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닐 다이아몬드가 만든 다큐멘터리 〈릴 인준〉(Reel Injun)에서 원주민계 영화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 교회 지하실에서 서부극을 보던 경험을 말하면서, “카우보이와 인디언 이야기 속에서 자랐고, 우리는 카우보이를 응원했어. 우리가 인디언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라고 회고한다. 원주민 공동체의 아이들이 할리우드 서부극을 보며 자기 자신을 인준(인디언)이 아니라 카우보이와 동일시했다는 이야기다. ‘릴’은 영화 필름(Reel)을 가리키는 동시에 같은 발음의 진짜(Real)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다. ‘릴 인준’은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이다.
영화 속 “허리에 천을 두르고 뛰어다니는 인디언들”은 자기들의 실제 삶과 너무 다르다. 할리우드 서부극의 ‘인준’은 대체로 말을 타고, 티피에 살며, 깃털 장식을 하고, 소리 지르며 백인 정착민을 습격하는 평원 부족 전사의 이미지로 획일화되어 있다. 영화 속 카우보이는 주인공이고 질서와 용기와 승리의 편인데 비해 인디언은 이름 없는 악당, 야만인, 습격자,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애물이다. 그러니 원주민 아이들도 영화의 서사 장치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주인공인 카우보이 편에 서게 된다.
세 가지 이유가 겹친다. 첫째, 재현의 불일치다. 영화 속 ‘인준’은 실제 크리, 스포캔, 오지브와, 나바호, 체로키 같은 다양한 원주민 현실이 아니라, 할리우드가 만든 단일한 가짜 인디언이다. 그래서 실제 원주민 아이들은 “저건 우리다”라고 느끼기보다 “저건 영화 속 나쁜 놈들이다”라고 받아들인다. 둘째, 서사의 강제다. 서부극은 대개 관객이 카우보이에게 감정이입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관객은 인종이나 출신과 무관하게 영화가 배치한 감정의 길을 따라간다. 셋째, 식민지적 내면화다. 피지배자의 후손이 가해자의 시선으로 자기 집단을 보는 것이다.
1980년에 출판된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의 첫 번째 챕터 「콜럼버스, 인디언, 인간의 진보」는 미국사의 출발점을 ‘콜럼버스의 발견’이 아니라 원주민 세계의 파괴, 노예화, 학살에서 다시 보자고 말한다. 보통 미국 교과서식 서술은 콜럼버스를 용기 있는 탐험가로 그리지만, 진은 시점을 뒤집어 원주민 입장에서 사건을 본다. 콜럼버스와 스페인인들은 ‘새 세계’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이 살고 있던 세계에 침입했고 금, 노동력, 영토를 얻기 위해 원주민을 폭력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이 진의 기본 논지다.
진의 첫 번째 포인트는 원주민 사회가 미개하거나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는 복잡한 문화와 공동체를 가진 세계였고, 어떤 지역은 유럽 못지않게 인구가 조밀했다. “문명인이 야만의 땅을 발견했다”는 서사는 부정된다. 두 번째 포인트는 콜럼버스의 탐험이 곧바로 착취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카리브해 원주민 사회는 급격히 붕괴한다. 이는 발견이나 진보의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정복 자체의 귀결이었다.
세 번째 포인트는 역사서술의 문제다. 콜럼버스의 용기, 항해술, 유럽 문명의 확장은 크게, 원주민의 죽음과 고통은 작게 처리했다는 얘기다. 네 번째 포인트는 제목에 들어 있는 ‘인간의 진보’에 대한 비판이다. 유럽인의 신대륙 진출이 아무리 거대한 역사적 변화를 낳았다 해도, 그 과정에서 학살당하고 노예화되고 땅을 빼앗긴 사람들의 고통을 ‘진보의 대가’로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후 영국의 식민지 건설, 북미 대륙의 팽창, 서부개척, 인디언 전쟁까지 이어지는 미국사의 큰 흐름은 ‘자유의 확대’가 아니라 정복과 배제의 연속이었다.
숭미 의식이 바로 ‘릴 인준’식 사고방식이다. 해방 후 한국도 북미 인디언들과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다. 1945년 해방은 식민지 조선인이 자기 힘으로 세운 독립국가의 출발이어야 했지만, 현실의 남쪽 땅에는 미군정청이 들어섰다. 일본 제국의 총독부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 군정이 3년 동안 통치권을 행사했다. 한국인은 해방된 주권자가 아니라 관리되고 교육되고 선별되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은 단순한 외국이 아니라 질서, 문명, 자유, 풍요, 구원의 이름으로 한국인의 의식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은 이 의식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미국은 탱크와 폭격기, 군복과 통조림, 원조물자와 달러의 얼굴로 나타났다. 많은 한국인에게 미국은 살려준 나라, 먹여준 나라, 지켜준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역사를 우리 눈으로 보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릴 인준’의 원주민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인디언이 아니라 카우보이 편에 세웠듯이, 한국인도 어느새 자신을 미국의 동맹자, 미국의 보초병, 미국 질서 수혜자의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미국이 가진 음흉한 속내는 선한 마스크 속에 진면모를 감추었다.
미국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관찰할 때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우리 자신은 말할 나위가 없이 열등한 미개 족속이다. ‘릴 인준’의 재현의 불일치가 그대로 반복된다. 우리는 지워내야 할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동시에 미국식 발전은 지상최고의 가치로 등극한다. 서사의 강제다. 미국 문물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궁극이다. 그러면서 당연히 식민지적 내면화 과정도 펼쳐진다. 미국이 우리를 바라보는 경멸적 시선을 우리가 차용해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하워드 진이 미국사를 콜럼버스와 개척자의 영웅담이 아니라 원주민과 노예와 노동자의 고통에서 다시 써야 한다고 말했듯이, 우리도 한국 현대사를 미국의 시선에서 벗겨내 다시 보아야 한다. 우리는 미군정을 민주주의의 훈련 과정으로, 한국전쟁을 자유세계의 성전으로, 한미동맹을 번영과 안보의 절대 조건으로 배워왔다. 그러나 그 서술 속에서 빠진 것은 분단의 고착, 민중의 학살, 자주노선의 좌절, 전쟁체제의 영구화다. 미국화는 근대화의 동의어가 되었고, 영어와 미군은 성물로 숭배되었으며, 한국인은 주어가 아니라 하찮은 목적어가 되었다.
오늘의 현실은 그 결과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 땅은 자주국가라기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진기지, 대중국 군사전략의 교두보, 유사시 병참과 군수보급의 창고처럼 취급되고 있다. 우리의 안보는 우리의 판단보다 워싱턴의 세계전략에 더 깊이 묶여 있고, 우리의 외교는 한반도의 평화보다 미국 패권의 향방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전쟁이 나면 죽는 것은 한국 민중인데 전쟁의 버튼과 전략의 언어는 남의 손에 쥐어져 있다. 이것이 과연 해방인가. 이것이 과연 독립국가의 정상적인 모습인가. 우리가 스스로 정체성을 포기한 ‘릴 코리안’이 된 결과다.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역사적 각성이다. 반미 감정의 분출만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을 영웅으로 떠받들고 자신을 그 하위 동맹자로 상상해온 내면의 식민성을 직시해야 한다. 한미동맹이 영원한 숙명이라는 주문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안보와 외교와 경제를 대한민국의 이익과 한반도 평화의 관점에서 다시 세워야 한다. 진짜 독립은 국기와 애국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기 역사를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운명을 자기 손으로 결정할 때 비로소 자주독립 진짜 대한민국은 시작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