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 자주와 반파쇼 민주화 위해 헌신한 불꽃 삶 | |||||||||||||||
기사입력: 2015/10/09 [20:1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연탄배달과 가정교사를 하며 한국의 최고학부인 서울대에 25세 늦깎이로 입학해 사회정의를 위해 학생시절을 바치고, 얼음장사와, 월부책장사를 하며 조국의 자주화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신향식 선생이 바로 그이다.
전남 고흥이 고향이었던 선생은 고학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노동청 공무원과 출판사 편집자 등을 지낸 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3년 6개월을 감옥에서 지낸 뒤 출소했다.
신향식 선생의 감방 출소는 더 큰 유신의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 선생의 정의의 양심은 민족자주화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어 투쟁했다.
신선생은 1976년 서울대 동문인 이재문 선생 등과 함께 ‘반유신민주화, 민족해방을 목표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를 결성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1979년 10월 검거될 때 까지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와 유신독재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에 전력을 다했다.
신향식 선생의 민족자주화와 반파쇼 민주화에 대한 불꽃같은 삶은 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해 1982년 10월 8일 사형이라는 극형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하지만 선생의 넋은 자주. 민주. 통일을 바라는 겨레의 가슴에 살아 오늘도 투쟁의 불을 지피고 있다.
자주통일인사들은 신향식 선생의 불꽃 같은 삶을 기리기 위해 9일 선생이 묻힌 경기도 광주 공원 묘원에서 추도식을 가졌다.
추도식은 류경완선생이 신향식 선생의 걸어오신 길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전사2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나라 곳곳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어떤 사람은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 죽어갔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그러나 보아다오 동지여!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오늘 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남민전 활동을 함께 했던 신우영 선생은 추도사를 통해 “자주통일을 염원하다 사형을 당한 신향식 선생이 더욱 그립다”면서 “신향식 선생은 언제나 조용한 어투로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회고했다.
서울대 동문인 조영건 명예교수는 “신향식 선생은 만학도로 서울대에 입학하여 엄혹한 시대를 뚫고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헌신했다”면서 “6.15시대에 우리는 신향식 선생의 넋을 이어 받아 우리민족끼리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분단장벽을 돌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족인 장남 신원호 선생은 “아버님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자주.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겠다.”고 유족을 대표해 약속했다.
50여명이 참여한 이날 추도식은 ‘우리의 소원은통일’ 노래로 막을 내렸다.
약력 1934년 전남 고흥 출생 1958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입학 1964년 노동청 산재보상과 근무 1966년 동아출판사 편집부 입사 1968년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투옥, 3년 6개월형 선고받음 1972년 비전향 만기출소 1976년 남민전 결성, 중앙위원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1980년 대법원 사형 확정 판결 1982년 10월 8일 사형 집행 경기도 광주공원묘지 안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