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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기고] 여름부터 지금까지, 기아차 화성공장에서는 무슨 일이?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3/11/20 07:55
  • 수정일
    2013/11/20 08:0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기아차 화성공장 KD외주화 저지 투쟁 평가
 

이동우 (기아차 화성공장 해고노동자)


지난여름부터 투쟁하는 동지들의 SNS상에 간헐적으로 올라오던 기아차 화성공장 KD외주화저지 투쟁이 최근 마무리되었다. 2008년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 강제해산과 기아차지부 사내하청분회로의 편제 이후, 간헐적인 해고자복직투쟁과 임단협 소식 이외에는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현장투쟁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기아차 화성공장이었다. 게다가 연초 비극적인 故윤주형 열사의 자결과 장례투쟁의 이야기들 속에서 전국의 투쟁하는 동지들이 이후의 현장투쟁을 많이들 걱정하던 터에 들려온 투쟁 소식이다.

특히나 대공장 관료주의와 조합주의 하에서 비정규직투쟁(1차 하청)이 독자적이며 자주적으로 펼치기 어려운 조건이기에 기아차 화성공장의 KD외주화 저지 투쟁은 주목할 만하다. 천막농성 58일/민중광장 옥상농성 25일을 전개하며 끈질기게 싸웠던 KD외주화저지 투쟁을 돌아본다.


KD공장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부품을 수출해서 현지에서 조립, 판매하는 방식을 말한다. 주로 자동차의 수출에 이 방식이 취해진다. 완성차를 수출하는 것보다도 관세가 싸게 먹히고 현지의 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가 있다는 점 때문에 유리 - 매일경제

KD공장은 완성차의 부품을 포장하는 일을 하는 공정이다. 화성공장에서는 정규직 70여명, 비정규직(1차 하청과 계약직 포함) 13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소수의 계약직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아차지부의 조합원으로 조직되어 있다.

사실 기아차 사측은 어느 공정, 어느 공장에서나 원가절감을 이유로 외주화 공격을 시도했으며 KD공장도 물량과 부품을 빼내는 외주화를 수시로 감행했다. 그리고 늘 그러하듯 노동조합은 부분적인 외주화를 용인하고 특근과 장기적 고용을 보장받는 방식의 타협이 이뤄졌다. 사측 또한 파국적인 전면외주화보다 주고받는 식의 부분외주화를 통해 노동조합의 반발을 무마하고 기회비용을 줄이면서 서영과 글로비스로 일감을 몰아주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본관 항의방문



KD공장 비정규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지회로 조직되기 전, 기아 원청사측이 특히나 고령의 노동자들을 많이 고용했던 공장이 바로 KD공장이다. 화성공장 전반이 타 완성차 공장보다 고령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KD공장은 평균치를 상회한다. 원청사측은 정규직 정년을 넘긴 고령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그야말로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근로기준법을 어기는 것은 다반사에 연월차 사용을 막고 특근, 철야를 강요하며 불만을 표하면 해고로 위협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조 건설의 열망이 더 컸던 것 또한 사실이다. 비정규직지회가 건설되기 전의 업체 노동자회가 건설된 몇 안 되는 곳이 바로 KD공장이었으며, 비정규직지회 건설과 사수의 핵심 업체 중 하나였다. 이러한 현장투쟁의 활성화는 투쟁의 성과로 남기도 했다. 비정규직지회 단협 체결 당시 이미 합의했던 정년 회의록이 단협을 상회함에도 사측에 의해 인정받은 것이 좋은 예이다. 당시 정규직 내에서도 자신들의 정년보다 훨씬 높다라면서 이야기되곤 했는데, 원청사측에게 고령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부려먹은 것에 대한 응징과 보상의 측면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비정규직지회 건설 이후 원청사측에게 핵심 업체로 찍혀 여러 가지 공격을 받기도 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모범사례이겠지만 사측이 보기에는 조직력을 와해시켜야 하는 눈엣가시기 때문이다. 이에 원청사측은 130여명의 한 업체로 조직되어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두 개의 업체로 쪼개는 분사화 공격을 단행했고 아쉽지만 막아내지 못한 아픔도 있다.

1사1조직 강제통합이 있은 후 분회 차원에서의 현장투쟁이 아쉽기만 했던 지난 6년 동안 KD공장에서는 소중한 현장투쟁을 만든 기억도 있다. 2012년 계약직 정직 전환 투쟁이 그 예일 것이다.

그간 기아 원하청 사측은 정년자 자리에 2개월 안에 1차 하청 신규 채용하라는 단협 조항을 번번이 어겨왔다. 그리고는 계약직을 채용, 사측에 순응하는 계약직을 중심으로 임단협 합의 이후 정직으로 전환하는 꼼수를 부려왔다. 지부, 지회, 분회는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했고 한 술 더 떠서 계약직 노동자들의 노조로의 가입을 막아오곤 했다. 우연적이긴 했지만 소수의 계약직 노동자들이 고용불안과 노동조건의 불만을 이유로 조합원 가입원서를 제출했지만 공식적인 이유조차 없이 반려되거나 무시되었다.

이렇듯 사측은 인력운용의 완충지대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노동자들을 채용하기 위해서, 노동조합은 조합주의의 한계에 갇혀 조직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던 계약직 노동자! 비정규직 내의 비정규직인 계약직 노동자들의 정직전환 투쟁에 KD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함께 한 것이다. 물론 즉각적인 정직전환의 요구가 아니라 임단협 이후 합의된 정직전환 인원에서 하청사측이 근속을 무시하고 가려 뽑으려는 시도에 대한 투쟁이었지만, 함께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도 하지 못했던 연대의 목소리를 냈던 투쟁이었다.

 

 

소문에서부터 시작된 투쟁

사실 화성공장에서 2013년에 외주화 공격이 있을 것이란 소문은 활동가내에서 횡행했었다. 도장과 플라스틱, KD공장이 그 중 하나일 것이란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은 지금까지의 경험상 사측의 공격으로 기정사실화되곤 했다.

연초 이러한 소문이 현장에서 돌기 시작하자 KD공장 대의원들은 지부와 지회 대의원대회를 통해 집행부에게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또한 사측의 외주화 공격이 사실이라면 지부 차원의 공동 대응을 결의해줄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당시 22대 기아차지부 지부장은 지회 대의원대회에서 확인하고 문제를 풀 것을 요구했고 지회장은 확인된 외주화 계획은 없으며 만약 시도가 있다면 지회 차원에서 막아낼 것임을 공언했다.

그런데 이러한 투쟁 결의와 공언을 그야말로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휴가를 다녀온 직후인 8월초 기아 원청사측은 KD물량이 줄어들고 있으며 수익성 하락을 이유로 KD외주화 강행이라는 여론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부서장 명의의 홍보물과 대자보가 현장에 나돌았다. 관리자들과 사측 조합원들이 이를 기정사실화하면서 고용이나마 보장받아야 한다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사측은 아예 외주화를 동의하는 서명까지 조직하면서 공세적으로 나왔다.

현장조합원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노동조합과 함께 투쟁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측의 외주화 서명을 거부하고 투쟁을 결의한 것이다. 투쟁 초기 200여명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들은 외주화가 고용불안을 전제로 하기에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함께 할 것을 결의하고, 지회 차원의 대응이 필요함을 지회에 요구했다.

8월 중순 부터는 현장 집회, 선전전, 대자보 부착, 홍보물 배포 등 현장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투쟁들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9월 초에서는 KD공장 앞에 정규직/비정규직 천막이 두 동 세워졌다. 비상시기니 만큼 현장조합원들이 먼저 비상한 각오로 투쟁할 것을 주문하고 실천에 돌입한 것이다.


내 일터는 내가 지킨다!


천막 농성에 돌입한 이후부터 조합원들이 매일 아침 출투, 중식 및 퇴근장 선전전을 했다. 공식적으로 외주화를 저지하겠다는 입장을 다시금 재천명하지 않는 화성지회에 대한 항의방문도 이어졌다. 임단협 투쟁 과정에서 불거진 KD외주화 공세가 임단협 교섭에 묻히지 않도록 조립공장 현장순회도 꾸준히 이어갔다.

10년 넘게 투쟁하고 노동하면서 지냈던 KD공장에서 하루아침에 공장 이곳저곳으로 찢어지고 노동조건이 후퇴시키는 사측에 대한 분노도 표출됐다. 9월 3일 화성공장 본관 진입 및 로비 점거 투쟁은 이러한 조합원들의 분노를 보여준 자리였다. 외주화 시도에 항의하는 본관 앞 집회를 기아 원청사측은 문을 걸어 잠그고 모르쇠 했고,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은 공장장을 만나 따지겠다면서 로비로 진입, 연좌농성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물리적 충돌을 빌미로 사측은 담당대의원을 비롯한 3명의 조합원에게 고소고발을 자행했다.

 

화성지회의 입장변화, 투쟁하는 조합원
 
이러한 조합원들의 분노는 사측과 더불어 화성지회에도 향하게 됐다. 연초에 공언했던 화성지회의 입장이 임단협 마무리 국면을 맞이하면서 변화된 것이 이유였다. 조합원들은 교섭이 한창인 소하리로 몰려갔다. 20~30여명의 조합원들이 조퇴와 월차를 쓰고 교섭장으로 달려가 지부장과 지회장에게 KD외주화를 함께 막자고 호소했다. 그 시간 화성 공장에서는 비정규직 조합원 한 동지가 고용불안과 투쟁하지 않는 노동조합에 대한 답답함으로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부장, 지회장과 상집간부들은 임단협 교섭을 빌미로 면담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거칠게 항의하는 조합원들에게 당시 지부와 지회 상집간부들은 고압적인 모습을 보이며 교섭을 방해하는 것이냐며 비난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교섭장 앞에서 면담이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지회장은 조합원의 고용을 지키기 위해서 심사숙고하겠다는 두루뭉술한 약속만 했다. 끝내 외주화 자체를 막겠다는 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연일 교섭장 상경과 봉쇄투쟁이 이어지고 지회 항의방문과 공청회가 진행되었다.

이 속에서 화성지회의 입장은 “기 합의된 엔진공장 신설을 KD공장을 허물고 할 수 밖에 없다, KD외주화는 그룹본사 차원의 정책이기에 더 큰 투쟁과 희생이 요구된다”라며 사실상 외주화 수용입장을 내놓게 된다. 이러한 입장 선회는 200여명의 KD조합원들에게 큰 혼란으로 다가왔다. 투쟁 초기 담당대의원이 공석이 된 정규직 조합원 70여명은 교섭권을 지회에 일임하고는 제일 먼저 투쟁에서 후퇴했다. 두 개의 업체로 나눴던 비정규직 대오에서도 이탈이 발생했다. 그나마 현장투쟁력이 상대적으로 나았던 업체의 조합원들은 정규직 대오의 이탈을 예상하면서 투쟁의 의지를 다졌지만, 다른 업체의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그러지 못했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전적동의서에 서명하면서 사실상 지회에 교섭권을 위임한 것이다.


김남규 동지의 공사강행 저지투쟁


“심정은 이해하나, 고뇌에 찬 결정”


결국 임단협 잠정합의가 이뤄진 새벽, 화성지회는 KD외주화를 합의하는 고용소위원회 회의록을 작성했다. 회의록은 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한 고용보장 내용이 담겨 있으나,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일자리는 오리무중이었다. 여기에 45세 이하의 비정규직 조합원들에게는 정규직 채용의 자격을 부여한다고 했다. 다른 업체로 전적하는 고령노동자들의 정년문제나 계약직 노동자들의 고용문제는 빠진 회의록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가르고, 45세 이하 젊은 노동자와 나머지 노동자를 가르고, 고령노동자와 계약직은 배제된 전형적인 투쟁대오 갈라치기 회의록이었다. 그리고는 10월에 공사를 진행한다는 합의.

다음 날 임단협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와 더불어 23대 임원선거에 대한 공고가 게시됐다. 통상 다음 집행부 선거가 공고되면 현 집행부의 임기는 종료된 것으로 보는 관례에 비추어 22대 지회 집행부의 KD외주화 회의록은 임기 종료 하루를 앞두고 졸속적으로 조합원의 고용불안을 야기한다는 비판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신규 엔진공장 증설과 KD공장 외주화 저지를 함께 가져갈 수는 없었는지, 새로운 집행부와 KD조합원들이 외주화 저지 투쟁을 할 수 있게 차기로 넘길 수는 없었는지에 대한 비판이 있었으나 회의록은 체결되었다.

이후 진행된 화성지회장 항의면담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10년 넘게 KD공장에서 일한 조합원들의 반발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집행부의 고민과 고뇌에 찬 결정을 이해해달라는 이야기뿐이었다. 지부, 지회, 분회가 외주화를 용인한 가운데 결국 외주화 철회와 고용안정을 위해 투쟁하는 수십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에 연대하는 활동가들의 투쟁으로 남은 것이다.

화답하듯 사측은 KD조합원 200여명에게 10월 공사 유급 휴무를 공고했다. 정규직은 내년 6월까지, 비정규직은 올해 말까지. 계약직 노동자들은 해고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연일 포클레인과 구사대를 동원해서 공사강행을 시도했고 저지하는 조합원들을 몸으로 밀어냈다. 사진채증을 하며 업무방해 고소고발 협박과 비아냥거림도 서슴지 않았다.


고립된 투쟁, 완강한 저항


이미 임단협이 종료된 9월 중순부터 기아차지부는 지부 7개 팀, 지회 8개 팀이 참여하는 선거전에 돌입해 있었다.(분회 선거는 지부, 지회 선거가 마무리된 이후 진행) 그렇지만 투쟁하는 조합원이 있고 고용불안에 떨고 있음에도 KD외주화문제는 쟁점화되지 못했다.

당시 화성지회 선거관리위원회는 공정 선거를 빌미로 공장 안 집회와 선전전을 하거나 개별적인 유인물 발행과 현수막 게시를 자제를 요청했다. 다수의 활동가나 현장조직들이 선거전에 뛰어든 마당에 이러한 선관위의 입장표명은 공장 안의 연대를 위축시키고 선거전에 KD문제가 걸림돌이 될 것이라 여기는 단위들에게 좋은 핑계거리로 작용했다.

그렇지만 KD조합원들은 사측의 공사휴무에도, 공사강행 탄압에도, 선거전에 묻히는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투쟁을 이어갔다. 강제 휴무 전, 계약해지를 당한 계약직 노동자 중 한 동지가 본격적으로 KD외주화 투쟁에 결합했다. 아침/중식/퇴근장 선전전을 매일 진행했다. 조를 나눠 천막농성장을 지켰다. 사측과 KD외주화를 용인하는 세력들의 유언비어와 비난이 담긴 문자가 전공장적으로 돌아도 흔들리지 않았다. 공장 안의 연대 대오는 비정규직 지회장 후보를 내세운 동지들을 비롯한 소수였지만 집행부가 합의하면 끝이라는 패배의식을 뚫고 완강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 속에서 조합원들이 훨씬 많은 안 공장(조립/도장)으로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광장 옥상농성이 계획되었다. 백 명이 넘는 구사대의 공사강행 침탈에 수십의 대오가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공사를 저지하고는 있지만 선거 국면이 지나가면 직접적인 침탈이 예상되기에 더 수위가 높은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국 10월 6일 새벽 한 동지가 민중광장 옥상에 올라 몸에 줄을 묶고 “조합원 다죽이는 KD외주화 반대! 고용안정 쟁취하자!!”란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선거운동 한 달 동안 KD외주화저지 투쟁은 이렇게 계속되는 선전전과 사측의 공사침탈 저지투쟁, 조합원들과 지회, 분회에 투쟁을 촉구하는 옥상농성으로 이어졌다. 물론 계속되는 투쟁에 대한 SNS상의 선전과 연대호소도 병행되었다.



지역 연대의 조직과 투쟁의 마무리


옥상 농성이 9일을 지나고, 노동조합의 외면 속에서 고립된 싸움으로 이어지는 KD투쟁이 알려지면서 지역 연대의 흐름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지역의 정치단체와 정당, 전국의 투쟁하는 사업장의 동지들과 활동가들이 KD투쟁을 지지/연대하기 위한 실천을 시작했다. 급박하게 지지유인물을 찍어 공장으로 달려왔다. 함께 선전전을 하고 간담회를 통해 연대의 방안을 모색했다. 이에 연대동지들은 지원모임을 결성, 주중 퇴근장선전전에 결합해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지지현수막을 보내줬다. 또한 사측의 공사침탈이 있을 때마다 공장으로 달려와 함께 할 것을 찾거나 연대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SNS상으로 상황을 전파했다.

이렇게 지역연대가 조직되기 시작했지만, 공장에서의 투쟁은 투쟁대오의 점진적인 유실과 더불어 지난하게 진행되었다. 기존 본관 투쟁 건을 포함해서 공사 저지, 옥상농성을 이유로 기아 원청 사측은 총 4명의 동지(담당 대의원과 옥상농성을 하는 동지, 조합원 2명)들을 고소 고발했다. 휴무에 들어간 조합원의 가정으로 두 번이나 가정통신문을 보내 KD외주화 투쟁을 비난하고 징계협박했다. 휴무중임에도 천막농성장을 계속 찾는 조합원들에게는 경고장을 보내고 핵심동지들을 징계위에 회부했다. 노동조합이 외면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가운데 사측의 탄압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작용했다.

그래도 투쟁대오 내에서는 마지막까지 물러설 수 없는 투쟁요구가 있었다. 외주화 자체는 우리 힘이 모자라 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함께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의 요구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기존의 정년 회의록이 외주화로 휴지조각이 돼버리는 고령노동자들,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노동조합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계약직동지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또한 우리 고용을 지키기 위해서 각 업체로 찢어지면서 그 곳에서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의 일자리를 밀어내는 방식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명확했다.

화성지회 신임 지도부가 들어선 가운데 외주화 철회가 아닌 고용에 관한 보충협의가 진행되었다. 사측은 다시 한 번 공사를 강행하기 위해 백여 명의 구사대를 동원해서 저지하는 조합원을 끌어내고 (정규직)천막을 침탈했다. 계약직 해고자에 대한 공장출입을 불허하고 징계위 협박을 다시금 자행했다. 마지막 회의록을 작성하면서까지 탄압은 지속되었다.

결국 KD외주화 저지 천막농성 58일차, 민중광장 옥상농성 25일차 아침 40여명의 조합원들과 옥상농성을 했던 동지는 기간 투쟁의 성과와 우리의 한계를 함께 이야기하며 회의록을 작성했다.

 


하지 못한 것, 우리에게 남은 것


외주화는 당사자들의 고용불안 뿐만 아니라 공장 밖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를 확대하는 자본의 노동정책이다. 수익성 운운하며 경영합리화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외주화를 단행한다. 그렇기에 우리 노동자들은 외주화를 반대한다. 멀쩡히 일 잘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지들 마음대로 여기 저기 찢어 놓고 기존의 노동조건, 투쟁성과를 무로 돌리려는 시도이기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KD외주화를 저지하지 못했다. 지부, 지회, 분회가 안 될 일이라고 투쟁조차 시도해보지 않았고, 고립되는 정세 하에서 분투했지만 투쟁 대오의 유실 속에서 결국 외주화를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현장 조합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직권조인하면 현장투쟁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관료주의와 노동조합을 욕하고는 뿔뿔이 흩어지는 관행을 끊어내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주체의 힘으로 돌파하지 못한다면 연대 대오의 구축과 투쟁을 통해 시도해야 했음에도 소극적이었던 모습 또한 아쉽기만 하다. 200여 조합원 중에서 정규직과 투쟁에 소극적인 비정규직 일부가 투쟁조차 하지 않거나 시늉만 낼 것이라는 것이 예상되었고 선거 국면 속에서 더욱 고립될 것 또한 예측되었다. 그 속에서 더욱 과감한 공장과 지역의 연대 전선 구축을 더 빨리 고민하고 조합원들과 함께 만들었어야 되지 않았을까?

또한 마무리 총회 국면에서 조합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던 투쟁했던 동지들-고소고발자와 징계자-의 문제가 향후 투쟁과제로 미뤄진 것에 대한 평가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특히나 대공장에서 벌어지는 이런 문제는 늘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축소되어 나중 과제로 미뤄지고 있다. 그 속에서 소수의 당사자들만이 다시금 고소고발과 징계문제로 투쟁을 이어나가는 악순환을 금번 KD외주화 투쟁은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고 KD외주화 투쟁이 마냥 한계만을 보여준 투쟁이었는가?

기간 관료주의와 조합주의에 찌든 대공장 운동에서 노동조합이 합의하면 욕하면서 뒤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현장조합원의 힘으로 투쟁을 밀어나간 소중한 경험이 바로 KD외주화 투쟁일 것이다. 또한 1차 하청 조합원에 한정된 고용보장이 아니라 함께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내의 비정규직인 계약직 노동자,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과 함께한 싸움이었다.

비정규직지회 건설과 사수 과정에서 정규직의 배신과 실망 속에서 현장투쟁을 이어가지 못했던 패배주의나 우리조합원 고용만 지킬 수 있으면 된다는 식의 조합주의로는 희망을 볼 수 없다. 우리 고용을 지키기 위해 더 열악한 노동자들을 밀어내는 방식의 투쟁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KD투쟁의 경험에서처럼 내 옆에 있는 더 열악한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통한 투쟁, 지역과 사회를 향한 연대를 통한 투쟁으로 희망은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관료주의, 조합주의에 갖혀 우리 조합원만 챙기는 것이 아닌 공장 담벼락을 넘나드는 더 낮은 곳을 향한 노동자연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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