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잠시 전쟁과 안보 현안에 가려져 있지만, 미국의 통상 압박은 여전히 살아있고 범위는 오히려 더 넓어지고 있다. 구글맵의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 망 사용료 갈등, 개인정보와 데이터 국외 이전, 공공 클라우드 보안 인증, AI 인프라 조달, 온라인 플랫폼 규제, 그리고 쿠팡 사태까지다. 미국은 한국이 디지털 경제의 규칙을 새로 짜는 과정에서 미국 기업에 불리한 판을 만들고 있다고 본다. 미국 입장에서 위치정보 반출 제한, 개인정보 국외 이전 규제, 망 사용료 논의, 플랫폼 지배력 견제, 공공 클라우드 보안 기준은 모두 ‘비관세장벽’이다.
미국은 지난 2월 20일 무역법 122조를 근거로 2월 24일부터 150일을 기한으로 대부분의 수입품에 10%의 임시 추가관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곧바로 사법적 제동을 받았다. 미국 국제무역법원(CIT)은 5월 7일 판결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를 122조상 ‘국제수지 적자’와 같은 것으로 취급해 부과한 관세는 무효라고 판정했다. 다만 이 판결로 10% 관세가 즉시 전면 중단된 것은 아니다. 항소법원이 5월 12일 CIT 판결의 효력을 임시 정지했기 때문에 현재 관세 징수는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압박은 관세에 그치지 않는다. USTR은 지난 3월말 발표한 2026년 국가별 무역장벽(NTE) 보고서에서 한국의 AI 조달, 디지털 규제, 망 사용료, 위치정보 반출, 개인정보 국외 이전, 클라우드 보안 인증 문제를 한꺼번에 거론했다. 특히 2025년 11월의 한미 공동 팩트시트와 관련해, 한국이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고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서 미국 기업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대목도 보고서에 포함했다. 한국의 디지털 규제를 미국의 내부 정책이 아니라 이미 합의된 통상 의무의 이행 문제로 당연시하겠다는 의도다.
구글맵 사안은 대표 사례다. 한국 정부는 2월 27일 구글이 요구해온 1:5,000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국외 반출을 조건부로 허가했다. 구글맵과 구글어스의 위성·항공사진에서 군사·보안시설을 가림 처리하고, 국내 제휴기업이 국내 서버에서 원본 데이터를 가공한 뒤 정부 심사와 검토를 거친 경우에만 반출을 허용하며, 등고선 같은 민감 자료는 제외한다는 조건이었다. 또 정부는 조건 이행 여부를 확인한 뒤 반출을 허가하고, 중대한 위반이 있을 경우 허가를 중단하거나 회수할 수 있다고 분명히 했다. 조건부라고는 하지만 19년 가까이 막혀 있던 문이 열린 것은 사실이다.
망 사용료 문제도 같은 구조다. USTR은 4월 말 공식 SNS에서 한국의 망 사용료 정책을 “미국 수출업자가 직면한 가장 황당한 외국 무역장벽”이라고 지목했다. USTR은 외국 콘텐츠 제공자로 하여금 한국 인터넷서비스 사업자에게 망 사용료를 내도록 하는 법안들이 한국 통신 3사의 과점 구조를 강화하며 미국 콘텐츠 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미국 빅테크가 막대한 트래픽을 발생시키며 한국 통신망을 이용하면서도, 다른 한국 업체들은 다 내는 비용을 자기들만 안 내겠다는 억지이기 때문이다.
AI 인프라 조달 문제도 새롭게 전면화됐다. USTR은 2026년 NTE 보고서에서 한국 과기정통부의 고성능 GPU 및 클라우드 자원 조달이 국내 입찰자 중심으로 설계돼 미국 클라우드서비스 제공업체들의 참여가 배제됐다고 문제 삼았다. 국가 핵심 데이터와 공공 AI 인프라의 구축과 운용을 국내 통제권 아래 두겠다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선택이다. 미국이 자기의 AI 인프라는 전략산업으로 보호하면서 한국의 동일한 정책을 ‘통상장벽’으로 몰아가는 것은 통상 문제 제기가 아니라 한국의 디지털 산업주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쿠팡 사태는 악질적이다. 미국 투자자들은 쿠팡 개인정보 유출 이후 한국 정부의 조사와 규제가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이라며 USTR에 301조 청원을 냈다가 철회했다. 미 공화당 의원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보낸 공개서한에 대해 우리 정부가 주미대사를 통해 단호하게 답변함으로써 미국은 일단 이 문제를 봉합하려는 국면에 들어섰다. 한국의 국회의장을 포함한 우리 국민은 미국의 내정간섭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쿠팡 사태는 미국이 한국의 디지털 규제를 차별 프레임으로 몰고 가는 상징적 사례로 남아 있다.
여기에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압박까지 겹쳐 있다. 한국 국회는 3월 12일 미국 전략산업 투자와 조선 협력에 관한 3500억 달러 투자 이행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5월 20일 주한미국대사 지명자 미셸 박 스틸은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한국의 3500억 달러 투자 약속의 재원과 사용처를 면밀히 따져보겠다고 발언했다. 그녀는 동시에 한국에서 미국 기업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것은 미국이 그들이 ‘속국’으로 간주하는 한국에 ‘총독’을 보내 한국에 대한 통상 압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신호로도 읽힌다.
미국의 공세는 무식한 협박이 아니다. 꽤나 치밀하다. 자기가 유리한 대목에서는 한미 FTA와 팩트시트를 들먹이고, 불리한 대목에서는 122조, 301조, 232조 같은 국내법 수단으로 우회한다. 122조 관세가 법원에서 위법 판정을 받은 것은 이 압박의 약점을 드러낸다. 미국은 강한 법적 근거 위에서 한국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근거가 흔들리는 임시 권한과 정치적 위협을 조합해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정확히 찔러야 한다.
첫째, 122조 관세에 대해서는 미국 국내법원 판결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미국 법원조차 무역적자와 국제수지 위기를 혼동한 관세 조치에 제동을 걸었다. 한국이 이를 정상적인 통상 압박으로 수용할 이유는 없다. 둘째, 301조 압박에는 사실과 법리로 맞서야 한다. 우리의 디지털 규제, 개인정보 보호, 온라인 플랫폼 규제, 쿠팡 조사, 망 사용료 논의가 특정 국가의 기업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국내외 기업에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왔다는 자료를 축적하고, 소비자 보호와 시장질서 확립의 공익 목적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셋째, 구글맵 사태는 사후 통제의 문제로 넘어갔다. 이미 조건부 허가가 난 이상 이제 핵심은 조건의 실효성이다. 국내 서버 처리, 군사·보안시설 가림 처리, 등고선 등 민감 정보 제외, 위반 시 승인 정지가 실제로 작동해야 한다. 조건을 붙여놓고도 집행하지 못하면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넷째, AI 인프라와 공공 클라우드 조달은 통상 문제가 아니라 산업주권의 문제다. 한국의 안보, 산업정책, 데이터 주권을 기준으로 한 조달 원칙이다. 다섯째, 온라인플랫폼법은 조속히 입법화되어야 하고, 망 사용료 부과정책도 서둘러 실행에 옮길 일이다.
다섯째, 한미 FTA와 한미 공동 팩트시트의 재검토를 금기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이 협정을 방패막이 삼아 우리의 입법 주권과 규제 주권을 침식한다면, 한국도 협정의 유지와 재협상, 부분적 조정, 심지어 폐기 가능성까지 협상 카드로 올려놓아야 한다. 그런 카드가 상상조차 불가능한 나라와 가능한 나라는 협상장에서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다. 구글맵이든 망 사용료든 온라인플랫폼법이든, 그것이 비차별적이고 합리적인 법치에 근거한 것이라면 우리는 당당해야 한다. 주권 국가의 입법권은 눈치의 대상이 아니다. 한미 관계는 중요하다. 그러나 일방적 굴종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치밀한 준비, 정확한 팩트, 강한 법리, 그리고 우리의 규제 주권을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주권을 스스로 지키는 나라라야 미국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진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