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는 스쿨버스 노선, 야구장, 미식 축구장이 있다. 군인들은 패스트푸드 체인점 타코벨, 피자헛, 아비스 매장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선다. 미국 우편 서비스 로고가 찍힌 우체통이 미국 식료·잡화점으로 가득 찬 매점 밖에 서 있다. 거기에 편지를 넣으면 미국으로 바로 연결된다. 모든 안내판은 영어로 되어 있고, 미국 달러가 사용된다. 울타리 너머로는 군용 헬리콥터가 비행장 위로 솟아올라 푸른 하늘을 가로지른다.
이 장면은 미국 본토에서 5000km 이상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미국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주한 미군 기지의 총본산 평택 ‘캠프 험프리스’
지난 22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라파엘 라시드 기자가 평택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를 찾아가 목격하고 체험한 현장 소묘다. 캠프 험프리스는 미국의 해외 기지 중 최대규모의 기지로 1372헥타(서울 여의도 면적의 5~5.5배)의 면적에 약 1000개의 건물이 있고, 미군 장병과 가족들, 그리고 한국인을 포함해 약 4만 1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 땅이지만 이곳 주소체계는 미국식으로 돼 있다.
거기에 주한미군사령부(USFK) 본부가 있다. 서울 용산에 있던 주한미군 총본산이 그곳으로 옮겨 갔다. 캠프 험프리스는 “195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한반도의 안정을 뒷받침해 온 워싱턴과 서울 간 동맹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물리적 상징”이라고 라시드 기자는 썼다.
“캠프 험프리스의 한가로운 교외 풍경 뒤에는 전쟁 훈련을 하는 군사 시설이 숨어 있다. 최첨단 밴달훈련센터(Vandal Training Center)에서는 미군과 한국군 병사들이 헬리콥터가 바다에 추락하는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도록 설계된 거대한 수영장에서 수중 생존 훈련을 실시한다.
인공 연기와 전투음으로 가득 찬 어두운 의무실에서는 야간 투시경을 착용한 병사들이 40만 달러짜리 마네킹을 이용해 전장 후송 훈련을 한다. 이 마네킹은 팔다리가 절단된 채로 명령에 따라 피를 흘리는 장치가 돼 있다.
위층에는 가상 현실 시뮬레이터가 있어 부대원들이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나 지형에서 전투 시나리오를 체험할 수 있다. 기지 관계자는 준비 태세 기준은 ‘오늘 밤 전투 가능’(fight tonight, 상시 임전태세)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다른 어떤 동맹국도 대신할 수 없는 이점”
주한미군의 주임무는 북한의 침공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1월 발표된 미국 국방전략은 대북 억제의 주요 책임(primary responsibility)을 점차 한국이 떠맡고 미국은 제한적인 지원을 하는 쪽으로 역할 분담을 재조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대신 미국은 주한미군의 임무 범위를 한반도를 넘어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하려 하고 있다. 이른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다.
“캠프 험프리스에서 미국은 중국을 주시하고 있다. 기지는 상하이에서 약 800km(500마일), 대만에서 1400km 이내 거리에 쟈리잡고 있다. 주한미군 관계자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역내 안보구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다른 어떤 미국 동맹국도 대신할 수 없는 지리적 이점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주한미군 사령관 제이비어 브런슨은 기지의 존재가 적(adversary)의 ‘모든 계산을 복잡하게 만든다(complicates every calculation)’고 말했다.”
브런슨 사령관의 말은 22일 그가 미 육군전쟁대학 전략연구소(SSI)의 중국 지상병력(Landpower) 연구센터(CLSC)의 연례 육군 지상전 전력 심포지엄에서 한 기조발제 뒤에 한 얘기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그는 기조발제 뒤 팟캐스트 대담에 출연해 “중국의 동부 해안에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건 한국이 아시아의 심장을 꽂는 비수이고, 일종의 방패이자 방어벽 같은 일본이 뒤에 있다”고 말했다.(시민언론 민들레 5월 27일, “이번엔 ‘한국은 단검’…브런슨 사령관 튀는 발언 왜?”)
100년이 지나도록 재활용되는 ‘한반도 비수론’
‘조선반도 비수(匕首)론’은 일본제국(일제)이 한반도를 강점할 때 써먹은 침략자의 논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대외팽창에 나선 일제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에 이어, 시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러시아제국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열도를 겨누고 있는 비수 조선을 먼저 지배해야 한다는 침략주의를 방어적 모양새로 포장한 ‘국론’을 정착시켰다.
브런슨 사령관의 ‘한국(한반도) 비수(단검)론’은 100여 년 전 일본을 겨누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그 단검의 칼 끝을 반대방향인 중국대륙을 향한 것으로 돌려 놓은 것이다.
일제는 조선반도 비수론을 앞세워 한반도를 강점한 뒤 중국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일제의 중국침략은 한반도 강점이 그 출발점이었다. 브런슨의 한국 비수론은 처음부터 그 칼 끝이 반대방향인 중국을 향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한국 평택에 해외 최대규모의 자국 기지를 두고 있다. 브런슨과 미국은 한국 비수론은 침략이 아니라 방어논리, 방어전략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하겠지만, 중국이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적의 모든 계산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브런슨 사령관의 말은 캠프 험프리스와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이 중국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중국의 방어전략에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왜 브런슨은 하필 100여 년 전 일제가 대륙 침략의 도구로 써먹은 한반도 비수론을 다시 꺼내 방어논리로
국제관계에서 적대적인 이웃국가끼리는 늘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들을 겨누는 비수가 된다. 서로 그렇게 주장하면서 결국 힘 센 쪽이 약한 쪽을 침략, 강점하는 구실로 삼는다.
일본이 패전한 뒤 한반도는 일본을 점령한 미국과 중국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으로 대치하는 더 거대한 충돌대립구조의 접점이 됐고, 두 세력은 한반도 비수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한국(조선) 주민들은 분단까지 당한 채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10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그 외부세력에 ‘안보’를 구실로 한 볼모로 붙잡힌 형국이 돼 있다.
기구한 평택의 역사
한국전쟁 때 들어 온 미군이 평택에 주둔하기 전에도 그곳은 외국군 기지였다. 1910년 강압적으로 조선을 점령한 일본제국(일제) 육군은 1919년 그 자리에 비행장을 건설해 항공기지로 썼다. 그 전인 1894~95년의 청일전쟁 때 그곳은 격전지였다. 1945년 일본 패전 뒤 한국군이 그곳을 잠시 사용했으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미군이 차지했다. 그때 평택 미 공군기지는 K-6기지로 불렸다. 1962년에 기지 공식명칭이 캠프 험프리스로 바뀌었다. 그 전 해인 1961년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임무수행 중 숨진 미 육군 조종사 벤저민 K. 험프리스 준위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2004년부터 서울 용산 미군기지를 캠프 험프리스로 옮기는 논의가 시작됐고, 기존 기지를 서북쪽으로 10㎢나 확장하는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됐다. 그곳 안정리 서쪽 대추리 전역과 도두리의 75%가 기지로 편입됐다. 팽성읍의 서해 쪽과 안성천 주변 저지대는 주민들이 힘겹게 간척해 농지로 일군 땅이었으나 농민들은 강제 이주당했다. 2006년부터 주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있었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 함께 싸웠지만, 캠프 험프리스 확장은 그대로 추진됐다.
주변 부지를 대규모로 매입하고 흙을 채워 넣어 면적을 넓힌 결과, 여의도 면적의 5.5배에 이르는 규모의 초대형 기지가 완성되었다. 2017년 미군 제8군사령부가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했고, 2018년에는 용산 주한미군사령부도 옮겨왔다.
지금 USAG(US Army Garrison 미 육군 주둔지) 캠프 험프리스는 주한미군사령부(USFK), 유엔군사령부(UNC), 한미연합군사령부(CFC), 미 제8군사령부, 미 제2보병사단 등 주한 미군의 핵심 지휘부와 주력 부대가 모두 집결한 주한 미군의 심장부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군 주둔기지다. 기지 내부에는 전투시설뿐만 아니라 주거지, 학교, 대형 쇼핑몰, 병원 등 도시 하나에 버금가는 인프라가 구축돼 있다.(나무위키)
시험대에 오른 한미 동맹관계
이런 기지를 세운 미국과 한국의 동맹관계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고 라시드 기자는 썼다.
“무역 긴장부터 안보보장에 이르기까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기의 양국 관계는 점점 더 거래적인(transactional) 양상을 띠고 있으며, 이는 북한에 대한 방어를 보장하는 데 오랫동안 워싱턴에 의존해 온 서울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 외국어대 메이슨 리치 교수(국제정치학)는 “신뢰성과 신빙성 문제가 이전보다 더 심각해졌다”며, 한미 두 나라가 여전히 긴밀한 작전적 연계(operational ties)를 유지하고 있지만, 정치적 상황은 훨씬 더 불안한 상태(fraught)가 됐다고 했다.
5월 1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으로부터 미국이 "굴욕을 당하고 있다"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총리의 말을 들은 뒤 발끈하듯 독일주둔 미군 5000명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하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미군병력 감축을 위협하자, 한국 언론은 한국도 다음 차례가 될지 모른다고 썼다. 트럼프 1기 집권 때부터 거론된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관련한 추측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국 국방부와 대통령실은 주한미군 병력감축 논의 보도를 신속하게 부인했고, 주한미군사령부는 주둔병력 규모 및 자산 조정설에 대한 질문에 현재의 2만 8500명은 기준치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고정된 병력 수보다 그 역량이라고 밝혔다.
가디언 기사는 그러나 지난해 미국 조지아 주에 건설 중인 현대-LG에너지솔루션 합작공장에 대한 대대적인 이민단속과 한국인 기술자 체포 구금, 한국산 제품에 대한 25% 관세 부과 위협 등으로 동맹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그것이 안보문제로 번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거기에 정동영 통일부장관의 북한 구성 우라늄 농축시설 관련 발언 뒤 미국이 정보 공유를 부분적으로 제한했고, 방대한 이용자 정보를 유출시킨 미국법인 쿠팡에 대한 수사를 이유로 미국이 내정간섭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한미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핵잠수함 개발 협상 중단설까지 흘러나왔다.
가디언은 “이런 긴장 상황(tensions) 속에서 한국은 미국의 보호에 얼마나 의존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고 썼다. 그 긴장은 그런 긴장을 정치적 공세에 이용하기 위해 우파세력이 의도적으로 조성했거나 증폭시켰다는 의심을 샀지만, 가디언 기자가 캠프 험프리스를 찾아간 것은 그가 느낀 그런 분위기에 대해 주한미군사령부는 그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피기 위혀서였을 것이다.
캠프 험프리스 유지 “미군 철수 가능성 낮다”
가디언은 “북한을 넘어선 미국의 지역 작전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한국을 원치 않는 중국과의 갈등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썼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한국을 미중대결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한국인들은 당연히 바라지 않을 것이다. 서강대학교 김재천 교수(국제관계학)는 “많은 한국인, 특히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주한미군의 임무가 중국 견제에 집중되는 것을 꺼린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특히 대만 문제와 관련해 미중 전략경쟁에 휘말릴 것을 강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가디언은 기사 말미에 “캠프 험프리스에서는 새로운 병영(barracks) 4개 동이 완공을 앞두고 있으며, 새 초등학교 건설도 진행 중”이라면서 “기지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적어도 현재로서는 대규모 병력 철수는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고 썼다.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주한미군 사령부 앞에 서 있다. 조형물 한쪽 면에는 한국어로 ‘함께 갑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함께 어디로 가자는 것일까?
한승동 에디터 sudohaan@mindl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