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 일당 지배 23년 만에 민주당 시장이 당선되고 다수의 여당 시의원이 기초 의회에 진출했다. 시민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여념이 없던 구미 시정도 이제는 달라지리라는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더구나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빛나는, 서대문 형무소 제1호 사형수 왕산 허위를 기리는 광장과 누각,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독립운동가들의 동상이 구미에 세워진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 시설은 일제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자랑스러운 지역 역사를 새롭이 되새기며, 자라는 세대들에게 '나라 사랑'을 가르치는 산교육의 공간이 되리라는 기대를 모았다.
▲ 왕산루 쪽에서 바라본 왕산광장.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1950평)보다 큰 2420평의 이 광장은 졸지에 "산동광장"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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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반전', 왕산의 이름을 빼앗기다
그런데 이 계획이 변질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8년 신임 장세용 시장이 '인물 기념사업은 태생지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지역의 몇몇 주민단체가 '지역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하며 진정서를 제출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광장과 누각의 이름이 지역 명칭인 산동면을 따라 바뀌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구미시에서는 왕산광장과 왕산루가 '지역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일부 주민의 민원'으로 명칭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민문연은 산동도 구미시 지역이 아닌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추모 시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역 정서'의 정체는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지난 3월, 이미 구미시는 수자원공사 구미사업단에 명칭 변경안을 통보했다. 열네 분의 동상은 왕산기념관으로 옮기려 했으나 후손과 지역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갈 곳을 잃어버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 가문인 왕산 일가의 독립투쟁을 기리는 광장이 완공을 앞두고 그 이름을 빼앗긴 셈이었다.
민문연 구미지회는 "'왕산광장'이 '산동광장'으로, '왕산루'가 '산동루'가 바뀌는 계획 변경안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 황당한 '반전'은 누구에 의해서 기획된 것인가" 묻고 있다. 또 시민 공청회와 설문 조사를 통해 확정한 사업의 핵심 내용이 시장 개인의 논리와 지역의 소수 민원에 의해 일거에 뒤집히는 상황 앞에 당혹스럽다고 밝혔다.
▲ 왕산루에는 "산동루" 현판을 걸지 않았으나 누각 왼쪽에 세운 안내판에는 "산동루" 석자가 뚜렷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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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는 왜 왕산 선양사업에 소극적인가
민문연 구미지회 전병택 지회장은 시민들이 "이런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역사를 부정하는 구미시의 처사에 분노한다"라는 등의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018년 왕산 순국 110년 만에 처음으로 추모제를 집행한 민문연 구미지회 창립의 주역으로서,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세계 독립운동사에 유례가 없는 왕산 가문 14분의 독립운동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구미시에서는 3·1혁명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찬란한 독립운동 가문의 역사를 훼손하고 지우려고 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웃 성주군은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문화공원 조성에 나서 국비 237억 원을 확보하여 성주 대가면에 심산 테마파크를 조성한다고 하지요. 또, 안동 임청각은 국비 등 280억 원을 투입하여 석주 이상룡 선생 일가의 독립운동 정기를 끊으려고 일제가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놓은 철길을 돌려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는 사업에 착수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경북 유일의 여당 소속 장세용 구미시장은 대한민국 최고 독립운동 가문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돕기는커녕 '있는 사업'도 지우기에 나섰습니다. 실로 무섭고, 순국선열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전 지회장은 지난 8월 31일에 왕산기념관에 모인 왕산의 후손들을 맞았다고 했다. 왕산의 친손자인 허경성(93) 옹 내외와 15년 만에 미국에서 온 그의 아들 내외, 손자 등이 왕산의 묘소에 참배하고 민문연 구미지회 회원들과 환담하면서 왕산을 추모했다.
허경성 옹이 광장과 누각은 어찌 되었는지 물어 그는 각각 '산동광장, 산동루'로 바뀌고 14분의 독립운동가 동상은 갈 데가 없는 상태라고 알려주었다. 허 옹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눈물을 글썽이면서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를 기리는 일을 왜 신임 시장이 가로막는가?"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단지 선열의 피를 이은 사람일 뿐, 칼자루를 쥔 관의 행정 앞에는 무력하다. 그가 눈물을 글썽거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 4월 왕산기념관 옆 사당에서 거행된 왕산 선생 위패 봉안, 경인사(敬仁祠)의 낙성 고유제 행사에 참석한 시장과 관료, 지역 유지들 사이에 맨발로 초라하게 서 있던 허 옹의 모습이 떠올랐다.
▲ 올 4월에 거행된 왕산 선생 위패 봉안과 경인사(敬仁祠)의 낙성 고유제. 왕산의 친손자 허경성 옹이 의관을 정제하고 늘어선 시장과 관료, 지역 유지들 사이에 맨발로 초라하게 서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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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의 소환, 지역 정체성의 확인이다
지난 2018년 지방선거 당시 구미 지역에서 경북 유일의 민주당 시장이 당선된 것은 23년 일당 지배의 지방자치를 바꾸고자 한 시민들의 반란을 통해 가능했다. 그러나 정작 구미시장은 박정희 우상화 사업의 결과로 개점휴업 상태인 '새마을 테마공원'이나 대안도 없이 건물만 세우고 있는 '역사자료관' 문제 등에는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오히려 힘을 보태야 할 왕산 선양사업에 재를 뿌리고 있는 것 같다(관련 기사 : 879억 들여 만든 애물단지 '새마을 공원'… 이게 끝이 아니다).
장세용 시장의 '인물 기념사업의 태생지 중심론'은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와 '왕산 선생 순국기념비'가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얼마 전 공사에 들어간 노무현 시민센터가 왜 김해가 아니라 서울 종로에 세워지는지도 해명할 수 없다.
장 시장은 지난 선거 기간 중 왕산기념관을 찾아 허형식 장군의 기마상을 세우고 싶다는 포부를 피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지난 4월, 보훈처에 허형식 장군의 서훈을 신청한 것은 민문연 구미지회였다(관련 기사 : '김일성과 동급' 허형식 장군은 서훈을 받을 수 있을까).
현재 일제의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에 반발한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한일 간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원죄를 환기하게 한다.
그런 뜻에서 1세기 이전의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소환하는 것은 산업도시 구미의 지역 정체성을 새롭게 가다듬는 일이기도 하다. 주권자들이 정치인에게 원하는 것은 원대한 포부와 전망이 아니라 시민공동체를 위한 사업을 제대로 지원하는 일이라는 걸 구미시와 장세용 시장이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