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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연애기간과 결혼의 관계

 
연애기간과 결혼의 함수관계

<우리 벌써 만난 지 햇수로 삼 년이야>
<아직 당신을 잘 모르잖아요>

연애를 늘 짧게 짧게 하는 이들에겐 말 못할 ‘짧은 연애 콤플렉스’라는 게 있다. 왜 내 연애는 석 달을 못 넘기냐고 한탄을 하며 그들은 소개팅에서 만난 제법 마음에 드는 상대남자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바라보며 ‘사귄다 한들 대체 우리는 얼마나 갈까’라며 자조적인 생각에 빠지게 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의 속 깊은 고민은 연애 자체가 짧게 끝나는 데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나 이러다가 제대로 결혼할 수나 있을까?’일 것이다. 연애기간의 길고 짧은 것이 결혼의 성사에 정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  

1.     오래 사귈수록 관계는 확실할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대개 ‘오래 붙어 있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편이다. 회사도 한 회사에 지그시 오래 다녀야 한다고 하고 배우자가 꼴 보기 싫어도 오래 데리고 사는 걸 권장하는 사회다.

하물며 연애를 짧게 하는 이들에겐 ‘그 따위는 연애가 아니야’라며 노는 남자, 노는 여자,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질 않나, 캠퍼스커플로 4년 내내 사귀었다가 졸업 후 이내 다른 사람으로 갈아타서 몇 달 만에 결혼하는 친구는 수군거림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편견의 이면에 는 인간관계란 자고로 오랜 기간 서로 겪어내야 양자가 인간적으로 성숙한 인격체가 된다, 라는 사상이 깔려 있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이른바 결혼적령기에 도달한 그녀들이 보내오는 ‘이젠 결혼하고 싶어요’류의 상담을  보노라면 반드시 남자친구와 사귄 기간을 함께 써서 보낸다. 마치 병원에 가서 진찰받을 때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는지 대변은 잘 보는지 밝혀야 하는 필수항목처럼 하나의 주요 잣대나 지표로 생각하는 듯 하다.

과연 그럴까? “저 이 남자랑 얼마 동안 사귀었어요.’라는 교제기간에 대한 명시는 물론 유용한 힌트이긴 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우유부단함이나 성급한 뜨거움, 만난 지 석 달쯤 되었을 때 느껴지는 희미한 실망감과 초조함, 그리고 만난 지 일년 후의 아득한 권태기와 편안함 등, 연애에도 일련의 사이클이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평균적인 ‘연애’사이클에 불과하지 여기에 ‘결혼’이라는 큰 명제가 들어가게 되면, 그 보편적인 사이클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자못 ‘특수’해진다. 어떤 남녀는 만난 지 반년도 체 안 돼서 바로 상견례를 감행하고 어떤 남녀는 여러 유혹을 다 견뎌내고 8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한들 끝내 결혼에 이르지 못한다. 한 쪽은 눈을 반짝거리며 장담한다. “첫눈에 이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어요.” 또 다른 쪽의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하다. “만난 지 5년이 넘었는데도 어떻게 청혼을 안 할 수 있죠?” 마치 시간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듯이. 오래 사귀었는데 남자친구가 결혼을 먼저 얘기하지 않고 질질 끄는 상황을 듣노라면 내가 다 안쓰럽고 미안하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두 사람, 이미 결혼할 타이밍 넘겨버린 것 같은데. 오래 사귄 안심되는(?) 연인들의 함정은 그렇게 한 두번 결혼할 타이밍을 ‘미루게’ 되면 생기는 그 ‘미루는 습관’이다. 한 번 미루면 두 번 미루는 것은 쉬우니까 말이다. 여자가 참다 참다 못해 “대체 우리 관계는 뭐였던 거야?”라는 철학적인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하면 이별이 가까워졌다는 징조다. 그리고 두 남녀는 각자 생각에 잠긴다. ‘대체 뭐가 잘 못 되간 거지?’. 너무 오래 만나면 도리어 결혼하기 힘들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방점은 어느 시점에선가는 찍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2. 연애기간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란?

물론 연애의 숙성을 위해서 적절한 교제기간이 권장사항이 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서로의 몰랐던 면을 하루아침에 발견하기는 쉽지 않고 또 차분히 서로 단계를 밟아가며 더 가까워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진작에 ‘짧고 길다’는 것은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 한달? 석달? 일년? 오히려 특정 연애기간에 대한 선입견은 ‘내 연애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어떤 틀에 끼워놓고 해석하려다 보니 탈이 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짧게 만났다 해서 두려울 것도 없고 오래 사귀었다 해서 당연히 결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결혼’이라는 대사에는 시간으로 ‘때우는’ 것 이상의 거대한 힘이 작용해주어야 한다. 어떤 기세나 기합, 의지랄까. 그것은 ‘이 사람을 잃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열정일 수도 있고 ‘더 이상의 상대는 안 나타날 거야’같은 현실감각일 수도 있다. 내용은 저마다 제 각각이다. 공통점이라면 그들의 결혼을 향한 에너지의 농도는 두 사람이 처음 연애할 때 도와준 에너지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점이다. 농도와 강도가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그것이 강하고 진할수록 “어떻게 그 사람이 운명의 상대인 줄 알아봤어?”라는 질문에 “그.냥.알.게.돼.”라는 다소 거만한 대답과 “너무나 자연스러운 호흡처럼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라는 싱글들에게 전혀 도움 안 되는 모호하고도 잔잔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잔잔한 듯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이 에너지가 바로 그 유명한 ‘타이밍’ 되시겠다.

3.     결론

부끄럽지만 나 역시도 만난 지 삼 주 만에 청혼을 받아 두 달 후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속도위반을 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하루라도 빨리 그 남자랑 살고 싶었다. 서두르면 후회할 수 있다고 주변에선 말렸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고작’ 석 달이지만 만난 빈도수, 성의, 열기나 소통의 깊이로 따지자면 10년 만난 연인 버금가는 집중된 ‘힘’이 작용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법’ 혹은 ‘운명’이라고도 즐겨 부른다. 그리고 마법과 운명은 저 멀리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보통은 내가 ‘보이지 않게’ 만들어놓는 것! 자, 그 동안 사귄 기간을 가지고 연인에게 질문하고 다그치기 보다 결혼을 하고 싶다면, 결혼을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떤 계기를 찾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십 년은 빠를 것이다.    


글/임경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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