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재판 80주년, 전쟁범죄자 단죄 못해 세계가 신음

2026/04/25 11:24

이희용 줌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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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 선언 따라 일제 침략자 재판 목적 설치

사형 7명, 종신형 16명에도 천황 제외한 한계

생체실험 731 부대장도 밀실거래 통해 면죄부

2002년 제노사이드, 전쟁범죄 처벌 염원 안고

국제형사재판소(ICC) 출범했으나 제 역할 못해

푸틴과 네타냐후 체포영장 별무효과, 트럼프는?

강대국 우격다짐에 국제사회 약속 물거품 위기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46년 5월 3일 일본 도쿄 신주쿠구 이치가야의 옛 육군성 대강당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이 열렸다. 이곳은 1934년 육군사관학교 건물로 지어졌다가 1941년부터 대본영이란 이름으로 태평양전쟁의 일본군 지휘부 역할을 했기에 전쟁범죄자들을 단죄하기에는 맞춤한 장소였다.

1945년 8월 30일 46만 명의 미군을 이끌고 일본에 진주한 더글라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9월 11일 전범 용의자 체포 명령을 내렸다. 1941년 진주만 공습을 지시한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해 118명이 두세 달 사이에 끌려왔다. 총리를 세 번이나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 관동군 사령관 시절 만주사변을 주도한 혼조 시게루, 군의관 출신으로 후생대신에 올랐던 고이즈미 지카히코, 문부대신을 지낸 의사 하시마 구니히코는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맥아더 원수의 특별선언과 연합군 사령부 일반명령 1호에 따라 1946년 1월 19일 설치됐다. 근거는 “연합국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하는 모든 전쟁범죄자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내린다”는 포츠담 선언 제10조였다.

 

일본 도쿄 신주쿠구 이치가야의 옛 육군성 대강당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이 열리고 있다.

판사와 검사는 각각 11개국 출신 12명씩으로 구성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검사와 판사는 미국·영국·중국·소련·프랑스·네덜란드·캐나다·호주·뉴질랜드·인도·필리핀 11개국에서 파견된 12명씩이었다. 미국은 판사를, 소련은 검사를 두 명씩 파견했다. 재판장과 수석검사는 호주의 윌리엄 플러드 웨브와 미국의 조지프 베리 키넌이 각각 맡았다.

전범들은 전쟁을 기획·주도한 A급(반평화 범죄), 민간인 학살 등 전쟁법과 관습법을 어긴 B급(통상의 전쟁범죄), 민간인과 포로에 대한 고문이나 살해 등 C급(비인도적 범죄) 3가지로 분류됐다. 처벌 대상으로 삼은 범죄 기간은 일제가 군벌 장쭤린을 암살하며 만주 침탈 야욕을 노골화하던 1928년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종료 시점까지로 제한했다.

 

11개국에서 파견된 판사 12명이 도쿄재판 법정의 판사석에 앉아 있다.

체포된 118명 가운데 대부분은 이런저런 이유로 석방되고 28명만이 기소됐다. 재판은 2년 반 동안 818차례 열렸다. 만주국 황제 푸이에서부터 이등병 병사까지 모두 4천여 명이 증언대에 섰고, 연인원 2만 명의 방청객이 법정을 지켜보았다. 1948년 11월 12일 웨브 재판장의 선고와 함께 마무리됐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히로타 고키 전 총리, 육군 대장 이타가키 세이시로·도이하라 겐지·기무라 헤이타로·마쓰이 이와네, 육군 중장 무토 아키라 일곱 명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1948년 12월 23일 처단됐다. 히로타를 제외한 여섯 명은 교수대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고 죽었다.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등 군인 11명과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 등 민간인 5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외무대신 출신 두 명과 황족 나시모토 모리마사는 각각 20년, 7년, 6개월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2명은 판결 전에 사망했다.

 

법정에 출석한 A급 전범들. 앞줄 왼쪽부터 도조 히데키 전 총리(사형), 오카 다카즈미 해군 중장(종신형),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 대장(종신형),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장(종신형), 무토 아키라 육군 중장(사형). 뒷줄 왼쪽부터 하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종신형),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금고 20년),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금고 7년).

이와는 별개로 중국 난징대학살, 일본 오가사와라제도 지치 섬 식인 사건, 필리핀 미군 포로 학살 사건 등에 관해서도 중국·미국·영국·네덜란드·호주·필리핀에서 재판이 각각 열려 984명이 사형, 475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맥아더와 키넌 수석검사 보호로 처벌 면한 히로히토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훗날 역사가들은 도쿄재판을 ‘실패한 재판’으로 평가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히로히토 천황을 제외한 것이었다. 천황제를 존속시켜 일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동시에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아시아의 방패로 활용하려는 미국 구상에 따라 기소는 물론 조사 대상에서 빠졌고 증언대에도 서지 않았다.

재판에 참여한 나라 가운데 상당수가 히로히토의 퇴위와 처벌을 요구했고 미국 내 여론도 곱지 않았으나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그의 수호신을 자처하며 철저히 보호했다. 수석검사 키넌은 증언까지 조작해가며 그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왼쪽)과 만난 히로히토 일본 천황. 미국은 천황제를 존속시켜 일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동시에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아시아의 방패로 활용하려는 구상에 따라 히로히토를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1947년 12월 도조 히데키가 “일본의 신민이 폐하의 의사에 반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일본 고관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말해 군부가 천황 뜻에 따라 침략전쟁에 나섰음을 시인하자 키넌은 다른 전범들을 시켜 발언을 철회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이듬해 1월 도조는 “천황께서 군부의 전언에 마지못해 동의함으로써 개전에 이르렀다”고 증언을 번복했다.

 

천황 대신 단죄의 표적이 된 도조 히데키 전 총리.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관련자 색출도 철저하지 못했다. 전쟁 상대국은 물론 아시아 지역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잔악한 범죄를 저지른 숱한 전범에게 형사 책임마저 묻지 않았다. 대표적 사례가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관동군 방역급수부본부) 책임자 이시이 시로가 밀실 교섭을 통해 관련 자료를 미국에 넘기는 대신 재판 직전에 석방된 것이다.

만주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도 전범 혐의로 체포됐으나 기소되지 않고 공직 추방 조치만 받았다. 일본이 점령지에서 약탈한 보물과 국가기밀 정보를 넘기는 조건으로 풀려났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조부로 자민당 초대 간사장을 거쳐 외무성 장관과 총리 등을 역임했다.

연합국은 한반도에서 전범 재판을 열지 않았다. 만일 서울에서도 국제군사재판이 열려 일제 군국주의 주범들과 협력자들을 단죄했다면 한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은 도쿄재판에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중국도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경황이 없어 전범 색출과 단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중국 측 검사와 증인들은 증거재판주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전범들이 꼼짝하지 못할 증거를 들이대기보다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며 울분을 터뜨리는 것으로 일관했다.

교수형 당한 전범 7명 유골 빼돌린 뒤 무덤 조성

재판 후속 조치도 미흡했다. 독일은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정신을 잇고자 특별법을 제정해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처단 의지를 분명히 했다. 형법 86조와 130조에도 각각 나치 상징물이나 표지 유포, 나치 찬양과 홀로코스트 부정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규정을 담았다.

반면 일본은 헌법 9조에 전쟁 포기 선언을 담은 것 말고는 이렇다 할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범 용의자 대부분이 정계, 관계, 재계 등에 복귀해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으로 나섰다. 심지어 처형된 전범들을 추앙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났다.

미국은 교수형에 처해진 7명이 숭배의 대상이 되면 군국주의 부활의 불씨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해 시신을 화장한 뒤 비행기로 뼛가루를 태평양에 뿌렸다. 그러나 그 뼛가루는 처형자들의 유골이 아니었고 실제 유해는 재판에 참여한 한 변호사가 수거해 시즈오카현 절간의 불상 밑에 보관했다는 사실이 1958년 밝혀졌다. 그는 미군이 수거해가고 남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화장장 직원을 매수해 빼돌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우익들은 이를 1960년 8월 아이치현 니시오시 산가네산에 묻었다. 묘비 ‘순국칠사묘(殉国七士墓)’와 사당 이름 ‘순국칠사묘(殉国七士廟)’ 글씨는 총리 재임 시절의 기시 노부스케가 썼다. 1869년 전몰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도쿄의 야스쿠니신사는 1978년 10월 17일 이들 7명과 함께 옥사한 전범 7명을 더해 14명의 위패를 모셨다. 이때부터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거나 공물을 보내는 것은 전범 추모 행위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전범 7명의 유해가 묻힌 일본 아이치현 니시오시의 순국칠사묘. 묘비 글씨는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썼다. (나무위키)

최근에는 도쿄재판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이른바 평화헌법을 고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2013년 아베 신조 총리가 “도쿄재판은 연합국이 승자의 판단에 따라 단죄한 것”이라고 말한 이후 여러 정치인이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으며, 다카이치 사나에 현 총리는 취임 전부터 거듭 개헌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002년 상설 전범재판기구 국제형사재판소(ICC) 출범

전쟁을 범죄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다. 프랑스와 영국 등 승전국들은 패전국 독일과 베르사유조약에 조인하며 항복 직전 네덜란드로 피신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소추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신병 인도를 거부해 재판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뉘른베르크재판과 도쿄재판에서 본격적인 전범 재판이 이뤄져 침략전쟁을 주도한 인물과 비인도적 행위자 등을 단죄했지만 패전국 관계자에 국한됐다는 한계가 있었다. 1945년 유엔 헌장이 채택되고 1949년 제네바협약이 체결됐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6·25 전쟁 전후 한반도에서 숱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어도 국제사회는 제대로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1968년 베트남전 미라이 학살 주범인 미국 육군 중위 윌리엄 캘리는 미국 군사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가택연금으로 감형됐다가 3년 뒤 해제됐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전쟁과 1994년 르완다 학살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는 상설 국제사법기구 필요성이 대두됐다. 199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유엔 전권외교회의에서 로마 규정을 채택한 데 이어 2002년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발족해 제노사이드(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침략 범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기로 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125개국이 가입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 건물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강대국들은 건드리지 못하고 주로 아프리카 국가 범죄자들만 조사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수단 다르푸르 분쟁, 콩고 내전, 케냐 사태, 우간다 내전 등의 전범 용의자 40여 명을 기소했으나 유죄 판결은 고작 다섯 건에 그쳤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전 당시 미군 범죄를 조사하려 하자 미국은 탈퇴를 선언하며 ICC 인사들에 대해 입국 금지, 자금 동결 등의 제재를 내렸다. 유럽연합(EU)이 벨라루스의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첸코 대통령을 처벌해야 한다고 ICC에 촉구했으나 러시아 반대로 무산됐다.

러시아도 ICC가 우크라이나 점령지 아동들을 러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상대로 2023년 3월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ICC를 탈퇴했다. 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하면 회원국들은 협조할 의무가 있다. 푸틴은 영장 발부 이후 몽골,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ICC 회원국을 방문했으나 ICC의 협조 요구에 응한 나라는 없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지도자 네 명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ICC를 제재했다.

 

2024년 9월 2일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공항에 도착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당시 국제인권단체와 우크라이나 정부 등은 ICC 체포영장을 집행하지 않은 몽골 정부를 비판했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트럼프는 연일 전쟁범죄 저지르겠다고 공언

이제 화살은 트럼프로 향하고 있다. 미군이 이란 초등학교를 폭격해 170여 명을 숨지게 하는가 하면 “문명 전체를 사라지게 하겠다”거나 “발전소와 교량을 파괴하겠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의 행위나 트럼프의 경고는 유엔 헌장과 로마 규정이 정한 명백한 전쟁범죄다. 유엔인권이사회는 지난달 17일 초등학교 폭격 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80년 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범 재판은 인류에게 큰 교훈을 남겼으나 여전히 각국 지도자들은 역사에서 배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거듭된 국제사회의 약속도 강대국들의 우격다짐으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뉘른베르크재판에 출두한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가 신문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비인도적 행위를 질타하고 전범 추모자들을 비판해야 한다. 인권 옹호에 뜻을 모으고 ICC가 제 역할을 하도록 힘을 합쳐야 한다. 당장 전범들을 법정에 세우지 못한다 해도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전쟁범죄 가능성을 낮추고 한 명이라도 희생자를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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