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 북극 항로 정책이 단순한 물류 프로젝트가 아니라 남북 관계를 포함한 동북아의 지정학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외교 카드란 평가가 나왔다.
미국 브라운대 왓슨 국제·공공문제연구소의 라일 골드스타인 교수와 앤디콧대의 비탈리 코지레프 정치학‧국제학 교수는 '동북아의 빙하를 깨다. 이재명 대통령의 과감한 북극 베팅'이란 3일 자 <38노스> 공동 기고에서 한국의 북극 항로 정책을 "가능성을 담은 하나의 평화 제안이며, 강대국 사이에서 영민하게 움직이는 과감한 시도"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현재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란 지정학적 리스크만 해소되면, 예정대로 오는 22일 북극 항로 시범 운항에 돌입할 예정이다. 북극 항로 추진본부에 따르면, 부산에 거점을 둔 선사 팬스타라인닷컴의 컨테이너선이 부산항을 출발해 러시아 쪽 북극해를 거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항까지 운항하며, 왕복에 40∼45일이 소요될 걸로 예상된다. 이를 두고 두 교수는 "한국의 이 대통령은 문자 그대로도, 비유로도 '빙하 깨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라고 썼다.
"북극 항로 정책, 가능성 담은 평화 제안"
22일 부산-로테르담 시범 운항 돌입 예정
이들은 북극 항로 정책을 이 대통령의 '평화 구상' 중 하나로 풀이했다. 작년 6월 취임 이후 단행한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선 비핵화 폐기와 선 평화론 수용'이란 최근의 대북 정책 전환과 맥을 같이한다고 봤다. 그러면서 "이른바 중국‧북한‧러시아 '북방 삼각'과 미국‧한국‧일본 '남방 삼각' 사이의 신냉전 대립 구도에 직면한 이재명 정부는 창의적 방식을 통해 한국의 경제와 국가 안보 이익을 지키려고 조용하지만, 체계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골드스타인과 코지레프는 이 대통령의 실용적 균형 외교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이들은 "이 대통령은 한국 외교 정책의 기존 패턴을 너무 급격히 깨지 않으려고 신중함을 보였다"면서 그 사례로 지난 7월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 참석과 함께, 전 정부의 대일본 외교 기조 유지, 미국이 요구한 국방비 지출 확대 수용 등을 들었다.
두 사람은 "이 대통령은 또한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복원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북극 항로 구상을 소환했다. 이들은 "그의 북극 항로 구상은 적어도 출발점에서는 한‧러 관계의 복원을 겨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작업이 북‧러 관계에도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악화하는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그런 균형 외교는 청와대에 도전이 되겠지만, 새로 부상하는 복합적 다극화 세계 질서에 실용적으로 대응하려는 가치 있는 발걸음이다"라고 평가했다.
북극 항로, 수에즈 항로 대비 거리 36% 단축
러시아의 통항 허가와 안내, 쇄빙선 지원 필수
이 구상은 부산항을 북극 항로의 주요 아시아 환적 거점으로 육성하고, 2030년까지 정기 상업 운항을 정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북극해 항로(NSR)를 이용하면 부산에서 로테르담까지의 운송 거리가 기존 수에즈 운하 항로의 약 2만2000㎞보다 약 8000㎞ 줄어 약 36%가 단축되는 효과가 있다.
골드스타인과 코지레프는 한국이 '내빙' 선박(Arc7) 건조 분야의 세계적 위상을 거론한 뒤 "이런 계획들이 단순한 구상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의 대러 제재로 인해 주요 발주가 중단됐지만, 러시아의 내빙 탱크선 대부분도 한국에서 건조됐다. 이들은 "러시아 천연가스 생산업체들이 한국 최대 조선업체인 한화오션의 LNG 운반선을 도입하고자 다시 협상 중"이라고 전했다.
북극 통항을 위해선 북극 항로 대부분이 러시아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속해 러시아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한국 선박이 북극해를 통과하려면 러시아의 통항 허가와 쇄빙선 지원, 그리고 항로 안내와 기상 정보 서비스가 필요하다. 앞서 5월 26일 러시아 매체 <로시스카야 가제타>는 한국 측은 "이미 북극해 항로를 통한 컨테이너선의 운항과 관련해 러시아 당국과 예비 협의를 진행했으며, 통항에 대한 모스크바의 원칙적 동의를 확보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마지막 관문은 서방의 러시아 제재 리스크
"북‧러 양해 없이 한‧러 관계 돌파구 난망"
또 다른 관문이 남아 있다. 서방의 대러 제재다. 러시아의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에서 제재를 위반하거나 미국의 '2차 제재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정부는 이를 예방하고자 미국 등 관련국과 막바지 조율작업을 벌이는 걸로 알려졌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골드스타인과 코지레프가 이 대통령의 북극 항로 구상을 북‧러 동맹 강화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해석하는 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동맹 관계를 통해 러시아가 북한의 군사력과 핵 현대화에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이 대통령의 북극 항로 구상에 담긴 무언의 메시지는 러시아에 어느 정도 '당근'을 제공하고 대러 지렛대를 확보함으로써 북‧러 파트너십을 약화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풀이했다.
두 교수는 이 대통령의 북극 항로 구상이 성공하려면 '북한의 참여'가 핵심 요소라는 점을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 당시, 한국과 러시아를 잇는 '9개 다리'(천연가스, 철도, 항만, 전력, 북극 항로, 조선, 일자리, 농업, 수산) 구축은 중단된 나진-하산 프로젝트나 광역 두만강 개발구상처럼 북한의 참여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이들은 지적했다.
한·미·일·북·중·러 '북극 통항 6자 회담' 제안
"동북아 해양 협력 조건, 북극 통항에 집중"
이들이 보기에, 지정학적 상황은 녹록지 않다. 뭣보다 우크라 전쟁을 거치며 북‧러 동맹 관계가 더 공고해지고 제도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러시아는 현재 포탄과 같은 핵심 군수물자는 물론 병력까지 북한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고, 전쟁은 더욱더 격화하는 상황이다. 이에 두 사람은 "북‧러 간의 사전 양해 없이 한‧러 관계의 중요한 돌파구를 생각하긴 어렵다"고 우려했다. 또한 우크라 전쟁 발발 이후 한국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방산 협력을 강화하는 유럽의 입장에서도 군사 분야와 무관한 북극 항로 이슈라고도 해도 한국이 적대국인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걸 경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한국엔 부담스러운 대목으로 봤다.
이런 여러 지정학적 요소들을 고려할 때, 중장기적으로 한·미·일과 북·중·러가 모두 참여하는 북극 항로 개척을 위한 '새로운 6자 프로세스' 창설을 이들은 제안했다. 이들 6개국이 참여했던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 회담은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1차 회담을 시작해 2008년 12월 6자 회담까지 이어졌으나. 성과 없이 종료됐다. 이후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강행으로 6자회담은 그 운명을 다했다. 골드스타인과 코지레프는 "새로운 다자간 협의체는 동북아에서의 해양 협력 조건과 특히 북극 통항 문제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러한 다자간 포맷은 북한을 역내 문제의 잠재적 이해 당사자로 참여시키는 통로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란 전쟁, 동북아 ‘북극 통항’ 공감대 촉진?
"중·일도 한국 빙하 깨기 작업 동참 가능성"
중‧일 관계에 미치는 부수적 효과도 짚었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 모두 북극 통항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지닌 채 '빙하를 깨려는' 한국 대통령의 노력을 지지할 것이란 몇몇 정황이 존재한다. 이 대통령은 북극 항로 개발이 중‧일 관계가 위험한 균열 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이들 두 나라를 함께 모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의제가 될 수 있다고 볼지도 모른다"고 썼다. 중‧일 관계는 올해 1월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으로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호르무즈 해협에 석유와 가스 수입 대부분을 의존하는 동북아 국가들이 6개월째 지속되는 이란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으며 대체 에너지 공급 및 수송 항로를 신속히 개발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북극 통항 문제에 대한 공동의 작업을 촉진하는 요소라고 이들은 지적했다.
두 교수는 "이 대통령의 북극 카드가 격화되는 우크라 전쟁이라는 강력한 지정학적 역풍 탓에 완벽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해도, 동북아의 에너지 미래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실용적인 지역적 논의를 촉진할 수 있다"며 "그의 북극 구상은 적어도 러시아가 전면적 대북 군사 협력이 가져올 함의를 더욱 깊이 검토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기대했다.
또한 북극 통항은 아시아와 유럽을 훨씬 더 밀착시켜 다극화와 글로벌 안정성을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미국도 상당한 혜택을 볼 걸로 이들은 예상했다. 골드스타인과 코지레프는 "이 대통령의 북극 항로 구상은 우크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아주 복잡해졌지만, 이 사업을 밀고 나갈만한 설득력 있는 이유는 여전히 존재한다"며 "이 도전적이지만 여전히 유망한 사업에 대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제안한다"라면서 끝을 맺었다.
이유 에디터 yooillee22@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