투표하게 해야만 한다. 투표시간은 법률에 고정되어 있지만 투표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투표시간 안에 도착하여 투표를 마치지 못한 유권자에게는 투표시간을 연장하여 투표권을 보장한다. 투표권의 보장을 위해서 투표시간의 조정은 허용된다는 뜻이다.
투표용지 부족사태와 관련하여 국가의 선거업무를 방해할 목적으로 고의나 과실로 투표용지의 부족을 초래했다면 형법상 직무유기죄에 해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대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공무원의 직무유기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기능을 저해하고 국민 피해를 야기할 구체적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수사기관의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국민의 참정권, 특히 선거(헌법 제24조)이 침해되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이 청구된 경우에 문제가 되는 집단은 투표시간 안에 도착하였으나 투표용지의 부족으로 정해진 투표시간을 넘어 투표한 유권자들 또는 지연된 투표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투표를 포기한 채 돌아간 유권자들이다.
전자의 경우에 투표할 시간이 지연되어 선거권의 행사를 방해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선거권 자체가 박탈된 것은 아니므로 헌법재판소가 선거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지는 단정할 수 없다. 문제는 후자로 투표할 수 있는 시간의 지연으로 대기표를 받고도 기다리지 못해 투표를 포기하여 사실상 선거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헌법재판소는 선거권 침해를 확인할 개연성이 높다.
다만 투표용지 부족사태로 인한 선거의 효력, 즉 재선거 실시 여부는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소청이나 선거소송으로 다투어야 하며 이 문제를 헌법소원으로 다투면 보충성 원칙 위반으로 각하될 수 있으며 굳이 선거소송의 헌법 위반 여부를 다투려면 최근에 도입된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해야 한다.
국가공동체의 의사를 그 구성원이 직접 결정하는 민주주의는 구성원의 자격을 분명하게 확정하기 위하여 국민주권으로 구체화되며 국민주권을 구현하는 방식으로서 대의제 체제에서 선거권은 대표에게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필수적 요소다. 선거권에 대한 제도적 침해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투표용지 숫자에 대한 추정의 실패로 선거권에 대한 사실적 침해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일부의 주장처럼 부정선거로 몰아가거나 심지어 부정선거에 따른 비상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선관위의 구성에서 법관중심 제도와 1인 상임위원 제도와 같은 제도적 결함에서 연유하였으며, 더욱이 선관위 내부의 감독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선거권이 침해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상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정파적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나 여당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정권에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하여 부정선거론자의 주장에 편승하여 선관위 해체론을 옹호하지 않아야 한다. 선관위 해체는 헌법 개정으로만 가능하며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선관위를 설치한 헌법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선관위의 개혁을 모색해야 한다.
이준일 시민기자 profyi@kore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