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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파견 판결 릴레이 인터뷰 (3)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비정규직 해고자 이동우 (전 기아비정규직지회 부지회장) 동지 인터뷰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11/13 16:15
  • 수정일
    2014/11/13 16:1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9월 25일 기아자동차 하청노동자들이 낸 불법파견 소송에서 재판부는 앞서 현대자동차 하청노동자들에 내린 것과 동일한 판결을 내렸다. 기아자동차는 불법성이 명확한 혼재작업(같은 라인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작업하는 형태) 비율이 다른 완성차 공장에 비해 낮은 탓에 현대자동차와 달리 불법파견 문제가 크게 제기되지 않았으나, 이번 판결로 생산라인의 하청노동자는 모두 불법파견 정규직화의 대상이 될 길이 열렸다. 하지만 최근 기아차 지부와 사내하청분회는 불법파견 문제에 대해 언제가 될 지 모를 대법원 판결을 보고 논의한다는 합의를 체결하여 활동가들과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분노를 샀다. 이번 판결의 영향 및 합의서 체결 후 공장 상황에 대해 화성공장 해고자이자 1사1조직화 이전 비정규직지회 부지회장이었던 이동우 동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사노신]


기아화성은 혼재 작업이 상대적으로 적은 탓에 그동안 불법파견 투쟁에서 비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기존에 합법도급으로 여겨온 이른바 진성도급은 물론이고 컨베이어 작업에서 합법도급을 인정하지 않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청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판결인데, 화성 공장에서 파장은 어떤 것 같습니까?

말씀하신대로 기아차는 전반적으로 혼재작업이 적어서 노동부 불파 판정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파견 투쟁에 집중하기보다는 노동조합을 통한 임금과 고용조건 개선 투쟁에 집중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사내하청 정규직화 투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언적인 측면이 강한 것이 사실이었지요.

그 속에서 21대 집행부 시절 최병승 동지의 법정투쟁 결과를 보고 하청분회 차원에서 대규모 불법파견 소송인단을 모집하는 사업이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조합원들이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노동부가 불법파견을 인정한 숫자가 적어 조합원들의 관심이 적었던 이유도 있지만, 화성공장의 경우는 조합원동지들의 평균연령이 고령인 것도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지속적인 임금 및 단협 개선투쟁으로 정규직 전환을 위한 끝장투쟁보다는 점진적인 개선투쟁에 힘이 실린 것도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활동가들 내에서는 지속적으로 차별받는 비정규직 내의 비정규직 문제, 즉 식당과 청소노동자들의 차별, 2·3차 하청과 계약직노동자들을 노조 조합원으로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산발적인 투쟁이 있었습니다.

물론 금번 불파 판결의 의미는 유의미한 측면이 존재하고 현장에서도 파장이 없지 않습니다. 소송의 당사자를 비롯한 조합원들이 판결 결과의 의미를 현장에 알려내고 지부, 지회, 분회 차원의 투쟁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조합원들도 현대차 동지들의 투쟁이 이런 결과를 가지고 왔다는 점을 인식하고 집행부가 더욱 원칙적인 입장을 가지고 현대차 동지들과 연대해야 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었습니다.
 

현대차 비정규직울산지회에서는 판결 이후 노동조합 가입 문의가 급증했다고 합니다. 화성공장에서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어떠합니까?

먼저 지난 9월 판결 이후 화성 현장의 상황이 급변했던 것을 말씀드려야겠네요. 우선 기아차 사측은 현대와 마찬가지로 000명 특별채용의 형태로 불파 문제를 비껴가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교섭 자리에서 150명->200명->350명 순으로 선고 전까지 어떡해서든 현대와 같은 결과의 특별교섭 합의안을 도출하려 했습니다. 그리고는 00명 수준의 정규직 신규채용을 하면서 예년과는 다른 더 많은 수의 예비합격자를 뽑아놓고 합격자를 발표하지 않는 꼼수를 부렸고요. 사측 입장에서는 정규직 채용에 응한 노동자들을 투쟁에 나서지 않게 만들어 놓고 특별채용 카드로 노조와 합의안을 만들어서 불파 시비를 비껴나가려 한 것이지요.

여기에 노조의 대응이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당장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의 원년을 만들겠다면서 수 년 째 임단협 요구안에 올렸던 정규직화 요구에 예년처럼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여 왔으니 말입니다. 기만적인 특별채용 제시안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투쟁에 나서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교섭자리에서만 단호한 모습을 보이고는 투쟁 계획을 제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현대차 동지들의 선고에 이은 기아차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투쟁으로 만든 결과는 아니지만 기회가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응은 미흡하기만 했습니다. 공세적으로 선고 결과에 따른 전원 정규직화 제시안을 사측에게 요구하고 투쟁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교섭에만 매달렸습니다. 임단협 투쟁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기에 더더욱 시기상 호기로 볼 수 있지만 지부와 분회 집행부의 판단은 현장과 달랐던 모양입니다.
 

결국 합의서가 나오지 않았나요?

예. 기아차는 1사1조직이라 지부 임원과 3분회 분회장이 포함된 교섭단이 하청사장단과 교섭을 진행하는 데요, 결국 임단협이 마무리되기 일주일 전, 지부와 분회가 반노동자적인 합의서를 작성하고 말았습니다. 합의 주체마저도 개인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합의라고 인정했다던 합의였습니다. 아니, 사실 의미 없는 걸 넘어 지금까지 목숨 걸고 구속과 해고, 고소고발, 가압류에 굴하지 않고 투쟁했던 동지들을 배신한 합의였습니다. 대법원까지 불파소송을 끌고자하는 사측이 원하는 내용 그대로를 인정해준 합의였단 말입니다.

현장의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합의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하다가 활동가그룹들의 선전을 통해 그 실상을 알고서는 경악했었습니다. 많은 조합원들이 실망한 것 또한 사실이고요. 한 조합원의 말처럼 고생은 고생대로 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거기에 편승해서 아예 상을 뒤엎은 합의서였기에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판결 때문에 조합원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긴 한가 봅니다. 분회의 경우 이전 입장 보면 “전원 정규직화”라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는 척하면서도 이 투쟁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었는데

분회 집행부는 임단투 내내 사측에게 전원 정규직화 로드맵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었습니다. 이 말인즉 전원 정규직화 계획을 내놓고 이에 따른 순차적, 단계적 정규직화 제시안을 내라는 내용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조차 단순한 립써비스에 불과한 것이 이번 불파 합의서 내용에서 명확히 드러난 거죠. 판결 이후 딱 한번 조합원 공청회를 열어 소송을 확대하고 전원 정규직화 투쟁을 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이런 쓰레기 합의서를 쓴 거니까요.


하청분회에서 임단협 결과에 대해 부결선동을 한 건 왜 그런 거죠?

정규직 임단협 잠정합의 이후 몇 시간을 끌면서까지 분회 요구 내용을 더 수용해줄 것을 요구했었지만 정규직 임원이 무시하고 직권조인을 해 버린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다 들어줬는데도 마지막 순간 지부에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죠.


이런 분회의 행태에 대해 조합원들도 많이 실망했을듯한데?

현장에서는 분노와 허탈감 보다는 냉소와 조롱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지부와 분회가 한 몸이 되어서 그렇게 전국 비정규직 동지들을 배신하는 합의서를 써놓고서 이에 항의하며 합의서 폐기 교섭장 투쟁을 하는 활동가들을 일부의 난동으로 교섭조차 진행되지 못했다고 매도하고. 그래놓고는 결국 분회 교섭에서 지부에게 뒤통수 맞고는 부결 투쟁을 이야기하는 건 웃기는 짓이라고 조합원들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파 문제에 대한 분회의 태도에는 아무 변화가 없나요?

임단협 투쟁이 가결로 결정 난 이후인 지금까지 분회 집행부의 태도는 변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불파 선고에 따른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화 투쟁도, 현대차 동지들과의 연대를 통한 즉각적인 정규직 전환도 시도조차 되지 못하고, 불법파견 정규직전환과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의 원년은 말로만 덩그러니 남게 된 꼴이죠. 거기 더해 투쟁하는 동지들을 배신하고 사측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 적은 대법 결과에 따른다는 합의서가 남아있고요. 이렇게 해놓고 뻔뻔스럽게도 지난 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투쟁하는 비정규직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겠다고 말하다니 참 으로 공허할 뿐입니다.


사법부의 판단에 따라 부침이 심했던 과거로 봤을 때 불법파견 투쟁에 한계와 난점이 많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사내하청 운동의 주체로서 그동안 지켜보신 불파 투쟁 과정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불파 투쟁의 과정과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불파투쟁의 핵심 대오에 비껴있었던 화성과 개인적 상황에서 단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건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고 할 수만은 없고, 선고에 대한 무조건 환영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법원 결과에 따라 투쟁의 부침이 심한 법정투쟁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투쟁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금번 판결 또한 노동부나 검찰, 사측이 주장했던 것에 비해 확대된 내용이 있지만 그 안에서 소외된 하청노동자들, 조합원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식당과 청소, 경비 노동자들이 그들입니다. 이 속에서 소송의 확대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소송 당사자 만의 투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정규직 조합원들의 호응 또한 이끌어내지 못하겠지요. 우리가 비정규직 투쟁을 하면서 그렇게 욕했던, 차별에 둔감하고 자신들만의 이익에 갇혀있던 일부 정규직의 모습을 답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적 다툼으로 간다면 아예 파견법 적용조차 받지 않아 소송조차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런 노동자들까지 포괄해서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송을 투쟁의 매개 중 하나로 명확히 하고, 조합원들에게 법원의 판단은 자본에게 늘 유리했던 과거와 투쟁을 통해서만 조금이나마 유리해질 수 있다는 현실,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2심이나 대법원에서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다는 미래를 정확하게 공유한 가운데 조합원들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법정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망과 과제를 갖고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아에서는 활동가들 사이에 뭔가 준비되고 있는 계획이 있습니까?

상당기간 분회의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번 합의서 폐기투쟁을 경과하면서 정규직·비정규직 활동가 내에서 불파투쟁을 비롯한 정규직 전환투쟁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대되고 있으며 불파 소송을 비롯한 정규직 전환투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논의들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습니다. 현대차 동지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정규직 전환투쟁을 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불파투쟁을 거칠게나마 현장에서 평가해보고 투쟁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하는지에 대한 각자의 고민을 나누는 토론회 같은 거라도 열어서 거기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해주셨듯이 화성 분회에는 조합원들 중에서도 이번 판결이 적용되지 않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한다면 이 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식당과 청소 조합원들에게 이번 판결이 적용되지 않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측도 식당과 청소 조합원들에게는 선고 결과와 합의서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해당사항 없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더군요.

개인적인 고민으로는 불법파견을 비롯한 간접고용 노동자들 전반의 정규직화 투쟁을 고민하면서 접근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법조차 지키지 않고 십 여 년 간 통상임금을 떼먹고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착취해왔던 자본에게 이제는 우리가 당당히 간접고용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도 서비스, 청소, 간병, 설치기사, 보육, 학교 비정규직 등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대되고 있는 마당에 공장에서도 불법파견에만 갇히는 것이 아닌, 불파를 비롯한 공장 내 모든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것, 이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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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파견 판결 릴레이 인터뷰 (2) 현대자동차비정규직아산지회 송성훈 전지회장

8월 18일 합의 이후, 현대차비정규직 아산지회에서는 합의안에 반대하는 69명의 조합원들이 부결투쟁과 불복종 투쟁을 벌여왔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은 불법파견 판결 릴레이 인터뷰 두 번째로 아산지회 전지회장이자 8/18 합의안 불복종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송성훈 동지를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는 10월 23일 서면으로 이루어졌다. [사노신]



아산에서는 8/18 합의안 이후, 부결투쟁과 합의안 불복종 투쟁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 상황은 어떠합니까?

8/18 합의를 전후해서 비록 4명의 해고자 동지들뿐이었지만 합의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선동을 유인물로 시작했습니다. 합의 이전에 울산지회가 교섭장에서 퇴장한 이후부터 이 합의를 막기 위해 현장에 교섭내용을 알려내고, 교섭중단을 선동하는 등의 노력들을 했으나 결국 아산지회와 전주지회는 합의를 하고 말았습니다.

총회에서도 해고자 동지들을 중심으로 부결선동과 총회에서의 부결 투쟁을 진행했지만 결국 57.1%의 찬성으로 가결됐습니다. 이후 이 합의안에 반대한 조합원 중 69명의 조합원들이 신규채용을 거부하고 “8/18 신규채용 쓰레기안 직권조인 사태관련 대책 마련을 위한 조합원 모임”을 꾸려서 싸우고 있습니다. 비록 전체 조합원으로 보면 적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우리의 투쟁을 무로 돌리는 합의안을 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근투쟁, 영업소 1인 시위, 현장 유인물 배포 등을 진행하면서 현장 안팎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다시 현장을 추슬러 투쟁을 조직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수많은 곡절이 있었고 아직 끝난 투쟁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같은 성과를 얻긴 했지만 부작용도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8/18 합의안이 나오게 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8/18 합의까지 가게 된 원인은 “조합원 우선 정규직 전환”으로 요구를 바꾼 것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두고 투쟁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측이 제시한 3000여명 안에 ‘투쟁하는 조합원’이 한명도 빠짐없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측의 의도가 어떻든 조합원만 정규직이 되면 된다는, 조합원들만 정규직 전환이란 보상을 받으면 된다는 태도입니다. 

이는 결국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화’로 표현된 8대요구의 정신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계급적 전망을 버리자 고립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요구안의 후퇴는 계속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투쟁보다는 교섭에 더욱 목을 매게 되었고, 힘의 우위에서도 밀리고 투쟁의지나 전망마저 상실한 상황에서 대중의 정서는 현실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적이라는 것은 결국 교섭에서 회사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전망을 찾기를 포기하고 조합원들의 요구만을 받아 안겠다는 조합주의적 태도는 당장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에는 조합원들을 달랠 수 있는 성과만을 찾게 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눈앞의 성과만을 좇다보니 처음에는 조합원 전원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다수를 위해선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자기 조합원을 버리고, 불법파견의 문제의식은 온데간데없는 신규채용에 합의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울산지회는 판결 이후 노동조합 가입 문의가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산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아산에서는 울산과 달리 간간이 문의가 오는 정도입니다. 아마 아산의 경우에는 다수의 비조합원들이 한 번 지회에 가입했다 탈퇴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게다가 아산 현 집행부가 8/18합의를 한 당사자이다보니 비조합원 조직화에 신경을 쓰지도 않고 있고, 그러니 더더욱 현장에서 반응이 나오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에 지회에 가입했다 탈퇴했던 비조합원들과는 다르게 2차 업체 노동자들은 이번 판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다만 대중적인 조직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고 있다 보니 아직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지난 6월 사내하청노동자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의 조속한 판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사진 출처 : 금속노동자)

 

판결 이후 현 지회 집행부에 태도나 입장에 어떤 움직임이나 변화가 있나요?

8/18합의와 9월 18·19일 법원판결 이후, 10월 8일에 첫 입장이 나왔는데, 8/18 합의를 존중하며 이 합의에 근거해 조합원들의 신규채용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판결 여부와 상관없이 이전 입장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8/18 신규채용 쓰레기안 직권조인 사태관련 대책 마련을 위한 조합원 모임”의 동지들은 이번 판결로 큰 힘을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향후 어떻게 투쟁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십니까?

이번 판결이 실제로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조합원들에게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 힘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조합원들이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8/18 합의에 이르게 된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수동화라는 엄청난 장벽이 있었기에 아산지회와 전주지회의 집행부가 직권조인까지 저지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모임에서는 조합원들 모두가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방식을 포함하여 평조합원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가능할 때만이 8/18 합의안을 뒤엎고 현장에서의 전망을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대공장에서 사내하청은 이미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형태의 고용형태가 늘어날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이번 판결에서도 촉탁직은 배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식당과 시설 노동자들은 이 판결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산공장에 이 판결에 적용되지 않는 노동자들은 어느 정도 있고, 이들에 대한 고민은 어떠하십니까?

아산공장에서 이 판결이 적용되지 않는 노동자들은 식당, 청소, 경비 등의 노동자들은 대략 250여명이고, 그 외 촉탁직 노동자가 대략 200여명 정도 있는 걸로 파악됩니다. 우리가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 전환이라는 요구를 내걸었던 것은 단순히 그분들의 지지를 받기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조직하고 함께 싸우겠다는 결의를 담은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부족해서 그 이들을 조직하지 못했지만, 그들을 포기하는 순간 결국엔 조합원만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촉탁직의 경우, 현대차가 불법파견을 은폐하기 위한 꼼수로 만든 것입니다. 현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 누구는 정규직이고, 누구는 비정규직, 여기에 더해 촉탁직까지.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이를 용인하는 것은 우리의 투쟁을 포기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조건이지만 촉탁직을 조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계속해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번 판결의 파장은 간접고용 전반으로 번져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공장 뿐 아니라 다른 업종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 오랫동안 불파 정규직화 투쟁을 해온 주체로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많은 비정규직 사업장에서 현대차에서의 판결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관심이 판결 자체에 대한 관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판결을 만들어 낸 과정에 대한 관심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판결은 사법부의 아량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투쟁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많은 비정규단위에서 근로자지위 확인소송 등을 준비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번 판결은 지난 10년간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과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투쟁을 위해서 소송을 하고 그 결과를 얻은 것이지, 소송만을 바라보며 기다리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했으면 합니다. 소송만을 바라보는 순간 노동조합은 투쟁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결국엔 소송 또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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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파견 판결 릴레이 인터뷰 (1) 현대자동차비정규직울산지회 김성욱 지회장

지난 8월 18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이경훈 집행부와 비정규직아산·전주지회 집행부가 이른바 ‘사내하청관련 합의’를 체결했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포기하고 사측의 신규채용을 용인하는 내용의 이 합의는 울산지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으로 관철되었다. 이는 수 년 동안 연기되어온 판결을 또 다시 연기시키고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수작임에 뻔했다. 그러나 한 달 뒤 법원은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의 모든 공정에서 하청노동자의 사용이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9월 25일에는 불법파견 소송을 낸 기아자동차 하청노동자들에게도 동일한 판결이 내려졌다. 현대차에서 항소를 하고 노조탄압과 신규채용을 강행하는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이번 판결로 다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불붙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은 판결의 의미와 앞으로 전망에 대해 현대자동차비정규직 울산지회, 아산지회, 기아비정규직 동지들을 인터뷰했다. 모든 인터뷰는 서면으로 이루어졌다. [사노신]

 

자본은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먼저 승소 축하드립니다. 판결의 불법파견 범위가 예상보다 훨씬 확대된 것 같습니다. 이번 판결의 의미와 앞으로 미칠 영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회사는 최병승 동지의 대법원 판결은 ‘개인판결’이다 최병승은 특별한 경우고 현대자동차에는 ‘불법파견은 없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의장, 비의장, 간접부서, 2·3차 할 것 없이 하청노동자들은 모두 파견이다’라는 판결입니다. 즉, 현대차 공장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들은 모두가 정규직이라는 의미입니다. 조직되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할 것으로 보입니다. 



판결 이전의 상황에 대해 간략히 얘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회사는 선고 이전에 어떻게든 불법파견은 인정하지 않고 신규채용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우리 울산지회는 회사의 신규채용에 동의할 수 없다며 교섭결렬을 선언하고 교섭장에서 퇴장했습니다. 지회 조합원들은 노측 교섭단 회의장을 봉쇄하면서 이번 교섭에 관련 문제를 포함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고 노측 교섭단들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합의서에는 지회도 포함되는 내용으로 합의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울산지회에서도 합의안에 동의하고 소취하한 동지들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다른 지회들에 비해 조합원들의 동요가 적은 편으로 보입니다. 그 동력은 무엇이라고 평가하십니까?

우리가 그동안 요구해 온 것은 회사에 의해 정규직이 되는 신규채용이아니라 2010년 7월 22일 최병승 동지에 대한 판결로 법원도 인정한 정규직전환이었습니다. 수년간의 투쟁과 신규채용이라는 사측의 꼼수는 사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조합원들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판결 이후 노동조합 가입 문의가 급증했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가입을 받고 있지 않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계신가요?

노동조합 가입 문의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10월 13일부터 집단조직화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판결의 의미와 투쟁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간담회가 끝나는 24일부터 가입을 받을 것입니다. (이 인터뷰는 10월 20일에 이루어졌다. - 편집자)



최근 사측이 비정규직노조 임원들에 대해 출입 금지 등 탄압을 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고 계시나요?

13일부터 공장출입이 막혀서 임·상집과 해투위 동지들이 연좌농성을 진행했고 15일부터 사무실 까지는 출입이 풀렸습니다만, 아직 현장에는 못 들어가고 있습니다. 명백한 부당노동행위로 강력히 대응할 생각입니다. 

법원의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하던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판결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출처 : 매일노동뉴스)



판결 이후 이경훈 집행부의 태도는 변화한 게 있나요?

현대차지부의 입장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10월 21일 금속노조는 중집 자료를 통해 8/18 합의를 승인/인정한다고 밝혔다 - 편집자)



사측은 항소로 시간을 끌면서 신규채용을 계속 강행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어떤 투쟁계획을 잡고 계십니까?

판결이후 회사는 최종심 결과에 따라 조합원이든 아니든 소송여부와 상관없이 준용하겠다는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이미 대법원 최종심이 나와 있음에도 시간을 끌면서 최대한 많은 인원을 신규채용 하겠다는 것입니다. 13일부터 회사는 신규채용 모집공고를 현장에 붙였지만 현장의 비정규노동자들의 관심은 낮은 것 같습니다.



불법파견 투쟁은 수많은 곡절이 있었습니다. 이번 판결과 같은 성과를 얻긴 했지만 법률 판결에 대한 의존성, 조합원들의 분열 같은 한계와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기간 불법파견 투쟁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고 계십니까?

우리는 법원 판결에 의존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대법원 판결이 나와 있으니 법을 지키라고 한 것뿐입니다. CTS점거농성, 철탑농성, 노숙 농성 등을 진행했지만 회사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판결 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법원 판결은 우리의 투쟁이 정당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합원들이 힘들었고 지쳐서 신규채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동지들이 있기에 분열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향후 지회의 중요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고 계십니까?

투쟁을 위해서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단결해야합니다. 조직력 확대와 신규채용에 맞서 투쟁해야만 합니다.



대공장에서 사내하청은 이미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며, 다른 형태의 고용형태가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번 판결에서도 촉탁직은 배제되었고, 식당과 시설 노동자들도 이 판결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판결에 적용되지 않는 비정규직노동자들 규모는 어느 정도이고 이들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직접 생산 공정은 5000명 정도이고 청소·경비 노동자를 포함하면 훨씬 많은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불법파견이 확인된 공정의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투쟁을 진행하고, 촉탁직과 비생산 노동자들도 정규직 전환 가능 여부를 확인하여 정규직전환 혹은 직접계약 무기계약직 전환 등 투쟁을 모색할 것입니다. 



이번 판결의 파장은 간접고용 전반으로 번져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공장 뿐 아니라 다른 업종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 오랫동안 불파투쟁을 해온 주체로서 해 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십여 년의 투쟁으로 우리가 옳았음을 확인했듯이 침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자본은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규직입니다. 포기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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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노동자신문 연속 워크샵 #5

이번엔 기본소득입니다~
"맑스주의 논쟁의 열쇳말" 워크샵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


함께 읽을 글

* 한겨레21 제 1000호 [표지 이야기]
* 강남훈, '기본소득론 찬성 : 우리 앞에 다강오고 있는 기본소득'
* 보화, '패러다임 전환으로서 기본소득과 여성에 관한 시론'
* 곽노완, '여러 가지 기본소득과 21세기 변혁의 주체'. [진보평론] 45호
* 우승명, '기본소득노트 비판', [사회복지와 노동] 13호

- 참여하실 분들에게는 사전에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 문의 : 010-7647-7076/ sanosin.jinbo.net
- 9월 27일 토요일 늦은 5시 사노신 사무실 (5호선 영등포시장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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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 칼럼] 어용(御用)의 역습

* 7월 25일에 발행한 <focus>에 실린 기사입니다.


본래 어용(御用)이란 왕이 쓰는 물건을 이르던 말이다. 이것이 지금은 국어사전에 정의된 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부나 그 밖의 권력 기관에 영합하여 자주성 없이 행동함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다.

우리는 보통 이 단어를 어용학자, 어용노조 같은 형태로 쓰는데, 그러니 현대적 의미로는 정부나 자본이 그들의 이해를 위해 사용하는 자주성 없는 자들을 어용이라고 부른다. 원래 어용노조라고 하면 보통 한국노총을 의미했다. 해방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맞서 우익인사들이 조직한 대한노총은 1960년 한국노총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 80년대까지 군사독재 동안 그 외의 모든 독립적인 노조가 불법화된 상황에서 오직 정부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가짜노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근본적으로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에 맞서며 등장했다. 한국노총을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을 건설할 것인가는 민주노조운동 초기 주요한 논쟁지점의 하나였다. 대다수 전투적 노동자들은 한국노총은 타도의 대상이지 활용의 대상이 아님을 명확히 했고, 자주적이고 계급적이며 민주적인 새로운 노조운동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주노총의 주요 미조직 사업장 목록에는 한국노총 사업장이 명시되어 있었다.

마지못해 끌려 들어온 한국노총 개혁론자들은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노사협조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사실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은 분명 차이가 있는 개념이다. 한국 노동운동에서 어용은 사측의 사주를 받아 그들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세력을 가리키고 노사협조주의는 투쟁을 회피하고 실리적인 이익을 따지는 세력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갈수록 어용과 노사협조주의의 구별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민주노총의 일부 상급단체들조차 이제 노사협조주의를 넘어 점차 어용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자본도 아닌 민주노총 회계감사직에 있는 사람의 고발 때문에 조합비 횡령혐의로 강종숙 전(前) 학습지노조 위원장의 체포영장이 집행되었다. 작년 초부터 계속된 재능교육지부 분열로 벌어진 참사다. 겉으로 보기엔 한 개인의 일그러진 공명심이 낳은 독단적인 행위에 의한 사건으로 보이지만 전후사를 잘 따져보면 개인의 돌출행위만으로 볼 수 없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고소 → 징계발의 → 체포영장 집행 → 단체협약 조인 → 제명으로 이어지는 각본처럼 착착 진행된 과정을 볼 때, 과연 우연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작년 8월 26일 사측과 합의 이후 이른바 현(現) 재능교육지부 집행부는 투쟁하는 조합원들의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사전에 집회신고를 내는 등 사실상 사측을 대리해서 행동해 왔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는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이 있었다. 이런 일은 재능지부만의 일이 아니다. 스타케미칼, 보건복지정보개발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모두 사측의 회유에 넘어간 다수의 조합원들이 지도부를 엎고 사측을 대신해서 방해가 되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조용히 투쟁을 접는 것을 넘어 다수를 이용해 집행부를 장악하고 투쟁하는 조합원들에게 징계·제명요구를 하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서비스연맹은 학습지노조를 통해 투쟁하는 3인의 조합원을 제명했다. 스타케미칼의 경우도 금속노조 구미지부가 어용 집행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제명했다. 보건복지정보개발원분회의 상급단체인 서울일반노조도 투쟁하는 동지들에 대한 징계 안을 올린 바 있다.

이런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조합원들을 보호해야 할 상급단체들은 묵인과 방조를 넘어 심지어 공모와 배후 조종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노동조합 관료와 개량주의 세력에 대한 자본의 요구는 가면 갈수록 심해져서 결국은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위한 정치경찰이 되어라”고 요구한다고 경고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바로 그런 현상이다. 정부와 자본은 노사협조주의자에게 노골적인 어용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이른바 민주노총의 상급단체들이 어용적인 작태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태에 대해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다수의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어정쩡하게 방관하고 있다. 어용에 맞선 투쟁이 민주노조운동의 근원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7월 25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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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공동체 내 성폭력사건 해결, 어떤 변화를 꿈꿀 것인가?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07/31 19:30
  • 수정일
    2014/07/31 19:3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최근 들어 운동사회 내에서 성폭력 사건들이 제기되고 해결되는 양상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운동사회 성폭력 사건 100인위원회의 문제제기 이후, 다양한 성폭력 사건들이 있었고, ‘해결’되었다고 할 만한 사건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해자, 혹은 2차가해자가 적극적으로 명예훼손 관련 소송을 제기하거나, 피해자를 지지하는 운동단위 사무실 앞에서 농성을 하는 등, 적극적인 반발이 감지되고 있다.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에서 원칙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은 현실에서 가해자들의 적극적 반발로 더 이상 효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반감이 전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것은 2011년 서울대에서 성폭력이라고 제기된 사건이 온라인과 언론매체를 타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이는 2013년, 9월 말 이뤄진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칙의 개정의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2011년, 서울대의 한 여학생이 이별을 통보하던 같은 학교 남학생의 줄담배를 포함한 여타의 태도를 성폭력으로 규정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 해결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로 인해 사건 제소를 받은 사회대 학생회장이 사퇴하는 일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언론은 이 사건을 기존 반성폭력 운동, 페미니즘의 문제로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제기했던 여성은 언론의 직격타를 맞았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그 당시의 일을 검색해보면, ‘담배 핀 것이 왜 성폭력인가’라는 식의 문제제기, 피해자에 대한 비난, 더 나아가서 피해자의 권력화에 대해 규탄하는 글과 댓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이 사건의 공론화를 위해 열렸던 토론회 자리에서도 주요 쟁점은 담배 핀 것이 성폭력인지 아닌지, 피해자의 ‘대항폭력’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로 한정되었다. 즉, 성폭력의 범위, 피해자 중심주의의 유효성 여부, 피해자 권력화에 대한 공론화만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토론회 자료집에서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도대체 왜 피해자가 이 상황을 ‘사건’으로 제기하고 싶었는지, 왜 피해자는 그 상황이 폭력적이라고 느꼈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사건이 제기되었을 때 가장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했던 것 중 하나는 무엇이 피해자로 하여금 이를 폭력적이라고 느끼게 했는지, 그리고 그 폭력의 내용이 공동체의 일상적 문화, 관계 맺기 방식에 기인하는 건 아닌지 성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반성폭력 운동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내부의 공론화는 물론이고, 사건을 제기한 당사자의 목소리가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2013년 9월 말, 개정된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칙(이하 ‘개정회칙’)은 위와 같은 사건해결과정을 거치면서 기존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소위 성폭력 사건 해결의 원칙, 성폭력 개념틀을 부정하며 ‘객관적’ 기준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객관성 확보로 귀결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
 

대학 내 여성주의자들의 반성폭력 운동, 운동사회 내 여성 활동가들의 성폭력 사건 문제제기가 있은 지 10년이 지났다. 이러한 운동들은 학내에서 학칙 개정 운동, 학생회 회칙 및 각종 운동단체의 반성폭력 규약 제정 등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규정된 ‘성폭력’은 기존의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칙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성차에 기반한 편견을 재생산하는 언행도 포함하는 것이었고, 이는 기존의 가부장적인 공동체 문화에 대한 급진적인 문제제기 방식이었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만들어진 반성폭력 학생회칙, 혹은 각 사회단체 내 규약들은 성폭력 사건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접근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매뉴얼과 같은 성격을 띠었다.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 가해와 같은 개념들은 그러한 운동과정에서 가부장적인 반발에 대항하기 위한 개념들이었다. 

그러나 이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 이후, 각 학교에는 양성평등센터, 인권센터와 같은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학교 기관들이 생겨났고, 대학 내에서 자치활동의 쇠락과 함께 공동체 내에서 성폭력 사건을 제기하고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 되었다. 학내에서 성폭력 사건을 제기하면서 공동체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졌다. 이는 대학 내에서 반성폭력 규약의 내용과 필요성에 대한 고민이 일정정도 단절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에 2000년대 후반 이후, 과반 내에서는 반성폭력 학생회칙에 대한 공유를 찾아볼 수 없거나, 반성폭력 학생회칙이 각종 과반 학생회 행사에서 공유된다고 하더라도 학생회 구성원들 중에도 예전부터 전해내려 오기에 공유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을 가해자 취급하는’ 불쾌한 무언가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반성폭력 운동을 하던 여성주의자들 역시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진행하기도 했다. 피해자중심주의가 피해자의 말을 기계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만 여겨지면서 더 이상 공동체 내 변화를 추동하지 못하게 되는 지점, 오히려 피해자가 공동체 내에서 고립되고 떠나게 되는 현실, 대책위 중심의 획일적인 사건화 방식이 오히려 다양한 해결방식을 고민하지 못하게 하는 지점에 대한 구체적 현실에 대한 고민들이 존재했다. 

이번의 회칙 개정은 그간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해서 반성폭력 운동 내․외부의 비판적 평가가 이루어지는 와중에 등장했으며, 일견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적 평가를 반영한 것이었다. 개정된 회칙은 기존의 성폭력 사건해결과정에서 공동체의 역할이 부재하고, 가해자-피해자의 갈등구도로만 여겨졌다는 점, 대책위 중심의 획일적 사건 해결방식 등을 지적하는 등, 기존 반성폭력 운동의 유의미한 한계점을 포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정 회칙은 무엇보다도 ‘피해자중심주의’의 주관성을 핵심적으로 비판하며 성폭력 판단 기준에 객관성을 다시 도입하는 것으로 기존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객관적 판단을 위해 성별권력관계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삭제하고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로 성폭력을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개정회칙은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진지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사건 해결을 바라보는 시각,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반발과 객관적 판단 기준 강조로의 회귀 등에 있어 최근 보이는 성폭력 사건 제기에 대한 반발과 유사한 논리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가부장적 공동체 문화 비판에서, 개인의 인권보호로
 

서울대 사회대의 개정된 학생회칙은 기존의 반성폭력 학생회칙에 비해 성폭력의 범위를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성폭력이 성차별적인 언동을 포괄하게 되면서, 지나치게 범위가 넓어졌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또한 피해자 중심주의를 대체하는 것으로서의 ‘공동체의 합의’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공동체의 합의’는 감정적인 피해자의 주관이 아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해자의 인권과 관련된 부분이 추가되어 있어, 피해자와 가해자의 인권을 모두 보장해야 한다는 관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구도만 보자면, 개정회칙은 이전의 사건해결매뉴얼과 같은 형식에 비해서 국가의 법제도적 틀과 유사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판사의 판결을 ‘공동체의 합의’라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정회칙은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여성운동의 문제의식을 일부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지점도 일부 있으나 결국 기존의 반성폭력 회칙에 비해 운동성을 탈각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반성폭력 회칙이 기존의 가부장적 공동체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의 성격을 강하게 지녔던 것에 반해, 개정회칙은 개인적 권리의 충돌과 그것을 조율할 수 있는 합리적인 공동체의 합의를 전제하고 있다. 이는 성적자기결정권을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점, 공동체의 합의가 객관적이며, 그것을 통해 피해자의 문제제기를 재단하려고 한다는 점, 동등한 권리와 권리의 충돌로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 등을 통해 드러난다. 

기존의 회칙은 공동체의 변화라는 운동의 목적과 회칙이라는 수단을 밀접히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여 사건제기자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원칙들을 설정했다. 이에 반해 개정회칙은 분명 공동체 문화의 변화를 회칙의 목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적이고 객관적 기준만이 강조되는 회칙 구성 속에서 그러한 목적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개정회칙이 피해자중심주의가 오히려 공동체 내 논의를 막고 있음을 지적하며, ‘피해자의 주관’ 대신 공동체적 합의를 주장하지만, 피해자의 감정과 주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어떠한 수단과 관점도 없이 이뤄지는 공동체적 합의는 어떤 것인가. 기존의 인식을 답습하는 그러한 합의는 아닌가? 

개정회칙의 서두에서는 분명히 ‘성차별주의적인 문화’가 문제이며 이를 변화시켜나가려고 한다고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보았을 때에는 일탈적 상황으로서의 성폭력과 ‘정상성’의 회복으로서의 성폭력 사건 해결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것이다.1)

 

‘성적자기결정권’의 축소
 

개정된 회칙은 기본적으로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로서 성폭력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침해 여부야말로, 성폭력 사건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성적자기결정권’이란 “자신의 성적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고 구성해나갈 권리”로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이는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는 성폭력을 법적으로 규정하는 기본적인 기준이 되기도 했다. 또한 반성폭력 운동 내에서도 성폭력을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로 제기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개정회칙은 기존의 회칙이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를 너무나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어, 결국 그 판단이 피해자의 주관에 맡겨졌다고 본다. 이에 따라 개정회칙은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를 더욱 협소하게 정의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기존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보다는, 그 이전으로 후퇴하는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반성폭력회칙은 ‘성적 자율권’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으나, 성폭력으로 규정될 수 있는 행위의 범위를 “상대방의 의지에 반하거나 의지와 관계없는, 성적이거나 성차에 기반을 둔 행위를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기존 회칙 2조)”고 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성, 여성성을 강요하고, 구분하는 행위까지도 문제시하고자 했다. 단순히 동의, 합의 없는 성적 언행뿐만 아니라, 성별에 따른 편견을 재생산하는 행위도, 성폭력으로 제기함으로써 문제시하려 한 것이다. 즉, 사소화 되는 기존의 가부장적 공동체 문화에 대해 경종을 울리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성적자기결정권과 같이 일견 자유주의적으로 보이는 용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평등한 개인의 자유로운 합의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존의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식에 문제제기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성폭력이라는 용어를 포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다양한 가부장적 문화를 문제제기하려던 것이 효과적인 방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동안 가시화되지 않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사용했던 ‘폭력’이라는 명명은 한편으로는 연속적으로 경험되던 다양한 성차별적, 위계적, 폭력적 경험을 ‘성폭력’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을 낳았고, 이는 공동체 구성원 간 다양한 위계와 차별을 문제제기하는 것보다는 ‘성폭력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갖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개정회칙은 위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성폭력 개념을 축소시킨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을 보았을 때, 성폭력을 개인의 동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개정회칙에 대한 설명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개정회칙에서는 명시적 동의 여부가 문제시 되었을 때, 그 대안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폭력을 저지를 위험을 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성적 언동이든 하기 전에 상대의 의사를 명시적으로 확인하는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건의 성격을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하게 실효성 있는 방법이라고 하고 있다.2) 

즉, 개정회칙은 성폭력의 문제를 동의 여부로 축소시키고 있으며, 이때 사건은 그러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의미화 되며 사건의 해결은 기존에 존재했던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를 회복하는 과정으로 의미화 되기 쉽다. 이러한 관점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동일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는 구조적 억압을 보이지 않게 하는 자유주의적인 분석틀로써, 기존의 성별과 관련된 통념과 가부장적 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는,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만이 부각되는 것으로 이어지기 쉽다.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기존의 회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법제도적 합리화가 아니다. 성폭력 사건 제기가 공동체의 문화 변화를 위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성적인 언동의 내용이 어떤 인식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러한 경험이 피해로 인식되는가에 대해 문제제기가 필요하며, 이는 개인의 침해된 권리에 대한 구제가 아니라, 성별과 성적 지향, 성적 행동의 규칙 등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도전하는 과정이다.



객관성에 대한 강조
 

개정 학생회칙의 저변에는 ‘객관성’에 대해 강조가 깔려있다. 이는 기존의 ‘피해자중심주의’에 입각한 사건 해결이 가해자에게 사실관계의 확인도 거치지 않고, 소명기회도 주지 않는, ‘피해자제멋대로주의’로 이해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 개정회칙에서는 성적자기결정권 침해 여부가 객관적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존재한다면 물증에 기반하여, 아니라면 진술의 일관성과 타당성에 기반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피해자의 평소 언행, 행실은 그 증거가 될 수 없음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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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각자가 기억하는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필요하다. 지금까지 ‘피해자중심주의’에 입각하더라도 사실관계의 확인은 언제나 요구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각자가 이야기하는 서사가 다를 때, 특히 동의 여부와 관련하여 서사가 다를 때 문제가 되어왔다. 이때 물증은 주로 피해자가 사건 이후에 보인 태도, 문자 등등이 되어왔다. 문제는 같은 피해자의 행동에 대해서도 그에 따른 해석이 다르다는 점이다. 피해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형화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빠져나오는 피해자도 존재하며, 빨리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협상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때 물증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객관성이란 것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피해자중심주의는 이렇게 다른 해석들 속에서 여성과 소수자의 관점에서 해석해봄으로써, 기존의 지배적인 해석방식에 균열을 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객관성에 대한 회귀로 해결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존의 통념을 몇몇 개 나열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쓴다고 해서, 객관성이 확보된다고 하기에는 우리 스스로의 시각도 가부장적 프레임에 갇혀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존의 피해자중심주의가 피해자의 진술을 형식적으로 ‘진실’로 승인하고, 수동적으로 ‘피해자의 요구’만을 적용하는 것이 문제였을 수 있다. 정작, 사건에서 드러나고 있는 공동체의 차별적 문화에 대한 고민은 하지도 않은 채, 수동적 수용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성이라는 잣대로 피해자의 문제제기를 재단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피해자의 감정과 문제제기 지점에 대해서 함께 공동체와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고, 피해자의 문제의식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감정적인 피해자와 객관적인 공동체?
 

객관성에 대한 강조는, 이후 조항들에서 피해자와 공동체의 관계를 ‘감정’, ‘직관’과 ‘객관’, ‘합리성’의 구도로 대비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회칙 개정의 이유를 서술하거나, 각 조항 해설에서는 기존의 성폭력 사건의 기준이 피해자의 ‘감정’ 혹은 ‘주장’이었던 것에 반해, 개정회칙은 ‘맥락과 상황을 고려한 객관적 기준’을 제시할 것임을 거듭 주장하고 있다.4) 

이는 개정회칙이 기존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사건해결과정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반영하는 것이다. 개정회칙에서는 피해자는 감정적이고, 합리성을 상실한 사람이기에 성폭력 사건 판단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합리적 공동체의 객관적 판단이 요구된다고 보고 있다. 또한 개정회칙은 기존의 성폭력 사건 해결과정이 ‘피해자의 감정’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처럼 삼았다고 간주한다. 이는 ‘피해를 호소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든 자의적 사유로 누군가를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고 재단할 권력을 쥐어주는’ 피해자중심주의를 통해 뒷받침되어 왔다고 본다. 

물론 피해자중심주의가 정말 피해자의 ‘감정’만을 중심으로, ‘피해를 호소하기만 하면’ 권력을 부여하는 그러한 개념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아야겠지만, 개정회칙이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는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피해자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공동체의 구도를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공동체가 합리적이고 객관적 판단을 담보할 수 있는지, 혹은 피해자를 합리성에 대비되는 감정적 주체로 설정하는 것은 타당한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개정회칙에서 공동체의 합의는 피해자 문제제기의 타당성을 규정하는 기준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의 합의는 ‘감정적’인 피해자와는 달리 합리성을 담보하는 확고한 기준인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 내부에는 권력관계와 위계, 정상성과 비정상성으로 나뉘는 다양한 관계가 존재한다. 사실상 ‘공동체적 합의’는 중립적인 과정이 아니라 상당히 당파적이며, 서로의 이해가 맞부딪히는 장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개정회칙은 공동체적 합의의 객관성에 대한 신뢰 뿐 아니라 피해자의 감정에 대해서, 합리성을 결여한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피해자의 감정은 공동체적 합의에 의해 판단되고 재단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특정한 감정을 느끼는 데에는 맥락이 존재하며, 그러한 감정의 존재 자체가 무엇인가 부당함이 있다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집회현장에서 느껴지는 분노의 감정은, 비이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저항의 원동력으로 의미부여 되지 않는가? 오히려 우리가 놓친 것은 피해자가 어떠한 맥락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설명해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설명해나가려는 노력 속에서 사건, 혹은 상황에 대한 명명과 해결방안이 도출될 수 있다. 

운동 사회 내에서 다양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제나 공동체 내에서는 서로 다른 해석과 경험이 충돌했고 각각의 해석이 서로 설득력을 얻기 위해 토론하고 논쟁하는 과정이 존재했다. 사건의 내용이 기존의 성폭력에 대한 통념에 맞아떨어져, 쉽게 가해자를 규탄하는 경우로 끝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피해자의 문제제기는 기존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불평등한 관계를 가시화하는 역할을 해왔기에 공동체 내 다양한 의견들의 충돌과 투쟁은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공동체적 합의’를 통해 피해자의 문제제기를 재단한다면 많은 경우, 새로운 공동체적 합의가 형성된다기보다는 기존의 인식 내에서 사건은 재단되고 마무리될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는 적정한 선에서의 양비론(피해자도 잘못했고, 가해자도 잘못했다.)이나 ‘감정적’인 피해자의 무리한 요구라는 비난이 객관성으로 포장될 우려가 더욱 커 보인다. 공동체적 합의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객관성과 합리성을 담보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합의 도출 과정에서 공동체 성원들이 다양한 억압과 차별에 민감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로의 회귀
 

서울대 회칙 개정은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개정회칙에서 문제시한 피해자중심주의, 넓은 범위의 성폭력 개념 정의 등은 여러 여성학자들로부터 문제제기 되었던 개념이기도 하다. 피해자중심주의가 단순히 피해자의 서사를 승인하고 형식적인 사건 처리의 과정으로 여겨지는 상황, 이에 따라 공동체적 책임은 부재하고, 피해자에게 모든 사건 해결의 부담이 떠맡겨지는 상황 등은 분명히 새로운 접근을 요청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정회칙은 그 대안을 오히려 자유주의적 관점으로 후퇴하는 것에서 찾았다. 공동체 내에서 사건이 제기된다는 것은 기존의 공동체 내에서 허용되던, 혹은 권장되던 특정 행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은 공동체 내에서 허용되는 행위의 기준, 특정 행위의 의미에 대한 여성주의적 해석을 확산시키기 위한 ‘의미 투쟁’을 해왔다. 그러나 개정회칙에서 공동체적 합의는 성폭력 사건 제기라는 ‘의미투쟁’의 결과로서 제시되기보다는 피해자의 문제제기를 재단하는 기준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또한 일면 유의미한 시도일 수 있는 성폭력 범위 축소는 객관성으로의 회귀와 함께, 형식적 동의의 문제로만 한정되어 버렸다. 동의 여부만이 문제시되어서야 다양한 언어와 방식으로 공동체 내 성차별과 가부장성을 드러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무리 성폭력의 문제를 공동체 전체의 문제이며, 성차별적 문화의 문제라고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회칙의 내용이 그러한 관점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자유주의적 문제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개정된 회칙이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란, 서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이들이 ‘명시적 동의’에 따른 성적 행동을 하는 ‘합리적’ 공동체에서 타인의 ‘권리’를 상대방의 ‘명시적 동의’없이 침해한 ‘예외적’ 사건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동의’와 ‘권리’의 정치 속에서 관계 속의 권력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라져버린 듯하다. 그렇다면 일상적 공동체 문화 속의 권력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상실한 반성폭력 학생회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는 현재 공동체 문화 속의 불평등과 차별에 문제제기하는 운동성이 탈각된 것이자, 반성폭력운동이 극복하려고 했던 ‘자유주의적 관점’을 재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지원 jeewon@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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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정 학생회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폭력 사건을 남성 대 여성, 가해자 대 피해자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참여를 요구하는 문제로,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양자간의 투쟁에서 후자에 힘을 실어주는 것에서 공동체의 정의와 신뢰를 지키는 것으로 재정의한다는 점입니다. 기존 학생회칙의 문제들은 많은 부분 성폭력을 공동체의 문제로 바라본다는 언명과 달리 문제를 남성 대 여성의 구도로 치환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민주적인 토론과 참여를 배제하기 쉬운 대책위원회 모델을 획일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3학생회칙개정 QnA’에서 인용.

강조는 인용자. 물론 위의 강조부분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자만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녹아있는 것일 수 있으며, 이는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양자 간의 투쟁’, ‘남성 대 여성의 구도에 대한 대안이 공동체의 정의와 신뢰라는 것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여성과 남성 간의 권력관계를 가시화시켜왔던 성폭력 사건 제기에서 여성과 남성의 구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제시된 정의와 신뢰라는 말은 앞뒤의 개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이 강조되는 맥락 속에서 여남 상관없는 각 개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를 문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때, 각 구성원 간의 권력관계(가부장성,이성애중심주의 등)는 어떻게 문제시되는지 알기 어렵다.
 

   2) 사회대학생회 반성폭력학생회칙(최종개정 2013.9.27.) 5조 항의 해설참고
 

3) 개정 학생회칙은 기준의 객관성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기존 학생회칙은 사회 통념에 입각한 객관성은 왜곡되어 있으며 성폭력 사건의 규정은 너무나 맥락적이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고 지적하며 피해자의 주관을 그 대안으로 삼고 있으나,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가릴 수 없다면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정된 학생회칙은 왜곡된, 획일적인 객관성의 대안으로 주관성이 아니라 구체적 맥락과 상황을 고려한, 그리고 평등하고 진전된 인권 개념에 근거한, 수정된 객관성을 원칙적인 준거로 삼습니다.-‘2013 학생회칙 개정 QnA’ 인용

4) 이는 개정회칙의 5 2항에 대한 해설부분에 잘 드러나 있다. 개정회칙에서는 이 회칙은 피해자의 진술과 해석, 의사를 우선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처를 주는 행동 폭력은 같지 않으며, 폭력에 관한 규약들이 보호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권리이다. 피해자의 감정을 기준으로 삼는 관점은 여성 또는 피해자의 직관이 언제나 올바르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한 것으로, 이에 기반한 정책은 피해를 호소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든 자의적 사유로 누군가를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고 재단할 권력을 쥐어주는 명백히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결과를 낳는다.”라고 하여 피해자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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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청와대 만민공동회를 묻는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07/31 19:19
  • 수정일
    2014/07/31 19:2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사진 출처 : Newsis

 

6월 10일 청와대 만인대회 일정이 있고 나서 며칠 후, 청와대 만민공동회를 기획하고 제안한 활동가 중 한명인 오진호 동지를 만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운동 전반과 만민공동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바쁜 일정 중에 시간을 쪼개어 인터뷰에 응해준 오진호 동지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사노신]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묻고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외치는 운동이 여러 차원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분위기가 고양되는 시기는 지나간 것 같다. 그 운동의 한 축이었던 만민공동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어떤 취지에서 만민공동회를 제안하게 되었는가?
 

4월 16일에 사고가 났고 4월 28일 즘에 시민사회단체들의 모임이 있었다. 시민단체부터 사회주의 조직까지 굉장히 폭넓게 모이는 자리였다. 여기서 대책기구를 꾸리는 논의가 되었지만 분노를 모아가는 흐름으로 제안되는 것 같지 않았다. 추모와 애도는 있으나 운동적 흐름으로, 광장에서의 싸움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흐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청와대 만민공동회>를 제안했다.
 

이를 각 개인의 공동제안으로 성사되는 만민공동회로 기획한 이유는 무엇인가? 

특정 단체를 중심으로 제안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보다 분노하는 사람들이 경계 없이 모일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제안을 통해서 힘 있게 싸우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제안자들을 모아내는 방식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분노를 모아내는 것이었다. 그 그릇이 어떤 방식이어야겠냐는 점에서 모인 사람들이 토론을 통해서 기조를 결정하고 투쟁의 방식을 결정하는 대중총회 방식이 적절하다고 봤다. 특정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동의 결정과 공동의 투쟁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지향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안을 받은 사람들이 ‘청와대에 분노를 표하는 공간이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과는 어떤가.
 

4월 29일 밤부터 제안서가 돌기 시작해서 5월 6일 밤까지 제안자를 모았다. 그 때 1,200명이 모였다.(5월 18일 기준 총 제안자는 1,901명이다.) 첫 청와대 만민공동회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8일에 열었다. 집회신고를 청와대 인근 3군데에 냈는데 모두 불허되어 정부종합청사에서 하게 됐다. 이 날 세월호 참사에 대해 못 다한 이야기, 앞으로의 투쟁방향, 당일 투쟁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아르바이트라 불리는 노동자, 이주민들도 함께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 모든 문제를 박근혜 퇴진으로 귀결시키지 말자는 이야기, 지금 당장 청와대로 가자는 이야기 등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날 청와대로 행진했고 마침 실종자 및 생존자의 가족들이 KBS와 청와대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로 오면서 함께 1박 2일 청운동 사무소 앞을 지키게 되었다. 두 번째 만민공동회는 5월 18일이었는데, 역시나 열 군데의 집회신고가 모두 불허되어 청계광장에서 진행하고 광화문 앞으로 이동해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처음 두 차례까지는 취지대로 열렸지만 이 이후에는 양상이 달라졌던 것 같다. 점차 세월호 참사 전반에 대한 논의보다는 투쟁 전술 중심으로 이동하는 흐름이었다.
 

만민공동회에 온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굉장히 다양했다. 횃불시민연대 등 대선 결과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 개별적으로 참여한 투쟁하는 노동자들, 데모당, 시민사회단체에서 개인적으로 참가한 사람들 등등. 이들이 함께 5월 8일 만민공동회에서 박근혜 퇴진 기조를 결정했기 때문에 다음 단계는 투쟁을 벌여나가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한 논의가 필요한 건데, 예를 들어 박근혜를 고발하자는 등의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이를 만민공동회에서 추진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소송의 내용이나 방향 등 구체적인 건 정해지지 않았던 건데, 이걸 가지고 만민공동회를 다시 여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면서 전술 중심으로 사고된 것이 중반 넘어서는 있었다. 특히 18일 지나면서 그랬다. 그 이후에는 민주노총이 투쟁 계획을 내면서 함께 하는 양상이 됐다. 

5월 30일에 만민공동회를 열었는데 결정사항은 4개 분임조로 나눠 기자 회견을 진행하자, 5월 31일 집회참가자들에게 KT 앞에서 모이자고 얘기하고 함께 싸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5월 31일에 모여서 6월 10일 만인대회 제안하자고 결정했다. 6.10 만인대회 역시 시민들 이름을 받아서 61곳에 집회 신고를 했는데 모두 불허됐다. 당일 사전행사로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 기도회, 만민공동회가 잡혔지만 만민공동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진행하지 못했다. 결국 삼청동사무소 앞에서 그렇게 투쟁하게 되었다. 특히 이날 투쟁을 주도한 대학생 동지들이 뻔한 집회의 뻔한 싸움이 아니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준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만민공동회에서 다뤘던 내용은 세월호 참사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후 투쟁방향에 대한 것, 그리고 단기적인 투쟁계획에 대한 논의로 나뉘었던 것 같다. 만민공동회가 이후 전술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건 단기적인 투쟁전술 이외에 만민공동회라는 형식으로 이끌고 가기엔 어렵다는 걸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대책본부를 만들자는 의견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에서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해 대부분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의욕만가지고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박근혜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과 퇴진운동만을 위한 기구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박근혜 퇴진을 함께 외치고 있어도 의미하는 바는 모두 달랐다고 본다. 어디까지 같이 할 수 있을까를 조율하는 과정이 있었다. 만민공동회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사람들을 계속해서 모으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사진 출처 : 노동과 세계


만민공동회뿐만 아니라 다른 운동적 흐름도 존재했으나 각자 따로 이루어진 측면이 있어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다.
 

세월호 국면에서 운동단체들의 대응은 전반적으로 산만했다고 생각한다. 만민공동회는 산만한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 운동을 끌어가는 한 축으로 역할하고 싶었던 건데, 18일 이후에는 혼란스러운 그룹 중에 하나가 된 것 같다. 예상한 것과는 꽤 다른 힘들이 모였다고 생각한다. 참여를 예상했던 조직들이 자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모이지 않게 됐다. 조직된 운동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나 자기가 속한 조직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실천적 흐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여러 조직들이 하는 사업 중에 하나로 여겨지지 않고 폭넓게 광장에 모일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물론 준비를 더 꼼꼼히 했다면 더 많은 쟁점들이 운동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박근혜 퇴진이라는 죽은 단어에 많이 쏠린 측면이 있다. 정치적 책임을 묻는 첫 정치집회를 연 곳이자 청와대로 가는 실천적 투쟁체로 여겨진 것 같다.


광장으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제의식을 운동적 흐름으로 직접 만들어가는 고민은 오히려 국민대책위가 적극적으로 했어야 한 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오던 대규모 집회의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청와대로 가느냐 마느냐가 정치의 급진성을 분별하는 지점인 듯이 여겨지는 기이한 구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 구분선이 생긴 건 만민공동회가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술적인 고민이 있었다. 수백 명이 모이는 규모인 건데, 예를 들어 광화문 사거리를 점거하는 방식이 적절하지도 않은 것 아닌가. 어떤 싸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냐. 정부가 이 사태의 책임을 지라는 의미에서 청와대로 가는 투쟁을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었다. 종로에서 점거하기도 하고 상황은 다양했다


그런 흐름 속에 세월호 참사가 점차 대다수에게는 ‘기억해야할 것’으로 여겨진 반면, 일부에게는 보장되지 않는 집회시위와 표현의 자유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구조적 원인은 굳건하고 여기에 균열을 낼 어떤 운동방향이 구체적으로 제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운동진영의 대응 전반에 대한 평가에 해당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만민공동회가 만드는 흐름을 두고 운동단위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냐, 무겁게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냐, 대중의 눈높이를 맞춰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운동단체들은 자신들이 뭔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경향이 강했다. 이런 고민이 전반적으로 유족들의 반응을 따라다니는 흐름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나는 오히려 세월호 참사를 마주하며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어떻게 싸워야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점 운동단체나 운동의 힘이 노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거대한 조직으로 움직이다 되다보니 고민하고 논의하고 결정하는데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둔해졌다. 확실히 움직이는 양상을 보면 개인들과 단체들은 운동을 어쨌든 2000년대 후반 이후에 만들어진 흐름과는 다르다. 가만히 있으라, 데모당, 횃불시민 등의 단위들이 움직이는 방식과 기존의 시민사회단체나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단체의 대응이 사뭇 달랐다. 누가 역동적으로 싸움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갈린 것 같다. 이건 단지 나이나 기획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달리지는 흐름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후 만민공동회 활동방향은 어떨 것 같나.
 

외줄을 걷는 느낌으로 시작했다. 제안이 황금연휴에 이루어져 누구도 이게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름 있는 단체가 제안한 것도 아니고 제안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막 몰려들었다. 제안을 받는 것 자체가 운동적 힘을 지닌 때였다. 이 힘을 어떻게 더 확대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했어야 한다. 지역별 만민공동회를 진행한다거나... 어쨌든 실질적으로 참가자들이 사이에 차이가 많은 상황에서 한계가 있지만, 다른 운동으로 어떻게 확대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다만 만민공동회와 만인대회를 하면서 남긴 성과는 청와대 앞에서는 집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행자만 300명이고 구속자가 5명이다. 집회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더 흐름을 만들어갈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논의 중에 있다. 그리고 거리에서의 싸움을 계속 만들기 위한 시도가 필요하다. 세월호 싸움에 대한 실천적 흐름이 계속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구속되어있는 이들에 대한 법적 대응도 중요한 문제다. 밖에서 계속 싸울 필요가 있다. 불씨를 계속 만들어가야한다.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릴 계획이 있나.

분노로 모였기 때문에 점점 분노가 빠지면 박근혜 퇴진만 남는다. ‘기승전박’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 이 힘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다만 백화점식 사안 나열이 아니라, 새로운 힘이 형성되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김사자 saja-kim@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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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보] 슬프지 않은 자본, 출구만 찾는 정부,대안을 찾는 우리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07/31 19:11
  • 수정일
    2014/07/31 19:14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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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17일에 발행한 사노신 특보로 <focus> 7월호에 다시 실은 글입니다.


도대체 정부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곧장 우리에게 어떤 국가가 필요한지를 묻고 있다. 복지는커녕 적어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조건조차 마련하지 않고 있다면 이 정부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박근혜 정권에게 질문을 해본들 납득할만한 답을 들을 수 없다. 언딘의 독점적인 구조작업을 보장하기 위해 구조를 내팽개친 해경이 “구조나 수색에선 정부보다 민간 실력이 낫다”는 어이없는 대답을 내놓는다.


생명도 계산의 대상인 기업

그렇다면 정부 스스로 정부보다 낫다고 하는 기업들은 정신을 차리고 삶과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갈까. 조선일보는 “안전은 남는 장사”라고 기업에게 조언하며 그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이윤이 최우선인 시장논리에 비춰보아도 기업이 안전을 챙기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항공사가 툭하고 사고 내면 누가 그 비행기를 타겠”냐는 복거일 인터뷰를 실었다. 기업이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이윤을 위해 노력하면 안전은 따라올 수밖에 없으니 정부기구를 만들거나 규제를 강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업의 이윤추구 그 자체가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삼성전자가 반도체공장에서의 수많은 백혈병 환자 발생과 불산 유출로 인한 하청노동자의 사망을 숨기고 부정하는 태도로 버텨온 것도 결국 이윤 때문이었음을 말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동자가 일하다 쓰러져 결국 사망하게 된 과정에서 구급차마저 부르지 않은 이유도 이윤 때문이었음을 말하지 않는다. 이미 수년전부터 해상운송 과적의 위험성을 정부에 알렸으나 위험할 것 없다는 답만 늘어놓은 정부의 태도가 어떤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말하지 않는다. 자본에게 인간의 생명은 이윤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일 뿐이다. 말 그대로 ‘목숨값’이다.


‘국가개조’라는 출구

박근혜 정권이 정신을 차리고 이러한 기업들의 탐욕을 견제할리도 없다. 그동안 기업이 거리낌 없이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했던 정책들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국가개조’는 오히려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근혜와 중앙일보는 세월호 참사의 주요 원인으로 ‘관피아’를 지목해왔다. 진짜 관피아는 박근혜의 낙하산을 타고 공공기관과 유관기관 곳곳에 자리 잡고 박근혜의 명령을 강압적으로 추진하며 이권을 챙기는 자들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이 세력을 제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KBS와 MBC가 보여주듯이 이들은 권력의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는 한편으로 국가기강을 문제 삼으며 법과 질서를 강조하면서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공공기관의 부패와 비효율성을 강조하며 민영화를 비롯한 시장질서 도입을 지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 대안 아닌 대안은 아전인수라 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문제는 정부가 안전에 관한 재정을 거의 배정하지 않은데다가 안전업무를 민간업체에 외주화한 점이었다. 그리고 안전한 삶을 원하는 사회의 요구 위에 정부가 군림하고 정보를 통제하며 진실을 가리려 한 것이었다. 지배세력은 이런 아전인수를 통해 위기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다.


권력에 맞서 협력을 만들어간 사람들

세월호 참사를 마주하고도 자신들의 권력만을 생각하는 자본과 정부에 더 이상 이 사회를 제대로 운영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후안무치한 정부와 자본과는 달리 이 사회가 진정 새롭게 탈바꿈되어야한다는 생각을 몸소 보여준 사람들은 수많은 ‘민간인’들이다. 사고 당시 구호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몸을 던져 승객들을 구조한 사람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진도와 안산에 모여든 사람들, 어떻게든 구조에 도움이 되겠다고 자기 능력을 발휘하려는 사람들, 해직을 무릅쓰고 정권 퇴진을 요구한 교사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 스스로의 협력을 통해 사회 운영에 대한 것들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과 정부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권력

그러나 우리가 이를 위해 한 걸음 내딛자마자 마주하는 벽은 끈끈하게 하나 된 자본과 정부다.

그동안 이 벽을 넘기 위한 많은 싸움들이 있어왔다. 안전업무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민영화하는 철도공사에 맞서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했으나 박근혜 정권은 폭력으로 일관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발병의 책임을 묻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투쟁이 수년째 이어졌지만 정부는 삼성을 비호하기에 바빴다. 전주버스와 삼화고속 등 많은 버스노동자들이 회사의 법 위반 강제를 거부하고 안전운행수칙을 준수하는 투쟁을 벌였다. 삼성 등 대기업들의 돈벌이를 위해 건강을 위협하는 의료민영화 반대 투쟁이 오래도록 진행되고 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안전과 생태를 위협하는 핵발전소 건설을 저지하고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기 위한 노력이 밀양을 비롯한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사회 전반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도 10여 년간 계속되고 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 싸움들에 힘을 실어야 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자원을 삶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곳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집행권한을 찾아와야 한다. 사회기반 시설의 안전 유지와 감독의 권한을 빼앗아야 한다. 작업장에서 ‘안전 문제를 제기하면 해고하겠다’는 자본의 협박에 맞서 노동과정을 노동자들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곳곳에서 자본과 정부가 군림하며 휘두르는 권력을 무너트려야 한다.


정치권에 위탁하지 말고 우리의 정치를

문제해결을 누군가에게 위탁할 때 만족할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떨어트리는 것으로는,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통해 권력을 쥔 자들끼리 질문하고 답하게 하는 진상조사로는, 어떤 특별법에 대책 수립을 맡겨버리는 것으로는, 여야합의로 위기를 수습하는 것으로는 이런 참사가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들이 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권력 나눠먹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를 위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이다.

 

소외된 죽음, 소외된 노동

세월호 희생자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단원고 학생과 단원고 학생이 아닌 사람들.

단원고 학생들의 죽음이 전면적으로 부각되면서 세월호에 타고 있던 다른 희생자들의 죽음은 외면되고 잊혀진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중에는 30대, 40대, 심지어 다섯 살의 희생자도 있었고, 한국인뿐만 아니라 이주민도 있었다. 합동분향소에도 들어가지 못한 이들의 죽음은 제대로 된 보상은 고사하고 충분한 장례비조차 받지 못한 채 소외되고 밀려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월호 참사가 소외시킨 노동자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장례비도 지급받지 못했으며, 직장보험, 공제조합 등 어디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이들은 ‘선원’으로 분류되어 참사의 가해자인양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다.

구조된 화물노동자들도 있다.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화물을 싣고 이동 중이던 이들은 목숨은 건졌지만 차와 화물을 잃어버려 생계가 막막해졌다. 더욱이 특수고용노동자이기 때문에 이들의 입은 피해는 고스란히 본인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목숨이 희생되지 않았다는 이유,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평등한 추모에서 밀려나는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호의 대상이 아닌 적극적인 주체

촛불집회나 분향소에서는 ‘미안해 아이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가 가장 많이 외쳐진다. 또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면서 청소년을 “채 못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에 비유하거나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표현의 배경에는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규정하고, 이들을 보호하고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담겨있다.

세월호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 더 나아가 분노하고 함께 저항하는 것은 특정인을 배제하지 않으며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청소년을 보호하고 지킬 대상으로 보는 것은 청소년을 적극적인 주체로 만들기 보다는 이들을 어른의 뒤편에 멀뚱히 서 있으면 되는 수동적인 위치로 한정짓게 한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도 아닐뿐더러 보호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청소년들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5월 3일 청계광장에서 4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었고, 9일 안산에서는 3,000명의 청소년이 행진을 한 바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극적인 주체로 일어선 청소년들의 흐름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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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14년 여름, 화성공장 “마지막 해고자 복직”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4/07/31 18:34
  • 수정일
    2014/07/31 18:38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기고글은 사노신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06년부터 시작해서 올 해까지 횟수로만 8년이다.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서 해고자복직 투쟁의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이. 해고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2006년부터 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민주노조를 지켜내겠다는 저항을 이유로 해고자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또 현장투쟁과 교섭으로 하나씩 해고자들이 복직됐다. 그리고 남은 화성공장의 해고자는 2·3차 하청 해고자 이동우동지 한 명이다. 화성공장 마지막 해고자의 8년 복직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기아차지부 해고자들의 투쟁과 해고
 

실상 기아차지부의 해고자들이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은 2012년부터다. 화성공장의 해고자 4인이 기아자동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이하 해복투)를 꾸리고 “해고자 전원복직”의 기치를 걸었던 2012년은 4명의 해고자가 현장에서 처음으로 만난 해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인 연대와 강제전환배치 반대투쟁으로 08년 구속된 상태에서 해고된 정규직 이상욱동지, 사내하청 대의원으로 사측관리자의 폭력사태에 맞서 투쟁하다 사측이 노조와의 협의를 거부하자 잔업거부 투쟁을 진행하고 단식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10년 해고된 윤주형동지,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이하 비지회) 지회장・부지회장으로 비지회 투쟁을 이끌다 해고된 김수억, 이동우동지. 이렇게 네 명의 해고자들은 김수억・이동우동지가 2년 6월의 옥살이를 마친 후에야 모두 모일 수가 있었다.

4명의 해고자들은 해고 사유와 시기가 달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1차 하청과 2·3차 하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인정하는 해고자와 그렇지 않은 해고자로 나뉘고,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동지와 그렇지 못한 동지로 나뉘었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의 요구안으로 상정될 수 있는 동지가 있고, 노동조합에서도 나몰라라 내팽겨 쳐지는 동지 또한 생겼다.

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사측과 어용들의 광범위한 악선동과 유언비어, 이에 동조하거나 암묵적으로 용인하면서 해고자들의 투쟁을 폄하한 노조관료들과 일부 활동가들에 의해 4명의 해고자들은 갈가리 찢겨졌다.

 


유일한 정규직 해고자였던 이상욱동지는 비지회 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하면서 사측과 노조관료들의 눈 밖에 났었다. 비지회의 독자적인 투쟁을 옹호하며 당시 정규직 노동조합의 통제를 비판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조의 기만적인 전환배치 허용에 항의하다가 해고되고 말았다. 소위 말하는 노조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된 것이다. 그렇기에 정당한 조합활동이 맞냐는 몇 년의 논란 끝에 대의원대회에서 조합활동으로 인정받고 요구안으로 상정될 수 있었다. 물론 요구안으로 상정되었다는 것이 바로 복직된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조합활동으로 인정받기에 해고 기간의 신분보장을 받음과 동시에 어떻게든 노동조합이 책임지겠다는 결정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항의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이제는 열사가 된 윤주형동지는 어떠했던가? 정당한 현장투쟁이 어용들의 악선동으로 사측관리자와의 폭력시비로 얼룩지면서 수년 간 대의원대회에서의 논란 끝에 결국 조합 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금속노조 중앙과 기아차지부의 책임 떠넘기기에 신분보장기금 또한 전혀 지급받지 못했다. 당시 분회장의 소통과 지침에 따라 투쟁했고 탄압받았지만 윤주형동지만 덩그러니 남아 해고되고 2년여 동안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면서 노동조합 요구안으로도 상정되지 못하는, 기아차지부 조합원이지만 해고자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기아차지부와 비지회의 조직통합 이후에 해고된 김수억동지에게 지부는 비지회 투쟁을 핑계로 발목 잡았다. 조직이 통합되었다면 그 이전 조직인 비지회에서의 투쟁 또한 인정하고 함께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민주노조로써 마땅하건만 기아차지부 조합원이 아니었던 당시의 투쟁으로 해고되었기에 신분보장기금을 지급하니 마니하며 논란되었다. 당연히 통합된 조직을 인정한다면 지부 해고자로 인정하고 신분보장기금을 지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부 요구안으로 가져가지만 신분보장기금은 줄 수 없다는 꼼수로 해고자를 힘들게 했다.



기아차지부 조합원도 아니니 해고자로 인정할 수 없다?
 

이동우동지의 경우는 관료주의에 찌든 대공장 노조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비지회 투쟁이 한창이었던 2006년 조직부장이었던 이동우동지는 두 번의 해고장을 받아야 했다. 완성차 비정규직 투쟁으로는 영웅적인 투쟁으로 여겨지는 전년도 비지회와 하청사장단의 임단협 체결에서 소외되었던 2・3차 하청 소속 이동우동지는 비지회의 추가 단협 체결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원청과 하청은 본격적인 탄압을 준비했다. 정당한 휴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1차 해고장을 날렸고 이동우동지가 일하던 곳을 비롯한 2・3하청 조합원이 있던 공정을 다른 하청으로 넘겨 버렸다.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업체를 폐업하고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날려버리는 악랄한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결국 06년 임투가 정리되면서 원청사측과 정규직 노동조합의 합의를 통해 원청에서 2・3차 하청에 복직을 권고한다는 회의록을 쟁취했다. 물론 원청 사용자성 인정투쟁을 걸고 투쟁했던 것에 비해 부족한 결과물이었지만 권고라는 형식으로 하청 사장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동우동지가 속해 있던 2・3차 하청 사측과 또 다른 해고자였던 김지현조직국장의 1차 하청 사측은 즉각적으로 복직 이행을 시행했다.

그러나 2・3차 하청 사측은 이동우동지가 일하던 공정이 없어졌으니 공장 밖으로 복직할 것을 명령했고 복직 명령에 불응한다며 2차 해고장을 날렸다. 비지회는 원하청 사측이 회의록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2차 해고를 자행한 것으로 규정했고 조직통합으로 비지회가 해산될 때까지 이동우동지의 복직을 핵심요구로 가져갔다.

08년 기아차지부와 비지회의 조직통합 당시 부지회장이자 해고자였던 이동우동지는 비정규직의 독자적 투쟁이 정규직 노조의 관료주의와 쪽수에 의해 소멸될 것이고, 정규직 노조의 폭력적인 방식으로서의 흡수통합을 반대했었다. 그렇지만 조합원총회에서 찬성이 더 많았고 이에 따라 남아 있던 비지회 조합원 전체가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그런데 1,300여명의 비지회 조합원 중 유일하게 이동우동지만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부가 말하는 조합원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도 빈약하기만 했다. 기아차지부 규정 상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노동자는 “기아차 내”에서 일해야 한다면서 해당업체가 공장 밖으로 나갔으니이동우동지는 지부 조합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지사장인 하청사장이 누구든 간에 일하던 공정으로의 원직복직 투쟁을 하는 2・3차 하청 해고자에게 하청사장 따라서 나가라는 이야기는 사측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할 뿐이었다.

거기에 이런 기아차지부 운영규정은 상급단체인 금속노조 중앙의 조합 규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산별노조인 금속중앙의 조합원 규정은 이주노동자를 비롯해서 해고자와 금속산업으로의 취업을 준비하는 노동자까지 포괄한다. 그런데 19대부터 지금까지의 기아차지부 집행부에서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대공장 기업지부의 규정이 중앙의 규약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적용되는 익숙한 풍경인 것이다. 민주노조라고 하면 가입하려는 노동자를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직된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는 단협체결과 고용안정을 쟁취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노조 운동의 투쟁 정신과 조직확대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과제에 눈감기 위해 이러한 만행이 자행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기아차에서는 2・3차 하청과 계약직, 용역・알바 노동자들은 기아차지부를 통한 금속노조 가입 자체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

기아차지부와 기아차비정규직지회가 조직통합을 선언한 이후 대대적으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포용해서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나서겠다는 대대적인 선전이 뒤따랐다. 그러나 실상 해당 비지회 부지회장인 2・3차 하청 해고자는 지부 조합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에 따라서 지부 해고자가 아니니 요구안으로 올릴 수도, 신분보장기금을 줄 수도 없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4명 해고자의 해복투, “전원복직”

이렇듯 화성공장 4명의 해고자에 대한 의견과 접근은 다양하거나 악의적이었지만 해고자 복직투쟁을 염원하는 조합원들의 열망은 한결같았다. 또한 갈라치고 차별받고 소외받는 4명 해고자들의 투쟁에 대한 단 하나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이든 사측이든 그 누가 뭐라고 해도 4명 해고자들은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사수하는 투쟁에서 해고되었음을! 조합원과 함께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비타협적 투쟁을 하다가 사측에 의해 해고되었음을! 노동조합이 책임지지 못한다면 우리가, 현장의 조합원들이 책임지고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오게 할 것임을!

4명의 해고자 또한 2012년 해복투를 구성하며 앞서의 원칙을 공유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1차 하청과 2・3차 하청, 조합활동으로 인정받는 것과 받지 않는 것, 기아차지부 조합원이든 아니든, 각자의 투쟁이 정파적으로 다르게 형성되었을지언정 작금의 해고투쟁은 동일하게 가져가야 한다는 의지가 모아졌다. 사측의 악선동에도, 어용의 트집잡기에도, 노조 관료들의 해태 속에서도 해복투는 “전원복직”의 요구를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의원대회 논쟁에서 4명 모두 정당한 조합활동 속에서 해고된 해고자임을 주장하며 4명 모두 요구안으로 가져갈 수 없으니 단계적으로 가자는 우회로를 거부하게 4명 모두 요구안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한날 한시에 모두 복직되는 것을 요구하냐는 비아냥에 “전원복직”의 요구는 4명의 투쟁이 정당한 조합활동이며 노동조합이 인정해야하는 해고자복직 투쟁의 요구임을 설득했다.

결국 해복투와 해고자투쟁에 함께 하는 동지들이 가지는 주체 역량의 한계 속에서 4명 모두 요구안으로 상정되는 것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임단투 투쟁 과정에서 다시금 “전원복직”의 요구가 현실화될 수 있도록 투쟁을 결의했다. 또한 대대 대응 과정에서 3명의 연봉제 해고자들과 공동대응을 경험하면서 기아차 해고자 7명의 “전원복직”이 필요함을 확인했다. 이러한 동의지반은 12년 임단투에서 소하리 노숙농성을 공동으로 진행하는 성과를 남겼다.

그렇지만 12년 임단협 정리 국면에서 해복투의 “전원복직” 열망과 투쟁은 올곧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 사측의 갈라치기와 노조 집행부의 묵인 속에서 7명 해고자들에 대한 복직 요구는 차별적이고 단계적인 복직 회의록으로 귀결되었다. (13년 1/4분기 연봉제 해고자 3인과 이상욱 해고자 복직 조치, 14년 1/4분기 김수억 해고자 복직 조치, 윤주형・이동우 해고자 취업알선 구두합의)


남아있는 해고자 복직투쟁!

12년 임단협 투쟁의 결과가 다분히 영향을 미쳤던, 더 크게는 함께 할 것이라고 믿었던 민주노조와 동지들에 대한 배신감이 차곡 차곡 쌓여 비극적 결정으로 우리 곁을 떠났던 2013년 윤주형열사 투쟁을 경과하면서 화성 해고자의 문제는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났다. 민주노조의 탈을 쓰고는 투쟁하는 해고자에 대한 유・무형의 탄압과 회유, 끝갈데 없는 절망을 안겨준 관료들의 행태는 두고두고 비판받고 있다. 장례투쟁에서 지부 집행부가 신규 입사 운운하면서 선언적이라도 복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해고자들을 핍박했을 때 “자결해서라도 해고자 딱지를 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고 투쟁하라는 말이냐”는 해고자들의 절규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4년 이제 화성공장에는 단 하나의 해고자인 이동우동지가 남아있다.(연봉제 해고자 중 유일하게 투쟁하고 있는 허성욱동지 또한 합의서가 이행되지 못해서 아직 투쟁 중이다. 다행이도 14년 임단협 요구안으로 상정되어 있지만 올해 해결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지난 4월 합의서 이행이 지연되어 현장의 반발과 투쟁으로 우여곡절 끝에 복직한 김수억동지 또한 사측의 마지막 몽니에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하청 사측이 기존 노동하던 공정이 아닌 청소・조경공정으로 강제발령을 낸 것이다. 심각한 임금저하와 조합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한직으로의 발령을 통해 고립시키려는 문제가 있기에 노동조합과 함께 투쟁하고 있다.) 

투쟁의 대오는 4명 해복투 때보다, 기아차지부 7명 전원복직 요구를 걸고 투쟁하는 2012년보다 더욱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임단협 요구안으로 상정조차 되지 못한 가운데 집행부의 의지가 없다면 공문구로 전락하기 십상인 지부 집행부 사업으로 노력하겠다는 입장에서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 상황은 실질적인 현장투쟁을 통한 관료들을 압박하기 보다는 민주노조의 원칙을 주장하며 조합원들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마지막 해고자를 올해 안에 복직 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다. 그렇지만 매일 진행되는 중식 선전전에서, 화・목 진행되는 퇴근장 선전전 속에서, 소하리/화성/광주공장 비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서명작업을 조직하면서 확인하는 조합원들의 격려와 지지가 있다. 조합에서 책임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현장조합원들의 CMS모금이 경제적 버팀목이 되고 있다. 짧지 않은 8년 해고 생활, 반드시 현장에서 책임지겠다는 화성공장 동지들의 투쟁에 주목해야 한다.


기아차 화성공장 비정규직노동자 sanosin@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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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계급성을 잃는 순간 희망은 없다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4/07/31 13:33
  • 수정일
    2014/07/31 14:13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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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현대중공업에 2002년 이후 처음으로 민주파 집행부가 들어섰다. 지난 달 임단투 결의대회에는 오랜 만에 수 천 명의 조합원들이 모이는 등 조금씩 변화의 조짐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이 죽음의 공장을 넘어 다시 노동계급의 진지가 되기 위한 관건은 무엇보다 이미 4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공장 내 비정규직노동자들에 있을 것이다. 민주파 집권 이후 현대중공업과 하청노동자들의 변화된 상황을 알기 위해 사노신은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인 조성웅 동지와 현 하창민 지회장의 만남을 기획했다. 흔쾌히 응해주신 두 동지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편집자]



모든 것들이 시들해질 때에도 누군가는 무모할 정도로 묵묵히 자신의 싸움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누구 하나 관심 가져 주지 않았어도 노동자들의 죽음 곁에서 사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침묵했을 때조차 자본가에게 항의하고 단결의 문제를 끈질기게 발언하고 현장으로 보급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사람들이다.

2014년 임단협 투쟁을 조직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하창민 지회장을 지난 6월말 울산과학대 파업농성장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 지난 6월19일 하청업체와의 임단협 상견례를 가졌다. 하청노조 만들고 나서 11년만의 처음이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하청노조 임단협 상황을 설명해달라.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 처음 시작은 기존 조합원들이 업체에서 힘들어 했고 전망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자기 업체별 조직화에서 다수 하청노동자들을 상대로 조직화의 시야를 넓히는 것으로 시작했다. 작년 7월에 조합원 공개를 했다. 공개조합원 활동을 시작했다. 공개조합원들이 정문 밖 피케팅 선전전에 참가했다. 많이 자신감을 회복했다. 묶어 두지 말고 성장을 시켜야 할 시점이었다. 하청노조가 하청노동자들에 받아들여지는 모습은 어둡고 실패한 자들의 모습들이었다. 안되고 할 수 있는 것 없다는 인식을 바꾸면서 우리 조합원들의 투쟁력을 상승시키기 위한 숙제가 있었다.

올해 초 현대중공업의 변화된 노무관리 상태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조합원들이 현장에서 유인물을 돌리기 시작했다. 현장 활동을 진행하면서 올해는 교섭을 하고 임단협을 하자고 정리를 했다. 이러한 준비가 있는 상황에서 현대중공업 노조하고 하청노동자 실태 공동조사 사업을 바탕으로 요구안을 마련했다.

이때부터 교섭을 알리는 전 공장 선전전을 진행했다. 조합원들이 식당에 조끼를 입고 집결하고 요구안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선동을 했다. 한 달 넘게 진행됐다.

5월말 즈음에 현대중공업에서 경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고장이 계속 날아들고 한번만 더하면 출입증 빼앗겠다는 공문이 왔다. 살짝 치고 빠지기로 했다. 다른 방식으로 현장 활동(선전과 선동)을 지속하기로 하고 식당 중식 선동은 잠정중단하기로 했다.

6월 19일 하청업체와 임단협 상견례가 이뤄졌다. 각 업체들이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여론에 떠밀린다고 할까, 법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청업체 대표들은 중공업이 키를 쥐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앵무새처럼 이야기했다.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고 만들어 나가자고 제안했다. 하청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사용주인 현대중공업은 업체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사용자성을 부정하고 있다. 
 

●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에 대한 현장하청노동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임단협 목표를 설정할 때 대규모 조직화를 위한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조의 정상적인 활동을 널리 알리고 주체 역량의 강화에 올 임단협의 목적을 뒀다. 조직화가 예상보다 안 되더라도 낙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청노동자들의 중대재해 사망을 추모하는 분향소 투쟁, 18일 동안 하면서 조합원들의 자신감이 성장한 것은 큰 성과였다. 연대도 자발적으로 가자고 열의가 올라왔다.

식당에서 교섭 보고 대회를 할 때는 놀랄 정도로 호응이 있었다. 박수 치고 맞다 맞다고 함성도 지르고 했다. 하지만 식당 앞에 가판을 차리고 조합가입 캠페인을 할 때는 확연히 달랐다. 현장 하청노동자들에게 하청노조 가입은 어쩌면 자기 생의 명운을 건 선택의 문제였다. 집단적인 조합 가입은 이뤄지지 않았고 조합원들은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임단협 보고대회에서 하청노조 집단가입 캠페인으로 전환한 것은 현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장기적인 목표를 잡고 하청노조와 하청노동자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나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청노조 집단 가입 문제는 우리가 뚫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본다. 노조를 통해서 한 번도 뭔가 희망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스스로 단결해서 성취해본 것이 없었다. 하청노조가 투쟁을 통해서 이뤄낸 것을 본 적이 없는, 그래서 기대 심리는 있되, 자신이 참여해서 활동하거나 조합원이 된다는 것은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냉정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금씩 하청노조 활동의 성과를 보여주고 조합원들이 안 짤리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모습들을 대중적인 경험으로 축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서서히 녹아가는 동토, 그러나...


● 현대중공업은 하청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 해왔다.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 과정에서 하청노조를 대하는 현대중공업의 태도가 변했다고 보는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상견례는 시대적 흐름의 일부분이다. 하청노조의 힘이 강해져서 인정 하는 것은 아니다. 하청노조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대처를 잘해왔다. 그동안 업체 폐업되고 조합원들 들려나가고 해고 되고 이러한 두려움에 너무 갇혀 있었다.

조합원 공개하고 현장 선전전 시작하려 할 때 많이 반대했다. 과거처럼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역사적 흐름은 변화하고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10여 년 전의 그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해보니 현장 밖으로 들려나지 않은 것이 확인된 것이고 그만큼 진행되어 왔다.
 




● “현장 밖에서는 뭘 하든 하되 현장 안에서만 하지 마라”이것이 변화된 현대중공업의 노무관리 방침의 가이드라인이었는가?
 

작년 여름 6~7월, 그때 확인된 것이다. 현대중공업이 조합원들을 알고 있더라도 그 전까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밖에서 공개 활동을 하면서 아, 이 공간 정도는 열렸구나 판단했고 확인한 것이다. 확인한 만큼 멈출 수는 없었고 조금씩 하청노조 유인물 배포, 출퇴근 선전전도 했다. 예전 같으면 한 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한두 명 걸리면 바로 들어냈을 텐데 경고장 등 절차를 지켰다. 두 번째 경고장에 식당이 아닌 다른 장소의 협의가 가능하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과거처럼 대 놓고 탄압은 안하겠다, 꺼려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2년부터 울산법원의 노동조합활동 방해 가처분 결정문에 따라 현장에서 선전전 하겠다고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은 막혔다.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고민했고 내가 못 들어가도 현장 조합원이 활동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현대중공업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설마 그렇게 할까라는 부분을 치고 들어갔고 그들은 당황해했다. 조합원이 현장 활동을 시작하니까 이제 와서는 오히려 울산법원 가처분 결정문에 위반된다고, 하청노조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트집을 잡고 있다. 법원 판결문이라는 것이 오히려 노조활동을 가두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정규직 임단협 출정식에 96년 이후 처음으로 4000여명의 조합원들이 모였고 조합원들의 열기 또한 대단했다고 들었다. 정규직노조와 하청노조의 임단협 투쟁 공간이 만나고 있는데, 정규직 노조와의 관계는 어떻게 맺고 있나?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다고 판단된다. 정규직 노조와의 서너 번의 간담회를 통해 간극이 갈수록 넓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니까 사업들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를 인정하고 공통분모를 맞출 수 있어야 하는데, 대중적이지 못한 하청노조의 사업들을 함께 못하겠다고 했다. 하청노조의 활동 극히 제한적이다.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엄호 지지하고 연대하려는 마음들이 안 보였다. 기존 어용 집행부는 ‘당신네들은 가만히 있어라, 해주겠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다’라는 시혜적인 관점이 보였다. 그런데 (간담회를 통해) 민주파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현대중공업과의 공동사업은 실태조사 사업밖에는 없었다. 민주노총울산본부가 제안해서 시작했다. 30여개 문항을 기초로 실태조사 끝나기 전에 정규직노조는 먼저 4대요구안을 정하고 임시대대에서 통과시켰다. 실태조사 결과 나와도 바뀌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먼저 정해서 나왔고 우리 입장에서 잘못된 거다. 무시하고 갈 수 없는 것이었다. 공동으로 뭔가 투쟁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한 건데 공동 실태조사 사업이 형식적인 사업이 됐다. 그리고 4대 요구안 다 금전적인 요구들이다. 물론 하청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조직화도 안 될 뿐더러 기대심리만 올려준다.


● 조합가입 캠페인이 중단되었던 이유가 있나
 

실태조사는 무기명인데다 정규직 노조가 탈의실로 찾아오기도 하니까 쉬웠다. 조합가입 캠페인은 무게감 이라는 게 전혀 다르다. 정규직이 나서도 쉽지가 않다. 조합원들이 느끼는 실망과 패배감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준비가 부족했다. 임단협 이후에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빨리 사업을 잡아서 기운 빠질 필요는 없었다. 이런 생각에서 잠정 중단시켰다. 다수 하청노동자의 조직화도 중요하지만 교섭 시기만큼이라도 업체조직화로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전술적 변화도 필요하다. 


● 2014년 임단협 투쟁을 통해 어떤 성과를 바라고 있는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문제다. 처음에 목표했던 것은 임단협의 결과로 11개 업체 공개 조합원이 해고되지 않고 업체에서 대표성을 획득하는 것만 해도 성과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를 바탕으로 내년엔 20개, 30개 업체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공장 현대중공업


● 현대중공업은 죽음의 공장이다. 하청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의 사유가 남다를 것 같은데, 최근 하청노동자들의 죽음과 관련해서 하청노조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감당이 안됐다. 연이어 상황이 발생하고, 할 수 있고 해줄 수 있는 것이 특별하게 없었다. 참 답답했다. 중대재해 당한 업체 동료들 만나면 아는 사람이 몇 몇 있었다. 그러나 사고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 안 해줬다. 그들의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중대재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대표이사를 구속 처벌할 것을 촉구하고 고발장을 접수하고 산재 은폐 폭로하고 방송으로도 많이 나왔는데 스스로 위험작업에 대해 거부할 수 있고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상황에서 현대중공업의 대책이란 것이 무의미하다.

이제 네 번째 산재은폐 고발장을 접수했는데 산재 은폐 해소 못하면 죽음을 막을 수가 없다. 현대중공업은 저가 수주를 하고 갈수록 단기 물량팀이 늘어났다. 어떤 이가 현대중공업은 도살장이라고 했는데 그 표현이 정말 정확한 것 같다. 


● 현대중공업은 산재은폐 공화국이다. 최근 현장에서의 산재은폐에 대해 사례를 들어 설명해 달라.
 

산재은폐 고발 건 중의 한 사례인데, 한 젊은 친구가 일하다 다쳤다. 고발이 들어가니까 업체에서는 집에서 다쳤다 하라고 했다. 노동부에서도 그렇게 진술하도록 강요했다. 그런데 후유증이 남아서 도저히 안 되겠다. 산재 하겠다고 했을 때 업체에서는 나 몰라라 했다. 이러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다.

현장에서 일하다 다쳐 119 구급차에 실려 울산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도 은폐를 시키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저가 수주는 공정들이 더욱 타이트해줄 수밖에 없다. 공정 앞 당겨서 생산기간 줄이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에 제일 위험스러운 일, 물량팀 수시로 확대시켜서 작업시키고 있고, 그 사람들은 안전이라는 말조차 못한다.

얼마 전 LPG선 화재 사고 나서 두 분 돌아가셨을 때도 혼재작업 때문이다. 위에서 보온재 작업하고 있었고 아무런 화재 예방 조치도 안하고 감시자도 없이 용접절단 작업이 진행됐다. 검사는 검사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화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데, 죽음을 각오하고 한 것이다.

이번에 미포 조선 질식 사고도 똑같은 것이다. 페인트 마르고 난 뒤에 몇일 양생시키고 붓도장 작업을 하는데 전날에 페인트 작업하고 나서 다음날 붓도장 작업하러 들어가니까 톨루렌에 질식된 것이고 구조하러 간 사람도 산소측정도 안하고 구조장비도 없이 들어갔다 질식해서 5명이 실려 나온 것이다.

지난 5월달 분향소 투쟁을 진행했다. 중대재해로 돌아가신 다섯 명의 하청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분노, 애도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원청에 대한 폭로도 담겨 있었다. 분향소 투쟁은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현장에서 위험작업 차단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니까 밖에서 분향소 차린 것이다. 이것이 아쉬운 점이고 앞으로 우리에게 과제로 남겨져 있다.

18일 동안 분향소 설치하고 투쟁하면서 성과라면 정규직들, 시민들, 하청들 그 가족들이 많이 찾아오더라, 방명록 기록도 남기고 헌화도 하고 밤늦게 와서 정규직들이 손잡아 주고 가는 사람도 있고 술 한 잔하라고 주머니에 꼬깃꼬깃 돈을 넣어주기도 했다. 그 당시 죽음 앞에 사람들이 말은 못했지만 함께 공감하는 부분이 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향소를 지키는 조합원들이 이러한 기운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18일 동안 노숙투쟁 하면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의미 있게 진행 했다. 임단협 개시 직전이었는데 좋은 영향을 끼쳤다.

교섭으로 전환하기 전에 마지막 택으로 잡은 것이 정몽준 상경투쟁이었다. 이슈화시킨 것 같다. 대학로 유세하는 현장에서 손 피켓 들고 서 있는데, 정몽준 극성 지지자들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떳떳하고 당당하게 피켓 들고 서 있는 모습 보고 아, 진짜 싸우면서 성장할 수 있구나, 말로서 하는 것이 아니구, 사복 경찰이 둘러싸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지키는 모습을 보고 나는 감동스러웠다. 내려올 때도 소풍 갔다가 울산 가는 것처럼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처음엔 걱정을 했다 그런데 경찰도 처음 직접 겪어보고 극성 정몽준 지지 팬들에 맞서 이길 수 있을까 걱정 했는데 의외로 조합원들이 너무 잘했다. 한 조합원은 ‘당신들 아들이 죽어도 그런 소리 할 것이냐’고 항의하는데 현장에서 억눌린 분노들이 그렇게 표출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내려오면서 농담반 진담반이지만 이제는 점거다. 밝게 웃는데 그 모습 보면서 충분히 점거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의 신분제도가 변화해왔다. 10여 년 전만 해도 정규직과 하청업체로 단순화되어 있었고 물량 일당제는 예외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물량의 50% 이상을 단기 물량팀에 의해서 처 나간다고 들었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의 내부의 구성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업체 t/o, 매달 정규직 노조에 보고가 되는데, 하청만 3만6천명이다. 10년 만 해도 만5천이었는데 10년 만에 2만 명이 늘었다. 지금 현대중공업에는 식수인원이 사무직 포함, 6만 명이다.

해양사업부 같은 경우는 1차 사내하청 업체가 공장 밖 외부 파견 업체에 인력을 요청하면 외부 파견 업체에서 사람들을 사내업체로 투입시키고 이들을 데려 온 팀장들이 사업자 등록증을 내고 안에서는 실질적인 사장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일당 중의 5%를 공제하고 임금을 준다. 소규모 물량팀이 300명 업체에서 250명이나 된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사장인지도 잘 모른다. 한 업체 다니는데 그 업체 소속이 아닌 것이다. 돈(기성)은 사내 하청업체에서 파견업체로 나가는데 5% 공제하고 파견업체에서는 또 다시 5% 공제하고 팀장들에게 준다. 3단계로 기형화되어 있다. 도대체 자기 사장이 누군지도 모르는 하청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일 끝나면 언제든지 떠나니까 어디 소속 개념이 없다. 하루 어디 가서 일하라고 하면 하고 딴 데 가라면 가고 이러한 다단계 불법파견이 해양사업부에는 일반화되어 있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해양사업부가 있는 꽃바위 쪽에는 들어 갈 원룸이 없다고 한다. 워낙 이런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들어갈 때가 없다고 한다.

하청문제는 정규직 고용과 밀접하게 관계있고, 물량팀 확대되는 건 싸움이 필요한 문제인데 사내하청 업체 문제로 국한시키니까 잘 안 풀리고 풀릴 수가 없다. 산재 문제 가지고 자본과 피터지게 싸움을 준비 하듯이 물량팀 문제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문제가 아니니까 방관하고 있다.

조선사업부는 두 가지 형태의 물랑팀이 있다. 업체 고정으로 생산을 담당하는 팀이 있고 몇 일 블록 몇 개 해 주고 가는 팀, 즉 단기 물량팀이 있다. 한 업체로 따지면 적게는 물량팀이 40% 차지하고 있고 100% 물량팀인 업체도 있다. 그런데 겉으로는 물량팀이 본공(1차 하청) t/o로 잡혀 있다. 본공 100 t/o에 80명이 물량팀인데 20명이 관리직, 검사하는 인원들은 본공이고 80명 정도는 물량이고 이 전체가 100 t/o에 다 들어가 있다. 인원으로 보면 누가 본공인지, 물량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분화들이 이질감을 키우고 있고 조직화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년 정도 이상을 근무를 해야지 해고를 당하든 싸움을 하든 기반이 생기는데 그러한 것조차도 이젠 안된다. 물량팀장과 형식적인 근로계약을 쓰고(팀장이 책임질 것이 뭐가 있는가?) 일 끝나면 바로 떠난다.

이제 1차 사내업체에서 사용자성을 인정받는 것도 힘들게 됐다.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겠는데 이것을 뚫고 나갈 조직화 계획이 필요할 것 같다. 특히나 해양사업부는. 이들에게는 학자금, 성과금도 해당 사항이 없다. 1년 이상 일하지 않았으니까. 
 

계급성을 잃는 순간 희망은 없다


● 하청노조는 현장 밖으로 밀려난 해고자-활동가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회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임원들과 상집간부들은 현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이다. 지난 몇 년간의 하청노조의 변화와 조직사업에게 대해 말해 달라.
 

처음에 하청노조 찾아 갔을 때는 어려웠다. 사람들이 어려웠고 이 사람들은 준비된 사람들이구나 이러한 인상이 깊었다. 내가 해봐야겠다. 현장 정서에 맞게 주체들을 만들어서 해봐야겠다고 결의하고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 당(민주노동당)을 통해서라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십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이 있었는데 결국 착각이었다. 정당을 통해서는 절대로 조직화가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 무조건 뿌리박아야 한다. 하청노동자로 살아온 분노를 가지고 작은 투쟁을 만들어나갈 때 기초가 마련될 수 있고 흐름을 바꿀 수가 있다. 지금까지 끈질기게 노력 해왔다. 현장과 소통하고 주체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작지만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본 역량은 되었다고 본다.

나의 해고 생활 길어지고 관료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직책을 오래도록 맞다 보니까 내가 어려웠던 것은 활동가로서의 분노도 식고 현장의 사소한 감각들을 잃어가는 듯 한 생각이 든다. 현장 주체를 세워서 이 사람들이 스스로 지회를 이끌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고 내가 물러나는 것이 내 역할이 아닌가 생각한다. 걱정도 되지만 만들어야 한다.

지지모임은 잘 안되는데, 조합원들 통해서 느슨하게 틀을 유지하고 있다. 하청노조 지지모임 사람들을 조합원으로 가입시키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게 급선무다. 


● 현대중공업에서의 운동의 전망을 이야기할 수 있나?
 

꿈은 꾸는데, 하청의 반만이라도 조직되면 현대중공업을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현장 활동을 제대로 못하고 해고된 것, 지금 조합원들이 하고 있는 것을 나는 못 해보고 나온 것이 후회가 된다.

만약에 해고되지 않고 기존 업체에 있었다면 여기까지는 안 왔을 것 같다. 해고가 되고 삶을 바치자고 결의했고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도 처절하게 여기까지 끌고 온 것 같다. 해고되지 않았다면 평범한 용접하는 하청노동자로 조합 활동을 했을 것이다.

공개 조합 활동할 수 있는 100명의 조합원을 조직하는 것이 내 임기동안 꼭 만들고 싶은 것이다.

교섭의 핵심이 업체 너 댓 명이라도 노조로 가입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임단협이 진행되면서 교섭 업체에서 조합 가입도 이뤄졌다. 임단협 투쟁을 통해서 이렇게 업체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하청노조가 현장에 뿌리내린다면 지금의 상집 간부 중심의 체계를 대의원 체계로 전환하고 조합원이 그 업체 조합원들을 대표해서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 하청노조 처음 왔을 때 어려웠다고 하는데 현장에 어렵지 않게, 쉽게 다가가고 현장과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대화할 공간이 적고 없으니까 특별한 계획은 없는데, 현장 노동자들의 요구, 불만들, 분노들을 표출했을 때 사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어떤 원인이 있고 조건은 어떻고 결과는 이렇다는 등 사무적인 반응보다도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씨발 개발 같이 욕도 할 수 있고 그런 현장의 정서를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선 같은 감수성, 현장의 분노를 가지고 대해야 안 되겠나? 


● 해고되고 노조 대표자 생활을 3년째 하고 있는데, 현장의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고 했는데 어떤 위기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나?
 

어떤 사안이든 항상 경계에 놓인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조합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겠다는 위기감도 들었다. 계급적 관점을 유지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크고 개인적인 학습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간부들이 조합원들에게 계급적 대의를 자연스럽게 인식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연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적으로 지회장인 나부터 계급적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학습해야 하고 자연스럽게 조합원들에게 흡수될 수 있도록 대화하고 토론할 것이다. 


● 하청노조 대표자로서 전국 비정규직 대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계급성을 잃는 순간, 정규직 운동이든 비정규직 운동이든 희망이 없다. 침체된 정규직 운동, 자체 힘으로, 그 정화력으로 정규직 운동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소 비정규직이, 철강 비정규직이 투쟁으로 일어설 때 재편될 것이다. 물이 바뀌고 흐름이 바뀔 것이다. 그런 희망을 가져본다. 계급성을 잃지 않고 꾸준히 투쟁해 나가면 희망이 찾아진다고 본다.

글 : 조성웅 siwano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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