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민중항쟁과 미국의 개입 (2) 항쟁 발발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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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5/13 [16:4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5.17쿠데타와 광주에 대한 군대투입, 미국은 알고 있었다.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신군부가 민중들의 열망과는 반대로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총칼로 군부독재를 연장하려고 했을 때 미국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리고 신군부의 5.17군사정권 연장 쿠데타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광주에서 격렬하게 일어났을 때, 미국은 광주에서의 항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이 한국인들의 생명이나 민주화보다, 친미 군부정권의 안정을 더욱 중요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무렵 미국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한국의 정국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둔 것으로 보입니다. 신군부는 1980년 초부터 적 후방에 투입되어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최정예부대인 공수특전단들에게 ‘충정작전’이라는 이름의 폭동진압작전을 대대적으로 지시합니다. 공수특전단은 이미 부마항쟁과 서울 일부 지역에 투입되어 시위 진압과정에서 가공할 잔인성을 보여주며 야만성을 드러낸 집단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주한미국과 미국정보당국은 이들의 속성과 훈련동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의 외교전문에 따르면 미국과 신군부는 1980년 5월 무렵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격화될 경우 이들 특수부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문제에 대해서 긴밀하게 조율했으며, 신군부가 군사적 행동을 하기 전에 상호 간에 사전 협의를 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군부는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이동하는 부대의 동향을 한미연합사에 상세히 보고하고 있었고 상호간에 긴밀한 조율이 오갔습니다.(박만규, 2003, 223쪽)
미국과 신군부의 긴밀한 조율 속에서 결정된 공수부대 투입
5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광주에는 금마에 주둔 중이던 제7공수특전여단 33·35대대 병력이 투입되었습니다.이들은 2월부터 폭동진압을 위한 ‘충정작전’ 훈련을 받은 인간병기들이었습니다. 광주는 선혈이 낭자한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오히려 더 거세지고 조직화되어 갔습니다. 광주에서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자, 5월 22일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한미연합사 소속의 한국군 20사단의 네 개 연대를 ‘폭동진압(Riot Control)’용으로 허용해 달라는 신군부의 요청을 승인해주었으며, 데프콘3 수준의 경계태세를 발동해 신군부의 광주 진압을 전후방에서 지원해주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나중에 여러 인터뷰에서 광주에 대한 무력진압작전을 5월 25일에서 27일로 늦춘 것은 자신들의 인도적 배려에 기초한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이것 역시 거짓말이었음이 탄로 났습니다. 도청 진압작전이 27일로 연기된 것은 오히려 신군부와 미국 간의 주도면밀한 군사작전 모의의 결과였습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도청 진압작전은 미국의 공중지휘용 공군기와 항공모함 코럴시호의 한국 작전배치시간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5공 청문회 당시 이희성의 증언)
미국은 방조자가 아니라 공모자
미국 정부는 1989년에 광주학살을 해명하면서 자신들은 광주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고, 사태를 제어하려 했지만 신군부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변명은 거짓이었습니다. 5.18 이전부터 공수부대의 훈련과 작전이동을 상세하게 알고 있던 주한미군과 미 정보당국의 행태를 본다면, 이들은 충분히 광주에서의 학살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참상을 보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고 믿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미국은 광주학살을 묵인한 방조자가 아니라, 명백히 책임이 있는 공모자였습니다. 미국은 5.17쿠데타를 용인했고 공수특전단의 광주 및 주요도시 출동을 승인했으며, 한국군의 학살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미국은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만든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통해서 파쇼권력을 행사할 때 이를 지지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보수정권인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 후 첫 방미인사로 전두환을 초청함으로써, 신군부 정권이 국제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백악관은 전두환의 방미가 “전두환의 입지를 공고히 해 주면서 전두환 정권의 합법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해 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미국에게서 신군부의 잔인무도한 학살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광주항쟁을 ‘폭동’과 ‘무질서’에 대한 군부의 정당한 ‘질서회복 노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광주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한국인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는 복종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한국의 국민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1980년 8월 27일 AP통신과의 회견에서 “10월 사태 이후 미국이 한국 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 보람도 크다.”고 말해 노골적으로 전두환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5월 21일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은 본국으로 보낸 전문에서 “군부가 상당한 무력을 사용해서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광주항쟁의 원인을 ‘지역주의적 정서’, ‘호남인들의 오랜 소외감과 불만’, 그리고 ‘김대중 등 특정 정치인 차원의 문제’로 치부했습니다. 이는 이후 신군부가 광주항쟁을 매도할 때 사용하던 전형적인 궤변이 되었습니다. 다음의 외교전문들은 미국이 광주항쟁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짐작케 해주는 것들입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2008-5-29 (강연자료)
5.18광주항쟁을 통해 드러난 미국의 맨얼굴
전두환 일당이 벌인 12·12쿠데타가 국가 내부의 권력구조를 뒤바꾼 격변이었다면, 공수부대의 학살에 뒤이은 광주항쟁은 한국의 국가와 민중과의 관계 뿐 아니라 한미관계를 재구조화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미국은 반공을 지향한다면 그 정권이 비록 독재정권이라 할지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광주항쟁 이후 한국에서 미국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80년 6월에 만들어진 「광주 시민 의거의 진상」이라는문건입니다. 문건은 광주항쟁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의 맨얼굴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미국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미국을 참으로 오랫동안 혈맹의 우방으로 생각하고 신뢰해왔다. (…) 그런데 이번 광주사건을 비롯한 10·26 이후의 일련의 미국의 태도에 대하여 우리는 종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한미 협의 하에 실시되는 국군의 작전이 어떻게 동족을 살육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미국은 이에 동의할 수 있었을까. (…)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옹호가 미국의 국가이익에 우선할 수 없다는 미국의 기본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 이상 우리는 미국을 새로운 눈으로 주시해야 한다.”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은 물러가라’, 반미운동의 시대 개막되다
광주의 시민군까지도 미국을 자신들의 구원자라고 여기고 있던 친미국가 한국에서 드디어 반미운동이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광주학살에 미국의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데 이어 레이건이 ‘학살의 원흉’ 전두환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자, 미국에 대한 한국 민중들의 적개심과 배신감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 결과 1980년대 한국의 역사는 군사독재와 미국적 세계관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 기록으로 점철 되었습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구속당할 각오를 하면서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고, 때로는 미 문화원을 점거하거나 미 대사관에 대한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생들의 반미시위는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광주항쟁과 뒤이은 1980년대의 반미시위는 미국을 영원한 ‘우방’으로 여겨왔던 한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광주항쟁을 통해 한국인들은 냉정한 ‘제국’이자 탐욕적인 ‘외세’로서 미국의 면모를 각성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미국에 대해 자주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끝)
*참고문헌 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3』, 돌베개, 2010 김기협, “1987년 6월, 전두환은 왜 군을 출동시키지 못했나?”, 2011-11-04, 프레시안 박만규, 「신군부의 광주항쟁 진압과 미국문제」, 『민주주의와 인권』, Vol3. No1.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03 조지 카치아피카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2008-5-29 (강연자료) 이삼성, 「광주학살, 미국·신군부의 협조와 공모 : 최믄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본 5·17쿠데타, 광주학살과 미국의 대외정책」, 『역사비평』, No.34, 1996 이삼성,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당대, 1995 이삼성.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의 민족주의 : 광주항쟁·민족통일·한미관계』, 한길사, 1993 장준갑, 김건, 「1980년대 초반(1980-1981) 한미관계 읽기」, 『미국사연구』, Vol.38, 한국미국사학회, 2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