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와 이집트 등에서 친제국주의적이 아닌 자주적 정부 혹은 민중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제국주의를 편들 수 없는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리비아만이라도 서방 특히 미국의 군사동맹으로 만들거나 군사기지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45)"
이집트 혁명을 승리로 이끈 견인차는 노동계급이었습니다. 지난 2월부터 노조가 전국적인 파업을 했습니다. 혁명으로 관광수익도 줄어들었습니다. 이집트는 무바라크 퇴진 이후 경제가 날로 악화되었습니다. 이집트는 현재 빚이 굉장히 많은데 IMF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IMF의 지배를 받게 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서방은 이집트 민중에게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경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집트는 혁명 이후 처음으로 이번달에 선거가 있을 예정인데 무슬림 형제단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아직 이집트의 장래에 대해서 친제국주의적이니 자주적이니 할 단계가 못됩니다. 이스라엘을 증오하는 이집트 민중의 성향으로 봤을 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친제국주의 정부와 자주적 정부만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2-3-1. 리비아 항쟁의 배경-카다피 정권의 성격"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카다피는 집권 전반기에 석유수입을 바탕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1980년대에는 유가하락과 서방의 제제로 고통받으면서 삶의 질이 후퇴하였고, 1990년대 이후 적극적인 개방정책으로 1인당 GDP가 16,000불에 달할 정도로 괄목할만한 외형적인 성장이 있었지만,"에서 "서방의 제재"라고 간단히 언급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가다피 정권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서방국가로부터 "불량국가"라는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다피가 전세계의 수많은 민족해방운동을 정치적, 물질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건 정부는 리비아에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고 폭격을 하고 가다피를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가다피는 서방과 비밀협상을 했고 1999년 유엔은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했으며 미국은 2006년에 가서야 자신이 부과한 제재를 해제하고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그 뒤 블레어와 베를루스코니 등이 앞다투어 리비아로 달려가 비즈니스를 시작했습니다.
헨리 키신저는 서방이 1969년 혁명으로 리비아의 석유자원을 강탈당했다고 느꼈으며 닉슨 정부가 가다피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엑슨 모빌과 같은 석유 메이저들이 까다로운 조건하에서도 석유거래를 원한다는 이유로 암살시도를 포기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후 가다피의 변절은 뼈아픈 것이며 리비아의 청년실업률은 석유가 나오지 않는 튀니지나 이집트보다도 훨씬 더 높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변절자, 독재자라 하더라도 그가 왜 그런 길을 걷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너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서도 옳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고압적이고 엘리트적인 자세일 뿐입니다. 그 역시 한때는 리비아인 다수의 지지를 받았던 big brother였으며 그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하는 것이 리비아인들을 존중하는 태도라는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