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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롱뷰의 승리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행동이 필요하다 - 기포드 하트먼

 

[편집자주]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Occupy 운동이 한 순환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뉴욕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으로부터 시작된 Occupy 운동은 미국과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1월2일에는 미국 오클랜드 도시 총파업으로 번져나가 새로운 국면을 맞는 듯했다. 그러나 오클랜드 투쟁 이후 Occupy 운동은 차츰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사노신은 지난 1월 Occupy 운동이 미국 서해안의 항만노동자들에게 전파되고 있으며 워싱턴 주 롱뷰에서 벌어질 하역작업 중단 투쟁이 이 투쟁의 중요한 계기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란자 노트>의 유인물을 번역해서 게재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 내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12월 이후 벌어진 항구 봉쇄 투쟁들이 몇몇 정치단체들이 장악한 Occupy 운동에 의한 대리주의적인 행동이었으며 <반란자 노트> 등의 주장은 과장된 평가라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12월12일 항구 봉쇄 투쟁은 실패했던 것으로 보이며 Occupy 운동이 조직노동자운동으로 전파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이글을 쓴 하트만은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이쯤 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로 알려져 있다. 사노신은 이 기사의 정치적 내용에 동의하진 않지만 롱뷰 투쟁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관계들과 Occupy 운동그룹의 상황을 잘 알려주는 기사라고 판단하여 번역 게재한다. 사노신은 Occupy 운동의 전개양상이 이후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이 투쟁에 직접 참가한 좌익 계열의 활동가들의 평가서들을 계속 번역할 계획이다. 이 글의 제목과 소제목 및 각주는 편집자가 임의로 붙인 것임을 밝힌다.

 

<반란자 노트>가 롱뷰 투쟁에 관련해서 낸 유인물을 읽고 이런 문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인류의 역사적 위기는 혁명적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 4인터내셔널의 임무, 레온 트로츠키 [1938])

 

이유는 간단하다. 오클랜드의 한 전위집단이 워싱턴 주 롱뷰 EGT 곡물 부두의 하역작업을 중지시키려는 투쟁 계획1)을 완벽하게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반란자 노트>가 지도적 역할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 뉴욕 시와 시애틀에 있는 그들의 인민전선 동맹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시애틀 소동의 본질

 

△ 1월6일 집회 도중 난동을 부리는 국제항만노조 간부들 (출처 : The Internationalist Newspaper)

시애틀에도 <국제주의자 토론 네트워크 (Internationalists Discussion Network)>2)에 참여하는 동지들이 몇 명 있다. 그래서 여러 동지들의 견해를 들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요즘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않고 있는 <국제주의자 토론 네트워크>의 한 동지가 포틀랜드에 살고 있다. 그는 지난주 롱뷰에 있었다. 이 동지는 시내의 모든 술집에 부두노동자들을 지지하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고 했다.
그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부두노동자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슬프게도 그런 목소리들은 묻히고 있다. 우리가 듣는 소식이라고는 다른 곳의 레닌주의 동맹자들과 함께 반동적인 백인 노조관료들이나 파업회피주의적인 관료주의3)가 오클랜드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이 너무나 해악적이 되었기 때문에 시애틀의 제19지부 소속 평조합원들은 Occupy 시애틀 사람들에게 항구에서 떠나달라고 요청하기 이르렀다. 처음에는 나도 이것이 국제항만노조(ILWU)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발생한 노조 내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월6일4)에 벌어진 소동 당시 국제항만노조 회의장에 있었던 제19지부의 한 동지에게 생각을 물어보았다. 이 동지는 국제산업노동자동맹5)의 전통(Wobbly tradition)을 계승하며 종종 제 2의 간부진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현장조직(a caucus of rank-and-filer)에 속해 있었다.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노동계급의 자기행동을 옹호하고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투사임이 틀림없는 동지였다. 다음은 그날 일어난 혼란에 대한 그 동지의 생각이다.
<흑란단(黑蘭團)>6)(무정부의주의적 공산주의자로 자칭하는 무정부주의적 레닌주의자들), 혁명적 공산당(RCP)7)이 지배하고 있는 민중조직위원회(POC, People's Organizing Committee) 그룹, 그렉 루이스 선생(Sensei Greg Lewis) 주변의 핵심그룹(모택동주의 경향을 가진 레닌주의자들), 문 닫은 옛날 자율주의 공간(Autonomia space) 주위의 사람들(인셔렉셔니스트 아니키스트8), Pugetsoundanarchists.org를 보라) 같은 세력들이 Occupy 시애틀을 장악했다. 그들은 FRSP9)나 그 만큼은 아니더라도 ISO(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10) 등과 마찬가지로 Occupy 운동을 통째로 국제항만노조에게 갖다 바치려고 애쓰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이 모든 것을 오클랜드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1월6일의 ‘집회’에서 나타난 적대감의 원인이었다. 제19지부 소속 평조합원들은 지난 주 Occupy 운동과 모든 연계를 단절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 결의는 Occupy 사람들과 대화하고 설득하려고 수도 없이 시도해 본 뒤에 나온 것이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은 1910년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미국 최초의 산업별 노동조합 연합체이다. 영문 약칭은 IWW이며 흔히 워블리스(Wobblies)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05년 미국 시카고에서 D. 드 레온(Daniel De Leon)과 윌리엄 헤이우드(William Haywood) 등이 주도해 만들어졌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결성은 당시 주도적인 노동단체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의 보수성에 불만을 품은 데 따른 것이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는 전 노동자를 산업별로 조직화하고 자본주의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서부의 일용 노동자, 가출 노동자 등 미숙련 노동자를 중심으로 격렬한 스트라이크와 사보타지를 지도하였다. 이 같은 투쟁 방식으로 점차 세를 넓혀 전성기인 1912년에는 조합원 수가 10만 명을 넘었다. 헬렌 켈러가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 단체를 더욱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분열과 정부의 탄압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급속히 쇠퇴했다.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반전운동을 편 것은 특히 정부의 거센 탄압을 불러왔다. 윌리엄 헤이우드 등 많은 지도자가 처형을 당했고 한편으로 강경파가 공산당으로 이적하는 등 조직 분열이 가속화하면서 그 세력이 급격히 퇴조했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내세운 혁명적 조합주의(생디칼리즘)는 의회주의를 부정하고 노동조합을 혁명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으로 스트라이크(동맹파업) 등의 직접행동으로 혁명을 달성하고 자본주의 타도가 성취된다고 주장했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미숙련 노동자나 흑인 노동자의 조직화를 시도하고 산업별 조합주의를 도입한 것 등은 미국 노동조합운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조합원들의 중복가입을 인정하고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작업장 민주주의의 모델인 워블리 샵(Wobbly Shop)을 제시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 때 조합원이 2천여 명까지 줄어들어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으나 최근 다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조합원 수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는 Occupy이 운동과 메이데이 총파업 선전 활동과 조직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12월12일 투쟁은 과연 승리인가

내가 1월10일에 올린 글에서 지적한 대로 IBU(국제항만노조 해양분과(maritime division)) 조합원 사만다 레벤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예정된 항구에서의 행동(12월12일)을 위한 조직화가 어떻게 해서 실패했는지에 대해서 내가 실망한 점은 봉쇄가 대중총회에 안건으로 제안되기 전에 국제항만노조 내부에서 동맹자들 사이에 수행된 활동이나 조직화 작업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연대행동을 조직하는 활동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녔지만 그럼에도 노조에게서 집회에 오라는 말이나 다른 연락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또 국제항만노조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연대하고 있는 다른 좌파와 급진파들이 항구 봉쇄 제안이 처음 기획될 때 아무 얘기를 듣지 못하거나 계획을 준비하는 회의에도 참가제안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일반 부두노동자들 사이에서 아무런 집단적 과정도 거치지 않고 이들 전위주의자들은 그냥 도로에서 쇼를 벌인 다음 북서태평양 연안 전체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말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다른 보고들에 따르면 오클랜드 사람들이 “스타”처럼 우쭐대며 “오클랜드 항구 봉쇄” 투쟁의 무용담을 떠벌였다 한다. 골드너가 쓴 유인물에 나오는 “오클랜드와 포틀랜드 그리고 시애틀에서 국제항만노조 평조합원들이 점령운동의 피켓라인을 지키고 12월12일의 서부해안 항구 봉쇄투쟁을 위한 행동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었다”11)는 문구는 거짓말이다.
대다수 국제항만노조의 일반 조합원들은 아예 나오지 않았고, 12월12일 오클랜드의 2터미널(<한진>과 )에 있던 사람들도 노사중재자(arbitrators)12)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중재관들은 결국 “건강과 안전상의 이유”로 하루일당의 반을 지급하고 조합원들을 오전 중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조합원들은 노사중재자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몸으로 보여주는” 행위는 전혀 없었다. 전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항구 경영진은 오후와 오전 3시에 있는 다음 날 조간근무 교대를 취소했다. 즉, 노동자들은 일하러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고, 이는 무급이었다. 항구는 사실상 폐쇄되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기꺼이 인정하겠다. 하지만 나는 노사중재자들이 터미널 두 개를 폐쇄한 포틀랜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애틀은 달랐다. 항구로 가는 길목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시위자들이 터미널 하나를 막았고 다시 “지역시민으로 이루어진 시위자들(community pickets)”이 교대 근무하러 나온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경영진은 임금지급을 거부함으로써 부두노동자들을 징계했다. 우리는 이미 전에도 이런 일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 중 어떤 것도 해당 항구에서 일하는 부두·해양·운송노동자들이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모두 외부에서 시작된 행동이었다.
우리는 이미 이 행위의 성격에 대해 토론했고 나는 그것을 진정한 파업을 위한 시동행위로 생각하는 일부 젊은 공산주의 투사들(communization militants)의 생각에 동의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적어도 오클랜드에서는) 트럭운전사들(troqueros)이 대부분 항구에 나오지 않음으로써 수동적으로 파업행위를 했다.

 

△ 지난해 12월12일 시위대에 의해 봉쇄된 오클랜드 항구

 

항만노동자 투쟁의 성격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지적하는 게 필요하리라. 이 투쟁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생존권 악화(austerity)에 맞선 투쟁이었고 실제로는 1934년 해양분과가 파업으로 쟁취한 성과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해안전체에서 벌어진 이 파업투쟁은 항만노동자들에서 시작되어 즉시 해안에서 일하는 선원들로 파급되었고 83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두 사람이 살해된 7월5일의 “피의 목요일”에 전미트럭운전자노조 노동자들(teamster)은 1901년 자기들이 해안지역에서 파업투쟁을 했을 당시 부두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을 해준 것에 대한 보답에 나서 다른 부문 노동자들 중 처음으로 4일간 총파업에 동참했다. 이는 1886년, 1893년, 1916년 부두에서 일하는 모든 분야의 노동자들을 거의 총파업에 가까운 수준으로 단결시켰던 연대파업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1934년의 총파업으로 쟁취해서 연방중재관(federal moderator)이 승인한 요구들은 ⑴ 클로즈드숍 ⑵ 해안 전 지역의 일괄 계약 ⑶ 노조에 의한 고용알선이었다. 이 요구조건들은 1934년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샌 페드로(LA), 포틀랜드, 시애들 등 서해안의 모든 주요 항구에 적용되었다. 부두노동자들은 1937년 동해안에 주로 기반 한 부패한 국제항만노동자협회(ILA, 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를 버리고 국제항만노조를 건설하여 결국 서해안의 크고 작은 (현재 모두 29개에 이르는) 모든 항구를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경영진 측이 빨갱이라는 색깔 공세를 펼치며 협약을 파기하고 성과물들을 되돌리려고 하기 시작했을 때 부두노동자들은 신속하게 파업투쟁에 나서 자신들의 현장권력을 방어했다. 1934년과, 다시 한 번 큰 승리를 거두어 이전에 쟁취한 성과들을 확고하게 굳힌 1948년 사이에 부두노동자들은 도합 1399번이나 합법 또는 불법으로 조업을 중단했다. 이는 성과물을 얻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키기 위해 파업을 수행하는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의 전통이었다.
필라델피아를 거점으로 했던 세계산업노동자동맹 산하 해양운송노동자산별노조 제 8지부의 활동은 확실히 국제항만노조의 현재를 연상시킨다. 제 8지부는 1913년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부둣가에서 수행한 설탕파업(sugar strike)을 통해 생겨났으며 부두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한 이후 9년 동안 잇따라 파업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놀랄 만큼 다인종적인 노조로서 항구들을 지배했다. 제 8지부는 1934년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의 국제항만노조처럼 클로즈드숍이었고 노조가 고용을 알선했으며 파업투쟁으로 성과물을 방어했다. 노조의 운영도 독특하여 책임 있는 자리를 흑인과 백인이 번갈아 맡는 등 모든 회의나 모임에 흑백이 공평하게 섞여 있었다. 매년 피의 목요일을 기념하여 일을 하지 않는 국제항만노조의 전통처럼 제 8지부도 1913년 노조를 출범할 수 있게 한 그들의 첫 번째 승리를 기리기 위해 매년 5월16일 작업을 중단했다. 그들의 지배의 종말은 좌파의 볼셰비키화에 더해 세계산업노동자동맹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1922년 직장폐쇄에서 그들의 패배와 동시에 일어났다.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이 부족

EGT 투쟁은 국제항만노조에 동일한 일을 하려는 경영진의 시도이다. 국제항만노조는 이 노조가 적게 잡아도 지난 40년 동안 파업이라는 무기를 버리고 교섭을 통해 성과물을 보호하고 합법적으로 협약을 방어하는데 목을 매어왔기 때문에 훨씬 더 약화된 상태에 있다. 투쟁 없이는 1934년 이래 국제항만노조가 지켜온 세 가지 성과물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클로즈드숍과 노조의 고용알선은 다른 분야에서는 태프트-하틀리법13)에 의해 불법화되었지만 건축업에서 노조의 고용알선(그것은 대개 아주 눈물겹게 유지되고 있다)과 마찬가지로 국제항만노조에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노동과정에 대한 국제항만노조의 지속적인 통제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지역시민들의 시위”와 노사중재자들이 일반 부두노동자들 스스로의 행동을 대리할 수 없다. 그것을 가지고도 계급에 기반 한 전략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컬럼비아강수로안내인협회, 예인선 노동자들, 열차 기관사·승무원 조합, 롱뷰 근교의 트럭운전사들, 곡물의 산지인 워싱턴·몬태나·남북 다코타·미네소타 주의 농장노동자들과 곡물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접근하려는 노력은 전혀 이루어지 않았다. 곡물공급 연쇄를 이루고 있는 일본·한국·중국 등 아시아의 부두·선박 노동자들과 곡물을 가공·제분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려는 시도도 (일본의 작은 노조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을 빼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클랜드·시애틀·뉴욕에 있는 레닌주의자들 중 어느 누구도 진부하고 패배주의적인 행동주의 이상의 뭔가를 제안하지 못하고 있다. 듣자하니 ANSWER 뒤에 숨어 있는 스탈린주의자들의 그룹14)이 이 운동에 개입하여 조종하고 있다고 한다. 어디서 그런 소릴 들었냐고? 좋다. 뉴욕 시에 있는 또 다른 전위주의자들의 무리인데, 여기 그들의 광고가 있다. http://www.bailoutpeople.org/jan2012longview.shtml
국제항만노조가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은 노동계급의 일부가 이전에 획득한 성과를 지키려는 투쟁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투쟁을 다른 부분의 노동자들로 확대하려기 위한 계급적인 호소들은 전혀 없다. 참혹한 대우를 받는 트럭운전사들이 독립사업자로 잘못 분류되고 있으며 부두에서 일하는 국제항만노조 조합원의 반에 반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클랜드 지도부의 핵심은 스파르타쿠스 동맹(Spartacist League)15)에서 분리돼 나오거나16) 국제주의자신문(The Internationalist newspaper)17) 주위에 있는 그룹들로 판명된다. 이들에게 이 투쟁은 엄청나게 중대한 투쟁일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건 자신들이 활동하는 노조에서 평조합원들과 시간을 보내기보다 카메라 앞과 전위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에게 알랑거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자아도취에 빠진 몇몇 레닌주의자들의 허풍에 더 가깝다. 만일 ANSWER가 시애틀,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만안지역에서 온 코치들을 지원한다면 그들의 일종의 카메라에 찍힐 준비가 된 과시적인 정치의 일부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 것을 예상해야 하리라.

 

 

 

노동자들의 자기행동이 필요하다

슬프게도 롱뷰에서 노동자 계급의 자기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단지 1999년 시애틀에서 벌어진 WTO반대 운동의 축소판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당시 시애틀 거리에서 거둔 놀라운 성공에 대해 알렉산더 코번(Alexander Cockburn)18)이 지적한 대로 사람들은 단지 한 세대에 한 순간 불현듯 체제를 이해할 뿐이다. 그 한 순간이 나타났고 롱뷰 노동자들은 오로지 계급투쟁의 물결을 불러일으킴에서 의해서 승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투쟁은 국제항만노조와 정면으로 맞부딪쳐 계급적 연대를 이 노조 ―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 의 외부에서 얻어야만 할 것이다. 범계급적 대리주의(Cross-class subsitutionism)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런 레닌주의적 환상을 흉내 내며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고 당신들이 전혀 모르는 대륙 반대편의 한 정파에 간섭하고 있는 골드너에 대해 부끄럽다고 말해야 하겠다. 당신들의 ― 그리고 <반란자노트>의 개입은 무용한 것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자유주의자, 레닌주의자, 네오마르쿠제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전선 운동의 파산을 폭로한다. 그것은 그들의 전위주의적 지도력과 당신들이 새롭게 모집한 신참들의 정체성정치(identity politics)19)(그들이 “특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오클랜드와 달리 그들이 어떻게 기꺼이 “점령하라”라는 구호를 “탈식민지화하라”는 구호로 바꿔치기하고 있는지를 보라.)를 은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영감을 얻고 싶다면 더 나은 예들이 있다. 바로 지금 파나마 운하에서 파업이 벌어지고 있으며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도 항만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고 있다.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나이지리아의 총파업 역시 조만간 정리될 수도 있지만 다시 불붙을 수도 있다.20) 특히 나이지리아 총파업 파업참여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Occupy 나이지리아”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투쟁에서 계급적 이슈들은 롱뷰에 있는 항만노동자들과 동일하다. 우리는 그 투쟁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행성을 가로질러 일반화될 수 있을지 상상해야만 한다.

 

 

역주---------

1)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684 참조, 이 투쟁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2) 2001년에 만들어진 미국 내 국제주의·혁명적 경향의 활동가들의 토론 네트워크이다. 현재는 미국 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까지 포함하는 200여 명이 넘는 토론그룹으로 발전했고 이 네트워크의 기준(체제 변혁을 지향하고, 국제주의자여야 하며, 소련·중국·쿠바 등 가짜 공산주의에 명확히 반대하는 것 등)에 동의하고 신원이 확인되어야 가입이 가능하다.
3) 원문은 “the alternative strike solidarity bureaucracy”로 여기서 “파업 대체 (alternative strike)” 전략이란 단체교섭 등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파업이 아니라 여론이나 언론에 호소해서 성과를 내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4) 1월6일 국제항만노조 회의실에서 열린 점령운동 집회에서 국제항만노조 소속의 퇴직한 조합원 잭 헤이먼이 Occupy 운동에 의한 항구 봉쇄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 도중 몇몇 국제항만노조 조합원들이 고성을 지르고 단상으로 뛰어가는 등 발언을 방해하는 행동을 한 사건을 가리킨다. <국제주의자신문>에 따르면 헤이먼이 시애틀, 롱뷰, 포틀랜드, 오클랜드의 항만노동자들이 12월12일 Occupy 운동이 만든 봉쇄라인을 존중했다고 말하는 순간, 국제항만노조의 몇몇 간부들(기사에서는 관료주의적 폭력배bureaucratic thugs로 표현)이 소리를 지르며 단상을 향해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5) 국제산업노동자동맹(IWW)에 대해서는 박스기사 참조
6) <흑란단 (Black Orchid Collective)>은 시애틀 등지를 중심으로 비교적 근래에 결성된 그룹으로 자본주의와 백인중심주의·가부장제·이성애중심주의·제국주의·장애인 차별·국가 등에 맞서, 직접 민주주의와 이윤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구를 위해 노동자들이 창조적으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투쟁하며, 맑스주의를 통해 페미니즘·반식민주의·무정부주의·생태주의·반인종주의·동성애 해방의 가장 훌륭한 요소들을 결합시키고자 한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http://blackorchidcollective.wordpress.com 참조)
7) 혁명적 공산당(Revolutionary Communist Party)은 미국에서 1975년 설립된 모택동주의 조직이다.
8) 폭동의 역할을 강조하는 무정부주의 운동의 한 계열이다. (insurrectionist anarchists)
9)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정당 사회주의노동자당(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경향이 다름)의 시애틀지부를 중심으로 1966년 여성주의와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하며 그 당에서 분리해 설립된 자유사회주의당(Freedom Socialist Party)을 가리키는 듯하다.
10) 70년대 중반 국제사회주의자(International socialists) 계열의 북미 지역 활동가들이 분파로 조직한 그룹으로 2001년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주의경향(IST)에서 축출되었다. 정치는 IS와 대동소이하다.
11) <반란자 노트>의 유인물에서 잭 헤이먼의 발언을 인용한 부분이다.
12) 미국 노사관계에서는 노사협의가 잘 안 될 때 미국중재협회(American Arbitration Association)와 같은 제 3의 기관에서 파견된 중재자가 개입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다. 13) 1947년에 제정된 미국의 노사관계법, 법의 제안자의 이름을 따서 태프트-하틀리법이라고 통칭되고 있다. 1930년대 이후 활성화된 노동운동을 탄압하기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제한하는 규정을 담았다. 주요 내용은 ① 노조의 부당노동행위 금지 규정 ② 클로즈드 숍 금지(유니온 숍만 인정) ③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쟁의에 대한 긴급조정제도의 도입 ④ 각 주에 대한 노동입법권의 부여 ⑤ 연방공무원과 정부기업 종업원의 파업 금지 ⑥ 노동조합 간부가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선서서의 제출의 의무화 등이다.
14) ANSWER를 주도하고 있는 세력 중의 하나로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그룹인 노동자세계당(Workers World Party)이 꼽히고 있다. 1958년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분리된 이 조직은 다른 사회주의조직들과 달리 60, 70년대 흑인운동과 동성애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진보성을 보였으나, 50년대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분리할 때부터 소련의 헝가리 침공, 밀로셰비치, 사담 후세인, 김정일, 중국의 천안문 진압을 지지하는 등 스탈린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어왔다. 최근에는 금융기관이 아니라 민중을 구제하자는 “Bail out the People movement”를 전개하고 있다. 15) 미국의 젊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중심으로 1960년대 만들어진 그룹으로 70년대 이후 다양하게 분열되었다.
16) <국제볼셰비키경향(IBT)>(http://www.bolshevik.org/)을 가리킴
17) 미국 스파르타쿠스 동맹에서 파생한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국제주의자 그룹(Internationalist Group)>이라는 조직이 발행하는 신문이다. 이 조직은 제 4인터내셔널의 부활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다. (http://www.internationalist.org/longshoreworkersshutusports1112.html)
18) 미국의 정치평론가(1941∼)
19) 개인의 주요한 관심과 협력 관계는 인종·민족·종교·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다는 관점을 말한다. 필자는 이를 계급정치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20) 나이지리아 노동계는 정부의 유가인상 조치에 항의하여 1월9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했다. http://www.washingtonpost.com/world/americas/workers-go-on-strike-at-panama-canal-expansion-project-for-back-pay-safety/2012/01/17/gIQAj2uA6P_story.html

번역│이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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